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1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

간단하다. 외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는 그러므로, 그 언론이 자리잡고 있는 국가의 방역을 비판하기 위한, 헐리우드 액션이다.

마치 '엄친아'와 '엄친딸'이 완벽한 존재인 것과 비슷하다.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애여서가 아니라, 내 새끼 잘 되라고 혼내기 위해 엄마들은 자기 친구의 아들 딸을 세상 최고의 모범생이자 효자 효녀인 것처럼 칭찬한다.

외국 언론의 기사에서 한국이 바로 그 '옆집 걔'다. 외국 언론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나라인지 진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실제로 진심어린 예찬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한국 언론은 왜 이렇게 '해외 언론이 한국 방역에 깜짝 놀라 엄지척을 했다'에 집착하는 걸까?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방역 대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런 문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취재하는 대신, '국뽕팔이'에 도움이 될 요소들을 긁어서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내 언론에 소개되는 '해외 언론의 찬사'를 보면, 한국 언론의 수준에 화가 난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견인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이 하는 짓들은 어떤가. 국민을 '나랏님의 멋진 모습' 앞에 따봉 날리는 청맹과니 박수부대로 길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 같은 저질 기사가 계속 나오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선진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그 나라의 주요 언론을 아무리 뒤져도 한국처럼 이 와중에 이런 재앙을 소재로 국뽕팔이를 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다.

단적인 비교를 해보자. 뉴욕타임스에 '세계가 깜짝 놀라는 미국의 COVID-19 검사 속도' 같은 기사가 나오나? 안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뉴욕타임스'를 지향한다는 수많은 진보 언론은 그딴 기사를 하루가 멀다하고 내보낸다. 그 정도면 모를까, '미국인들은 사재기를 한다네요 우리는 안 하는데~' 같은, 불과 한 달 전의 현실을 까맣게 잊은 듯한 국뽕 기사도 최근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세계가 칭찬하는 한국'을 여태까지도 찾아 헤매는, 이 와중에도 그러고 있는, 그게 바로 우리 언론의 수준이고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 되려면 멀었다. 그런 면에서라면, 사회 엘리트의 건강한 정신과 판단과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20-03-19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었다.

'미국, 유럽인들은 왜 사재기를 할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은 안 그러는데?' 같은 소리 하면서 국뽕 빠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그짓 다 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2월 23일자 기사를 보자.

대량 구매 행렬은 대구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22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의 한 마트에서도 라면, 생수 등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같은 날 창원구 진해구의 한 온라인 카페에는 마트 내 유제품 판매대가 텅텅 빈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 코스트코 양재점에서도 매장 개점 이후 한 시간 만에 생수 수백 세트가 동났다. 서초구 거주자 박모 씨는 “서울도 이제 사재기 붐이 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나 생활용품 구매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회원 수가 19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파우더룸’에 ‘코로나19 때문에 100만 원을 썼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밖으로) 최대한 안 나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 비누, 세정제, 마스크, 생활용품 등을 사 놓았더니 10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이에 다른 회원들은 “나는 200만 원을 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실제로 온라인 주문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G마켓에 따르면 20일 즉석밥과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인 13일 대비 각각 54%, 80% 늘었다. SSG닷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부터 2월 20일까지 식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마트 먹거리 매대 ‘텅텅’…코로나19 확산에 ‘사재기’ 행렬 잇따라", 동아일보, 2020년 2월 23일

다들 좀 최소한의 품위를 갖고 살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불안하면 일단 주변 사람들 보고 따라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러 가면 나도 사러 가야 안 불안하다.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인들이 집이 넓고, 넓은 지역을 점유해서 살기 때문에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온라인 배송으로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즉 '생필품 서플라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직접 가서 우르르 사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다. 외국 네티즌들이 한국 약국 앞에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선 거 보면서 낄낄거리면 기분 좋겠나? 정말이지, 너무도 천박하다.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다. 한 달도 채 안 된 일이다. 윤리의 많은 부분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기억을 좀 하면서 살자.

2020-03-18

[캠페인] 지금, 세계문학전집을 읽읍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아주 잘 팔렸습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랑스 출판의 기틀을 닦은 가스통 갈리마르 평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령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 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 303-304쪽.

사회 활동의 제약이 있고, 가슴은 답답하고, 불평을 함부로 털어놓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런 상황. 그럴 때 2차 대전을 겪던 프랑스인들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고, 검증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죠.

