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3

승려(혹은 종교인)이 돈을 벌면 안 되는 이유

간단하다. 승려 혹은 종교인은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버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정당화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모든 자본주의적 행위자가 그러하듯,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을 넓히려고 들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자가 시장을 넓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마음의 불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컨대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장사를 할 유인동기가 된다는 소리다.

이는 마치 어지간한 나라에서는 의료행위를 순수한 영리 추구 행위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의사도 돈을 벌어야 하지만,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의료 지식을 마음껏 활용하도록 내버려두면, 없는 병도 만들어서 '치료'한다고 장사를 할 우려가 생긴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적절한 방식으로 의료의 사업화를 규제한다.

종교로 돈을 버는 그 승려를 두고 '왜 안 됨?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것을 보고 놀라는 중이다. 종교인이 제공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면, 그들의 행위는 돈벌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만 하는, 아주 당연한 결론이다. 이런 것까지 설명이 필요한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추가) 마음의 평화 제공 + 의료 서비스 제공 + 돈벌이 = 안아키. 이렇게 말하면 단번에 이해가 되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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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 작성


2026-04-08

1995년의 버스표


 

중고로 구입한 헌 책 속에서 나온, 95년 서울 → 강릉 버스표.

원래 주인은 긴 여정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샀구나 싶다.

그러나 책갈피가 꽂혀 있던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건대, 본인이 원하던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얻지는 못했던 듯.

고현학(考現學)의 사례로 기억할만 했다.

덧) 독서 목록(2022)을 확인해보니 고원정의 『빙벽』 1부의 2권이나 3권에서 나온 듯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던 책.

사마천. 이한우 옮김. 『이한우의 사기』(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26), 총10권.



나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번역가로 처음 알았다. 길버트 라일이 쓴 『마음의 개념』은 내가 처음 읽은,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철학서였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이한우, 당시 조선일보 기자.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 제국의 행동대장,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사라졌다. 망했다. 변질했다. 어떻게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번역가 이한우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품에서 나와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된 후로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서양 고전에서 동양 고전으로의 지적 도약을 감행한 후, 그는 더욱 훨훨 날아가는 중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님께서 보내주신 『이한우의 사기』 총10권이 지난 주말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나는, 사기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대부분의 한국 식자층이 그럴 테지만, '열전'의 백이숙제 편부터 펼쳤다. 왜? 가장 유명하니까. 우리가 '사기'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역시 잘 읽혔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기열전은 반쪽짜리, 아니 1/3쪽짜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기』 삼가주, 즉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까지 모두 번역해서 붙인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쌓인 주석들이 만들어내는 시층과 사유의 궤적이 아름다웠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역자 본인의 주는 또 어떠한가. 이미 『논어』 와 『문장정종』을 완역해낸 철학자 이한우는 사마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하는) 정통 유교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낸다.

첨부된 이미지 속 내용을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한우의 논어』는 "삼가주 완역 해설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새 번역본은 사실상 '사기 사가주(四家注)'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한우의 논어』가 이렇게 탁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지니고 있는 역사철학의 확고함 때문일 수 있다.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책의 1권을 펼쳤다. 역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첫 세 문단을 옮겨 적는다.

1.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이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이면서도 공허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물음이다. 사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조준이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에게 '무엇(What)'을 물어서 나올 대답은 뻔하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를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이나 고대 중국의 인간이나 21세기 현대의 인간이나 똑같이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How)', 즉 존재 방식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다. 즉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고 어느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쓸 것인가'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적어도 역사를 쓰는 사람은 일급 지성과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쪽, 역자 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유교 경전의 전체 체계를 제왕학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한우 동양 고전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양철학을 드디어 우리의 눈으로 읽어내는 시대의 개막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많은 독자분들이 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간청한다.

2026-04-03

우원식 개헌안, 내용도 형식도 틀렸다

오늘(4월 3일 금요일) 국회에서 한참 논의되고 있다는 우원식 개헌안.

