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3

내용적 종북, 형식적 종북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내용적 종북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되, 형식적 종북은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다'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패기 넘치게 '박근혜 대통령 떨어뜨리려 나왔다'던 이정희 대표의 통진당은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공중분해되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종북 사냥'의 사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2015-10-06

[북리뷰] 우리말의 탄생, 우리말의 재탄생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물러난 후라 경성역 창고에는 갈 곳이 없는 화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점검하던 역장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용물을 살펴본 역장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서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37쪽)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04

[별별시선]기성세대의 염치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지난달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의 칼럼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론이다. 인용문에서 지적된 ‘청년 논객’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답해볼 필요가 있겠다.

칼럼이 게재될 무렵, 새누리당은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 같은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청년들을 중장년층과 대립하게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홍기빈의 지적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그의 논리 구조가 결국 ‘피해자 탓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호남이 고립된 것은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절반을 군사독재 세력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바로 그 3당 합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의 있습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다. 호남의 고립은 호남의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김영삼의 지지 기반인 영남이 등을 돌려서 벌어진 일이다.

청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보다 높을까? 정부의 주장대로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야 없겠으나, 청년 실업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에 진보 진영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절대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를 ‘1차 노동시장’이라고 하고, 후자를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는 임금, 고용안정성,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한 번 ‘눈높이를 낮추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유사 신분제에 가깝다. 당연히 청년들은 처음부터 ‘1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만을 묻는다. 하지만 조합주의에 빠져버린 노동계 역시 이 사태에 있어서 결코 결백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기빈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다수화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률 10%대를 맴도는 한국의 노동계가 진작에 수행했어야 한다.

청년들은 정부에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 진영을 믿지 않을 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잘 조직되어 있는 일부 대기업 생산직에서 이미 가족이나 친지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대물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대체 청년들이 뭘 어쨌어야 한다는 말인가? ‘청년 담론’은 때로 보수의 분할 통치 방안으로 동원된다. 하지만 청년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의 영역에 분할 통치와 이간질이 가능한 차별이 존재함에도, 그것을 미리 바로잡아놓지 않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좀 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염치라고, 한 ‘청년 논객’은 외치는 바이다.


입력 : 2015.10.04 20:48:37 수정 : 2015.10.04 20:52: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48375&code=990100#csidxf53f26551e49056a682ddaf2c5c432b

2015-09-23

엠마 왓슨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고종석 선생님께 보내는 공개 서한


1.


고종석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 "에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께"를 읽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읽었고, 반면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엠마 왓슨은 읽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부터 그 '편지'는 엠마 왓슨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게 아니니까요.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코너 '고종석의 편지'에 실리는 내용이 실은 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게재된 제목들을 쭉 훑어보면, "IS 전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그나마 수취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 대사,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엠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 등은 극동의 변방에서 한국어로 실린 공개 서한에 눈길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국제적 명사들입니다. 하물며 사회주의자 여운형, 익사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 등을 수신인으로 호명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공개 서한'이라는 민망한 글쓰기 방식을 저도 시도하고 있는 지금, 그 형식에 대해 한 차례 곱씹어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그 글에서 지목하는 상대가 읽기를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정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연락처를 알아내어 직접 전달해야 할 테니까요. 공개 서한은 누군가를 '명시적 독자'으로 삼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을 '실질적 독자'로 만듭니다.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적어도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일종의 상소문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오바마'와 '공개 서한'을 함께 검색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뉴욕타임즈>의 광고란을 사서 오바마를 상대로 공개 서한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근혜'를 함께 검색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요컨대, 힘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모아서 권력의 꼭데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발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대사에게 보내신 '편지'는 그러한 고전적인 양식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껏 칭찬하다가, 그 모든 개방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제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교황의 입장을 비판하시죠. 케네디 대사를 향해서는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밀착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결국 한국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국제 정세를 전달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2.

편지가 시작된 후 다섯 문단에 걸쳐 고종석 선생께서는 엠마 왓슨의 HeForShe 연설과 그 캠페인을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이 '편지'가 진정으로 엠마 왓슨을 향한 것이라면 그 내용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엠마 왓슨 본인이 잘 알고 있을 내용일 테니까 말이죠. 

