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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7

루머의 루머의 루머.. '쥴리 벽화'는 폭력적인 여성혐오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캐스 선스타인 책 '루머'로 본 쥴리 벽화의 진실과 거짓
일러스트=유현호

리버티 고등학교의 공기는 무겁다. 일주일 전 해나 베이커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클레이 젠슨은 더욱 울적하다. 해나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자책과 우울에 시달리던 클레이의 집 현관 앞에 이상한 소포가 배달된다. 주소도 보낸 사람의 이름도 써있지 않은 꾸러미의 내용물은 일곱 개의 카세트테이프. 여섯 개는 양면으로, 마지막은 한 면만 녹음되어 총 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녕, 해나야. 해나 베이커. 나야. 라이브에 스테레오지.” 어리둥절한 채 플레이 버튼을 누른 클레이는 기절초풍하고 만다. 자살한 해나가 남긴 음성 유언인 것이다. “간식 갖고 와서 앉아. 내 인생 얘기를 해줄 테니까. 더 자세히 말하면 내 인생이 왜 끝난 건지를. 네가 이 테이프를 듣고 있다면 너도 그 원인 중 하나야.” 13면의 테이프, 13명의 원인 제공자. 해나의 목소리와 클레이의 시선을 통해 시청자는 사건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내용이다.

가장 먼저 지목되는 첫 번째 원인 제공자는 저스틴 폴리. 단짝 친구가 전학간 후 적적해져 있던 해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운동부 남학생이다. 두 사람의 풋사랑은 아름다웠다. 심야의 데이트를 하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던 해나의 속옷을 저스틴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그 영상을 운동부 친구들에게 보여줬다가, 결국 전교생에게 퍼져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해나는 순식간에 ‘걸레’로 낙인찍혔다. 거짓 소문, 루머의 늪에 사로잡힌 채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루머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넛지>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캐스 선스타인의 책 <루머>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선스타인에 따르면 루머는 “사람과 집단, 사건, 단체와 관련해 진실이라고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거짓말과 루머는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 ‘어젯밤에 호랑이가 와서 우리집 소를 물어갔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거짓말쟁이는 가짜 증거를 제시하거나 그럴듯한 설명을 꾸며낸다. 반면 루머꾼은 사실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 믿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 거짓말쟁이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 그것이 바로 루머인 셈이다.

그래서 루머는 이미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는 동질적인 집단 속에서 쉽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선스타인은 그런 특징을 ‘사회적 폭포효과(social cascades)’라 부른다. 또한 루머는 같은 생각을 지니는 집단 내에서 확산되기에 점점 더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폭포효과와 집단 극단화가 맞물리면 그 해악은 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아폴로 탐사선의 달 착륙이 조작된 허위라거나, 코로나 백신은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심기 위한 빌 게이츠의 음모라거나, 힐러리 클린턴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동 성매매 혐의로 FBI에 체포되었다는 따위의 허황된 루머를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잘못된 믿음을 근거로 삼으며 더욱 똘똘 뭉치는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편가르기를 하며 이득을 보는 사람들, ‘가짜 뉴스 공장’을 운영하는 자들이, 루머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악의적인 루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 ‘마크 로스코 전’ 등 대형 전시를 기획하고 흥행시킨 성공한 문화사업가이며 전시기획자다. 또한 대학원에 다니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그 이력은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그런데 그가 ‘쥴리’라는 예명으로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황당무계한 루머가 어째서 이렇게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야당 후보의 아내를 둘러싼 추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런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집단적 신념 체계는 사실 여부와 무관하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적 폭포효과와 집단 극단화가 맞물려 결국 ‘쥴리 벽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최근 몇 년 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력적 여성혐오다. 그쯤 되자 여론도 그 루머꾼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우리 국민의 인권 의식과 건전한 양식이 그런 광경을 용납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다.

리버티 고등학교의 사정은 달랐다. 루머에 잠식당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로 돌아와 보자. 아무도 해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심심풀이용 가십으로 소비하고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해나는 테이프에 남긴 마지막 육성을 통해 가까스로 호소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어떤 얘기가 제일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제일 인기 없는지는 알아. 진실이지. 진실이 늘 제일 재미있거나 최고나 최악은 아니거든. 진실은 그 중간이지. 하지만 진실을 알고 기억해줘야지.”

<루머>는 적대적 루머에 시달리던 오바마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다보니 선스타인은 진보적인 법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시장’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해로운 루머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위축효과를 줄 수 있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은 미국보다 명예훼손과 관련된 처벌 조항이 잘 마련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바람직하며 근본적인 해법은 수용자 집단의 건전한 양식에 달려 있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몇 달 후 국민 스스로가 상식적이며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면 악의적인 루머꾼들을 공론장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7-24

[노정태의 시사哲] 세계가 삼성 폰으로 K팝 듣는 시대.. 日과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아무튼, 주말] 도쿄올림픽 2020에 듣는 '수궁가'와 '범 내려온다'

용왕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기 위해 자라는 뭍으로 올라왔다. 멋진 경치를 쓱 둘러본 자라 눈에 육지 짐승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윗자리에 앉아야 마땅한지 상좌(上座)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옳거니, 저기 가면 토끼가 있겠거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털이 북슬북슬한 짐승 쪽으로 말을 붙여 보았다. “토생원 아니시오?”

먼 바닷길을 헤엄쳐 오느라 힘들었던 자라의 입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호생원 아니시오?”라고 내뱉고 만 것이다. 산에서 가장 힘센 짐승이지만 남이 자신을 ‘생원’이라고 높여 부르는 일 따위는 영 없어서 서운했던 호랑이,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자라를 향해 달려갔다. 자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도망갈 틈이 없다. 엇모리장단에 맞춰 소리꾼이 목청을 뽐낼 차례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일러스트=유현호

퍽 친숙하게 들린다면, 그렇다. 밴드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가 바로 이 대목을 따서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작한 것이다. 마치 판소리의 한 대목이 ‘힙’한 유행가로 탈바꿈했듯, 우리는 이 옛이야기 한 토막 속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이라는 오늘날 키워드를 찾아볼 수 있다. 호랑이는 자존심을 앞세워 우쭐대다 큰코다친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굽히고 자존감을 되찾아 힘센 상대를 이겨내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린다. 그 ‘무언가’ 중에는 당연히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나는 소중한 사람인가? 고귀한 존재인가?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와 같이 다양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답을 제시하는데,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아 존중감(self-esteem)’이라고 부른다. 그 개념이 일상적 대화와 심리 상담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자존감’이라는 약칭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은 자존심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취급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무관하게 나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긍정적 가치를 자존감이라고 하는 반면, 타인과 경쟁하거나 서로 평가하면서 얻는 자기만족 등을 자존심이라 부르는 화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심리학 용어가 대중적으로 정착되면서 학술적 의미를 넘어 그 나름의 용례를 갖게 된 셈이다.

이와 같이 자존감과 자존심을 대립시킨다면 자존감은 자존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긍정하라’는 말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존감과 자존심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키워야 하는 양자택일 관계가 아니다. 자존심을 적절히 채우거나 필요한 시점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자존감을 기르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다시 수궁가의 그 대목으로 돌아가 보자.

호랑이는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존심만 강한 캐릭터다. 동물들은 누가 더 어르신이고 윗자리에 앉아 대접받아야 하는지 논쟁을 벌인다. 내 나이가 더 많다며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다툰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대본에서 호랑이 역시 그 틈에 껴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 높은 대접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라가 실수로 ‘호생원’이라고 불렀을 때 호랑이는 그 말이 너무도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갔다.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버렸다. 호랑이가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자 “나는 자라가 아니라 두꺼비”라고 둘러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죽기 살기로 싸워봐야 할 때. 여기서 ‘수국 전옥주부공신(典獄主簿功臣) 사대손 별주부’라는 자라의 자존심은 자존감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준다. 목을 쭉 빼서 내밀고 호랑이의 가랑이 사이 ‘밑 주머니'를 물어뜯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21년 7월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선진국이다. 국제사회라는 동물 모임 중에서도 그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에 걸맞은 국가적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말초적 자존심 싸움에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일본을 상대로 한 자존심 싸움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곤 한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습니다” “쇠퇴하는 일본 ‘선진국’ 격상 대한민국”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같은 문구를 떠올려보자. 중학생, 아니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이렇게 유치하게 자존심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한민국의 공식 채널에서 튀어나온다. 정말이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갓 개막한 도쿄올림픽을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이다. 코로나로 한 해 미뤄지고 지금도 확진자가 나오는 어려운 여건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의 올림픽 운영은 퍽 미숙해 보인다. 손기정 선수를 굳이 ‘일본 금메달리스트’라 표기하고, 일본 자위대 깃발인 욱일기를 대회장에서 사용하겠다고 고집하는 등, 논란을 자초하는 모습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손뼉도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올림픽은 전 세계 모든 나라와 함께하는 평화와 우정의 한마당이다. 그걸 마치 전쟁이라도 되는 양 일본과 벌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끌어내리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어른스럽지 않다. 한반도 모습을 한 호랑이 그림과 함께 ‘범 내려온다’고 써서 내건 것도 마찬가지다. 수궁가의 원래 맥락을 떠올려보면 이건 코미디다. 그 호랑이는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자라를 상대로 자존심을 찾다가 망신만 호되게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21세기의 20여 년간 일본을 상대로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한때는 한국 청소년들이 소니 워크맨으로 J팝을 듣고 자랐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삼성전자 스마트폰으로 K팝을 듣고 있다. 우리의 자존심은 새로운 시대의 자존감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마땅하다.