한마디로 내용도 형식도 틀린,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개헌안이다.

3대 내용이라는 것이 이렇다.

첫째, 헌법 전문에 광주항쟁 부마항쟁 넣자.
둘째, 지방자치 확대하자.
셋째, 계엄 재발 방지 조항 넣자.

내용을 역순으로 검토해보자.

계엄 재발 방지? 이미 윤석열의 불법 계엄을 현행 헌법으로 잘 막아냈음. 오히려 지금보다 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면, 북한이나 제3국이 계엄 필요 상황을 유발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가 망할 수 있음. 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함.

지방자치 확대? 지방자치는 아예 없애거나 대폭 축소 개편해야 함. 심지어 지방 거주민들도, 자신들 입에 떨어질 콩고물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대계를 고민한다면, 지방자치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할 것. 근데 이걸 현행 유지하면서 확대한다? 개소리임.

광주항쟁 부마항쟁? 솔직히 이거 '호남표 영남표' 같은 얄팍한 계산에서 찬성하는 거 아님?

물론 광주항쟁 부마항쟁이 큰 사건이었음으로 원론적으로는 반대할 수 없음. 그런데, 그렇다면,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함.

우리 헌법 전문은 애초에 이상함. 3.1운동에서 시작하는데 곧장 4.19로 이어짐. 중간에 있어야 할, 한국전쟁의 서사가 빠져 있음.

한국전쟁은 단지 대한민국과 북한의 전쟁이 아니었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제 질서의 기틀을 잡은, 일종의 '정초전쟁'임. 우리는 세계 최초로 정상 작동한, 아마도 마지막 사례일 수도 있을, UN군의 힘으로 살아난 나라임. (내가 돈과 힘이 있으면 어디 좋은 터에 칸트 사당을 짓고 싶을 정도.)

헌법 전문, 나는 솔직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정 그걸 그대로 두고 확장하고 싶다면, 광주 부마항쟁을 논하기 이전에, 한국전쟁을 넣어야 함. 

한국전쟁은 민주항쟁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독재와 맞선, 최초의 민주 항쟁,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임.

이렇게 내용이 다 틀린 우원식 개헌안. 심지어 형식도 틀렸음.

국회의장이라는 인간이 왜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헌안을 띄움? 왜 '지선과 연동해야 한다'고 뽐뿌질함? 이게 과연 정상적인 국회의장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음?

우원식은 사퇴해야 마땅함.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될, 公人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갖지 못한 사람임.

내용도 형식도 글러먹은 우원식 개헌안, 반대가 마땅함. 국힘의 당론은 옳고, 개혁신당도 당론을 바꿔서 지금이라도, 향후 있을 수 있는 장기적이고 진지한 개헌 논의의 단초를 마련해야 옳다고 생각함.

2026-03-25

크리스틴 로젠. 이영래 옮김. 『경험의 멸종』(서울; 어크로스, 2025)

미국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 은 훌륭한 페이지 터너다. 그 장점은 단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왜 읽기 쉬울까? 주제가 너무도 단순 명료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기술에 의해 계속 변하고 재편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깔고, "비기술적 가치와 지식 흡수의 방식이 대체되고 사라지는 것", 즉 "경험의 소멸"[19쪽]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런 삶을 그만 살자,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진짜 경험'을 돌려주자는 이야기다.

좋은 주장이다. 우리는 이미 나쁜 사례를 잔뜩 알고 있다. 가장 극적인 예를 들어보자. "2010년 한국에서 한 부부가 인기 온라인 게임 프리우스Prius에서 가상 아이를 키우느라 실제 아이는 굶어죽게 내버려둔 일이 있었다."[31쪽] 꼭 이렇게 극적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의 '정념'에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정념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이성'에 설득되지 않아서다. 자신의 논지를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여러 학자를 원용하는데, 양쪽 모두에 있어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장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사라이 시에라라는 33세 여성의 사례를 짚어보자. 시에라는 혼자, 하지만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원래 세계와 단단히 연결된 채, 튀르키예 여행을 갔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못했다. 2013년 1월 21일 귀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실종된 후 11일 후 이스탄불의 역사 지구 술탄아흐메트의 성벽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범인은 인근의 노숙자였다. 페인트 시너에 취한 채 시에라를 강간하려다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범인은 스마트폰이다.

