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더>의 원작 소설을 나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옛 번역본으로 읽었다. 새로 나온 판본과 다를 게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그 책의 뒷부분을 보면 역자 소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역사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끊이지 않는 논쟁이 이어지는 역사학과 달리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법학에 매력을 느껴 법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의아했다. 독일에서는 그렇단 말인가? 법학에 명쾌한 결론이 있다고?
5월 31일,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법원은 1심 판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죄를 선고하였다. 검찰의 공소 내용이 화염병으로 인한
발화를 특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발화의 이유를 찾을 수 없으므로, 화염병으로 인해 망루에 불이 났다는 사실오인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in dubio pro reo, 불리할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한다는 형사 재판의 제1원칙은 온데간데없고,
발화 원인을 특정하지도 못한 검찰의 공소장을 따라 아들이 아비를 죽였다는 내용의 유죄가 선고된다. 발화 원인이 다른 것일 수
있다는 피고인측의 주장은 '합리적 의심'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악의 정치 재판이다. 한나라당이건 구 민주당 계열이건, 그들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있는 건설자본의 입김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오세훈도 아니고 한명숙도 아니다. 건설사들이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무죄를 선고받는 것은 그 건설사들의 돈벌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므로, 법원은 '합리적 의심'을 비합리적으로
줄여버린다. 다시 한 번 묻자. 검찰은 발화 원인이 화염병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이성의 보편성을 믿는다. 그러나 구체적 상황에서 작용하는 '이성들'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지레 가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이성이 정치적,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의 주체임을 자임하는 자들은 정치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이성적 판단의 이름 하에
포장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법학에서 그 어떤 명확한 결론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법정의 논리가 아니다. 정치의 논리로
그들은 용산 참사의 당사자들을 감옥으로 몰아가고 있다.
노회찬을 찍는 한 표는 그래서 사표가 아니다. 죽은 후에도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사람들, 살아서도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을 법의 폭력 앞에 떠안게 된 사람들을 살리는 생표[生票]다.
용산 참사의 해결은 정치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의 첫걸음은
노회찬의 지지율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오세훈에게 다섯 명의 희생자와 한 명의 경찰 대원의 이름을 묻는 바로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법원에게 또 토건족들에게 보란듯이 과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당신이 최소한의 여유가 된다면, 노회찬 선본에 지금이라도 후원금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한다. 벌써 오후 5시 30분이지만, 내일
선거가 끝난 이후라도 치루어야 할 여타 잔금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부끄러움 없는 돈이 모여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을 부끄럽게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 링크를 클릭해서 많은 분들이 지금이라도, 작은 쌈짓돈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좋겠다. 나도 없는 살림에 또 5만원을 보탰다.
아직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여러 악재가 겹쳤고 예상치 못한 충격까지 받았지만, 남은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부디 모두 힘을 모아주시길.
2010-06-01
주가가 떨어지니까 전쟁에 반대한다면
맹자 양혜왕 상편의 첫 문답. 먼 길을 온 맹자에게 양혜왕이 묻는다. “어르신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겠군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시면 대부大夫[관직자]들도 ‘어떻게 하면 우리 가家에 이익이 될까?’하고, 사士와 서민들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게 됩니다.”(맹가, 안외순 옮김, 『맹자』(서울: 책세상, 2002), 15쪽.)
천안함의 침몰 이후 북풍 몰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에서 발생한 은행 국유화 사태와 맞물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환율은 크게 치솟았다. 지방선거에서 줄곧 ‘정권 심판론’을 밀어붙이던 ‘범 야권’은 호기를 잡은 듯 바로 그 지점을 문제삼고 있다. 한나라당은 전쟁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이며, 심지어 그것은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명숙 후보는 직접적으로 한나라당을 ‘전쟁’으로, 스스로를 ‘평화’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5월 28일 내걸린 새로운 플래카드에는 “전쟁을 막는 현명한 선택, 한명숙”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것이다.
그럼 전쟁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한나라당과 정부가 주도한 북풍 몰이가 한반도에 긴장 상태를 유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주가는 급락했고 환율과 금값은 엄청나게 뛰어올랐다가 정부의 강경 태도가 다소 누그러들자 그에 맞추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풍을 통해 보수적인 표심을 결집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경제 지표가 흔들리는 것은 여당의 선거 전략에 전혀 이롭지 않은 현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북풍에 대한 ‘경제적’ 비판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선거용 북풍 장사질 때문에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 손해를 대체 대통령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 말이다.