‘범 내려온다’는 산에서 내려온 허세 가득한 호랑이를 위한 노래가 아니다. 바다에서 올라와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을 찾은 자라 이야기다. 흥겨운 가락을 흥얼거리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파이팅을 외쳐본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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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0

[노정태의 시사哲] 미군이 점령군? 낡은 역사 판타지에 빠져 '백 투 더 조선' 외치지 마라

 

[아무튼, 주말]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본 이재명 대한민국 건국 논쟁
일러스트=유현호

미국의 작은 도시 힐 밸리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 맥플라이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 주 토요일 밤으로 예정된 댄스 파티에서 조지와 로레인이 키스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티뿐 아니라 마티의 형과 누나의 목숨이, 아니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마티가 원래 살던 1985년이 아니라 1955년. 마티는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왔다. 본의 아니게 조지와 로레인의 첫 만남을 방해해버렸다. 문제는 조지와 로레인이 마티의 부모님이라는 것. 게다가 로레인은 조지가 아닌 마티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마티는 로레인의 관심을 피하면서, 조지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서 키스를 하게 해야 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내용이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이야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가 ‘타임머신’을 출간한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물리학적, 철학적 고찰이 시작되려면 천재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완전성의 원리’로 유명한 수학자이며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지구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에 탑승한 후 수십 년이 지나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에 남아있던 쌍둥이는 노인이 되겠지만 우주선을 탄 쌍둥이는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채 돌아올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가령 인공위성의 시계는 중력의 영향을 덜 받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서 지표면의 시계보다 느리게 작동한다. 인공위성은 미세하게나마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오차를 꾸준히 보정해주지 않으면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GPS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상대성이론 속에 살고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두 유대인 천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에서 만났고 곧 단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델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 “제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이용해서 새로운 우주 모델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한 장비 없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죠.” 철학자이며 과학 저술가인 짐 홀트의 책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괴델 우주’를 검토하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 우주가 출현하면서 시간 여행은 과학에 근거를 둔 논리 퍼즐이 되었다. 그것을 ‘타임 패러독스’라 부른다. ‘백 투 더 퓨처’도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이다. 스스로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면? 아직 발표되지 않은 히트곡을 원작자에게 들려준다면? 어떤 스포츠팀이 이길지 결과를 미리 다 알아놓고 도박을 해서 돈을 번다면?

영화와 창작물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피해간다. 그 퍼즐 게임을 보는 것이 시간 여행물의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논리적 분석은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괴델 우주에 살고 있지 않고,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소리다. 어떤 식으로건 과거에 영향을 준다면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고,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면 시간 여행자의 존재가 부정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김원웅 광복회장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미군이 점령군이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 등 일부 지식인은 미국의 공식 포고령에서 ‘점령(occupy)’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그저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편을 들었다.

분명한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칭한 것은 공문서의 어휘다. 반면 소련군이 스스로를 ‘해방자’라 부른 건 선전용 문서에서 나온 말이다. 미군의 표현이 증명사진이라면 소련군의 표현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필터를 잔뜩 먹인 셀카와 마찬가지다. 소련과 북한의 ‘쌩얼’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이들은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거나, 혹은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패배하는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낡은 역사책에 기반한 일종의 시간 여행 판타지에 푹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진정한 민족국가를 세울 수만 있다면!

1945년, 남과 북의 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미군에게 ‘점령’당한 반면, 북한은 소련을 통해 ‘해방’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76년이 흐른 지금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실험을 보는 것만 같다. 미국이라는 로켓을 타고 넓은 우주로 나간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반면, 소련을 통해 ‘해방’되고 중국의 품에 안긴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 독재 국가로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미국에 ‘점령’되면서 자유를 얻었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을 통해 ‘해방’된 후 압제에 시달린다. 누가 점령군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처럼 묘사한다. 그들 소원대로 미군이 ‘점령’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전형적인 타임 패러독스다. 다 큰 어른들이 그들만의 역사 판타지 속에 허우적거리며 ‘백 투 더 조선’을 외치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본인들이 낡고 후지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국민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백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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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6

수술실에 CCTV 달자고? 현대판 ‘파놉티콘’에 스스로 들어갈 텐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조지 오웰의 ‘1984’로 본 ‘CCTV 의무화법’의 위험성

 

윈스턴 스미스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하급 당원으로서 개성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때 ‘영국’이라고 불렸던 오세아니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세아니아의 곳곳에는 지도자 ‘빅 브러더’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빅 브러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진 정교한 그림이다. 게다가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정권 홍보 방송을 내보내는 텔레비전이지만, 동시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모든 이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이 흔히 그렇듯이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몇몇 장면이나 구절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1984>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의 작동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약간 공부가 필요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인 ‘파놉티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마치 도넛처럼 중앙이 비어 있는 원형 건물을 떠올려보자. 건물은 총 6층이며 층마다 감방이 늘어서 있다. 원형 건물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서 있다. 죄수들의 감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다. 반면 감시탑 창문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단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구조다. 벤담은 이런 감옥을 고안하고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알다시피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비인간적 감옥을 고안했을까? 18세기 말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산업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온 낯선 이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람 몸을 훼손하거나 때리는 식의 처벌은 선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전례 없이 수형자가 늘어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범죄자를 처벌, 교화, 재교육할 새로운 방안이 절실했다.

파놉티콘은 그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벤담의 설명을 들어보자.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완전한 지배 장치,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조지 오웰로 돌아가 보자. 1984년 4월 4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느 날, 윈스턴은 펜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짓은 그 자체로 ‘사상죄’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독자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텔레스크린 혹은 파놉티콘의 감시를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기에 무엇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국민이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응징하려 든다.

과연 소설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는 방방곡곡 CCTV가 설치된 세상에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공공 장소 CCTV의 필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째고 피를 쏟으며 목숨이 오가는 곳인 수술실 내부에도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여론 몰이를 보면, 인권도 프라이버시도 윤리적 감수성도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런 입법 시도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의사회(WMA) 데이비드 바브 회장은 지난 22일 의사협회에 보낸 영상에서 “이 법안은 ‘조지 오웰’적 성격이 짙어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에 가깝다”며 법안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대리 수술이나 성폭력 등 의료진의 일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규약을 확립하고 동료 간 리뷰를 강화하는 등,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이 있다. CCTV는 그런 목적 달성에 부적합하다.

반면 부작용만은 확실하다. 전신 마취 수술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대개 완전 탈의 상태로 진행한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과 수술 과정 등을 담은 전자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 방식으로는 검색도 접근도 어려운 ‘다크웹’에는 아동, 시신, 동물 등에게 성욕을 품는 자들이 찍은 온갖 끔찍한 영상이 돌아다닌다. ‘한국 수술실 영상’들은 다크웹의 핫 아이템으로 거래될 것이다. 돈과 관심을 노리는 유튜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 협박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도 충분하다.

유출자를 엄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잡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후약방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를 불신하면서 CCTV 영상 관리 업체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해킹 위험도 있다. 원자력, 잠수함 등 기밀 등급 높은 자료도 털린다. 수술실 CCTV 영상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건 허황된 꿈이다. 일단 찍은 영상은 유출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여성 연예인 등 대중의 선정적 관심이 쏠리는 사람의 수술 영상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안보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고위급 인사의 의료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수술을 받는 영상이 다크웹에서 거래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외국인, 특히 무슬림 여성들의 의료 관광 수요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중국마저도 수술실 내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윈스턴의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사상 경찰에 체포된 그는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라고 강요당하며 세뇌된다. 결국 오세아니아의 대다수 국민처럼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CTV는 감시 도구이며 인권침해 수단이다. 의료인에 대한 불만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일부 정치인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부추겨 국민 스스로 파놉티콘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건 정말 나쁜 정치다. 파놉티콘의 죄수가 아닌 시민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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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조국의 시간'에 열광하는 앵무새들.. 이제 그만 자아도취서 깨어나길

[노정태의 시사哲]
나르키소스 신화로 본 악성 자아도취의 비극

강의 신 케피소스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겁탈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홀딱 반해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늘 냉담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구애를 뿌리칠 뿐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헤라 여신의 시종인 요정 에코도 거절당했다. 에코는 원래 수다쟁이였지만 헤라의 저주를 받았다. 자기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야멸차게 내뱉은 말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리 꺼져. 네 품에 안기느니 죽는 게 나아.”

상심한 에코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 뼈마저도 돌로 변해버렸다. 그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청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네메시스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차인’ 전력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청원은 접수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 나르키소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물가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가 되었다. 에코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남이 한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다.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惡)을 탐구한다. 그가 볼 때 악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 자아도취(나르시시즘), 근친상간. 프롬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아도취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한다. 왜 그럴까?