그녀의 친구와 가족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에라가 여행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의존했던 기술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지는 않았는지,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위험에 무감해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220쪽]

'주변의 위험을 살피지 않고 폰만 보고 다니지 말라'는 충고는 일반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노숙자가 시에라를 강간하려 했을 때 상황이 스마트폰과 유관한지 아닌지, 적어도 독자인 우리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여행지에서 셀카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례처럼 소비될 일이 아니다. 비겁하고 심지어 위험한 서술 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끌어들인 내용도 종종 눈에 거슬린다. 저자는 "벤야민은 이렇듯 열정적이지만 산만한 비판이 문화의 수준을 낮추고 대중이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저속하고 단세포적으로 변할 것이라[245쪽]고 우려"[246쪽]했다고 적는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잘 요약했듯, "발터 벤야민은 1936년 에세이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술적 변화, 특히 기계적 복제가 새로운 관점인 "진보적 반응"(그가 붙인 이름이다)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245쪽] 기술복제로 인한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벤야민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반겼다. 로젠은 벤야민을 똑바로 읽고도 거꾸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견강부회가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의 편향성 때문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나는 X세대다) 성인기에야 이 새로운 세상을 접하[18쪽]고 이 세상의 전망과 위험성을 헤쳐 나가고 있는 나 자신의 경험에서 발전"[19쪽]한 책이다. 특정 세대의 경험과 세계관에 입각해 현재의 미디어 발전을 제단하고 있는 것이다.

X세대라면 여자친구와 워크맨 이어폰을 나눠 듣는 것을 아름다운 연애 경험의 한 장면으로 추억할 것이다. 그런데 오직 그것만이 '현실'일까? 여자친구의 온라인 게임 계정에 대신 로그인해 레벨을 높이고 아이템을 주워주는 Z세대의 연애 경험 역시 나름의 진실된 무언가를, authenticity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

지니는 이미 램프 밖으로 풀려났다. 이 문제는 특정 국가에서 성장한 어떤 세대의 편견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가치 중립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2026-03-23

'노동 해방'(혹은 주3일 노동)은 인간 해방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26쪽] 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간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혼의 붕괴를 수용할 만한 병원은 아직 충분치 않다.[27쪽]

에리히 프롬,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서울: 나무생각, 2016).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노동 해방'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에리히 프롬의 양면적 고뇌가 잘 담겨 있는 대목. 

2026-03-15

우리가 '언제적 하버마스' 타령이나 할 때, 하버마스는 늘 현재를 살고 있었다

1970년대에 학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현대의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는, 1990년대에 대한민국에 급격히 소개되면서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의 대항마로 큰 각광을 받았고, 그 열풍이 시들해지면서 동시에 급격히 대한민국의 식자층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현실 정치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며 사회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 2008년에 등장한 책이 바로 『아, 유럽』이며, 우리는 2011년 그 책의 한국어판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서야 제 우편함에 당도한 이 뒤늦은 편지와도 같은 책을 읽으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빠졌다.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외국의 학자들을 유행 따라 읽고 소개하는 한국의 지적 풍토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언제적 하버마스'는 없다. 그는 꾸준히 그가 살고 있는 현재를 해석하고 그 현재와 상호작용한다. 과거의 철학자를 과거의 유물로 만드는 것은 그를 그렇게밖에 치부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특히 하버마스와 같이, 본인의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다른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해서 전달하는 일에 능숙한 철학자를, 단지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읽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손해다. 이 책 『아, 유럽』은 20세기의 중후반부를 살아가는 현대철학의 거목들의 진면모를 아주 짧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낸 강연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거장의 손으로 (본인의 논지를 펴기 위한 왜곡 없이) 요약된 거장을 접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최수태. "위기에 빠진 유럽, 하버마스의 처방은?". 프레시안Books. 2011-11-2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092 

3월 14일 하버마스의 부음을 듣고 저는 어떤 서평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서평지였던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원고지 50매에 달하는 그 긴 서평의 저자는, 하버마스의 <아, 유럽>을 다각도로 읽어내고 있었죠.

