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4

행정수도,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아니냐, 한 나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수도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께.

미국의 수도가 왜 워싱턴 DC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여 13개 주가 연방을 결성할 때, 가장 힘이 셌던 두 도시가 있습니다. 뉴욕 주의 뉴욕 시,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 시.

지금 구글 지도를 펴서 미국의 동부 지도를 보십시오. 워싱턴 DC가 어디 있습니까? 네, 그렇죠. 뉴욕과 리치몬드의 중간에 있습니다. 가장 힘이 센, 남부와 북부를 대변하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연방의 수도를 새로 만든 겁니다.

이건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인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힘이 센 도시 두 곳은 어디? NSW의 시드니, 그리고 빅토리아주의 멜버른. 그럼 연방국가 호주의 수도는? 그렇죠.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 지대에 만든 인공 도시 캔버라가 되는 겁니다.

캐나다의 수도가 오타와인 이유도 똑같습니다. 서부가 개척되기 전, 가장 센 도시 두 곳, 몬트리올과 토론토. 둘 중 어디도 자체적으로 수도가 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기에 중간 지점인 오타와가 연방의 수도로 낙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세종이 무난하게 행정수도로 기능하려면, 부산이 서울에 맞먹을만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1차 세계대전 수준의 무장을 해서 전쟁을 했을 때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만큼) 힘이 강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 지점인 대전이나 그 인근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게 말이 되죠. 아니,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서울과 수도권을 합치면 인구의 절반이 들어가고 산업생산 역시 절반을 넘깁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권역은 중화학공업 생산기지와 항구를 가지고 있지만 수도권과 별도로 헤게모니 싸움을 할 역량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서울은 장기적으로 황폐화되고, 잘못 만들어진 세종시가 제2의 서울 강남 기타등등이 되어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골때리는 수도권 과밀 현상을 겪게 될 겁니다.

한국의 식자층 여러분, 꿈을 꾸는 건 좋지만,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소리들을 좀 하고 삽시다. 한국은 앵글로색슨이 주류가 되어 만들어낸 연방국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 나라의 풍토에서는 '행정수도' 같은 기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부의 핵심 기능을 세종으로 옮긴다는 건, 그냥 서울을 다 옮긴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세종으로 옮기면, 지금 서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몇 배 더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현될 겁니다.

덧) 한국의 행정수도 논란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2020년 현재, 갑자기 프랑스가 '국토 균형 발전'을 꾀한다며 파리와 마르세유의 중간 지점인 (심지어 제3의 도시 리옹도 재껴둔 채) 군소 도시 클레르몽페랑을 수도로 삼네 마네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이 수도 일극에 집중된 다른 나라를 예로 들어보니 감이 확 오지 않습니까?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운운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큰 혼란과 재앙을 초래할지?

덧2) 일본은 관서의 오사카, 관동의 도쿄가 전쟁을 해서 도쿄가 이겼죠. 도쿄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고히하고자 천황을 '모셔와서'(납치해와서) 도쿄에 데려다 놓고 있고요. 그래서 일본의 수도는 지금껏 도쿄인 겁니다.

아, 국토의 균형 발전, 그거 참 좋은데, 일본도 도쿄와 오사카의 중간 어디쯤에 행정수도를 만들면 좋겠네요.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입장에서 절호의 기회가 될텐데.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을 추격하는 경쟁국들에게 아주 큰 기회를 공짜로 헌납하고 있는 셈입니다.)

2020-07-30

정진웅 부장검사의 폭행: 사안의 본질은 가학수사

정진웅 부장검사가 한동훈 검사장의 스마트폰 USIM을 뺏는다는 명분 하에 달려든 사건에 대해, 사건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 본질을 호도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사안의 본질은 가학수사다. 국가가 범죄 수사를 명분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 피해자가 검사장이건 시정잡배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때린 게 핵심이다. 박종철을 '탁'하고 쳐서 '억'하고 죽었다고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수사기관이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주하는 용의자를 체포할 때 뿐이다. 그 외의 경우에 수사기관이 폭력을 쓰는 게 용납된다면, 해당 국가는 순식간에 독재로 돌아가고, 경찰은 그 독재의 도구로 악용되게 된다.