사실 자아도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어난 직후의 아기를 생각해보자. 나와 세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울면 젖을 주고 달래준다. 모두가 나를 보며 웃어준다. 나는 곧 세상과 동일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도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든다. 그런 태도는 때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잡스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고 남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 동료들은 잡스가 ‘현실 왜곡장’을 펼친다고 농담 삼아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더십과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스마트폰 세상은 오지 않았거나 퍽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히틀러는 어떨까. 히틀러는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부활시킬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아도취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그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의 개인적 자아도취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장됐고, 그 속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롬은 종양을 진단할 때 쓰는 의학적 용어를 빌려, 자아도취를 양성(benign)과 악성(malign)으로 구분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 범인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개방적 태도, 그런 것이 함께할 때 자아도취는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반면 죽음과 고통을 찬미하며 가족이나 부족, 민족 같은 폐쇄적 혈통에 집착할 때 자아도취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커지면 그 여파는 개인을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자아도취의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조국 전 법무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 때문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즘은 연예인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자의식에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판단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몇 구절 읽어보자. “제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폐 상태였다고 토로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 전형적 자아도취 증상이다.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이유’가 문제인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 나르시시스트는 불리하면 이런 식으로 논점 일탈을 한다. 압권은 이 대목.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토록 비장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국의 자아도취는 양성보다 악성에 가까운 듯하다.

문제는 이 자아도취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고액 사모펀드에 가입할 재산도 인맥도 없는 사람들, 자기 자식을 인턴으로 꽂아 넣고 입시 특혜를 안겨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여 인증샷을 올리며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우상(idol)에 자아를 투영하는 팬클럽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작은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조국과 그의 팬클럽만 모르는 것 같다. 마트에서 나뒹굴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처럼 ‘무죄판결 내 거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조국을 SNS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이 나간 나르키소스라 한다면, 그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은 그에게 반한 에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달리 현실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한 비극의 주인공 행세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엉터리 희극일 뿐. 조국과 그의 팬들 모두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숙한 존재가 되시기를 희망한다.

2021-05-01

文정권이 손 놓은 암호화폐, 나라를 투전판으로 만들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미다스 신화와 마르크스로 본 암호화폐와 투기 심리

일러스트=안병현
미다스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현명한 임금이었다. 특히 디오니소스가 그를 총애했다. 디오니소스의 양육자이자 스승인 사티로스 실레노스를 잘 대접했기 때문이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노라는 디오니소스의 말에 미다스는 ‘내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문자 그대로 그와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차라리 저주였다. 음식을 먹으려고 잡으면 황금이 되었다. 물이나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들어도 모든 게 황금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사랑하는 딸을 쓰다듬었더니, 딸 역시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미다스는 고통으로 절규하며 디오니소스에게 간청한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팍톨로스 강물에 가서 목욕을 하면 축복, 아니 저주가 풀릴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미다스는 지시를 이행했고 정상적인 몸을 되찾았다. 그 후로 팍톨로스강은 오늘날까지도 터키 최대의 사금(沙金) 산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미다스왕과 관련된 고대 그리스 신화 중 하나다.

신화는 인류의 집합적 지혜의 소산이다. ‘탐욕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좀 더 깊이 있는 독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 경제 철학의 핵심 개념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구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것을 만들고 또 소비하며 살아간다. 원시사회가 아닌 다음에야 물물교환으로 경제활동을 해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인류는 화폐를 발명했다. 금이나 은처럼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귀금속을 매개체로 삼아 가치의 저장과 교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상품이 지니는 가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물건 자체를 직접 사용·소비의 대상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말하자면 쌀이나 물고기를 직접 먹을 때 누리는 가치. 그것을 사용가치라고 한다. 반면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 때 매겨지는 가치가 있다. 이를 교환가치라 부른다.

모든 재화는 각기 다른 사용가치를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농부에게는 쌀이 남고 어부에게는 생선이 남는다. 농부는 생선을 먹고 싶고 어부에게는 쌀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낮은 사용가치가 상대방에게는 높은 것이다. 그러니 농부와 어부는 화폐라는 중간 매개체를 이용해 서로의 사용가치의 합의점, 즉 교환가치를 찾는다.

여기서 화폐의 독특한 성격이 문제가 된다. 미다스왕의 고초가 잘 보여주다시피 우리는 황금을, 즉 돈을 입거나 먹을 수 없다. 화폐는 오직 교환가치만을 갖는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스스로 앞장서 ‘미다스의 손’이 되고자 한다. 진정 쓸모 있는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신 돈으로 돈을 벌 궁리만을 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으로 인해 무너지고 공산주의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그의 주저 <자본론>에서 이 과정을 수학 공식과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해 설명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경제학’이라 보기 어렵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던 모든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은 경제에 대한 철학적 담론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다스왕의 전설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용가치를 ‘내적 가치’로, 교환가치를 ‘외적 가치’로 넓혀서 이해한다면, 이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돕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무언가가 가치 있는 재화라면, 그것은 그 자체에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비싸게 팔릴 것이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시끌벅적한 ‘암호 화폐’는 어떨까. 일단 개념의 오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암호 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비트코인이나 그 외의 알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재산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다. 사용가치를 지니는가? 만약 암호 화폐가 화폐라면 그 개념 정의상 암호 화폐는 사용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반대로 화폐가 아니라고 해도 암호화폐는 복잡하게 짜여진 디지털 암호문에 불과하다. 컴퓨터 자원을 소모하고 저장 용량을 차지할 뿐이다. 유의미한 사용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사용가치는 없고 교환가치만 있다. 내가 구입한 것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은 가격으로 사줄 것이라는, 그래서 ‘돈 복사기’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그 기대만이 남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참여자가 거래 대상의 내적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장, ‘폭탄 떠넘기기’를 꿈꾸고 있는 시장을 일반적으로 ‘투기 시장’이라고 부른다. 암호 화폐 시장은 투기 시장이다.

문제는 왜 투기판에 20대와 30대가 대거 뛰어들고 있느냐일 것이다. 암호 화폐를 거래하는 젊은 층이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유심히 살펴보면 ‘졸업’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돈을 벌 만큼 벌거나 다 잃어서 판에서 나간다는 뜻이다. 좋은 의미에서 ‘졸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을 한다. ‘집 샀습니다! 성투(성공한 투자) 하세요!’

문재인 정권을 향해 묻고 싶다.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것이 왜 나쁜가. 적어도 집은 실체가 있는 물건이다. 대출을 못 갚으면 집을 팔면 된다. 가격이 떨어져도 그냥 그 집에서 살면 그만이다. 사용가치가 있는 재화라는 뜻이다. 반면 암호 화폐는 사용가치가 0으로 수렴한다. 집을 사는 것은 투자일 수도 있고 투기일 수도 있지만, 암호 화폐를 사는 것은 100% 투기다.

내 집 한 채 마련하여 빚을 갚으며 천천히 자산을 키워나가는 정상적인 경로를 끊어버리니 온 나라가 투전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책 실패다. 그러면서도 암호 화폐에 대한 과세 유예 카드를 만지고 있다. 이제는 부동산으로 세금 폭탄 맞는 사람들과 암호 화폐 투자자들을 ‘갈라치기’할 셈인가.

미다스왕은 아들과 딸이 황금으로 변한 후에야 자신이 걸린 저주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가 원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을 얻기 위해 가장 위험한 도박에 뛰어드는 모순적인 광란. 그것을 진정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문재인 정권에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4-17

참사 7년… 진실은 사라지고 음모와 선동만 난무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세월호 참사가 남긴 숙제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에 왕과 아내가 살았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신탁이 있었지만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고심 끝에 아기를 죽이기로 하고 발에 꼬챙이를 꿰어 산에 버렸지만, 아이는 구조돼 성인이 되었다. 그러고는 델포이 신전에 찾아가 물었다. ‘신이여, 저는 누구입니까?’ 신은 엉뚱하고도 끔찍한 소리를 했다.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네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예언은 결국 이루어진다.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오이디푸스 신화의 내용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도 친숙했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테네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네 자녀를 낳고 모든 이의 존경을 받던 오이디푸스가 본인의 정체를 파헤치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몰락하는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일종의 추리물로 구성했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있다. 전 국왕을 시해한 범인이 테베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직 왕인 오이디푸스는 범인을 수배한다. 그러자 어떤 현자가 나타나 그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반박하고 새로운 증인을 불러오는 가운데 오이디푸스가 평생 궁금해하던 스스로의 정체가 드러난다. 국왕을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범인은… 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예 비평이라 할 수 있는 <시학>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모범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대단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신분이 높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운(티케, tyche)에 휩쓸리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결함이나 실수 등을 뜻하는 과실(하마르티아, hamartia)로 인해 행복에서 불행으로 굴러떨어지는 완결성 있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는 나약한 존재다. 알건 모르건 스스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질 낮은 비극은 그런 인간적 조건을 망각하게 만들어, 관객의 영혼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쉽게 욕할 수 있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주인공을 세워놓고 뻔한 권선징악극을 만드는 것은 미적·윤리적으로 가치가 없는 일이다.