하버마스는 <아, 유럽>에서 미국의 '좌파 애국주의'를 공들여 다루는데, 그것은 유럽통합론자로서 하버마스가 이성 중심의 공론장 뿐 아니라 감성으로 만들어진 애국심, '유럽의 애국심'이 필요하다는 걸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추측을 담아내고 있는 서평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책의 내용을 넘어서, 그 책을 읽고 있는, 혹은 읽어야 할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지점이야말로 이 서평이 독특한 가치를 지니게 만든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뇌리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언제적 하버마스' 같은 소리나 찍찍 내뱉으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외국의 지적 흐름을 무슨 두쫀쿠 버터떡마냥 소비하고 버리는 동안, 하버마스 같은 진정한 지식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맥락 위에서 최선의 지적 활동을 해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위르겐 하버마스, 위대한 학자이자 열정적인 공공 지식인, 그의 명복을 빕니다.

2026-03-12

옌스 죈트겐, 크누트 푈츠케 엮음, 강정민 옮김, 『먼지 보고서』(서울: 자연과생태, 2012)

옌스 죈트겐, 크누트 푈츠케 엮음, 강정민 옮김, 『먼지 보고서』(서울: 자연과생태, 2012)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갑자기 춥다가 덥다가 하는 기온 때문만은 아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이하기 어렵게 만드는 불청객, 미세먼지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도 봄마다 불청객 황사가 찾아왔지만 요즘의 미세먼지는 다르다.

올해 초, 설 연휴가 끝나던 주말에는 수도권의 미세먼지가 1000마이크로그램/세제곱미터를 넘겼다. 0에서 30이면 좋음, 31에서 80이면 보통, 81에서 150이면 나쁨, 150 이상이면 '매우 나쁨'인데, 그 '매우 나쁨'의 기준선을 한참 넘어선 것이다.

이전까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먼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늘 먼지와 마주치고 살아간다. 먼지는 책꽂이 위에도 쌓여있고, 우리의 몸에서도 뿜어져 나오며,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 사실, 먼지는 어디에나 있을 뿐 아니라, 우주가 시작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해왔다. 실로 이 우주는 먼지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먼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언젠가 먼지로 돌아간다.

독일 아우그스부르크 대학교 환경과학연구소를 이끄는 옌스 죈트겐은 대단히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화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철학으로 바꿔서, 질료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제품 형상을 공부한 크누트 푈츠케와 함께, 자신들을 빼고도 24명이나 되는 저자들이 쓴 글을 묶어 낸 책 <먼지 보고서>를 펼쳐보자.

미세먼지, 또 초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들은 호흡기를 통해 폐로 흡수되며, 다양한 질병을 유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많은 먼지를 만들어내는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1990년대 초 플렌스부르크(Flensburg)와 가미쉬(Garmisch) 사이에 있는 3,000가구를 실제로 관찰한 결과 대부분의 공간에 있는 공기는 대도시의 차가 많이 다니는 교차로보다 50배나 더 유해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그들 삶의 60~90%를 집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먼지는 외부의 해로운 입자만큼이나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178쪽)