엠마 왓슨은 "연설에서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한 뒤, 그것이 남성 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사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연설을 듣고 고종석 선생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유롭게 감성적이 돼야 하고 자유롭게 강인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HeForShe 캠페인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엠마 왓슨과 함께 HeForShe 캠페인을 기획한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캠페인이 갖는 근본적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나 고종석 선생님보다야 잘 알고 있었겠죠. 간헐적으로 칼럼을 쓰는 저나 고종석 선생님과 달리, 그들은 직업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여성 인권 뿐 아니라 다양한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요컨대 HeForShe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과 든든한 자원을 가진 집단의 페미니즘 기획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을법한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평가와 왜곡이, 그것도 엠마 왓슨을 수신인으로 호명한 공개 서한에 빼곡이 담겨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것이 나름 선진국 반열에 속한 대한민국의 언론 지면에 정식으로 실릴 것이라고는 말이죠.

일단 이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당신이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 멋진 연설에서 누락했을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칼럼의 후반부는 그 "누락"된 문제들을 지적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 문제들이 누락된 이유가 과연 '시간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과연 엠마 왓슨과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캠페인 담당자들이 그저 '시간이 부족'하여, 고종석 선생님도 아실만큼 잘 알려진 젠더 이슈들을 간과한 것일까요?


3.

HeForShe는 2014년 이전까지의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볼 때 굉장히 이상한 캠페인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만, 애초에 공개 서한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만 보라고 쓰는 게 아니니까, 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미니즘은 크게 세 개의 세대로 구분됩니다. 1세대 페미니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참정권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기본권의 동등한 보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대략 1980년대 정도까지, 기본적인 정치적 평등을 넘어서는 사회적 균형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표출되었고요. 3세대 페미니즘은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페미니즘 그 자체가 간과할 수밖에 없는 범주들을 발견하고 그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페미니즘의 다각화 혹은 발전적 해체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놓고 고종석 선생님의 진심어린 충고를 살펴보면,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으나, 고종석 선생께서는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3세대 페미니즘의 레퍼토리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계셨음이 드러납니다.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은 양상이 크게 다"르다거나, "존재는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그렇게 중층적으로 결정된 존재는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논변 등은 아주 고전적입니다. 특히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이라는 표현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을 겨냥하여 수많은 소수 젠더 그룹들이 불만을 드러냈던 맥락을 거의 고스란히 상기시킵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여성 일반을 대변하여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와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던 과거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보편 범주로서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서 많은 비판과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과거의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은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사각지대', 즉 인종과 계급, 성 정체성 등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층위로 드러나는 '여성' 내의 차이들을 조명하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담론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3물결이라고도 하는 유색인종 여성의 비평들이 제2물결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적 전제를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에 내재하는 인종적·계급적·문화적·민족적·성 정체성적 차이에 주목한 이래,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추상적 범주보다는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 경험과 각각의 삶이 지니는 특수성에 대해 성찰하는 페미니즘'들'로 분화되었다.[1]

이렇게만 놓고 보면 고종석 선생님의 공개 서한은 퍽 그럴듯한 말처럼 보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세대 페미니즘의 맥락을 빌려 HeForShe를 2세대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성립하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이 분화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죠. '너는 백인 중산층 여성이므로, 흑인 빈곤층 여성인 나의 경험을 대변할 수 없다'는 문장은, 오직 발화자가 흑인 빈곤층 여성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흑인 빈곤층 여성'이 무엇으로 바뀌더라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 뿐입니다.

결국 3세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를 해체하는 페미니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인용한 책을 조금 더 읽어볼까요. "1980~90년대 페미니즘 이론이 침체기를 맞이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 거론되면서 페미니즘이 '젠더 연구'로 이행하는 동시에 동성애론이 성장한 것은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 차이와 다양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여성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깨어져 나갔습니다.


4.

