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윤미향·최강욱 공통 QR코드 마오쩌둥 ‘모순론’
帝国主义要的矛盾国家内部各阶级的一切矛盾要和服从的地位(마오쩌둥)
*제국주의가 주요 모순일 때 국가 내부 각 계급의 모든 모순은 부차적 복종적 지위로 추락한다
●반미주의자 딸의 미국 유학, 형사 피의자의 큰소리
●국가보안법보다 악랄한 민주당 ‘역사왜곡금지법’
●“주요 모순 결정적, 기타 모순 부차적”…졸작 ‘모순론’, 운동권 원리로
●‘토 달지 말고 따르라’는 권력투쟁 레토릭
●‘모순론’ 번안물 조성오 ‘철학에세이’는 스테디셀러
●불변의 주요 모순 “‘쟤들’이 더 심하지 않아?”
●‘친일파가 친미파 거쳐 지금도 기득권’이라는 역사소설
한때 순수했던 청년들이 나이를 먹고 권력을 잡으니 타락하고 말았다. 그들 스스로가 외치던 정의로운 도덕과 윤리를 내팽개친 채 자신들이 싸우던 상대와 다를 바 없는 기득권이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후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판이다.
가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모두가 개천에서 벗어나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본인들의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스펙을 쌓아주고 의학전문대학원에 부정 입학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2015년 위안부 협상을 뒤집어엎은 반미 성향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기 딸을 미국에 유학 보내놓고 있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는 조 전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로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형사 고발을 당한 피의자인데, 재판 중 당 대표로서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한다며 퇴정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물론 판사는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민주당과 ‘열린 사회의 적’
그 정도는 약과다. 현재의 여권은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며 폐지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자 양향자 의원을 대표로 한 여당 의원 31명이 ‘역사왜곡금지법’을 발의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보안법보다 더 악랄하다. 일제 식민통치 주장에 동조하거나 그들을 찬양·고무한 경우 징역형을 때리겠다는 거다. “일제 식민통치 옹호단체”를 대통령령으로 정해 판단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철학자 카를 포퍼가 말한 ‘열린 사회의 적’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40% 이하로 떨어진 일이 드물다. 여당 지지율 역시 야당과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구(舊)여권과 달리 현재의 집권 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 공정 사회 같은 가치를 자신들의 핵심 어젠다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가치를 내팽개친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층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중 잣대를 휘두르며 상대방을 겁박하는 여당과 청와대, 그리고 그 지지자들의 행태는 단순한 ‘내로남불’이 아니다. 그 내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대학 시절 배웠거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철학, 특히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을 발견할 수 있다.
‘모순론’은 마오쩌둥이 1937년 8월 옌안 항일군사 정치대학에서 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친 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적은 안팎으로 있었다. 소련에서 교육받고 온 다른 공산당원들과 노선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사물의 모순 법칙, 즉 대립물의 통일 법칙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변증법의 본래 의미는 대상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
‘모순론’의 첫 문장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보편적으로 모순이 내재하고, 그 모순 각각은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특수성을 지닌다. 하나의 사물이나 과정에 모순이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여러 모순이 있을 테고,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주요 모순’과 ‘기타 모순’의 구분법이 여기서 등장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
“따라서 어떤 과정이든지 그 속에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중에 반드시 주요 모순이 있어 지도적·결정적 작용을 하며, 기타 모순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이든지 모순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복잡한 과정을 연구할 때에는 주요 모순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지당한 말처럼 들린다. 가령 자동차가 여러 군데 고장 났다고 가정해 보자. 와이퍼가 작동하지 않고 블랙박스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며 엔진이 툴툴거린다. 엔진이 고장 나면 자동차가 멈춰버릴 테니, 카센터에 가면 엔진을 가장 유심히 살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면 와이퍼 고장이 주요 모순으로 등극할 수도 있고, 접촉사고라도 난다면 블랙박스가 안 켜진 것이 가장 뼈아픈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운동권 원리와 독재자 논리 사이
마오쩌둥이 이런 논리를 개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공합작을 펼쳤고, 일본군을 쫓아내고 난 후 다시 국민당과 싸우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한발 더 나아가, 공산당이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계급 해방을 앞세우지 말고 당면한 주요 모순인 국민당과의 전쟁에 집중하라고, 내부 분파들을 단속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모든 모순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며, “주요 모순과 부차적인 모순 양자를 구별하고, 주요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은 이후 거의 모든 운동권 담론의 바탕에 깔린 원리가 됐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떠올려보자. 한쪽은 대한민국의 성격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보았고 다른 쪽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파악했다. 전자는 미군 철수 및 통일운동을 주요 모순으로 보았고, 후자는 신식민지 주변부 파시즘의 극복을 주요 모순으로 설정한 셈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전자는 NL(민족해방), 후자는 PD(민중민주)의 세계관이다.