이와 비슷한 연구가 또 하나 있다. 북미의 연구자들은 1990년, 178명의 실험 대상자에게 휴대용 먼지감지기를 설치했다. 이 사람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먼지 감지기를 달고 살았는데, 그 결과, 그들의 집과 생활 공간에서의 먼지는 건강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기준치 이하였던데 반해, 대상자의 휴대용 먼지감지기에 포착된 먼지의 양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다시 말해, 집은 깨끗해도 사람이 더러웠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개인적 구름'이라는 표현으로 해설했다."(188쪽) 우리는 한 평생 스스로 만드는 먼지 구름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건강을 위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다. 잘 씻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공기가 맑은 날이면 환기를 자주 하는 것 등. 또한 국내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동차의 매연 및 타이어 마모 먼지 등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많은 먼지를 발생시키는 중국과 협력하여 보다 나은 환경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먼지에 대해, 단지 불쾌한 무언가로만 여기지 말고, 진지한 사고를 해볼 필요가 있다. <먼지 보고서>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옌스 죈트겐이 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먼지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며, 동시에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먼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는 로마교회의 교부(敎父)이자 200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추존된 성 이시도르(Isidor von Sevilla, 기원후 560-636)가 지은 백과사전에서 발견된다. 그는 돌과 금속에 관한 장에서 '바람에 의해 이동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구약성서 시편 1장 4절을 증거로 든다. 이 정의는 순전히 현상에 의존한다. 즉 먼지는 바람에 의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저술은 수백 년간 최상의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중세까지도 대학생들은 그렇게 배웠다.(35쪽)

시편 1장 4절은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어떤 자연과학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니, 이것이 중세인가 싶고, 왠지 틀렸다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먼지에 대한 현대적 판단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 연방환경청에서 근무하는 라이너 레무스의 말을 들어보자. "먼지의 묘소와 관련하여 지난 시기에 다양한 정의와 협약이 내려졌다. 그에 따르면 먼지는 고체와 액체 입자로 된 복잡한 혼합물이다. 이러한 혼합물은 에어로졸이라고도 일컫는다."(147쪽)

이 작은 입자들은 "자신의 크기로 인해 어떠한 침전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중력에 의해 침강하지 않으며 대기권에 아주 오래 머문다."(같은 곳) 쉽게 말해보자. 모래는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그것을 놓는 순간 땅에 떨어진다. 중력에 끌리는 것이다. 하지만 먼지, 에어로졸은 너무도 작기 때문에, 공기와의 마찰로 받는 힘이 중력에 끌리는 힘보다 더 크다. 마치 사람과 곤충의 차이와 흡사하다. 우리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지만 곤충들은 다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워낙 몸이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너무도 작아서 떨어지지 않고, 대기 속에서 부유하다가, 공기와의 마찰 혹은 정전기나 기타 힘에 이끌려 어딘가에 붙어있기도 하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먼지인 것이다.

먼지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사색의 기회를 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먼지로부터 만들어졌다. "우리 태양계는 약 46억 년 전에 거대한 성간가스와 먼지구름, 즉 태양계 이전의 먼지구름에 의해 탄생"(86쪽)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말처럼, "우리는 먼지와 그림자"인 셈이다. 지금도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우주의 먼지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성층권까지 올라가는 비행기에 끈끈이를 붙여서 우주먼지를 수집하고, 연구실로 가져와 분석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바보같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이런 행위를 통해,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다.

라이프니츠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바젤 출신의 수학자 요한 베르눌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에 대해 함께 사고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신은 우리들의 대상을 규정하고 우리의 사고에 해당하는 크기의 종류만을 창조했단 말인가. 극미한 먼지에도 이 커다란 세계의 모든 것에 상응하는 질서 잡힌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반대로 우리들의 세계가 무한히 큰 다른 세계의 먼지 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38쪽) 미세먼지가 잦아들고 황사가 불어오지 않는 맑은 봄 밤, 청소를 하고 환기를 하며, 먼지 속의 우주, 우주 속의 먼지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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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의 책 소개 코너를 위해 작성한 원고. 내가 이렇게 줄글로 서평을 써서 보내면 작가분이 받아서 라디오 대본으로 재구성한 후 그것을 들고 방송을 했다. 2015년 3월 19일 방송분.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나. 유튜브 이후였다면 곧장 링크를 찾을 수 있었을텐데.