그것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혹은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는 보다 더 넓고 다양한 성차를 포함하는 젠더 연구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은, 적어도 3세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에게는, 꺼림직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내에서 '여성학자'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펼쳐볼까요.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3]

현재 진보 진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한국인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은,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정체성의 정치'가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페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정체성의 정치 그 이상의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철학인데,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4]

그러한 입장은 최근 그분께서 <한겨레>에 기고하신 서평에서도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하시면서도,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5]라고, 아마도 최근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운동에 고무되어 당신께 문의 메일을 보냈을 수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페미니즘 그 자체를 어떤 강고한 '주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 "교차, 우회로, 가로지르기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횡단의(transversal) 정치"[6]로 여기는 이와 같은 발상은, 고종석 선생님께도 매우 친숙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에 이러한 입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법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온 이태영 박사님과 그 후속 세대들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고종석 선생님께는 정희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가 매우 친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봅니다.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엔본부에서 출범식을 가진 HeForShe, 그리고 2015년 트위터를 넘어 국내의 전반적인 여론에서 페미니즘을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에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공론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어휘 역시 봉인을 뜯고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활발히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 운동 모두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합니다. 3세대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광범위한 젠더 연구로 발전적 해체를 거듭해온 맥락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만,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발 비켜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지만 익숙한 페미니즘을 제기합니다. '여성주의'로서의 페미니즘과, 그 페미니즘에 동참하는 외부 세력으로서의 '남성'이라는 범주를 재창출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기존의 '차이'가 놓이던 자리에는 대신 '남성'이 들어가고요. 엠마 왓슨을 앞세워 HeForShe를 기획한 이들은, 젠더 연구의 주된 화두였던 다양한 성소수자 뿐 아니라, 암흑의 핵심이요 가부장제의 원흉이며 세상의 악이란 악은 모두 저지르는 테스토스테론의 노예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을 페미니즘의 논의에 암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시스젠더'란 스스로 생각하는 성정체성과 육체의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저처럼 스스로 이성애자 남자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의 최근 경향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국제기구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그'를 소환했습니다. 2014년 말에 벌어진 일입니다.


5.

자, 먼 길을 돌아 다시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낸 편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비판했다시피, 그 편지는 전제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습니다.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이 고종석 선생님보다 페미니즘을 몰라서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백인 여성 영화배우'에게 연설문을 넘겨준 게 아닙니다. 고종석 선생께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맥락을 넘어서, 그간의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HeForShe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지만, 동시에 남성 운동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주어가 He, 즉 남자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저 구호를 접하고 '대체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마치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양, 그리고 남자들을 무슨 백마 탄 왕자인 양 포장해주는 것 같은데, 그게 유엔에서 추진하는 캠페인이라고?

그런 의문을 품었던 것은 저 역시 기존에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유통되어온 페미니즘, 혹은 포스트페미니즘, 아니면 젠더 연구 등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2015년이 되고, 다양한 여성 문제가 터져나올 때, 특히 고종석 선생님같은 남성 지식인들의 대응을 보니, 우리의 남성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편지에서 201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거론합니다. "지난해에 노벨평화상을 탄 파키스탄의 여성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당신보다 일곱 살이 젊지만, 당신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며,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이지만 "말랄라의 페미니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의 소산"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더군요. 이 대목을 읽고 저는 즉각적으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엠마 왓슨과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이고, 두 사람 모두 2015년 현재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사례를 들어 엠마 왓슨을 가르치신다고요? 이건 부산 사람이 광주 사람더러 목포 사람보다 너는 덜 차별당한다 운운하며 호남차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꼴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이론화하여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선각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였고, 심지어 자기 원고가 말이 되는 소리인지 부인에게 원고 검수를 받기라도 했지요. 그런데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원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 '책을 더 읽어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습니다. 부산 사람이 목포 사람에게 호남차별에 대해 가르치다가, '책을 읽어봐라'라고 말하는 상황을 또 한 차례 상상하게 되네요.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겨우니까요.


6.