반면 좋은 비극은 어떨까. <오이디푸스 왕>을 보던 그리스의 관객 중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이들은 감동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겪는 일처럼 두려움에 떨고 전율하고 비탄에 빠지고 헤어나오면서 ‘영혼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만취 후 구토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술과 음식을 게워내고 나면 평정을 되찾고 건강한 몸을 회복한다. 비극을 보며 통곡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영혼이 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의미다. 요즘 흔히 말하는 ‘사이다’와는 전혀 다르다.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악한 자가 벌받는 이야기로는 부족하다. 인간적 한계와 모순을 지닌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하는 이야기야말로 비극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7년 전, 어제. 바다가 304명의 목숨을 삼켰다. 그중 250명은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 학생이었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참담한 이 사건에서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불법 개조로 무게 중심이 턱없이 높아진 낡은 배. 조타 장치의 일부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장으로 인해 우현 37도로 돌아가 고정되어버린 방향타. 엉성하게 묶여 배가 기울면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과적 화물. 승객을 구조하지도 갑판 위로 유도하지도 않은 채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

가장 나쁜 우연과 있어서는 안 되었을 과오가 겹쳤다. 온 국민의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사건에 대한 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필요했다. 더 중요한 건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카타르시스, 영혼의 정화에 도달했어야 했다.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해경 해체를 발표하자, 일부 국민 사이에 청와대가 ‘꼬리 자르기’를 한다는 의혹이 퍼져나갔고, 김어준으로 대표되는 음모론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폭침설, 좌초설, 심지어 미군 핵 잠수함과의 충돌설 등 온갖 황당무계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과정에는 수수께끼가 없다. 통상적인 선박 전문가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원인으로 벌어진 사고였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에서 인양한 선체를 분석해본 결과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착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됐지만 어떤 이유로 공식적인 발표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진실’은 인양되었다.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따름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따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체 왜 팽목항 분향소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고 쓴 것일까? 나는 어떤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향해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왜 생기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다.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이디푸스 왕>은 진실 때문에 파괴되는 한 인간을 다룬 비극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한 인간을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탐정처럼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며, 그게 본인임을 깨달은 후,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를 응징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진실을 향한 끝없는 의지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면 진정한 비극만이 선사하는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세월호 사망자의 명복을 빈다. 유족과 부상자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 비극을 비극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정화된 영혼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4-03

강남좌파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길, 4·7선거에 달렸다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헝거게임’을 통해 본 ‘참여연대 권력’의 시작과 끝

일러스트=안병현
 

어느 날 크나 큰 재앙이 닥친 후 북미 대륙은 수도인 ‘캐피톨’과 13개 구역으로 이루어진 판엠이라는 국가로 재편되었다. 오래전 반란을 일으켰던 13구역은 초토화되었고, 나머지 12개 구역은 오직 캐피톨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16세의 소녀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은 그중 가장 가난한 12구역에 살고 있다.

판엠에는 74년째 이상한 제도가 운영 중이다. ‘반란을 속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캐피톨을 제외한 전국 12개 구역에서 매년 12세부터 18세까지 남녀 한 쌍을 추첨해, 총 24명의 청소년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선수 추첨부터 단 한 사람의 승자가 살아남을 때까지 벌이는 살육전의 이름은 ‘헝거 게임’. 캣니스는 동생을 대신하여 헝거 게임에 자원한다.

헝거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24명중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 캣니스처럼 가난한 구역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모든 판엠 주민들은 원치 않아도 시청해야 한다. 자기네 구역 출신의 누군가가 이기라고 응원하고, 열광하고, 실망하면서. 가장 잔인하게 고안된 ‘빵과 서커스’인 셈이다.

대체 왜 이런 잔인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하는 걸까? 판엠의 독재자인 스노우 대통령은 설명한다. “겁주는 게 목적이면 24명을 모아놓고 몰살하는 게 낫잖아?” 헝거 게임의 목적은 공포가 아닌 희망이다. “두려움보다 강한 유일한 것이지. 단, 그것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가두어 둬야 해.”

미국 작가 수잰 콜린스의 소설 <헝거 게임>의 설정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또한 4부작으로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둔 바 있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맞서는 시위대가 영화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미얀마 국민들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며, 이 지면에서는 좀 더 깊은 논의를 해보도록 하자. 스노우 대통령이 말한 ‘헝거 게임’의 내용과 목적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의 작동 과정을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맞서 싸웠던 사람이다. 당시 많은 이는 자본주의와 불평등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정권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하는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 때로는 도리어 옹호하는가?

그람시는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와 그 밖의 ‘시민사회’를 구분했다. 시민사회는 교회, 언론, 학교, 지역 공동체 등 다양한 제도 및 삶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배계급은 국가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통해서도 지배한다. 심지어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게모니’다.

가령 무솔리니 정권에 불만이 있는 한 공장 노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잠재적 혁명분자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매주 성당에서 신부의 강론을 들으며 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국가’의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교회’의 설교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그중에서도 종교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희망을 주는 헝거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평생 자신이 태어난 구역에서 착취당하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젊은이에게 헝거 게임은 ‘인생 역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각 구역 출신 우승자가 ‘멘토’가 되어 출전자를 지도하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갖춰져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서 24명의 젊은이가 잘못된 체제와 싸우는 대신 자기들끼리 덫을 놓고 칼로 찌르며 화살을 쏜다. 판엠의 헤게모니는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다시 그람시로 돌아와 보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은 어지간해서는 혁명에 동참하지 않는다. 한 번에 세상을 뒤엎는 ‘기동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득하게 사람들 틈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때를 노리는 ‘진지전’을 펼쳐야 한다. 대중을 천천히 견인해나가는 전략이다.

헤게모니론과 기동전, 진지전은 한국의 운동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주사파 등 혁명을 꿈꾸던 세력과 달리 시민운동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쪽을 택한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김창엽, 성낙돈 교수의 논문 “헤게모니론 관점에서 본 시민단체 시민교육의 성격: 참여연대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시피, 참여연대는 그 ‘진지전’의 핵심 거점이었다.

참여연대는 조국이 주도한 사법 개혁 운동, 장하성의 소액 주주 운동, ‘재벌 저격수’ 김상조의 재벌 개혁 운동, 박원순이 이끈 부패 정치인 낙천 낙선 운동 등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피지배층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만한 권위를 축적한 것이다. 결국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참여연대는 문재인 정권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실세 집단으로 등극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 대한민국은 내로남불 부동산 천국이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은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면서 빚을 내 주식과 가상 화폐 투전판에 뛰어들고 있다. 근로소득만으로는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캐피톨’ 강남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온 나라를 헝거 게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캣니스는 헝거 게임에서 우승한다. 우승자로서 얻게 된 인기와 영향력을 바탕으로 혁명군에 동참하여 판엠의 헤게모니를 파괴한다. <헝거 게임>은 한 청년이 ‘진지전’을 벌여왔던 혁명군과 힘을 합쳐 ‘기동전’을 통해 잘못된 체제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교육, 언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는 저들 손에 넘어간 상태다. 자발적인 복종 상태에 빠진 이들은 여전히 단단한 결속력을 과시한다. 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강남좌파의 헤게모니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응징의 화살로 헝거 게임을 끝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3-20

나무 심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뭉개버리네… 이것이 ‘국토 농단’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LH사태로 본 ‘공유지의 비극'

1913년, ‘나’는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알프스 산맥 속을 걷고 있었다. 라벤더만 듬성듬성 핀 삭막한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수통에는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 흔적은 있었지만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절망감이 커져갈 즈음 늙은 양치기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던 고독한 양치기는 식사 후 테이블에 앉아 도토리를 쏟아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는 좋은 도토리를 자루째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들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뚫고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그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부피에는 진심으로 그 일에 매진했다. 어린 가지와 잎사귀를 뜯어 먹어 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자 양을 팔아버리고 대신 벌을 치기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 산을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그 수십 년 동안 부피에는 꿋꿋하게 나무를 심었다. 숲이 자리를 잡자 말라붙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고 곤충과 동물이 찾아오면서 결국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1953년 작 <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이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이 1987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가 세계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을 푸른 숲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실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장 지오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오늘날 정치학, 경제학, 사회철학 등의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숲, 어장, 혹은 깨끗한 공기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자원을 떠올려보자. 내가 먼저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남이 잡는다. 어부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그런데 그 어장을 개인이나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와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이가 경쟁적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공유지는 망가지고 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 주민들은 숯을 구워 도시에 팔았다.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적으로 나무를 베었다. 화자인 ‘나’는 숲의 파괴에 대해 부피에와 대화를 나눈다. “난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공유지거나, 주인이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있는 땅 같다고 했다.”

부피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땅을 되살리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 조용한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숲이 저절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에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33년 산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1935년에는 정부 조사단이 숯 굽는 일을 금지했다. ‘나’는 감탄한다. “숲은 국회의원들에게조차도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 공동체의 힘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마저도 국가의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법 집행의 영향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건 결국 국가 몫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속 프랑스 정부가 되살아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고위 공직자들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허겁지겁 매입했다. 더 많은 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값비싼 묘목을 빽빽하게 심었다. 나무가 자라기는커녕 다 말라 죽어버릴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뽑아버리기 위해 심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검찰 개혁이니 검수완박이니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검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체 조사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여당은 공허한 특검 논의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소유권과 올바른 공권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는 법.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면서 ‘영농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땅에 농사를 짓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든가 해야 한다. 교양과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불법이 아니어도 하지 않을 일을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모는가. 누가 누구를 청산한단 말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영웅의 조용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들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 이후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늘리겠다며 산을 깎고 나무를 뽑아왔다. 농지 구입을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을 향해 ‘좀스럽다’고 쏘아붙였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뽑는 사람’인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일으킨 알프스의 화전민처럼,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정부 고위층은 경쟁적으로 게걸스럽게 땅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국토 농단’이다. 알프스의 숲이 저절로 살아나지 않았듯 부패한 권력이 알아서 반성하는 일은 없다. 우리 스스로 정치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건강한 도토리를 심어 나가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3-06

‘백신 진수성찬’이라며 정권이 내놓은 밥상은 텅 비어 있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백신 상상놀이’ 빠진 文 정권에 피터 팬이 말했다 “놀고 있네”

/일러스트=안병현
 

마흔 살의 M&A 변호사 피터 배닝(로빈 윌리엄스 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른 시점에 뜻밖의 일을 겪는다. 런던에서 아들과 딸이 납치당한 것이다. 고아였던 그를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준 웬디 할머니의 집 안 곳곳은 갈고리로 긁은 흔적이 가득하고, 벽에는 협박 편지가 칼로 꽂혀 있다. ‘피터 팬, 네 아이들을 찾고 싶다면 네버랜드로 와라.’