2026-03-10

예술은 여덟 도시의 10000명의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계는 자신을 예술계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예술계 구성원이다. 감상 후보의 지위를 부여하는 개인은 바로 본인이 그런 지위 부여 대상을 직접 만든 작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레디메이드나 파인아트의 사례처럼 지위 부여자와 작품 제작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술'이라는 낱말을 트집잡아, 디키가 예술 전문가들과 같은 패거리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는 엘리트주의 이론을 제시한다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때는 방금 논한 점을 들어 반박해볼 만하다. 톰 울프 Tom Wolfe, 1930~2018는 『현대미술의 상실 The Painted Word』에서 자신이 보기에 예술계 구성원 가운데 현대미술의 특색taste을 결정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지역별 분포상황을 자못 진지하게 작성했다.

우리는 예술계를 구성하는 교양인 culturati (미술가를 제[140쪽]외하고) 로마에 750명, 밀라노에 500명, 파리에 1,750명, 런던에 1,250명, 베를린·뮌헨·뒤셀도르프에 2,000명, 뉴욕에 3,000명, 그 외 우리가 잘 아는 세계 각지에 1,000명 쯤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덟 도시의 '사교계 les beaux mondes'에 속한 10,000여 명의 (한 작은 마을의 인구수에 불과한!) 인사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이 예술계다."

울프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할 만한 예술로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10,000여 명의 예술계 구성원이다. 하지만 디키가 말하는 예술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생각도 제한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실제로 디키는 예술의 개념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지식과 같은 예술적 수완, 혹은 예술 현장에 대한 이해, 미적 안목의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키의 예술 정의가 전통적 의미의 예술 정의인 것은 맞지만, 예술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상이 예술품의 지위를 온전히 획득할 가능성을 전혀 차단하지 않는 정의라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훈련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다.[141쪽]

톰 울프다운 코멘트, 그리고 좋은 해설이다. <현대미술의 상실>이 출간된 게 1975년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1만 명이라는 숫자에 더 큰 설득력이 생긴다.

문제는 내가 저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인용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 챗GPT니 제미나이니 하는 놈들한테 물어봐도, 당연하다는 듯,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지 혼자 지어내서 지껄여댄다.

이런 식의 '출처 상실'은 왜 벌어졌을까? 당시 내가 저 대목을 손수 타이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플 노트의 OCR 기능을 이용하여 죽 긁어붙이고, 최소한의 편집만 한 후, 서지사항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출처를 아는 분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흑흑...

2026-03-04

사람은 언제나 딴생각을 하며 불행해진다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https://doi.org/10.1126/science.1192439)는 마음 방황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46.9%에 딴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든 책을 읽든 대화를 하든 휴식을 취하든 무엇을 하든지 딴생각에 쉽게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성관계 중에는 딴생각을 가장 적게 했지만, 그 비율은 여전히 10%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앱에서 울리는 알람에 답변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만요.)

https://maily.so/mind/posts/fca43346(링크 깨짐)

제목이 곧 내용이며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도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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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원래 2024년 7월 11일,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웹에 올린 쪽글이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 비유를 들고 싶어지는 실험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비유를 했었는지 나도 기억 못하겠다.

그러므로 제목을 바꾼다. 좀 더 합리적인,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글과 함께 고민할 수 있을법한 제목으로.

참고로 인용문에서 말한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논문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자면, "떠도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딴생각에 빠지고,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Matthew A. Killingsworth, Daniel T. Gilbert,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Science* 330, 932-932 (2010). DOI:10.1126/science.1192439

역시 대니얼 길버트답게 글을 잘 썼다.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보자.

In conclusion, a human mind is a wandering mind, and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The ability to think about what is not happening is a cognitive achievement that comes at an emotional cost.
결론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방황하는 마음이며,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능력은 인지적 성취이지만, 정서적 대가를 수반한다.

2026-02-26

내 글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날

은 2002년 7월 3일이며, 7월 4일자 신문에 실렸다.

