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 백종원을 ‘백주부’라고 한다. 집안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주부다. 주부는 대체로 엄마다. 백주부를 ‘백종원 엄마’라고 풀면 백종원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대중이 백종원을 통해 얻으려는 건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 그렇다, 엄마다.”
최근 예능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외식업자 백종원을 둘러싼 대중적 열광을 두고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내린 평가다. 발언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일단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황교익은 <집밥 백선생>을 보긴 했을까?
<집밥 백선생>은 연령대별로 나름 안배된, 하지만 요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네 남자에게 백종원이 아주 기초적인 레시피와 기술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타깃 시청자는 ‘엄마의 사랑’이 결핍된 ‘한국 맞벌이 부부의 1호 자식들’인 ‘1980~1990년대생’이 아니다. 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갑자기 자기 손으로 밥을 챙겨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중년 남성들이다. 그것은 <집밥 백선생>의 1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방송을 하다 보면 제작진이 의도한 타깃 시청자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상세한 시청률 표가 없으니, 논의를 위해 일단 황교익의 말대로 1980~1990년대생들이 <집밥 백선생>에 열광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집밥’이니까 ‘주부’가 하는 것이고, ‘주부’니까 ‘엄마’일 것이라는 자동연상은 적잖은 의문을 남긴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집밥 백선생>에서 가장 차별화된 키워드는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좋은 선생이다. 학생의 수준에 맞춰 아주 기초적인 내용부터 가르쳐준다. 이렇게 만들면 무슨 맛이 날지 상상해보라고 한 후, 당장 실습부터 해서 출연자들의 결과물에 대해 리뷰해주고,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그러니 시청자들 역시 손쉽게 따라해볼 용기를 낼 수 있다. 방송에 나온 식재료가 다음날 품귀 현상을 빚는 것은 괜히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밥’과 ‘엄마’가 분리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오직 여성에게만 쏠리던 가사노동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비로소 남자들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도 ‘집밥’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TV를 통해 전국에 유포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통조림을 이용한 생선 요리’편을 떠올려보자. 왜 통조림을 쓰는가? 백종원은 생선을 사온 후 냉장고에 넣었다가 조리하고 잔여물을 버릴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비린내가 나고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이 TV에서 요리를 했지만, 가사노동의 덧없는 고통을 이렇게 공정하게 전달하고 설득한 사람은 없었다.
황교익의 식재료 중심주의에는 분명 경청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러나 백종원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분석하는 그의 시선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경제력도 부족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는 면에서, 무심하고 또 잔인하다. “맞벌이로 바빠 내게 요리 한 번 가르쳐준 적이 없는 엄마와 달리 부엌의 온갖 인스턴트 재료로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백종원의 인기 비결이라고 황교익은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아이가 집밥을 못 먹고 자라는 것은 엄마가 맞벌이를 안 해도 될 만큼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빠 탓 아닌가?
아빠가 돈 벌고 엄마가 살림하고 애 둘 낳아 기르는 4인 가족 모델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집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엄마’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구시대적, 여성차별적 세계관은 더더욱 현실 적합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집밥 백선생>의 성공은 변화한 세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엄마주의자’들이 엄마의 손맛 타령을 한다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는 생존을 삶으로 바꾼다. 다 큰 어른들이 엄마 집밥 타령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 부끄럽다. 많은 남자들이,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스스로의 삶을 가꾸어나가면 좋겠다.
입력 : 2015.07.12 21:23:15 수정 : 2015.07.12 21:24: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122123155
2015-07-12
2015-07-02
[북리뷰] 이성애도 한때는 정상이 아니었다?
사랑의 역사
루이-조르주 탱, 문학과지성사, 1만3천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전 세계의 국가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말이다. 영국의 시사·경제주간지 <The Economist>에 의해 '게이 디바이드'라고 명칭되기도 한 이 격차는, 지난 6월 26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각 주는 동성커플의 결혼을 막을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여 미국 내 동성혼을 전면 법제화함으로써, 확연히 가시화되었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이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제출한 혼인신고서가, 우리의 민법 규정상 특별히 반려되어야 할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게이 디바이드'에서 선진국이 아닌 후진국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6월 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조르주 탱은 동성애자이며 동시에 흑인이다.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며, 학문적으로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푸코의 방법론을 동원해, 사람들이 '자연스럽다', 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아주 근본적인 질서에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이성애'는 당연하기만 한 일인가?