검사들끼리 '개싸움'한 거라고? 프로레슬링 같은 거 했다고? 그런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당신들은 다가오는 독재의 위험을 애써 무시하려 드는, 신독재세력의 부역자들이다. 사안의 본질은 인권이다. 그것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언제나 가장 중요하게 보호되어왔던, 피의자의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함께 진지하게 분노해야만 할 시점이다.

2020-07-27

캐릭터의 제약과 난이도의 문제

조지 R. R. 마틴에게 있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중 가장 쓰기 어려운 캐릭터는 브랜이었다고 한다. 가장 어리고, 게다가 이야기의 초반에 추락하여 두 다리를 잃은 후로는 다른 캐릭터에게 의존하는 캐릭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좀 더 심층적으로 해석해보자. 캐릭터에게 제약이 존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작가는 캐릭터가 지니는 불리한 요소들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내면과 활동을 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게 되고 만다.

이는 요즘 잘나가는 '웹소설'이라는 장르에 왜 이렇게 '전생물'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사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생의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가는 '사이다' 구성이, 구체적인 장르를 불문하고 웹소설의 표준적 작성 방식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다'를 원하는 대리만족의 욕망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조지 R. R. 마틴이 브랜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현생을 다시 살아가는 먼치킨 캐릭터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고생하는 캐릭터에 비해, 작가 입장에서 보면 훨씬 '쉬운' 캐릭터임에 분명한 것이다. 만들기도 쉽고 이야기도 술술 풀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공급이 끊이지 않으므로 재미를 찾는 독자들은 공급되는 것을 읽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안고 태어나는 자의 정신적 황폐함'에 대해서는 이미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갈데까지 간 사고실험을 해서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물은 계속 나올 것이고, 독자들은 계속 소비할 것이다. 혹자는 손쉽게 독자들의 수준을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생산자들의 문제가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2020-07-26

[신동아] 여권이 조장한 ‘북한 판타지’ 기원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여권이 조장한 ‘북한 판타지’ 기원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
2020-07-26 10:00:01
  • [사바나]
    ● 여권 지지자 정신세계 속 ‘김진명 유니버스’
    ● 남북 힘 합쳐 외세 무찌르자는 민족합체물
    ● 국뽕, 반일, 반미로 점철된 1990년대 대중문화
    ● 북핵 용납해 日에 ‘본때 보여주자’는 ‘뜨거운’ 정념
    ● 소설·영화 속 北은 ‘낯설지만 南에 힘 되는 존재’
    ● 현실 속 北은 ‘고의로 南 인명 해치는 유일한 국가’
    ● 젊은 세대 대북觀 잘 반영하는 쪽은 장강명
    ● 민족합체물 대체 못하는 보수·중도의 빈곤한 대북담론
사바나 초원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2018년 9월 14일 남북 고위 관계자들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했다. 그로부터 1년 9개월여가 지난 6월 16일 북한은 사무소를 폭파했다(왼쪽).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9월 14일 남북 고위 관계자들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했다. 그로부터 1년 9개월여가 지난 6월 16일 북한은 사무소를 폭파했다(왼쪽).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반도 정세와 북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대중적 인식을 알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고 외국인 연구자가 부탁한다면 당신은 어떤 제목을 댈 것인가? 나는 주저 없이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라고 할 것이다. 그 어떤 학자가 쓴 진지한 연구 서적이나 기자가 쓴 충실한 논픽션이 아닌, 소위 ‘국뽕’ 소설을 보라고 권할 것이다. 

북한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 중 상당수는 ‘김진명 유니버스(Universe)’에 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문재인 정권의 탄탄한 지지층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민족에게는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가 있지만, 그것은 일본과 미국 등 외세에 의해 빼앗기거나 가로막혀 있으며, 남과 북이 힘을 합쳐 그 장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세계 초강대국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단순한 서사다. 그것이 상당수의 대중, 특히 여권 지지자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진명 유니버스’를 이해하는 것은 현실의 북한에 대한 구체적 사실관계 몇 가지를 챙기는 일보다 남북관계를 읽는 데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식의 구호를 좋아하는 여권과 그 지지층의 성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남북통일만 하면 하루아침에 일본도 미국도 넘보지 못할 주체적인 초강대국으로 거듭난다는 판타지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북정책과 외교에 미치는 영향을 알 필요가 있다.