경향신문에서 소위 '인터넷 논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자 'e메일 옴부즈만'이라는 코너를 신설했었는데, 거기에 글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1983년생인 나는 당시 만으로 19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적자금문제 심층분석 아쉬워-

공적자금 운용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이른바 횡령을 했다면 당연히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회수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공적자금이란 무엇인가. 금융사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입된 돈이다. 댐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르는 시멘트와 같다. 독일에선 4위 은행이 위험했을 뿐인데도 금융공황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선 1위 은행이 부도 위기에 처했었다. 어찌어찌 하여 구원되긴 했지만 몹시 위험한 순간을 통과했다.

댐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급한 김에 성금을 모아 시멘트를 사서 발랐다. 그래서 살아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가 내 시멘트 값 내놓으라고 소리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공적자금의 회수는 내 주머니에 돈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왜 좀 더 폼나게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는 비판과 다를 게 무엇인가.

최근 경향은 서해교전의 비극은 비극이지만 햇볕정책의 기본 논조는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햇볕정책의 기본 정신은 비록 당장 이익을 볼 수는 없더라도 북한 정권이 급속히 붕괴된다면 남한에 더 큰 부담이 되므로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돕자는 논리일 터이다. 이를 지지하는 경향신문이라면 공적자금에 대해서도 좀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더욱 깊이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다.

〈노정태/대학생 bard-of-wind@hanmail.net〉

"[e메일 옴부즈만]서해교전 냉철한 시각 돋보여". 경향신문. 2002년 7월 3일. https://www.khan.co.kr/article/200207211834161

편집부에서 편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내가 쓰는 수법들이 여럿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주제의식 역시, 이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청년 진보 인터넷 논객'이었는데도, 시스템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관점도, 확실히 '진보 진영' 일반과는 결이 다르고.

사람은 달라지고 나아지는 존재이며 그럴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딱히 엄청나게 바뀌는 건 또 아닌 듯하다.

나는 'e메일 옴부즈만'에 세 번 독자 투고를 실었고, 이후 잡지사에 취직해 GQ와 VOGUE 같은 훌륭한 잡지에 칼럼을 보내다가, 2008년 경향신문에서 '블로그 속으로'라는 코너를 만들면서 신문 칼럼니스트가 됐다. 만 25세의 일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썼던 글을 뒤적이다가 접하게 된 최초의 기록을 갈무리하여 공개해 보았다.

2026-01-01

독서 목록(2025)