우리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시민이며 동시에 군인이었던 그들은 서로 동성애 관계를 맺고 전우로서 함께 전장에서 뒹굴었다. 저자는 문학 연구자답게 중세의 대표적인 서사시 '롤랑의 노래'를 사례로 든다. 롤랑의 뒤를 따라 약혼녀가 죽는 장면을 후대의 연구자들은 크게 강조했지만, 그것은 분량상 대단히 미비하며 극중 비중도 크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롤랑이 그의 맞수인 올리비에 경과 나누는 진한 우정 혹은 애정이다. 그들은 서로 변하지 않는 충직함을 맹세하고, 진지하게 입을 맞추고, 함께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정말 중세의 서사시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세인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랐'기 때문에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동성애 뿐 아니라 이성애에 대해서도 현대인과 같은 관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세인들은 여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지한 감정적 교류를 남자와 나누었고, '남색가'가 아니면 남자와 몸을 섞기란 곤란한 일이므로,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돈독히 다졌다.
기사, 즉 무인 중심의 중세가 궁정사회로 변모하면서 이성애 중심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들끼리 싸워서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그 여성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하는 설득과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또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기사, 성직자, 의사들이 이성애에 온갖 딱지를 붙이며 그 영향력을 줄여나가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성애는 너무도 당연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 지배적 에피스테메가 되었고, 대신 동성애가 '문제적 대상'으로 부각된다.
이 책을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한 푸코적 해석으로 보는 것은 분명 가능하며, 그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독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과연 한국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로 나아간 적이 있긴 한지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마치 올리비에 경이 롤랑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듯, 한국의 일부 남성들은 성매수 경험이나 여성혐오적 농담 등을 공유하며 그들끼리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동성애가 인권의 판단 지표로 부각되어 있는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명적인 이성애자의 삶을 구현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불현듯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루이-조르주 탱, 문학과지성사, 1만3천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전 세계의 국가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말이다. 영국의 시사·경제주간지 <The Economist>에 의해 '게이 디바이드'라고 명칭되기도 한 이 격차는, 지난 6월 26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각 주는 동성커플의 결혼을 막을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여 미국 내 동성혼을 전면 법제화함으로써, 확연히 가시화되었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이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제출한 혼인신고서가, 우리의 민법 규정상 특별히 반려되어야 할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게이 디바이드'에서 선진국이 아닌 후진국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6월 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조르주 탱은 동성애자이며 동시에 흑인이다.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며, 학문적으로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푸코의 방법론을 동원해, 사람들이 '자연스럽다', 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아주 근본적인 질서에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이성애'는 당연하기만 한 일인가?
우리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시민이며 동시에 군인이었던 그들은 서로 동성애 관계를 맺고 전우로서 함께 전장에서 뒹굴었다. 저자는 문학 연구자답게 중세의 대표적인 서사시 '롤랑의 노래'를 사례로 든다. 롤랑의 뒤를 따라 약혼녀가 죽는 장면을 후대의 연구자들은 크게 강조했지만, 그것은 분량상 대단히 미비하며 극중 비중도 크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롤랑이 그의 맞수인 올리비에 경과 나누는 진한 우정 혹은 애정이다. 그들은 서로 변하지 않는 충직함을 맹세하고, 진지하게 입을 맞추고, 함께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정말 중세의 서사시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세인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랐'기 때문에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동성애 뿐 아니라 이성애에 대해서도 현대인과 같은 관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세인들은 여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지한 감정적 교류를 남자와 나누었고, '남색가'가 아니면 남자와 몸을 섞기란 곤란한 일이므로,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돈독히 다졌다.
기사, 즉 무인 중심의 중세가 궁정사회로 변모하면서 이성애 중심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들끼리 싸워서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그 여성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하는 설득과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또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기사, 성직자, 의사들이 이성애에 온갖 딱지를 붙이며 그 영향력을 줄여나가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성애는 너무도 당연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 지배적 에피스테메가 되었고, 대신 동성애가 '문제적 대상'으로 부각된다.
이 책을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한 푸코적 해석으로 보는 것은 분명 가능하며, 그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독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과연 한국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로 나아간 적이 있긴 한지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마치 올리비에 경이 롤랑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듯, 한국의 일부 남성들은 성매수 경험이나 여성혐오적 농담 등을 공유하며 그들끼리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동성애가 인권의 판단 지표로 부각되어 있는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명적인 이성애자의 삶을 구현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불현듯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2015.07.14ㅣ주간경향 113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6-30
[북리뷰]‘프레임’이 만만하게 보이니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지음·유나영 옮김 와이즈베리·1만3000원
2004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200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후, 지금까지 이 책만큼 오해되고 있는 책을 또 찾기란 쉽지 않다.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이 책의 제목을 모두 알고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그리고 다들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프레임이고….’ ‘프레임’이라는 단어, 혹은 국내에서 이해되고 통용되는 ‘프레임’의 논리는 지금까지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다.