HeForShe라는 구호에는 인류가 성적으로만 구분된다는 함의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입니다.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에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식이라면 '여성주의'는 세상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 '모든 폭력 반대주의', '착하게 살자주의'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시 호남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누군가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은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차별의 딱지입니다만, 그래도 세상에는 호남 출신 사장의 회사에서 일하는 영남 출신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나열한다 해서 호남차별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그 호남 출신 사장이 영남 출신 직원의 임금을 떼어먹었다 해도 '영남차별'이라는 범주가 새롭게 탄생했다고 우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웬 영남 출신 지식인이 '호남이라는 말은 단지 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 뿐 아니라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민중이다'라고 멋들어진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고종석 선생님, 이제 역지사지가 되십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을 두고 가르치신 '페미니즘'은 역설적이게도 협소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건 젠더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요건이 성립되는데, 선생님께서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알고 보면 남자도 희생자일 수 있고, 흔하다면 흔한 상대주의적 논변을 거쳐서 결국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실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페미니즘은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만, 모든 페미니즘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페미니즘은 해당 사조 전반을 대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고종석 선생님의 페미니즘 강의 그 자체를 지칭하는 여성주의 용어는 존재합니다. 이미 들어보셨겠죠? '맨스플레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이 쓴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독자적인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7]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남자들처럼, 이것은 단지 남자들이 '지식 자랑'을 더 좋아할 뿐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맨'들의 과오라고 지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 그 자체의 이면에 있는 중요한 성차별적 가정을 지적합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르치려고 드는 남자는, 상대가 자신보다 해당 주제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고, 너무도 태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8]


7.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보겠습니다.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고종석 선생께서 쓰신 편지는 결국 페미니즘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을 받는 상대가 누구냐일 것입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하지 않으시므로, 당신께서 한국어로 한국 신문에 쓰신 글이 엠마 왓슨 본인에게 가 닿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엠마 왓슨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엠마 왓슨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실천하려 하는 젊은이들이 실질적 독자로 상정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거든요. 그저 HeForShe 운동을 소개하고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싶다면 굳이 '당신이 열 살이었을 때 벌어졌기에 몰랐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여성 미군 사병이 벌인 잔학행위' 등을 꺼내들 필요가 없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페미니즘,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수렴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채, 요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 맨스플레인을 화끈하게 풀어내셨으니,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랜드에 등극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맨스플레인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 개념이 소개되자 다들 갓 말문이 트인 헬렌 켈러처럼 환호했던 여성들이, 고종석 선생님의 '편지'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을 설마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엠마 왓슨을 소환해놓고 여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내가 페미니즘을 한 수 가르쳐주마'라고 하셨으니 반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아, 어쩌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젊으셨던 시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게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옛날에는 운동권 남자들이 여자 후배에게 접근하면서 '너는 성적으로 해방된 주체니?' 같은 질문을 던져가며 '그러니까 나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던지곤 했다는군요. 또, 많은 '운동권 오빠'들이 여후배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남자가 자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자고, 임신을 해도 혼자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게 페미니즘인 양 가르쳐온 인간 말종 운동권 오빠들의 전설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1세기의 벽두에도 은은하게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정확히 그런 '운동권 오빠'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런 오빠들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운동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페미니즘 가르치는 오빠. 하지만 이전과 달리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방향이 뭐가 됐건 '페미니즘 가르쳐주는 남자'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8.

HeForShe는 남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정의 자체를 대단히 단순한 차원에 못박음으로써, 남자들이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동시에 남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아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남자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 단순한 대의에 동참하고 묵묵히 참여하는 것 말입니다. 굳이 역할을 덧붙이자면 여성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떠드는 다른 남자들을 제어하는 것이겠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 하는 남자 지식인이 물의를 빚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 역시 다른 남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고종석 선생님께 공개 서한을 보내야 할 당위가 생깁니다. 맨스플레인을 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뭘 모른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여자들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저와 비교하자니 머쓱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썼을 때의 상황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숫제 듣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억압한다면, 다른 남자들이 나서서 말려야지요.