  1. 250218화 - 박한슬. 『숫자 한국: 오늘의 데이터에서 내일의 대한민국 읽기』(서울: 사이언스북스, 2025)
  2. 250224월 - 빌 에디. 박미용 옮김. 『그는 왜 하필 나를 괴롭히기로 했을까?』(경기도 고양: 갈매나무, 2018)
  3. 250227목 - 빌헬름 딜타이. 이한우 옮김. 『체험·표현·이해』(서울: 책세상, 2002).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024. 리디북스.
  4. 250322토 - 용수. 신상환 옮김. 『근본 중송』(서울: 도서출판 b, 2022). B판고전 21.
  5. 250324월 - 지그문트 프로이트. 강영계 옮김. 『쾌락 원리의 저편』(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374.
  6. 250331월 - 범천. 가연숙 사진. 『불교논리학의 향연』(서울: 불교시대사, 2016)
  7. 250524토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문형준 옮김. 『아포칼립스』(서울: 도서출판 b, 2022)
  8. 250611수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경기도 파주: 서광사, 2008). 개정판.
  9. 250622일 - 손민석.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서울: 마인드빌딩, 2025)
  10. 250710목 - 리처드 오스본. 보린 반 룬 그림. 윤길순 옮김.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1). 하룻밤의 지식여행 6.
  11. 250712토 - 프란스 드 발. 장대익, 황상익 옮김. 『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서울: 바다출판사, 2018). 개정판.
  12. 250723수 - 스티븐 위트. 백우진 옮김.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25)
  13. 250726토 - 아투로 E. 허낸데즈. 방진이 옮김. 『제대로 연습하는 법』(서울: 북트리거, 2024)
  14. 250727일 - 살만 루슈디. 강동혁 옮김. 『나이프』(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24)
  15. 250809토 - 전용덕.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5)
  16. 250817일 - 에드워드 콘즈. 배광식 옮김. 『불교의 길』(경기도 파주: 뜨란, 2021)
  17. 250817일 - 에드워드 콘즈. 최필영 옮김. 『위없는 지혜: 금강경·반야심경 해설』(서울: 사유수, 2025)
  18. 250817일 - 헨리 제임스. 김진욱 옮김. 『에스펀의 러브 레터』(서울: 생각하는 백성, 2000)
  19. 250828목 - 로라 베이즈. 성원 옮김. 『인셀 테러』(서울: 위즈덤하우스, 2023)
  20. 250912금 - 크세노폰. 오유석 옮김. 『경영론·향연』(서울: 부북스, 2015)
  21. 250925목 - 이선 크로스. 왕수민 옮김. 김경일 감수. 『감정의 과학』(경기도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25)
  22. 250927토 - 우에사카 요시후미. 정현욱 옮김. 『일본제철의 환생: 가라앉던 제조 기업은 어떻게 되살아났는가?』(서울: 워터베어프레스, 2025)
  23. 251121금 -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스토너』(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5). 전자책.
  24. 251125화 - 이병한.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J. D. 밴스 이들은 미국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25)
  25. 251205금 - 조은정·허철. 『한자와 고대중국어』(서울: 역락, 2024). 경성대학교 한국한자연구소 한자학 교양총서 04.
  26. 251218목 - 폴 실비아. 정지현 옮김. 『교수처럼 쓰는 법』(서울: 빌리버튼, 2025)
  27. 251219금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1·지식의 의지』(경기도 파주: 나남, 2010), 제3판.
  28. 251219금 - 조앤 W. 스콧. 정지영·마정윤·박차민정·정지수·최금영 옮김. 『젠더와 역사의 정치』(서울: 후마니타스, 2023)
  29. 251224수 - 요한 하리. 김하현 옮김. 『도둑맞은 집중력』(서울: 어크로스, 2023).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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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록을 나는 왜 매년 작성하고 있는 걸까. 2025년의 끝자락에서 새삼스러운 고민에 잠깐 빠져 있던 나는 이런 글을 읽었다.

없음이 아니라 과잉이 사랑을 죽였다고 말하는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 무엇이든 오래가려면 희소성을 유지하라는 것일까. 오웰은 그런 답을 주지 않는다. 생업이란 무엇을 많이 만들거나 많이 파는 일이며, 적게 해도 된다면 그건 생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의 사랑이 생업에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업계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웰처럼 업계를 떠날 수도 없다면 말이다. 일과 개인 사이를, 5천권과 가방 속의 한권 사이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 분리가 부디 유지되길 바라면서.

김영준. "5천권과 한권 [크리틱]". 한겨레. 2025-12-31.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37459.html

내가 이 목록을 만드는 이유를, 위 글을 통해, 보다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재미로 읽는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직업상 많은 책을 동시에 꺼내고 조금씩 보고 훑어 읽는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아웃풋'을 내기 위해 '인풋' 하는 과정이다.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쳐내야 할 마감도 있다. 매년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간다. 나는 지식, 까지는 아니어도 담론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함으로써 내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사람이기에, 조각조각 읽고 조각조각 쓰는 일 역시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독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읽기 위해 읽는 일이었다. 책의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판권까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읽고 쓰는 게 직업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만 기록하는 목록을 따로 만들고 있다. 읽고 쓰는 게 직업이니 매년 100권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물론 매년 지키지 못하고, 매년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결국 해를 넘긴 후에야 공개한다.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그런데 다음 순간에, 그런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들,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를 반박했다. 그리고 목록을 다시 만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덕업일치'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업' 뿐 아니라 '덕'에 대해서도 공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것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세상에 대한 작은 보답의 시작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