2020-01-23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댓글 7개:

  1. 빌&멜린다 재단의 펀딩은 개발도상국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미국 내 젊은 생명과학 쪽 과학자들이 있다고 해요. 이런 이들이 기업의 투자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연구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연구를 하고 싶을 때 가장 기댈 곳이 빌&멜린다 재단이라는 점이 저는 참 인상적였어요. 그 다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만.

    빌 게이츠가 한 때 천하의 가장 탐욕스런 자본가로 묘사되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리고 그에 비해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창조의 아이콘이며 기존 질서의 전복자로 묘사되며 게이츠보다 우위에 선 인물인 양 추앙받았는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이미지에 매몰되어서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싶습니다.
    잡스는 어디에 기부 한푼 하지 않았고 세금 납부도 최대한 피했다 하고, 첫 딸인 리사에게도 죽는 날까지 자기에 대해 미디어에 나쁜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죠.

    그러나 금전적으로만 부유한 집이 아닌,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강조한 엘리트 집안에 태어난 게이츠가 일찍 은퇴하고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여러 모로 놀랍습니다. 저는 요즘 엘리트를 무조건 추앙하고 싶지 않지만, 엘리트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분명 있음에도 그들에 평가가 그냥 삐딱하고, 잘난 척 해서 싫다는 식이라 우려됩니다. 이런 감정적인 영역을 벗어나서 그들의 기여가 확실히 있음을 인정해야 미래 세대도 '연구 열심히 해야 겠다'라는 자극을 받을 것이라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그런 너드같은 인생 별로 매력 없으니 화끈한 말이나 하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는 명제 아래서 어떻게 보면 미래 세대를 무능력하게 키우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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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티브 잡스가 그놈의 '대체의학'에 안 빠지고, 그냥 정상적인 치료를 받아서 회복했다면, 어쩌면 개심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이념인 히피즘에 충실하게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뒤집을 수 있을만큼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죠.

      사실 빌 게이츠가 자선사업가로 회귀하게 된 이유는,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크게 세 가지죠. 첫째로는 반독점규제법으로 회사가 박살나기 직전에 살아났다는 것. 그가 가지고 있던 hubris를 바닥부터 돌이켜볼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 멜린다 게이츠. 그 똑똑하고 잘난 아내가 대저택에서 자녀와 갇혀 있는 고통을 호소하자, 아예 아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선재단을 만들어버린 셈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결국 셋째 요인, 즉 빌 게이츠의 어머니가 보여준 어떤 모범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잡스의 인생과 게이츠의 인생이 크게 다른 것도 어떤 그런 근원적 체험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분들 인생 보면서 내가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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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하하! 저도 그런 생각 했습니다. 내가 왜 그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 되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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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S. 젊은 시절의 경험과 가치관은 참 오랜 동안 인생을 지배(?) 하는 것 같습니다. 잡스가 대체의학의 신봉자였던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젊었을 때 히피문화와 LSD 복용, 인도에 수행 혹은 명상 하러 떠났던 일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대체의학을 선호한 것. 대단히 일관성이 있네요.
      그래서 사람은 이왕 한 세상 살려면 좋은 것 보고 읽고 좋은 시각을 가지고 사는 게 나아요.
      이 좋다는 표현이 무조건 긍정적이 되자, 라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무엇을 파악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읽고 생각하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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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잡스를 사상적으로 분석하자면, 미국의 베이비부머를 강타한 히피즘에, 가장 미국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결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에서는 전자를 축소하기 위해, 혹은 그 영향을 최소화한 서술을 위해 끝없이 'good product'에 대한 잡스의 집착을 정말 수십번씩 반복하죠. 오디블로 듣는데 저놈의 'good product' 타령 나올 때마다 어우, 좀 징그럽더라고요.

      반면 게이츠는 잡스와 같은 세대인데 가치관은 그 부모 세대, 소위 '가장 위대한 세대'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어머니의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겠고, 게이츠 본인이 시에틀의 유력 인사 집안에서 태어난 탓도 있겠죠.