네버랜드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식기만 가득하다.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팅커벨이 규칙을 설명해준다. ‘상상해 봐, 그럼 진짜로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은 피터가 없는 동안 리더가 된 루피오의 지시에 따라 기도를 하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하지만 여전히 그릇은 비어 있다. 피터의 상상은 달랐다. 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루피오의 얼굴에 날리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짠! 루피오는 크림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통해 피터는 어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매슈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을 원작으로 삼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1년 작 ‘후크'의 한 장면이다. 루피오에게 상상의 크림을 던질 때 피터는 더 이상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변호사 피터 배닝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놀이는 모든 문화의 근간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를 펼쳐볼 때다.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엄마 할게, 네가 아빠 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다. 스스로 역할과 규칙을 정한다.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꿉놀이가 끝나거나 놀이방을 나가면 나는 엄마가 아니고 너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소꿉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하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다. 자유로운 규칙, 시공간의 한계, 진지한 몰입. 놀이를 만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인류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놀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 하는 ‘모방유희’, 서로 견주고 다투는 ‘경쟁유희’가 그것이다. 모방유희는 종교,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경쟁유희는 전쟁, 스포츠, 법률, 심지어 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토대에는 소피스트들의 말싸움과 언어유희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문화 산업의 발전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은 막대한 규모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수입은 어지간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대표적 K팝 그룹은 수출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피터 팬이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면 텅 빈 테이블에 음식이 생기듯, 말 그대로 ‘상상력이 밥 먹여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의 놀이, 혹은 마법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매직 서클’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분야는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영역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 백신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화이자 백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부족해 우리는 2월 25일까지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졸지에 이란, 이집트, 터키, 브루나이,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민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듯하자 갑자기 ‘K주사기’ 타령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최소 잔여형 주사기’를 이용하면 6인용 백신을 7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는 “대박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치약이 없어서 이빨을 못 닦는 집구석에 치약 짜주는 도구가 많다고 기뻐하는 꼴이었다. 옆 반 애들은 피자를 각자 두 조각씩 먹는데, 문재인 반장은 달랑 피자 한 판 사다놓고 잘 쪼개면 여섯 조각을 일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2월 3일에는 백신 유통 모의 훈련을 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행사를 하고 보도 자료를 뿌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23일에는 백신접종센터 대테러 훈련도 있었다. 이미 세계 백여 국가에 백신이 유통되고 있다. 테러범도 그런 걸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통령이나 총리, 여왕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았다. 비과학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갔다. 대통령이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백신 접종을 ‘참관’하러 간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대통령이 ‘안티백서(Anti-Vaxxer, 백신 음모론자)’인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K방역’은 이렇게 끝났다.

문재인 정권은 백신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의 백신 부족을 상상력으로, 그것도 식상해진 ‘탁현민 쇼’로 때우고 있다. 국민은 피터 팬이 돌아오지 않은 네버랜드에서 억지로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는 시늉을 하던 어린이들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백신이 넉넉하게 올라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루피오는 ‘기도하고 밥을 먹는’ 상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재미가 없었고 밥그릇은 텅텅 비어 있었다. 피터가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자 그제야 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가득 찼다. 정치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예술’이 된다. 청와대의 ‘호모 루덴스’들을 향해 ‘놀고 있네’라며 통쾌하게 한 방 날려줄 피터 팬을 기다린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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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직업윤리 저버린 권력자들로 ‘대한민국號’가 위태롭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美 조종사 설리가 보여준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체슬리 설렌버거, 일명 캡틴 ‘설리’. 40년 경력을 자랑하는 조종사다. 이 남자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두 엔진을 모두 잃고도 희생자 단 한 명도 없이 완벽한 비상착륙을 해낸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2009년 1월 15일 뉴욕에서 있었던 실화다. US 에어웨이스 1549편이 이륙 직후 새 떼에 부딪혀 동력을 잃었지만 허드슨강에 무사히 착륙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혹한에 일부 승객이 강물에 빠졌지만 전원 무사 구조되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 155명이 생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이렇게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설리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설리에게는 승객을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다. 직업윤리의 영웅이다. 반면 NTSB는 사고 원인과 전개 과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언론이 설리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고 해서 그를 검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승객 전원을 무사히 보호해낸 설리는 이제 NTSB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경력을 지켜야 한다. 두 직업윤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청문회에 불려나온 캡틴 설리(톰 행크스·왼쪽)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펼쳐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르네상스 시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였던 야코프 푸거 등은 수많은 조언을 남겼다. 정직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절제해야 하고, 이웃이 믿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뢰받는 상인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돈을 뭐 하려고 벌까? 이들은 ‘적당히 벌었으니 사치스럽게 놀고 먹자’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았다. 죽는 그날까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류 공통이지만, 경건한 태도로 돈벌이에 임하는 것은 오직 서구의 근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일이란 윤리의 최고선(summum bonum)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베버는 그런 사고방식을 자본주의 정신, 혹은 직업윤리라고 불렀다.

근대 이전까지는 직업으로 사람의 귀천을 나누었다. 동서양 모두가 그랬다. 조선이 사농공상 논리로 작동했다면 서양의 중세는 성직자와 기사 계급이 상공업자와 농민들을 착취하며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 뒤집혔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사람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직업윤리의 요체다.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일이건 성심성의껏 해나가야 한다는 것. 이는 곧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말과도 같다. 직업윤리는 자본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직업윤리라는 개념이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5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동훈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인터뷰 때문이다. 특수통 검사 한동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정권을 겨냥한 소위 ‘적폐 청산’ 수사의 일선에 섰고 ‘꽃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조국 일가를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과 맞섰고 세 차례에 걸친 좌천성 인사를 감내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눈 딱 감고 조국 수사를 안 했다면 계속 승승장구했을 텐데 왜 사서 고생할까? 한동훈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냥 할 일이니까 한 겁니다. 직업윤리죠.”

한동훈과 그의 상관인 윤석열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리한 수사를 해왔다는 비판도 있다.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법원 몫이다. 마치 설리를 철저하게 검증하던 영화 속 NTSB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직업윤리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장은 한 사람의 판사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삼권분립은 그의 직업적 소명의 핵심이다. 판사들이 정치적 외압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러한 본분을 다하기는커녕, 정치권에서 탄핵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법원장을, 국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공적 차원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판사로서도 실격이다. 사퇴해야 마땅하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의 기원을 개신교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자체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현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바탕에 소명 의식과 직업윤리를 도입한 것은 개신교 문화권의 서구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체 왜 “사람에게서 돈을 짜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가 가르쳐준 성경 구절을 통해 대답한다. “네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서리라.”

이러한 서구 개신교 중심적 설명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논쟁만 따로 떼어내도 별개 학문이 성립할 지경이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 기원이 어찌 됐건 직업윤리는 ‘우리의 윤리’다. 2021년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직업윤리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캡틴 설리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NTSB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기장을 다독여준다. ‘그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US 에어웨이스 1549편의 이륙에서 착륙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8초. 캡틴 설리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이 155명을 구했다. 5000만명이 탑승한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경건한 태도로 상공업에 힘쓰는 대신 권력을 이용해 한탕 하려는 자들, 근대적 직업윤리를 파괴하고 전근대적 사농공상 체제로 퇴행하려는 자들이 조종간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1-30

입양아는 세상에 가장 아프게 던져진 존재… 대통령은 왜 사과하지 않나

 [노정태의 시사哲-아무튼, 주말] 하이데거와 김국환의 ‘타타타’
일러스트=안병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 없지.”

온 국민이 다 아는 그 노래, ‘타타타’의 첫 소절이다.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1991년 첫선을 보인 이 노래는 같은 해 11월부터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통해 일약 국민 애창곡으로 거듭났다.

‘타타타’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에서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 이찬원이 받은 신청곡 또한 ‘타타타’였다. 그 노래를 신청한 건 대구에 사는 23세의 여성 김모씨. 1991년에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타타타’를 신청하고 불렀다. 그만큼 진한 감동과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가락과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타타타(Tathātā)’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여(如如)’라고 의역됐다. 사물도, 인생도, 있는 그대로 그러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다는 뜻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3분 남짓한 노래에 담아낸 셈이다.