HeForShe가 갖는 실천적 의의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페미니즘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상호 교차하는 가운데, 가부장적 억압의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남자들 중,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인 그 남성들이 동질적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아는 사실"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들은 성평등의 문제에서 자신이 속한 젠더 그룹이 아닌 억압받는 집단의 편에 섭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나야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류입니다. 남성과 LGBT를 포함한 모든 인류입니다. 인종과 계급과 장애 여부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류입니다." 앞서 지적된 것처럼,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저 "He"와 "She"의 범주를 아주 넓게 잡으셨죠.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HeForShe 선언을 안 하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가장 의아하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페미니즘을 넘어, 사실상 젠더 이슈도 아닌 무언가로까지 '진정한 페미니즘'을 확장시켜놓으시더니, 정작 본인은 남들 다 하는 그 쉬운 HeForShe 선언조차 안 하셨으니 말입니다. 'He'가 모든 범주의 강자고, 'She'가 모든 범주의 약자라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HeForShe를 안 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 하셨나요?

페미니즘이 후기구조주의적 비평과 이론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남자들이 책 한 두 권 읽고 너의 무의식이 어쩌고 욕망이 저쩌고 하면서 개폼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성차별의 문제는 다시금 단순명료한 평등의 문제로 재정의되었고, 그렇게 단순화된 페미니즘의 구도 속에서 남자들은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남자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차별적인 사회를 만들고, 그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설령 다 못 지킨다 하더라도, 더 많은 남자들이 여성들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젠더 그룹이 겪는 폭력과 차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아직 HeForShe를 하지 않았더군요. 이 편지를 쓰는 김에 동참합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만간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옳은 일인지, 이미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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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조원,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테레사 드 로레티스, 이브 세지윅,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희원, 이명호, 윤조원 외,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1), 19쪽.

[2] 같은 책, 20쪽.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서울: 교양인, 2013), 개정증보판, 초판 2005. 29쪽

[4] 같은 책, 30쪽.

[5] 정희진, "페미니스트", <한겨레>, 2015년 8월 21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5476.html

[6] 같은 곳.

[7]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5쪽.

[8] 같은 책, 20쪽. 강조는 인용자. 맨스플레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트위터 사용자 미원(@umami_er)님의 트윗에서 도움을 받았다.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0075939135488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1786506366976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3730725666816 참고.

2015-09-20

귀족이냐 평민이냐

1.

정치는 갈등이다. 어떤 집단과 집단이 무슨 주제로 갈등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면 정치적 구도가 그려진다. 유행어가 된지 10여년 만에 시쳇말이 되어버린 '프레임'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언어심리학적 개념의 섬세한 학술적 맥락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누가 누구와 왜 싸우고 있는지를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으로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 잡아도 2008년 대선부터 야권은 늘 지고 있다. 대선에서 두 차례나 패배했고, 총선에서도 다수석을 점해본 적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7년, 2002년의 대선 승리는 주기적인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시작이 아니라 역사적 예외로 기록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많은 이들이 시달린다. 현재의 야권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오직 17대 총선에서만 가능했었고, 그 총선은 다들 기억하고 있다시피 탄핵 역풍 속에 치뤄진 '비상선거'였다.

요컨대 야권은 늘 불리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최근에도 늘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치 지형지물처럼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야권이 패배하면 운동장이 기울어진 탓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야권의 브레인 내지는 빅마우스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패배한 것은 원래 환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꼴이다.

'프레임'을 바꿔야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현실을 설명할 때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리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실망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가 20퍼센트 대에서 맴도는 것도, 야당의 구성원들끼리 총선과 대선의 승리라는 단일한 목적 의식 하에 단결하여 일관된 지도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담론이 오가는 내용과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하며 국민들에게 징징거리고, '20대 개새끼론'을 들먹이며 본디 야권 지지 성향이 높은 청년층에게 표 내놓으라고 반 협박을 해서 도리어 심정적 지지도를 갉아먹고,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고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는 커녕 '아줌마들이 몰표를 줘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야권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2.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정치는 갈등이다.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이다. 정치는 갈등의 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긋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갈등의 선이 불리하게 그어져 있는 한, 미시적인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지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말로 호도되어 온 호남혐오, 호남포위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군사정권과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는 정치 세력은 위협적인 대선 후보 김대중을 눌러앉히기 위해 끝없이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군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그는 호남 사람이다, 이렇게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호남을 1:1로 결부시킴으로써, 김대중을 둘러싼 갈등을 '호남 대 비호남'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선을 제안하건, 그것을 빨갱이 아니면 호남이라는 두 개의 타자화된 개념틀에 포박지어 버림으로써 그를 1997년까지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전략은 현재 '친노 대 비노'라는 구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나중 문제고, 일단 그가 '친노'라고 분류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등의 선이 그어진다. 야권 내의 정치인을 '친노'와 '비노'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히 갈등은 노무현이라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어질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것은 노무현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기준선으로 그어진 갈등을 극복하거나 재설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끝없이 갈등의 선으로 제시되며, 사실상 학대당하고 있다.