      이야기를 쭉 하다보니 저 두 사람의 인생 궤적과 사상적 내용 등을 비교 검토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머릿속에 '언젠가는 해볼법한 일'로 담아둬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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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빌 게이츠가 몇 년 전 TED talk에서 팬데믹에 대해 경고했던 것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게이츠 재단의 역할과 중요성 때문에 그는 최소한 한 달에 하루 날을 잡아서 미디어 인터뷰에 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월 초 즈음, 게이츠는 NBC와 같은 미국 내 뉴스 채널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비디오 클립에 달린 댓글의 최소한 70%는 그에 대한 비난과 음모론이었지요. 게이츠가 주도해서 만든 백신을 맞으면 무슨 칩이 몸 속에 들어간다느니 하는. 한 번 더 세상의 돈을 쓸어 모으기 위해 게이츠가 이 바이러스의 배후에서 병도 퍼뜨리고 백신도 개발한다는 등의 음모론. 그런 댓글을 다는 미국인의 상당수는 적어도 40대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난 이 사람이 젊어서 부터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잘 알아!" 라고 했기 때문이죠.

    그러다 우연히, 게이츠가 뉴스 채널들과 인터뷰 한 같은 날 칸 아카데미의 살만 칸과 했던 대담을 보았습니다. remote learning 을 할 수 없는 미국 교육 내 빈부격차와 그것을 극복하는데 칸 아카데미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주 시청층은 청소년이었고 그들의 90%는 게이츠에 대한 존경을 댓글로 남겼습니다. 백신 접종이 인류에게 중요하다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한 학생은 주의 깊게 살만 칸과 빌 게이츠의 대담을 보고 썼어요.
    "너희들, 비디오의 몇 분 몇 초 쯤 가면 빌 게이츠 스웨터에 구멍한 거 보여. 정말 이거 본 사람 나 밖에 없니?" 라는 댓글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며 그의 메시지를 보라고 엄하게 꾸짖는 다른 십대 학생의 댓글도 이어졌죠. 그 학생의 댓글을 보고 제가 조용히 비디오 클립의 해당 위치로 가니 정말 스웨터 팔뚝에 구멍이 있더군요. 만일 제가 아는 아이라면 그 관찰력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의 작은 구멍.

    뇌피셜 음모론에 빠진 제 세대와 달리, 적어도 그 대담을 시청한 새로운 세대가 백신의 중요성을 평소 확고하게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류를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가치있다고 믿는 것 등은 교육의 힘이고 시간의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래 전의 게이츠가 잊혀질 수 있을만큼 흐른 시간의 힘. 누구보다 게이츠 자신이 자기 인생을 새롭게 만들 돈이 있었고 힘이 있었고 거기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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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20세기의 빌 게이츠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탐욕'의 대명사로 그를 떠올리는 게 당연하긴 하죠. 반독점법으로 철퇴를 맞을까봐 애플을 간신히 살려놓을만큼 무지막지한, 록펠러 이후 가장 성공적인 시장 지배자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도외시하는 건, 빌 게이츠를 그렇게까지 성공하게 만든 원동력이, 그가 지금 자선사업에 온 힘을 쏟아붓게 하는 원동력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다큐에서 잘 말하고 있다시피 'optimize'에 미친 사람이니까 말이죠.

      제가 그런 돈을 가져본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테니 이건 순전히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빌 게이츠 입장에서는 옷에 구멍이 났건 말건 별 신경 안 쓰일 것 같긴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라는 가장 소중한 자원을 'optimize'할 때, 옷을 입기 전에 한번 보고 구멍이 있으면 다른 걸로 갈아입고, 뭐 그런 건 의미가 없죠. 저는 그보다 '페이퍼리스 오피스'를 그렇게 밀어붙이고 상품화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가 허구한날 종이책 읽고 리걸패드에 메모하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런 걸 보면서 '위선자! 종이 없는 오피스의 배신자!'라고 욕하면 말이라도 될텐데 말이죠. 하하.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MS와 빌 게이츠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겠죠. 현재의 MS는 오픈소스 진영의 가장 큰 우군 중 하나니까요. 게다가 빌 게이츠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고 말입니다. 세상 참 모르는 것 같아요. 끝까지, 열심히 살아봐야 다 알 수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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