그 노랫말을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짚어볼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독일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그와 짝을 이루는 기투성(企投性, Antworfenheit)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당할 피 자에 던질 투 자를 합쳐 만든 번역어다. 말 그대로 ‘던져짐 당했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기투성’은 꾀할 기 자에 던질 투 자를 쓴다. 무언가를 어딘가로 던진다는 뜻이다. 요즘은 어려운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던져짐’과 ‘던짐’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세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기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은 합리적인 과학과 이성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굴러다니는 저 돌멩이처럼 ‘그냥’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고대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왕자로 태어난 부처도, 가난한 성당 종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을 공부한 하이데거도, 1948년 미군정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김국환과 수많은 한국인들 모두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 던져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태어나 있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 정신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는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의 지혜와 서구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이렇듯 뜻밖의 조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아동 학대를 겪었고 사망한 아이의 사건으로 애통해하는 국민 앞에서, 대통령은 마치 입양이 사건의 원인인 양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을 대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와 여당이 나섰다. 문 대통령은 사전위탁보호제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언론과 야당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 문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이미 4년 전에 법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사안이다. “임시인도 결정 후 입양 아동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양하지 않는 등 소위 ‘아동 쇼핑’을 조장할 수 있다. 입양 아동에게는 큰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던 법무부의 당시 입장을 보면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만 같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전위탁보호제가 시행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당 및 일부 지지자들도 더러 보인다. 전문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동방사회복지회 전 입양사업부장으로 37년간 근무한 김혜경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입양할 때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선택조차 못 하게 한다. 성별도 못 고르는데 성격이 안 맞는다고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회 복지 정책 차원에서 실로 끔찍한 소리였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황당하고 난폭한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다. 왕자로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고통과 근심을 몰랐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택한 이유다. 스스로가 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통령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입양아와 입양 부모를 향해 사과하지 않는가. 세상을 향해 내던져진 것은 우리의 존재로 충분하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던지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본인을 청와대 밖으로 내던질 날만 고대하는 국민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문 대통령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답답한 마음, 다시 ‘타타타’를 듣는다.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그렇다.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졌지만, 어쩔 수 없다. 불안과 근심 모두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필연에서 우연으로의 전환. 미지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꺼이 던지는 것.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 혹은 ‘던짐’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입양아는 그중에서도 아프게 던져진 아이들이다. 입양 부모들은 마치 야구선수처럼 스스로의 몸을 던진다. 아이들을 받아내어 가정의 품에 안고 키워서 사회를 향해 송구한다.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입양 가정을 향한 지지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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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6

포퓰리스트의 공통점, 경제에 무능하다

 [아무튼, 주말_노정태의 시사哲] 미 의사당 공격과 ‘지정생존자’
일러스트= 안병현
미국의 연방 의회, 일명 ‘캐피털 힐’. 대통령이 신년 국정 연설 중이다. 대통령, 부통령, 상·하원 의원과 대법관까지 모두 한곳에 모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이 전부 죽는다면 미국은 송두리째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미국은 1947년 이래 ‘지정 생존자’를 두고 있다. 대통령 유고 시 승계 권한을 갖는 사람 중 적어도 한 명은 별도 장소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도록 규정을 만들어 둔 것이다. 지정 생존자는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고 국가 기능을 회복해야 할 책임을 진다.

2016년 9월 처음 방영한 미국 드라마 <지정 생존자>는 바로 그 제도 위에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이다.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은 정치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자 학자다. 대통령이 발탁하여 워싱턴 DC에 발을 들였지만 아무도 그를 진지한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평범한 남자가 하루아침에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정체불명 집단이 저지른 폭탄 테러로 미 의사당이 무너졌고, 입법 행정 사법의 3부 요인이 거의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최악 상황에서 대통령이 된 커크먼은 테러 음모를 밝혀내고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때로는 현실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일까.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이 공격당했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시위대가 범인이었다. 트럼프는 백악관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포기도, 승복도 절대 없다”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의회로 가서 항의하라”고 연설했다.

그에 고무된 시위대는 의사당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상하원 합동 회의를 거쳐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확정하는 대선의 마지막 절차를 힘으로 방해하려 든 것이다. 그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계단을 올라 창문을 깨고 건물로 난입해, 기물을 훔치고 파손하면서 셀카를 찍고 자신들의 행동을 인터넷에 생중계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네 명,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시각으로 1월 7일 새벽.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나는 CNN을 통해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문득 <지정 생존자>를 떠올렸다. 워싱턴 DC의 엘리트들을 폭탄으로 한 방에 다 죽여버리고 시작하는 이야기. 엉겁결에 대통령이 된 평범한 남자가 잿더미 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이야기. 그것은 당시 미국에 들끓고 있던 포퓰리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당선 후 포퓰리즘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독일 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 이론과 정치 사상사를 강의하는 얀 베르너 뮐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정치인은 자신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만' 진정한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우리’를 위협하는 불순물, 침입자, ‘토착 왜구’다. 포퓰리스트는 그런 ‘비국민’을 적발하고, 징벌하고, 쫓아내 ‘순수한 국민’을 회복하는 숭고한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뮐러는 트럼프의 선거 유세 중 이 대목을 주목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국민 통합이다. 기타 인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색인종, 이민자,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 집단을 향해 쏟아낸 온갖 비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 백인을 제외한 모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며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가르는 나쁜 정치.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타락한 민주주의, 포퓰리즘.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현 정권이 집권 후 보여주고 있는 거의 모든 행보가 포퓰리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는 자신만이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라 주장하며 권력을 잡은 후에도 피해자 행세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 역시 마찬가지다. 180석을 가진 후에도 야당을 탓하고, 언론을 탓한다. 엘리트 세력이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국민의 적’으로 몰아간다. ‘검찰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시도한 검찰 장악이 대표 사례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도 포퓰리즘 세력은 그렇게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렸다.

세상은 착한 국민과 나쁜 엘리트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이해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현실 문제, 특히 경제 문제 앞에서 무능하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은 물가가 살인적으로 치솟자 병사들을 상점에 보내 상품에 낮은 가격표를 붙이게 했다. 인플레이션은 ‘부르주아 기생충’ 때문이니 대통령이 가격을 낮추면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값 폭등은 정권의 무능이 아니라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문재인 정권과 너무도 닮은 모습 아닌가.

포퓰리즘은 때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엘리트 중심 사회가 간과하거나 억누르는 대중적 열망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도 그랬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실물 경제는 박살이 났는데 월가에서는 성과급 잔치를 벌이며 ‘그들만의 호황’을 즐겼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속 시원한 개혁을 하지도 못한 채 임기 8년을 흘려보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선거운동을 하던 당시 <지정 생존자>가 폭발적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법. 트럼프라는 폭탄은 미국 정치를 ‘리셋’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진 건 공화당이었다.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선거 결과를 곱씹을 틈도 없이, 현직 대통령이 고무한 군중이 의회를 급습하는 초유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미국을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아닌 반면교사로 볼 날이 올 줄이야.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타락한 민주주의인 포퓰리즘을 건강한 민주주의로 이겨내는, 그런 2021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0-12-26

[시사철]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 12. 26. 03:10 수정 2020. 12. 27. 10:45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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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시사철] 공수처는 '절대반지'.. 권력자 善意 믿지 말고 반지를 파괴해야

 

[노정태의 시사哲] 공수처는 '절대반지'.. 권력자 善意 믿지 말고 반지를 파괴해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 12. 12. 03:11 수정 2020. 12. 13. 10:30
[아무튼, 주말] '반지의 제왕'과 공수처
일러스트=안병현

어린아이 정도의 키에 맨발로 돌아다니는 소박하고 낙천적인 소인(小人)족 호빗. 그중 빌보 배긴스라는 호빗이 있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는 그는 본인의 111세 생일잔칫날 홀연히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하여 조카이자 양아들인 프로도가 절대반지(The One Ring)를 유물로 얻게 되었다.

빌보의 오랜 친구인 마법사 간달프가 프로도에게 사정을 설명해준다. 절대반지는 타락한 신적 존재 사우론이 아주 오랜 옛날 만들어낸 물건이다. 요정들의 왕이 가진 세 반지, 난쟁이 군주들의 일곱 반지, 인간의 왕들이 지닌 아홉 반지. 그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찾아내며 불러내는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단 하나의 반지가 바로 절대반지다. 절대반지를 끼면 남에게 보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고, 자신이 꿈꾸던 것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반지에 영혼을 잠식당하고 마는 것이다.

악의 화신 사우론은 먼 옛날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절대반지를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절대반지를 손에 넣는다면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과 혼란 속으로 빨려들 것이다.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면 사우론의 본거지인 운명의 산으로 찾아가 용암 속에 반지를 던져버려야 한다. 프로도와 일행은 멀고 험한 여정에 오르고, 사우론뿐 아니라 오래전 반지를 가지고 있다가 타락해버린 골룸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반지의 제왕’은 전 세계인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야기다. 그야말로 ‘현대의 신화’인 셈이다. 그것은 단지 3부작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J. R. R. 톨킨의 원작이 지니고 있는 압도적인 세계관 및 진지하고도 보편적인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반지의 기원을 플라톤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리비아에 기게스라는 목동이 살았다. 어느 날 특이한 반지를 얻었는데, 보석받이를 자신의 손바닥 쪽으로 돌리자 본인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보석받이를 손등 쪽으로 돌리면 다시 몸이 보인다. 투명인간이 되는 힘을 갖게 된 기게스는 왕궁에 숨어들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살해한 다음 왕국을 장악했다. 그 유명한 ‘기게스의 반지’ 설화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글라우콘은 스승에게 묻는다. 이렇듯 누군가 남에게 들통나지 않고 어떤 짓이건 멋대로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기게스처럼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습니까? 글라우콘은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눈이 있어야 인간은 선한 행동을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설령 이득이 된다 한들 악한 행동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글라우콘의 입장을 윤리적 가치의 외재설(外在說)로,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내재설(內在說)로 불러볼 수 있겠다.