가령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지난 9일 ‘메르스라는 단어가 낯설고 국민들이 무서워하니 친숙한 우리말로 바꾸자’고 할 때, 그러한 제안에는 국내에 소개된 ‘프레임 이론’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를 ‘중동 독감’이라고 지칭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교적 친숙한 독감의 일부로 소개함으로써,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을 바꾸려는 시도라고, 짐작컨대 청와대에서는 스스로 자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지 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 이론은 그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프레임 재구성은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떤 마법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프레임은 슬로건이 아니라 생각이다. 프레임 재구성은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에 접근하여 이를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담론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반복하는 일에 가깝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한 과정이며, 반복과 집중과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13쪽)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메르스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독감이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0주년 기념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된 내용에서 저자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 가지 오해는 프레임을 구성하는 일이 ‘사망세’나 ‘부분 출산 낙태’처럼 상당수 대중에게서 반향을 일으키는 영리한 슬로건을 고안하는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슬로건은 세금이나 낙태 같은 쟁점들을 개념적으로 프레임에 넣는 장기간의, 흔히 수십년에 걸친 캠페인이 선행되어, 많은 사람들의 뇌가 이런 문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완료했을 때만 먹힌다.”(76쪽)
이미 2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격리 처치를 경험한 사람이 1만명을 넘어서게 된 메르스 사태를 두고, 야권 일각에서는 현재의 국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메르스를 세월호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물론 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메르스의 확산 통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놓고 정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야권에게 불리한 ‘프레임’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질까?
적어도 조지 레이코프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임은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세계관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 물론 변하긴 하겠지만, ‘프레임’ 타령만 하는 세력은 결코 기존의 프레임을 이겨낼 수 없다. 모든 위기 상황을 정치적 호재로 바라보는 분들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2015.06.30ㅣ주간경향 1132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506221617041&pt=nv#csidx23225d858145a6f89750f86343c6aae
조지 레이코프 지음·유나영 옮김 와이즈베리·1만3000원
2004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200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후, 지금까지 이 책만큼 오해되고 있는 책을 또 찾기란 쉽지 않다.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이 책의 제목을 모두 알고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그리고 다들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프레임이고….’ ‘프레임’이라는 단어, 혹은 국내에서 이해되고 통용되는 ‘프레임’의 논리는 지금까지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다.
가령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지난 9일 ‘메르스라는 단어가 낯설고 국민들이 무서워하니 친숙한 우리말로 바꾸자’고 할 때, 그러한 제안에는 국내에 소개된 ‘프레임 이론’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를 ‘중동 독감’이라고 지칭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교적 친숙한 독감의 일부로 소개함으로써,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을 바꾸려는 시도라고, 짐작컨대 청와대에서는 스스로 자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지 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 이론은 그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프레임 재구성은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떤 마법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프레임은 슬로건이 아니라 생각이다. 프레임 재구성은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에 접근하여 이를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담론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반복하는 일에 가깝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한 과정이며, 반복과 집중과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13쪽)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메르스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독감이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0주년 기념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된 내용에서 저자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 가지 오해는 프레임을 구성하는 일이 ‘사망세’나 ‘부분 출산 낙태’처럼 상당수 대중에게서 반향을 일으키는 영리한 슬로건을 고안하는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슬로건은 세금이나 낙태 같은 쟁점들을 개념적으로 프레임에 넣는 장기간의, 흔히 수십년에 걸친 캠페인이 선행되어, 많은 사람들의 뇌가 이런 문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완료했을 때만 먹힌다.”(76쪽)
이미 2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격리 처치를 경험한 사람이 1만명을 넘어서게 된 메르스 사태를 두고, 야권 일각에서는 현재의 국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메르스를 세월호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물론 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메르스의 확산 통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놓고 정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야권에게 불리한 ‘프레임’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질까?