주요 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그 말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전쟁에 대해서는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요구되는 평화는 과연 진정한 평화일까, 아니면 일종의 님비(NIMBY) 현상처럼 ‘피 튀기는 일은 내 앞마당에서 하지 말라’는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계속 읽기(한겨레 훅 링크)
* 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보낸 칼럼입니다. 저작권 관계상 전문을 블로그에 올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무역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한 독일 대통령이 어제 사임했습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이라크 전쟁 당시 고위직에 있던 정치인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이라크 전쟁 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주가 떨어지고 환율 높아지니까 아이패드를 지를 수가 없잖아!'라는 유치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투정 뿐 아닐까요.
천안함의 침몰 이후 북풍 몰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에서 발생한 은행 국유화 사태와 맞물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환율은 크게 치솟았다. 지방선거에서 줄곧 ‘정권 심판론’을 밀어붙이던 ‘범 야권’은 호기를 잡은 듯 바로 그 지점을 문제삼고 있다. 한나라당은 전쟁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이며, 심지어 그것은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명숙 후보는 직접적으로 한나라당을 ‘전쟁’으로, 스스로를 ‘평화’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5월 28일 내걸린 새로운 플래카드에는 “전쟁을 막는 현명한 선택, 한명숙”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것이다.
그럼 전쟁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한나라당과 정부가 주도한 북풍 몰이가 한반도에 긴장 상태를 유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주가는 급락했고 환율과 금값은 엄청나게 뛰어올랐다가 정부의 강경 태도가 다소 누그러들자 그에 맞추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풍을 통해 보수적인 표심을 결집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경제 지표가 흔들리는 것은 여당의 선거 전략에 전혀 이롭지 않은 현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북풍에 대한 ‘경제적’ 비판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선거용 북풍 장사질 때문에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 손해를 대체 대통령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 말이다.
주요 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그 말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전쟁에 대해서는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요구되는 평화는 과연 진정한 평화일까, 아니면 일종의 님비(NIMBY) 현상처럼 ‘피 튀기는 일은 내 앞마당에서 하지 말라’는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계속 읽기(한겨레 훅 링크)
* 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보낸 칼럼입니다. 저작권 관계상 전문을 블로그에 올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무역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한 독일 대통령이 어제 사임했습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이라크 전쟁 당시 고위직에 있던 정치인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이라크 전쟁 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주가 떨어지고 환율 높아지니까 아이패드를 지를 수가 없잖아!'라는 유치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투정 뿐 아닐까요.
2010-05-29
투표합시다?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투표합시다'라고 외치는 온갖 캠페인의 제작자들은, 그것을 본 누군가가 한나라당을 찍으러 간다고 말해도
좋은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정치운동이 아니라 한낱 공익광고를 하고 있을 뿐이니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공익광고를 빙자한 특정한 정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운동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공익광고의 탈을 쓴 정치운동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선관위가 '선거 관리'의 탈을 쓰고 벌이는 온갖 편향적 행동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관리를 위해 4대강 홍보는 그냥 두고 4대강 반대는 제지한다. 투표하자고 말하면서 한나라당 찍는 것은 안 된다는 복선을 까는 것은 원론적으로 볼 때 선관위의 그러한 행태와 다를 게 없다.
왜 '우리편'에게 항의하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비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공익광고를 빙지한 특정한 편향적 정치행위 자체가 갖는 해악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관위의 편향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공성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투표합시다'라고 쓰고 '민주당·국참당 찍읍시다'라고 읽는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선관위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관위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어떻게 보일까?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극단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는 '공정함'이라는 기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찍으면 된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찍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 잘못된 선거 제도 및 정치 구도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말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설득하라. 담백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번 선거와 관련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첨언: 설령 '진보신당 찍자'는 복선을 깔고 '투표합시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비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 논지는 '공익광고가 진정 공익광고가 될 수 있는 영역을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진보신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운동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것 역시 비판할 것이다.
정치 운동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공익광고의 탈을 쓴 정치운동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선관위가 '선거 관리'의 탈을 쓰고 벌이는 온갖 편향적 행동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관리를 위해 4대강 홍보는 그냥 두고 4대강 반대는 제지한다. 투표하자고 말하면서 한나라당 찍는 것은 안 된다는 복선을 까는 것은 원론적으로 볼 때 선관위의 그러한 행태와 다를 게 없다.
왜 '우리편'에게 항의하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비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공익광고를 빙지한 특정한 편향적 정치행위 자체가 갖는 해악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관위의 편향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공성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투표합시다'라고 쓰고 '민주당·국참당 찍읍시다'라고 읽는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선관위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관위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어떻게 보일까?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극단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는 '공정함'이라는 기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찍으면 된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찍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 잘못된 선거 제도 및 정치 구도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말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설득하라. 담백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번 선거와 관련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첨언: 설령 '진보신당 찍자'는 복선을 깔고 '투표합시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비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 논지는 '공익광고가 진정 공익광고가 될 수 있는 영역을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진보신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운동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것 역시 비판할 것이다.