두 입장에는 장단점이 있다. 윤리적 가치의 내재설부터 생각해보자. 가령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에 반기를 들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목사가 살인 모의를 한다는 모순을 논외로 하더라도,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지지하거나 묵인했으니,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윤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본회퍼를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내재설은 타인의 반대를 뚫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때로 큰 힘이 되어준다. 개인을 위한 윤리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외재설은 사회적 관점에서 유익하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초기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윤리적 가치의 외재설을 따랐다.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분리하고, 언론을 통해 외부에서 감시하며, 범죄의 수사·기소·재판 또한 최대한 공개하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해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고 통제받지 않으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기게스처럼 타락할 수 있으니, 권력자의 선의를 믿는 대신 기게스의 반지를 없애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2020년의 대한민국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다. 공수처라는 절대반지를 기어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가 공직자 부패 사건을 모든 수사기관에서 자동으로 가져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공수처장으로 만들면 현 정권에서 벌어진 모든 권력형 비리를 서랍 속에 넣고 묵힐 수 있다. 공직자 부패 사건을 드러내고 처벌한다는 본래 취지와 정반대로, 부패 비리 집권 세력의 손에 기게스의 반지를 끼워주는 셈이다.

법원을 수사 대상으로 삼는 것 또한 문제적이다. 판사도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설령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헌법에 정해진 제도와 절차를 통해 수사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 헌법에 근거가 없는 공수처는 판사들로 하여금 여차하면 먼지털이식 별건 수사를 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폴란드는 ‘정치 활동 금지’라는 명목하에 판사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고 EU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법을 내놓고 입법 폭거를 저지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왜 이렇게까지 공수처를 추진해야 하는 걸까. 최재형 감사원장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월성 1호기 폐쇄 감사 보고서를 써내려갔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그 내용에 기반하여 수사를 진행 중이다. 저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윤석열 죽이기 법, 최재형 재갈 물리기 법을 만들려고 드는 이유가 뭘까.

공수처는 절대반지다. 권력자의 부패 범죄를 안 보이게 만든다. 권력자는 모든 고위 공직자와 법조인을 억누를 수 있다. 이런 반헌법적 통치 기구는 일단 만들어지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권력자가 이렇게 좋은 걸 포기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자들도 그랬다. 반지의 악에 영혼이 잠식당하고 말았다. 맥락도 논리도 없이 ‘검찰 개혁’만 외치는 여당을 보면 ‘마이 프레셔스’라고 중얼대는 골룸을 보는 것만 같다.

인간, 요정, 난쟁이들은 절대반지의 유혹을 견뎌낼 수 없었다. 결국 절대반지를 파괴하고 세상을 구해낸 건 보잘것없는 호빗들이었다. 공수처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탈환하고야 말 것이다. 지금은 21세기 헌정사의 가장 어두운 밤.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며 용기를 얻는다.

2020-11-28

[노정태의 시사哲]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8. 03:08 수정 2020.11.29. 17:02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윤리철학 최신 담론 '능력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린 닐텝. 가난하지만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태국 소녀다. 목표는 해외 유학. 아버지가 그 학비까지 대줄 수는 없지만 상관없다. 장학금을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학 첫날부터 친해진 단짝 친구에게 호의로 커닝을 시켜줬다가 점점 판이 커졌고, 결국 걸렸다. 가까스로 퇴학은 면했지만 장학금은 받을 수 없다.

내 유학비 내가 벌겠다는 마음으로 린은 커닝 비즈니스를 더 키우기로 한다.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하는 금수저 수험생들이 고객이다. 미국 대학 입시에 필요한 STIC라는 시험은 전 세계에서 같은 날 치르는데, 그러니 태국보다 시간이 앞선 호주에 가서 먼저 문제를 풀고 답을 알려주는 계획을 세웠다. 린은 또 다른 천재 소년 뱅크와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2017년 개봉한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의 내용이다.

‘배드 지니어스’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범죄 영화, 즉 ‘케이퍼 무비’에 시험이라는 요소를 절묘하게 섞었기 때문이다. 보석 대신 정답을 훔치는 천재 소녀 린의 활약을 보며, 우리는 문득 능력주의(meritocracy)의 허와 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라는 소설을 썼다. 어느 날 혁명을 통해 신분이나 재산이 아닌 능력에 의해서만 사람을 평가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그럴까? 시험을 통한 능력 평가는 안정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계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엘리트는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지능이 높은 아이를 낳아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 온갖 제도 역시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대학교 학벌 같은 ‘능력 인증’을 받고 나면 다시는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는 더 나쁜 신분제가 되는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이 목격하는 부잣집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머리가 나쁘지만 돈 많은 집 자식들은 기부금을 내고 명문 사립고에 들어간다. 머리 좋은 누군가를 시켜 커닝까지 한다. ‘보스턴에 있는 대학교’ 간판을 따기만 하면 아무도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능력주의 문제는 현실이다.

2017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가 ’20대 80의 사회'(Dream Hoarders)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 지성계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뒤이어 나온 예일대 로스쿨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 하버드 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정치, 윤리철학의 최신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으로 인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미국의 리버럴은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게 문제이며, 자신들처럼 능력 있는 중상층 엘리트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위 20%가 나머지 80%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능력주의 비판은 미국 지성계의 자기반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능력주의 비판을 수입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퍽 이상하다. 미국에서는 기성 엘리트가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중장년 진보 엘리트는 청년들을 향해 ‘네 탓이오’라며 손가락질하는 분위기랄까. 20대와 30대 사이에서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 대항마로 능력주의 비판을 끌어들인다. 인천국제공항 사태, 공공의대 논란 등에서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정충’ 같은 모멸적 딱지를 붙이고는,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이다.

그런 비판은 학력고사 봐서 대학 간 다음 데모 좀 하더니 정치권의 주류가 된 586 기득권층에 돌아가야 한다.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입시 제도에 비해 부모의 정보력, 인맥, 문화적 자산 등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 1980년대의 한국이 202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나라였다면 지금 586세대 상당수는 대학 문턱을 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은 학벌과 인맥으로 평생을 먹고살면서 그들은 능력주의의 혜택을 철저하게 누린다.

그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모습은 어떤가. ‘컨설팅’을 받아야 대학 갈 수 있는 나라, 물려받은 재산 없으면 살아 생전 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라 아닌가.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사회 전체의 꿈을 긁어모아 제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 수십 번씩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집값을 못 잡는 무능력자들. 그들이 무슨 염치로 능력주의 비판을 입에 담는 걸까.

능력 중심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류를 봉건적 신분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유주의 혁명의 근간에 개인의 능력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으니 말이다. 능력 중심 시장주의는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단, 학벌을 능력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진정한 능력을 갖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특히 인적 자본 형성기, 즉 유년 시절 가정 환경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리브스는 강조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능력주의의 맹점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영화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돈 써서 커닝하고, 없는 집 자식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남 좋은 일 시켜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장감 넘치는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서글퍼진다. 그래도 시험은 공정한 조건에서 자기 실력으로 경쟁하여 평가받아야 하며, 커닝은 누가 뭐래도 나쁜 짓이다.

12월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이제는 수능 하나만 잘 봐서는 대학 가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그 기간에 집중해서 비대면 학원 수업을 받아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려온다. 올겨울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울 것 같다. 모든 수험생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2020-11-14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03:04 수정 2020.11.14. 19:17
[아무튼, 주말] 영화 '그랜 토리노'와 보수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월트 코왈스키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쇠락한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에 사는 성격 나쁜 독거노인이다. 입만 열면 인종차별적인 말과 함께 침을 뱉어댄다.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었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이사를 갔고, 이제 그의 이웃에는 베트남 근처 어딘가에서 왔다는 몽족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이웃집에는 타오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기 센 누나와 엄마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순한 녀석이다. 문제는 몽족 이민자들이 갱단을 만들어 타오를 끌어들이려 들고 말을 듣지 않자 괴롭힌다는 것이다. 몽족 갱단은 월트가 아끼는 1972년산 명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라고 타오에게 강요하다가 월트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는 사죄의 뜻으로 타오를 일꾼으로 부려먹어 달라고 부탁한다. 월트는 내키지 않지만 타오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남자로서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영화 ‘그랜 토리노’의 줄거리이다. 민주당 지지자 일색인 미국 영화계에서 드물게도 공화당 지지자인 그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잔잔한 이야기에 담아낸 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 경력을 정리해 나갔다. 1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다시 봐도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2020년 대선이 끝난 지금, 대를 이어 전승되는 가치와 보수주의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프랑스 혁명이 갓 벌어지던 무렵,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성의 빛으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차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영국 하원 의원 에드먼드 버크였다.

아직 자코뱅 일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극을 벌이기도 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이 혼돈과 비극으로 빠져들 것임을 단박에 예견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의 내용대로 사태가 흘러가면서 그는 일약 지성계의 스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보수주의의 비조(鼻祖)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제도와 관습 등을 단번에 갈아엎으려 들었다. 하지만 권력이 있다 해서 추상적 이론만으로 사회를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물려받은 삶의 방식을 신뢰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 관습, 도덕, 적절한 물질적 풍요 등이 그런 요소에 해당한다. 홉스, 로크, 루소 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회계약’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회는 실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 그리고 태어날 자와도 맺는 것이다. 국가를 하루아침에 들어엎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세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여름날의 하루살이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보수주의의 정수가 바로 여기 담겨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물려받은 유산 위에 살아가며 그것을 후대에 넘겨줄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추상적 이념을 들이밀며 세상을 단번에 통째로 들어엎을 권리가 없다. 지금보다 한 발 나아진 세상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다.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 고인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주의다.