적어도 조지 레이코프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임은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세계관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 물론 변하긴 하겠지만, ‘프레임’ 타령만 하는 세력은 결코 기존의 프레임을 이겨낼 수 없다. 모든 위기 상황을 정치적 호재로 바라보는 분들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2015.06.30ㅣ주간경향 1132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506221617041&pt=nv#csidx23225d858145a6f89750f86343c6aae
2015-06-16
[북리뷰]<페스트>-지금 가장 시의적절한 고전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책세상·1만4000원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만 할 때가 있다.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젊은 작가를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지금까지 번역을 제외하고 프랑스어로만 500만부가 팔린 책.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식상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없이 시의적절한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를 요양소로 보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동시에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들의 예후와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확산되는 전염병을 페스트로 보고 대비해야 하느냐, 그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오랑의 의사와 현감 등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총독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페스트의 발병을 확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고.
“오랑의 시민들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60쪽) 봉쇄된 도시 속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심지어 대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사무실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115쪽)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묘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노인과 아이들. 그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무색무취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포와 권태가 한 몸이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도시 바깥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마저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버려 결국 식상해져버리는 그 반복의 공포.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사건인가? 과연 그것은 지루한 ‘일상’을 대체해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태도 변경 앞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했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244쪽) 그 페스트에 맞서는 의사 리유 역시 다양한 인물들과 상호 교류하며 실존적인 화두를 던지고 대답을 찾아나서지만, 매일 환자들의 숫자를 세고 통계표를 만든다. 페스트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것과 싸우는 의학 역시 하나의 행정사무인 셈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졌고,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단 한 사람이 늑장 대책회의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시민들은 실존적 문제 이전에 아주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있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에, 실은 수십여 명의 확진 환자가 나타났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부터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휴지, 혹은 팔꿈치나 어깨로 가리고 해야 한다. 본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을 켜고, 공포와 불안의 봉쇄령이 풀릴 그 날을 함께 기다려보자.
2015.06.16ㅣ주간경향 113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6081443401&code=116#csidxe60f409375f16b293a255a00aeaba3f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책세상·1만4000원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만 할 때가 있다.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젊은 작가를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지금까지 번역을 제외하고 프랑스어로만 500만부가 팔린 책.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식상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없이 시의적절한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를 요양소로 보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동시에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들의 예후와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확산되는 전염병을 페스트로 보고 대비해야 하느냐, 그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오랑의 의사와 현감 등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총독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페스트의 발병을 확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고.
“오랑의 시민들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60쪽) 봉쇄된 도시 속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심지어 대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사무실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115쪽)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묘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노인과 아이들. 그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무색무취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포와 권태가 한 몸이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도시 바깥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마저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버려 결국 식상해져버리는 그 반복의 공포.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사건인가? 과연 그것은 지루한 ‘일상’을 대체해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태도 변경 앞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했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244쪽) 그 페스트에 맞서는 의사 리유 역시 다양한 인물들과 상호 교류하며 실존적인 화두를 던지고 대답을 찾아나서지만, 매일 환자들의 숫자를 세고 통계표를 만든다. 페스트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것과 싸우는 의학 역시 하나의 행정사무인 셈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졌고,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단 한 사람이 늑장 대책회의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시민들은 실존적 문제 이전에 아주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있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에, 실은 수십여 명의 확진 환자가 나타났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부터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휴지, 혹은 팔꿈치나 어깨로 가리고 해야 한다. 본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을 켜고, 공포와 불안의 봉쇄령이 풀릴 그 날을 함께 기다려보자.
2015.06.16ㅣ주간경향 113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6081443401&code=116#csidxe60f409375f16b293a255a00aeaba3f
2015-06-14
[별별시선]페미니즘을 위하여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이 주제로 등장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요?’ 하는 사람들 말이다. 경험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입력 : 2015.06.14 20:42:23 수정 : 2015.06.14 20:45: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덧붙임1: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 공개했을 때만 해도 '모든 페미니즘이 옳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2016년 7월 현재,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라고 주장한 이 글의 관점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메갈'을 타자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은 "#내가메갈이다"라고 해쉬태그를 달아, 그러한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덧붙임2: 내가 편집부에 보냈던 원래 제목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2016/07/29)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입력 : 2015.06.14 20:42:23 수정 : 2015.06.14 20:45: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덧붙임1: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 공개했을 때만 해도 '모든 페미니즘이 옳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2016년 7월 현재,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라고 주장한 이 글의 관점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메갈'을 타자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은 "#내가메갈이다"라고 해쉬태그를 달아, 그러한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덧붙임2: 내가 편집부에 보냈던 원래 제목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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