김진명 소설 속 ‘일본 응징 시나리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재미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모티프로 삼은 이용후 박사는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천재다. 그는 박정희의 부름을 받아 핵개발에 참여했지만 1978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물론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다. 범인은 폭력조직 잔나비파의 두목 박성길. 반도일보의 기자 권순범이 취재를 시작하자 박성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권순범이 도달한 결론은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미국이 주도한 국제 신디케이트가 가로막았다는 것이었고, 미스터리를 끝까지 추적한 끝에 청와대에 놓여 있던 청동 코끼리상에 플루토늄이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남과 북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상대의 동의를 구해야 발사 가능하도록 견제 장치를 걸어놓는다 

정통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띤 소설 그 자체도 인상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설 속의 소설로 등장하는 일본 응징 시나리오다.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송유관이 완성되자 미국과 일본은 불안감을 느낀다. 일본 극우 단체가 독도에 상륙해 할복 퍼포먼스를 벌이고 독도를 점령한다. 한국은 공군을 동원하지만 일본의 압도적인 전력을 이겨낼 수 없다. 미국은 뒷짐 지고 방관한다.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포항제철을 공습한다. 우리에게는 핵이 있으니 공격을 중단하라는 경고를 일본은 무시한다. 한국의 대통령은 북한에 핫라인으로 연락하고, 일본의 무인도를 향해 핵폭탄을 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미리 말해둘 필요가 있겠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출간된 것은 1993년이었고, 당시 대중문화는 (그때는 그런 용어가 없었지만) ‘국뽕’과 반일, 반미로 점철돼 있었다. 가령 만화가 이현세는 스토리작가 야설록과 힘을 합쳐 1994년 ‘남벌’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중동에 발생한 무력 분쟁으로 인해 석유 수입에 곤란을 겪은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무력 점령하면서 한국인들을 억류하고, 이에 양국 간 갈등이 커져 전쟁으로 비화하는데, 결국 한국이 이긴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북한의 공헌이 지대하다. 한국이 제공한 장비를 이용해 북한 기술자가 일본의 전파를 교란하면서 “남조선에서 넘어오는 TV 전파를 매번 차단하고 있던 터라 기술력이 좋다”고 너스레를 떤다거나, 고도로 훈련된 북한 특수부대가 한국에 노하우를 전수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일본을 무찌르는 이야기 구조 자체가 일종의 ‘원형 서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나가 된 남북의 저력은 고작 일본만 이기고 말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경진의 소설 ‘데프콘’ 시리즈에 따르자면 그렇다. 통일 한국의 국력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대만을 무력으로 병합하고 베트남까지 위협하던 중 통일 한국에까지 총부리를 겨눈다. 외세에 의해 분단됐을 때에는 주변 열강에 치이는 신세였지만 하나가 되고 나니 우리 민족은 정말 강했기에, 개성과 서울에 핵폭탄을 맞고도 중국을 이기고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이것이 1996년 처음 출간된 ‘데프콘’ 시리즈 1부 ‘한중 전쟁’의 내용이다. 통일 한국은 일본과도 싸워서 이기고, 심지어 태평양 건너 미국과도 전쟁을 해서 그들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놓고 만다.

‘북핵, 南에 위협 아니다’라는 민족합체물

2017년 개봉한 영화 ‘강철비’는 북한 핵무기 절반을 한국이 넘겨받으면서 끝난다. [와이웍스엔터테인먼트 제공]