모순론은 운동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타 모순은 잠시 미뤄두고 주요 모순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는 내부의 이견을 묵살하려는 독재자에게 악용될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국내외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반일주의를 무기 삼아 야당과 시민사회를 탄압했다.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고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경제적 평등 따위는 기타 모순으로 취급하거나 그런 요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본토의 사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쫓아내더니 ‘내부의 모순’을 찾겠다며 눈을 번뜩거렸다. 학자마다 추산이 다르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7000만~8000만여 명이 정치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구를 합한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모순론이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고 그에 집중하라는 말은 ‘중요한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라’는 소리와 사실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자기계발서, 가령 스티븐 코비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같은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마오주의(Maoism)는 모순의 해결 방법 중 하나로 폭력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적대는 대립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다. 폭력이 갈등 해결 방법 중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뒷주머니에 꽂은 홍위병들이 죽창을 들고 설친 건 우연이 아니다.
철학 텍스트로서 ‘모순론’은 졸작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미완성작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이고 무엇이 기타 모순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판단의 원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모순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둥, 사물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둥, 중언부언이 이어질 뿐이다.
그 허술함은 의도된 것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인지 미리 정해서 글로 써놓으면 마오쩌둥 본인의 권위가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결정하는 것, 일관성 없이 뒤바꾸는 것, 기타 모순에 집착하는 분파주의자를 지목해 숙청하는 것, 그것이 마오쩌둥이 휘두른 권력의 본질이었다. 결국 ‘모순론’이라는 텍스트는 ‘내가 제시하는 모순이 주요 모순이고, 네가 주장하는 의제는 기타 모순이니, 토 달지 말고 지도부를 따르라’는 뜻이다.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를 외치며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레토릭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문제는 이 내용 없는 형식이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면서, 이제는 대학가를 넘어 일반 교양 차원에서 비판 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데 있다. 1983년 초판 출간 이후 지금껏 꾸준히 팔리고 있는 조성오의 책 ‘철학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송건호 등이 지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영화 ‘변호인’을 통해 한층 더 유명해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과 더불어 386세대의 정신세계를 규정지은 대표적인 저작물로 꼽히는 이 책은, 마오쩌둥주의를 구어체로 풀어쓴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셋째 마당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모순론’의 번안물에 가깝다. 주요모순이라는 개념이 소개되고, 중국혁명과 만주사변, 국공내전 등이 사례로 제시되기까지 한다. 그 결과 도출되는 결론은 앞서 인용한 마오쩌둥의 말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주요 모순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모순을 일시에 전부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분산되어 문제의 해결이 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애초 익명으로 출간됐던 ‘철학 에세이’는 1993년 저자 조성오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다시 나왔다.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적 붕괴로 인해 기존의 운동권 사상은 힘을 잃는 듯했고 사회구성체(사구체)와 혁명을 논하던 왕년의 이론가들은 노마드(nomade·유목민)와 탈주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탈바꿈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철학 에세이’는 내용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새롭게 열린 논술 사교육 시장의 주요 입문 서적으로 소화됐고, 오늘날까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며, 모순론은 철학적으로 완성도가 낮은 권력투쟁의 레토릭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자유주의를 내 삶의 신조 중 하나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철학 에세이’의 판매와 유통 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특정한 성향의 출판물을 비판 없이 수용해 왔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며, 그 내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86세대, 혹은 그보다 더 젊은 고학력층에서 흔히 관찰되는, 여당과 청와대에 대한 ‘묻지마 지지’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모순론’의 사고방식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감성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렬 지지층이 아닌, 지적이고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는 교양인이면서도 선거 때마다 현 여권에 표를 던지는 사람과 정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상대방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도 쟤들 찍을 수는 없잖아.” 여기서 ‘쟤들’이란 당연히 현재의 미래통합당, 그 이전의 자유한국당, 과거의 새누리당, 그보다 앞서 존재했던 한나라당 등이다.