야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아가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고민은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갈등은 어디에 있는가?


3.

현재 야권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매달려 있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도 그래서 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가장 큰 자산이자 부채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갈등'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그 구도가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었고, 특히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386 세대 사이에서 그러한 믿음이 팽배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군사독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20대를 향해 '너희가 문재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협박했다. 20대는 꾸역꾸역 선거장에 나가 야당에 많은 표를 몰아주었지만, 정작 386들은 자신들의 동년배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잘난척하는 386들을 더는 참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리어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대선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대 이상에서 박근혜에게 몰표가 쏟아졌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표 결집도도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386들은 고장난 축음기처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붙들었고, 영남 득표에 올인하더니, 졌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이 몇 번의 구조적, 혹은 명칭에서의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의 구조를 업데이트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선거에서 졌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체계인 '민주 대 반민주'를 버리지 못한다. '비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심지어 그 정도의 이념적 틀거리도 갖추지 못한 채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겠지만, 정치는 갈등이다.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행복과 개혁을 약속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 당장 맞서 싸워야 할 핵심적인 갈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대선 직후 시들어버리고 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갈등의 설정이어야만 한다.


4.

그렇다면 여권의 핵심적인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야당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같은 말을 얼른 꺼내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빨갱이' 낙인 찍기로 압축되는 그러한 갈등 구도를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그러한 구도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할 뿐 어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선진국 대 후진국. 그것이 지금까지 여권에서 국민 일반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해온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축이다. 보수 정당 중 하나의 이름이 '자유선진당'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부터가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새로운 어떤 차원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진화시킨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후진국이 되지 말자, 가난에서 벗어나자,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렇게 선진국이 되자. 이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군부와 신군부의 교체를 거치고, 3당 합당으로 입당한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면서까지도 바뀌지 않은, 여권의 핵심 갈등이다. 지금까지 야당보다는 여당이 정치적 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 아주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핵심 갈등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해방 직후 해외 원조에 의존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립 구도가 국민 전체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긍정적 갈등으로 기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그 갈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가 '선진국 대 후진국'의 갈등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진국 대 후진국'의 구도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 우리는 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심지어 국회마저도 '선진화' 되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은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경제 주체들의 탐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모두 함께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국의 꿈'은, 어느덧 남들이야 망하건 말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의 꿈'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가 힘을 잃었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전 국민적 도전 과제가 새롭게 제시되지는 않은 지금, 대한민국은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저 표류하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이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을 재정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불을 넘긴 나라, 평균 출산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밤낮 없이 일하지만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 이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이냐, 평민이냐'의 갈등을 겪고 있다. 소수의 '귀족'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틀을 깨고 연합하여 일 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평민의 나라'로 향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를 떠올려보자.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수십년 더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눈에는 곧장 보이는 것이다. '상속받을 유무형의 재산이 있는 자'와 '부모로부터 빚이나 잔뜩 물려받지 않으면 다행인 자'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들이 함부로 순진하다고 치부하며 계도하려 드는 젊은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헬조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에서 그 단어를 거론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섯불리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꾸짖느라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인생의 문제를 부모와 조부모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태어난 평민 청년들의 울부짖음이다. 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헬대한'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말하는가? 젊은이들이 경험한 바, 이 나라는 신분제 조선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로,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특권 귀족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그저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남들은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끝없이 늘어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데, 선진국 타령이 말같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장기에 2002년 월드컵을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했고, 전 세계인들이 케이팝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지 말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선진국이 된다 한들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청년 세대가 볼 때 대한민국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진국의 작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오직 이 갈등만이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6.