2010-05-28
용산을 위해 노회찬을 지지한다
5월 27일,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트위터에 실망스러운 속보가 떴다. 5월 28일로 예정된 선관위 주최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발목을 잡았다. 직전 전국선거 득표율 10% '이상', 또는 5석
이상 원내정당의 후보, 그도 아니면 언론사 여론조사 평균 지지율 5% '이상'이어야 선관위 주최 TV 토론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규정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후보들의 동의가 있어야 TV 토론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
자유선진당의 지상욱 후보가 모두 동의하였지만, 오세훈 현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TV 토론이라는 것이 생긴 후 가장 많이 초대받은 정치인인 노회찬이, 정작 본인의 선거를 위한 TV 토론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체 왜 오세훈은 노회찬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노회찬의 지지율은 앞서 말했듯 현재 5%가 되지 않는다. 노회찬의 지자자 분포는 오세훈의 지지자 분포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지지율, 당선 가능성, 지지자 분포 등 모든 요소를 다 따져봐도 노회찬은 오세훈의 당선을 방해할만한 요인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토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세훈은 노회찬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5월 18일 백분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늘 하던대로 능숙한 화술과 현란한 비유를 구사하며 오세훈을 몰아붙였다. 복지 예산 증가율이 도로 건설비 증가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 무상급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오세훈이 말하지만 이미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드문드문 폭소가 터졌고, 오세훈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노회찬이 다섯 사람, 아니 여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오세훈에게 "서울 시장으로서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오세훈은 대답했다.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세훈이 노회찬과의 TV 토론을 회피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낼 수는 없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를 괄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TV 앞에서 자신의 정책과 공약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토론에 약한 한명숙 후보와 1:1로 대결하는 구도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회찬이 TV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는 작년 1월 20일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한 사건에 대해, 서울 시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회찬이 없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는 용산 참사도 없다. 그는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현직 시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야당 후보인 것이다.
나는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누군가를 투표로 심판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파악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세훈을 이기기 위해 노회찬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를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서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용산 참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오직 노회찬만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TV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 노회찬이 아닌 다른 그 누구를 찍는다면, 우리는 용산 참사를 흘러가는 세월 속에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삶보다 건설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자본의 힘에 짓눌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후 차가운 시신보관소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 갇혀있었던 약자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그것이 서울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 자체의 문제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실존의 문제다. 나 역시 용산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제2의 제3의 새로운 용산 참사의 현장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오세훈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며, 한 사람의 서울 시민으로서 노회찬을 지지한다.
TV 토론이라는 것이 생긴 후 가장 많이 초대받은 정치인인 노회찬이, 정작 본인의 선거를 위한 TV 토론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체 왜 오세훈은 노회찬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노회찬의 지지율은 앞서 말했듯 현재 5%가 되지 않는다. 노회찬의 지자자 분포는 오세훈의 지지자 분포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지지율, 당선 가능성, 지지자 분포 등 모든 요소를 다 따져봐도 노회찬은 오세훈의 당선을 방해할만한 요인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토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세훈은 노회찬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5월 18일 백분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늘 하던대로 능숙한 화술과 현란한 비유를 구사하며 오세훈을 몰아붙였다. 복지 예산 증가율이 도로 건설비 증가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 무상급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오세훈이 말하지만 이미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드문드문 폭소가 터졌고, 오세훈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노회찬이 다섯 사람, 아니 여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오세훈에게 "서울 시장으로서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오세훈은 대답했다.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세훈이 노회찬과의 TV 토론을 회피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낼 수는 없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를 괄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TV 앞에서 자신의 정책과 공약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토론에 약한 한명숙 후보와 1:1로 대결하는 구도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회찬이 TV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는 작년 1월 20일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한 사건에 대해, 서울 시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회찬이 없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는 용산 참사도 없다. 그는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현직 시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야당 후보인 것이다.
나는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누군가를 투표로 심판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파악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세훈을 이기기 위해 노회찬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를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서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용산 참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오직 노회찬만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TV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 노회찬이 아닌 다른 그 누구를 찍는다면, 우리는 용산 참사를 흘러가는 세월 속에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삶보다 건설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자본의 힘에 짓눌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후 차가운 시신보관소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 갇혀있었던 약자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그것이 서울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 자체의 문제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실존의 문제다. 나 역시 용산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제2의 제3의 새로운 용산 참사의 현장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오세훈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며, 한 사람의 서울 시민으로서 노회찬을 지지한다.
2010-05-25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조선일보는 때로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러운 운율, 싸구려 감수성, 너무도 명백한 정치적 의도.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예술화'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정치와 예술 모두 저질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일보가 딴 건
몰라도 미다시는 잘 뽑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미적으로 허름한 헤드라인을 '잘
뽑는 것'으로 보는 미적 판단 수준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의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으로 따져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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