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에게 저 계보로 이어지는 ‘쟤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고 가능하다면 존재 자체를 말살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간주된다. ‘쟤들’을 이기는 것이 주요 모순인 셈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요소는 기타 모순으로 격하된다. 정경심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건 말건, 청와대가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건 말건,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과 댓글 조작을 했건 말건, 윤미향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를 앞세워 자기 통장으로 성금을 모아놓고 어디에 썼는지 오리무중이건 아니건, 다 눈감아버린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돌아오는 건 이런 반응뿐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더 심하지 않아?”
‘쟤들’의 어떤 부분이 문제냐고 물어보면, 광주에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군사독재 세력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는 답이 가장 흔히 등장한다.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두 사람을 사면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판단을 바꾸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친일파가 미군정 시기를 거치며 친미주의자로 탈바꿈했고, 그 친미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했으며, 오늘날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는 일종의 역사소설을 주요 모순의 주춧돌로 삼고 있기에, ‘쟤들’은 뭘 해도 나쁘고, 우리 편은 뭘 해도 ‘쟤들’보다는 낫다. 선악 이분법에 근거한 사고방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 가지 해법이 있다. 첫째, 주요 모순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일군의 현대 철학자들이 구좌파에 가까운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택한 경로이기도 하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앞서 말했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갈 곳을 잃은 왕년의 운동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장식 삼아 둘러대는 일이 많았다. 애초에 서양 현대철학의 복잡한 논쟁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인 만큼 노력에 비해 소득이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테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의 비리 혐의가 터져 나온 이후의 상황을 복기해 보자. 한국 운동권의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에 그토록 비판적이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팔을 걷고 나섰다. 윤미향과 정의연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을 부추기는 한미일 동맹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주요 모순인 반미주의를 위해 횡령 같은 기타 모순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는 소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저런 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윤미향의 ‘내로남불’을 아무리 지적해 봐야 소용 있을 리가 없다.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의제를 선점하고 지켜내야 한다. 이 경우는, 결국 돈 문제다. 2020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땀 흘려 번 한 푼의 가치를 안다. 등산 소모임을 해도 회비 걷고 쓴 내역을 정리해서 카카오톡으로 공유하는 게 일상화된 나라다. 돈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분위기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시민들은 돈 문제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논의돼 자신이 낸 세금과 기부금 등이 좋은 곳에 소중하게 쓰이는 나라에 살고 싶어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는 그토록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으면서도 공적인 발언의 장에서는 청빈과 자본주의 극복 따위를 떠들어대는 저들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은 공산주의도 전민(全民) 항쟁도 원치 않는다. 도덕을 사유화한 특권 계층만 잘사는 위선과 모순의 나라가 아닌,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하고 여유로운 자본주의 국가를 원할 뿐이다.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오늘날의 백성에게는 돈이 곧 밥이고, 밥이 곧 돈이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건강하고 투명한 회계에 바탕을 둔 좋은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싸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이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 신동아 2020년 7월호(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887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