현존하는 정치적 갈등을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재편하는 것은 야권에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기울어졌다고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운동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새누리당도 선거를 앞두고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야권보다 좀 더 왼쪽에서는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서민'이나 '민중'은 그러나, 그에 대립하는 개념이 없는, 정치적으로 오작동하기 딱 좋은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보자. '서민'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중산층'인가? 아니다. '서민과 중산층'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처럼 한 세트로 취급될 뿐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 다 모든 정치 세력이 앞장서서 지켜줘야 할 누군가이며, 더 많은 연말정산 환급을 받아야 하고,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시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언어 속에는 '서민과 중산층' 바깥의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서민 정당'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반서민 정당'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이익'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가 돌아와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선거를 앞두고는 좋은 말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해, 중산층을 위해.

그 결과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실종되어 버렸다. 2012년 대선을 돌이켜보자. 여당과 야당의 경제 공약이 거기서 거기였다. 야당의 지지자들은 '어차피 저들은 실천하려는 진정성도 없이 공약을 마구 베꼈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약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만약 야당의 공약이 진정으로 올바른 갈등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올바른 혜택을 가져다주며 갈등선 너머에 있는 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런 공약은 절대 도둑질당할 수 없다. 여당이 야당의 경제 공약을 베낀 게 아니라, 야당이 여당의 경제 공약을 대신 써준 셈이다. 어차피 양당 모두 한국 사회의 갈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재설정하여 그에 맞춰 정치의 룰을 다시 짜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갈등 위에서 기존의 지지층을 재결집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7.

'평민'은 '서민'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서민'은 '민중'처럼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선의 거대한 대변자이면서 수혜자인 반면, '평민'에게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있다. '귀족'이 바로 그것이다. 평민은 귀족과 맞서서, 단결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실존적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받아도,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별별 희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한 실존적 선택이다. '귀족 마케팅'이 넘실거리고 '없어보이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평민'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단어다. '나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너도 평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스스로 평민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이겠군, 나는 다른 평민들과 함께 당신 같은 귀족에 맞서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나뉘는 세상에서, 너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편인지 물어볼 수 있는, 현실과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대립적 언어의 쌍을 우리는 지금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저 '귀족'의 범위 안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창업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왜 국민들이 납부한 국민연금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그들 같은 귀족을 위해 우리 평민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귀족들은 땀흘려 일하는 평민을 내쫓고 권리금을 빼앗으며 임대료를 올려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킨다.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날로 복잡해져가는 대입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녀를 일찌감치 외국에 빼돌려놓은 상태다. 여차하면 평민들이 총알받이 하는 사이 귀족의 아들들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어 돌아와 통치할 기세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르는 갈등의 선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노동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IMF 이후 대대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은 기득권을 사수하는데 급급하여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아예 내팽개쳤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그 노동귀족들은 경영귀족, 관료귀족들이 평민들의 노동권을 침탈하는 것을 반쯤은 방조와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진보는 '노동귀족'들이 내팽개친 평민들의 손을 잡는 대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귀족'과 '저런 귀족' 사이의 선택지만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무직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잘 조직된 대규모 블루칼라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지켜줄 단단한 정치 조직이다.


8.

레드 컴플렉스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그리고 김정은의 뚱뚱한 몸매와 함께 정치의 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상실한 채 후진국으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끝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퇴행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작 그 사이, 이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그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풍자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비명이다. 특권층, 양반, 귀족들이 지배했던 우울한 역사를 벗어나, 가까스로 노력한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절망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과 평민이 대립하는 나라다. 회사를 물려받고 건물을 물려받고 학벌과 명성을 물려받는 귀족들이 있고, 자기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도 가까스로 먹고 살까 말까 하는 평민들이 있다.

평민들이 귀족을 이기는 것은 역사의 당위다.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면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 세력이라면 더더욱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갈아엎고, '노령화 핵폭탄'을 맞은 인구 구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갈등을 새로 짜라. 이제는 평민들이 힘을 합쳐 귀족과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