바이든이 이기고 트럼프가 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트럼프가 보수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우롱하고 능멸하는 모습에 ‘스윙 스테이트’의 부동층이 등을 돌린 것이다.

미국은 군대가 문민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대신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존 매케인 같은 월남전 참전 용사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파병 군인들을 ‘패배자’ ‘호구’라고 부르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잃은 자들을 우롱하기까지 했다. 매케인의 선거구인 애리조나주가 ‘레드’에서 ‘블루’로 바뀐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 관습, 도덕 같은 무형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더더욱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요구마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었다. 그저 오늘 벌어질 정치 이벤트와 쇼만 가득했다. 한번은 재미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그걸 4년 더 볼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부동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낙선은 진보의 승리라기보다 보수의 패배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랜 토리노’로 돌아가보자. 월트는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 아닌, 머나먼 이국에서 온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에게 부정(父情)을 느낀다.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평생 지켜온 남자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몽족 갱단의 괴롭힘을 당하고 사는 한 이 소년의 앞날은 어둡다. 갱단에 휩쓸리거나 희생당한다면 그가 가르친 올바른 가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폐암이 번진 늙은 몸을 이끌고 월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러 간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다. 앞으로도 이민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미국적 가치를 보수적으로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진보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그랜 토리노’에 남긴 채 할리우드에서 존경받는 유일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 경력을 마무리지었다. 2009년 초 국내 개봉한 작품이지만 지금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물려받았는가? 어떤 문화와 관습이 우리를 지탱해주는가?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보수도 성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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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입력 2020.11.18. 03:04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작 출연 영화를 ‘그랜 토리노’(2008)에서 ‘라스트 미션’(2018)으로 바로잡습니다. 또 같은 기사에서 고(故) 매케인 의원의 선거구를 인디애나주에서 애리조나주로 정정합니다.

2020-10-31

[노정태의 시사哲] '추•윤 사태' 책임 안지는 文대통령.. "겨울이 오고 있다"

 

[노정태의 시사哲] '추•윤 사태' 책임 안지는 文대통령.. "겨울이 오고 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0.31. 03:08 수정 2020.11.09. 11:27
[아무튼, 주말] '왕좌의 게임'과 윤리철학
일러스트=안병현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 대륙의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들이 사는 북방과 맞닿아 있기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서 방어한다. 그 장벽을 지키는 것은 죄수로 이루어진 밤의 경비대. 그것을 운영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윈터펠의 영주가 할 일이다. 원래 죄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므로 탈영자는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에다드 스타크는 옛 법도를 지킨다. 탈영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칼을 빼들고 목을 친다. 고귀한 영주가 왜 이런 잔인한 망나니짓을 해야 하는 걸까? 에다드는 아들 브랜에게 설명한다. “우리는 선고를 내리는 자가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그 눈을 똑바로 보고 마지막 말을 듣는 정도는 해야 해. 그것도 견디지 못할 거면, 그 누군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미국의 작가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왕좌의 게임’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HBO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다. 칼과 갑옷과 마법이 등장하고 드래건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세계관, 그들의 가치와 지향점 등에서 진지한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형수를 직접 처형하는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칸트 윤리철학 중 자유와 책임, 그리고 존엄이라는 가치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처형하면서 존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심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사형수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범죄자는 자신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법을 어긴 자’인 범죄자를 처벌할 때, 역설적이게도 사회는 그 범죄자의 자유로운 인격과 존엄을 존중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붙잡힌 안중근 의사가 ‘나를 전범으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안중근은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 의도적이었다. 처벌당할 것을 알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실행에 옮겼다. 우발적 충동이 아닌 본인의 신념에 따른 행동임을 일본의 법정에서 당당히 외쳤다. 안중근의 이 존엄한 태도 앞에 일본인들 역시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는 존재다.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자유와 책임은 하나다. 칸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응보주의’로 분류되어 비판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원인은 다양하므로 철학적 원리를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한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라는 사고방식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옳다.

자유롭지 않다면 책임질 수도 없다. 책임이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지배를 받는 사람, 혹은 법을 어기고 처벌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 역시 스스로의 판단과 행위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에다드 스타크의 말은 그런 의미다.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그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의 부담까지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치자의 자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풍경은 이와 사뭇 다르다. 법무장관은 인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며 검찰총장의 수족을 잘라내고,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퇴임 후 정치 활동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둘을 임명한 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개입하지도 중재하지도 않고 그저 방관하는 중이다.

이와 같은 행보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하며 그에 따라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는 영주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으며, 적절하게 조율해낼 수 없다면, 둘 중 한 사람을 해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재인 본인이 인사권자라면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궤적을 놓고 볼 때 문 대통령이 칼을 빼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어이 임명했던 검찰총장이 바로 윤석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윤석열을 임명해놓고 자기 손으로 해임한다면, 검찰을 정권 보위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직접 자르지는 못하고 스스로 나갈 때까지 괴롭힌다. 마치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들개를 풀어놓는 장면을 연상케 할 지경이다.

게다가 윤석열의 말에 따르면 문재인은 지난 총선 이후 윤석열에게 자리를 지켜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렇다면 지금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치를 일부러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권에는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 대신 문제를 방치하거나 부풀리는 이 아수라장은 과연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왕좌의 게임’으로 돌아가보자. 윤리적인 영주 에다드 스타크는 음모에 휩쓸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다. 평화로웠던 대륙은 일곱 가문이 뒤엉킨 전쟁에 휘말리고 동쪽의 대륙으로 망명을 간 구 왕가의 후손은 신비한 힘을 얻어 재기를 도모한다. 선한 자는 쓰러지고 악한 자들이 날뛰는 가운데 윈터펠의 후손들은 가문에 내려오는 좌우명을 되뇌며 각오를 다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

드라마와 달리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상 매체에서 온전하게 다루기 힘든 철학적 고민과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이는 걸작이다.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질 때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가 된다. 이는 사형수부터 영주까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끝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그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머잖아 오게 될 것이다.

2020-10-17

[시사철] 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요

 

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요

노정태 입력 2020.10.17. 03:04 수정 2020.11.10. 09:33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나훈아와 소크라테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1983년생인 나는 가수 나훈아가 한창 날리던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게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파티 초청을 거부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두세 곡 부르고 약 삼천만원 정도 받는 쉬운 돈벌이였지만 단호히 거부하며 이런 뜻을 밝혔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려고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대체 저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의문은 올해 추석을 하루 앞두고 풀렸다. 지난 9월 30일 KBS 2TV에서 방송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보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호랑이 같은 얼굴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이 대범한 예인(藝人)이,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격식 없이 건넨 말 덕분이었다. 아, 테스 형!

나훈아는 노래한다. “세상이 왜 이래, 사랑이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원래 이 가사는 그가 작고한 아버지의 무덤에서 떠올린 것이지만, 너무 어둡고 무거워질 것 같아서 모두가 아는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후문이 전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 주제만큼은 진작부터 그의 가슴 깊이 묻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노랫말이 되었고 온 국민의 안방에 전달되었으리라.

고대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델포이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세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중 하나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인 델포이는 예나 지금이나 험난한 곳이다.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었던 셈이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웅장한 신전에 도달하면 신의 메시지가 기다린다. 너 자신을 알라.

즉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의 원작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워낙 열심히 저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사람이 ‘땡벌’을 나훈아가 아닌 강진 노래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회상록’에서 전하는 바는 이렇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며,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미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한다. ‘카르미데스’ ‘프로타고라스’ ‘파이드로스’ ‘필레보스’ ‘법률’ ‘알키비아데스 1’. 총 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는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았다. 대화 편에 따라 언급되는 맥락과 방식이 다르다.

가령 ‘알키비아데스 1’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라는 취지에서 저 말을 인용한다. 반면 ‘파이드로스’에 담긴 맥락은 훨씬 무겁고 비장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인 튀폰을 거론하며,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튀폰보다 더 끔찍하고 사나운 짐승인지, 아니면 오만하지 않은 명(命)과 신성을 타고난 온유하고 온전한 피조물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치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처럼,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소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그 이전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인간보다 자연에 쏠려 있었다. 우주가 어떤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순환하는지, 숫자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 그들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우주를 인식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고 귀찮게 질문을 던져댔던 것이다. 자네는 참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자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 이건희의 초청을 거절하던 나훈아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나훈아는 자신이 ‘대중 예술가’, 즉 표를 사고 공연장에 온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와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혼돈에 빠지면 더 큰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없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은 평범하고도 위대한 국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런 단단한 자기 인식에서 나왔으리라. 정권 따라 팔랑거리는 얄팍한 ‘개념 연예인’이 아닌 당당한 대중 예술가 나훈아. 그는 그렇게 온 국민의 가슴에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눈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통령 문재인부터 그렇다. 지금은 대단한 권력자인 것 같지만 고작 1년여 후에는 평범한 국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임기 말년의 선출직 공무원이다. 5년 빌려 쓰는 권력을 쥐고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며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앞에 빌빌 기면서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모습 앞에 국민은 입을 모아 외칠 수밖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골칫거리였다. 권력자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망자로서 살아가느니 아테네 시민으로서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팬이나 추종자라고 스스로를 착각하는 이가 퍽 많은 이 나라의 모습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뭐라고 할까.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답답한 마음을 한 줄기 노래에 실어 보내며,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