21세기의 인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전에 Financial Times에서 본 보도에 따르면 COVID-19 발병 이후 중국의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 올랐다고 합니다. 다들 스마트폰 게임 아니면 유튜브, 혹은 SNS에서 뇌를 벅벅 긁으며 도파민을 쥐어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에코 체임버에 갇힌 채 답답해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일반적인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책장에도, 괜히 사두고 안 읽는 '세계문학 고전'이 한 두 권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읽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꼭 '세계 문학의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한참 전에 나온 책, 시간의 검증을 버텨낸 책, 그리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책을 우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지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그런 책 말이죠. 그럼 당연히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이런저런 소설들이 1순위로 거론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줄창 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둬서, 그럼 뭐 어쩔 건가요? 아이들은 시간이 남아 PC방에 가고 거기서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어른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웃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를 가고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인문주의자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단 하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읽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책과의 거리 좁히기' 입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식재료를 이번 기회에 털어 먹듯이, 책장 위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고전 소설들을 꺼내어, 읽읍시다.

사족) 저는 W. G. 제발트의 책 중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 <토성의 고리>는 한 번 읽었는데, <현기증/감정들>은 사놓고 아직 안 봤군요. 지금이 그것을 읽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각 나름대로 '아 이거 읽어야지 언젠가'의 리스트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에 적합한 시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2020-03-17

도쿄 올림픽,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진다면

나는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대신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올림픽은 관객 이전에 선수들을 위한 행사다.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거행되는 이 대회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진실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정은 지켜져야 한다.
  2. 올림픽을 보는 전 세계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올림픽 일정은 지켜지는 편이 낫다. 우리가 비록 약 100여년만에 전 세계적인 유행병과 싸우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모티베이션을 전달할 수 있다.
  3. 세계 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도 올림픽은 일정대로 치러지는 편이 낫다. 올림픽은 단지 스포츠 행사일 뿐 아니라 방송, 광고, 기타 비즈니스가 결부된 거대한 경제 이벤트다. 이것이 미뤄진다면 안그래도 휘청이는 세계 경제에 좋지 않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올림픽처럼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밀접하게 모여앉아 열광하고 환호하고 끌어안는 행사를 안 하는 게 좋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100% 무관중 올림픽이 답일 수 있다. 단 한 명의 현장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스포츠 중계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위기지만 동시에 큰 기회일 수 있다. 카메라 및 기타 장비와 스탭이 관중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며, 관중에게 보이더라도 최대한 덜 보여야 한다는, 스포츠 중계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핵심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지금 축구 중계에 관중석이 없다면? 그래서 스탭들이 원하는대로 영상을 찍고 뽑아낼 수 있다면?

수십개의 드론을 동원할 수도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크레인을 배치할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까지 차마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다양한 각도와 기법을 동원한 촬영이 가능해진다. 현장 중계지만 마치 각본을 가지고 찍은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완전한 미디어 스펙터클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수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드러내어 겨룰 온전한 기회를 얻고, 주최국과 IOC는 비즈니스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선수와 스텝, 방송 등 인원 전부를 합쳐봐야 1만명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감염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올림픽에 참여시키고 귀국시키는 것은 일본 정도의 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다. 일본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은 관중인데, 관중 없이 올림픽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라톤 같은 실외 스포츠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통제하면 된다. 혹은 마라톤 또한 실내 경기장에서 치름으로써,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마라톤 스코어'가 어떻게 될지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망상이니까 무슨 말을 못하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거다. 우리는 COVID-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 전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 또한 막아야 한다. 무턱대고 때려치우고 안하고 거리두기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성을 유지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지켜주는 것들은, 동시에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또한 올림픽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스포츠 중 상당수가 등장하는 무대에서, 100% 무관중 경기를 '관객'이라는 제약 없이 중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운동인가' 싶을 정도의 영상이 실시간 송출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나는 그런 것을 문득 보고 싶어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무턱대고 안하고 때려치우고 집에 틀어박히고 이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뉴노멀'이 닥쳐온다면 그 '뉴노멀'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올림픽 취소해라 일본 망해라 아베 좆돼라'라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불현듯 한마디 해 보았다.

덧) 올림픽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이 존재한다. 가령 말콤 글래드웰은 '올림픽을 나라 옮겨가면서 하지 말고 어떤 섬 하나를 '올림픽 섬'으로 정해서 4년마다 같은 경기장과 트랙에서 경기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각국에서 올림픽 유치 후 벌어지는, 많은 경우 훗날 쓸모없어지는 대규모 시설 공사가 낭비라는 것이다. 만약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대로 '올림픽 섬'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면, 관객까지 싹 격리하는 결과가 되므로, COVID-19 확산 따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