2017년 개봉한 영화 ‘강철비’는 북한 핵무기 절반을 한국이 넘겨받으면서 끝난다. [와이웍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남북이 힘을 합쳐 미국을 대표로 한 외세를 이겨내고 자존심을 드높이는 이야기 구조는 최근에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또 소비되고 있다. 웹툰(Webtoon)을 영화화한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와 그 후속작인 ‘강철비2: 정상회담’이 대표적이다. 2017년 작(作) ‘강철비’는 북한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권력 1호’가 한국에서 은밀히 치료받는 가운데 일본·중국·미국 등 열강의 입김이 오가다 결국 북한 핵무기 절반을 한국이 넘겨받으면서 끝난다. 최종 445만여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7월 29일 개봉을 앞둔 ‘강철비2: 정상회담’의 전개와 결론도 전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더 강해질 테고 외세를 몰아낼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를 지닌 작품들을 통틀어 ‘민족합체물’이라고 불러보자. 로봇이 합체·변신해 막강한 악당을 물리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연상하면 된다. 민족합체물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심각하다. 단지 대중소설이나 영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합체물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북한의 핵은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통일 후 우리의 소유가 되거나, 설령 통일되지 않더라도 북한이 겨냥하는 적은 미국 혹은 일본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사실관계를 조금만 떠올려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바로 얼마 전 북한은 개성공단 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해전, 1990년대로 돌아가면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도 떠올려볼 수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중 군사력을 동원해 고의로 한국의 인명을 해치고 재산상 피해를 유발하는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은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나의 상식이 다른 사람의 상식과 꼭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김진명 유니버스’에 사는 이들의 상식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소수의 대중문화 애호가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2017년 갤럽에서 14개국을 대상으로 수행한 비교 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 있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미국 46%, 일본 45%, 한국 35%로 나타났다. 고작 2년 전인 2015년 북한에서 비무장지대에 매설한 목함 지뢰에 우리 군인 두 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65%의 한국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단 한 편의 소설이 이런 거대한 착시를 불러왔다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과대평가일 테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쏟아진 민족합체물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본다면 그 또한 대중문화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이 있건 없건 한국인의 일상은 끊이지 않고 흘러간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문화 콘텐츠 속의 북한은 언제나 ‘낯설지만 결국 우리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니, 65%의 국민이 북한의 핵 사용 가능성을 ‘없다’고 생각하는 게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북한의 핵을 우리가 넘겨받음으로써 핵보유국이 되는 시나리오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김진명 스스로가 2019년 11월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통일하면 우리 건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한국은 결심만 하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어요. 한국이 핵무기를 만드는 건 미국이 동의할 때입니다. 한국이 핵을 만드는 건 미국하고 바로 적이 되는 것인데, 어리석은 것이죠.”

장강명과 ‘최선의’ 北 붕괴 시나리오

소설가 김진명(63)은 1993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초판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외세의 벽을 넘어설 때 초강대국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사를 갖고 있다. [조영철 기자]

소설가 김진명(63)은 1993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초판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외세의 벽을 넘어설 때 초강대국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사를 갖고 있다. [조영철 기자]

그런데 이 말을 선뜻 믿자니 좀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인터뷰를 하기 3개월 전인 2019년 8월, 김진명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소설 속 소설로 등장한 일본의 한국 침략 시나리오를 만화로 각색해 출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 단체가 독도를 점령하면서 무력 충돌을 도발하고, 남과 북이 함께 만든 핵폭탄을 맞아 백기를 든다는 줄거리가 모두 동일한 그 작품의 이름은 다름 아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그렇다. 일본에서 반도체 제작 공정의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 수출을 막았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 내놓은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책 표지에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캐리커처가 각각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의 한 문장을 읽어보자. “일본의 독도 침략과 경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책은 변화된 지금의 국제 관계를 냉정히 직시해 보자는 생각으로 기획 제작되었다.” 

북한과 힘을 합쳐 일본을 핵무기로 굴복시킨다는 폭력적 쇼비니즘(맹목적·호전적 애국주의)이 담긴 내용으로 무엇을 ‘냉정히 직시’하자는 것일까? 알 길이 없다. 대신 분명한 사실 하나가 남는다. ‘민족합체물’의 소비자에게 허구와 현실의 경계는 매우 희박하거나 없다. 설령 현실이 그들의 허구에 맞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꿈은 이루어지고, 길은 처음부터 나 있는 게 아니라 걷다 보면 만들어지며,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설령 민족합체물이 소비의 대상에 머무는 게 아니라 북한 전반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들 그것을 문화계 외부의 힘으로 밀어내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해법은 현실에 입각해 혹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할 수 있는 더 나은 서사 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소비해 ‘대세’를 바꾸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을 펼치기가 현재로서는 매우 묘연한 상황이라는 데 있다.
 
가령 소설가 장강명의 2016년 작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펼쳐보자. 이야기는 ‘최선의’ 북한 붕괴 시나리오에서 시작한다. “김씨 왕조가 평화적으로 무너졌고, 국지전이 발발하지 않았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지 않았고, 중국 군대가 북한에 주둔하거나 북한 일부가 중국에 편입되지도 않았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북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추정컨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소 거품이 껴 있긴 하지만 120만여 명의 병력이 존재하지만, 군사 영역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철저히 실패하고 망가진 곳이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는 미국과 패권을 다투며, 티베트와 신장위구르를 병합한 전례가 있는 중국이 있다. ‘북한 붕괴로 인한 통일’이라는 사건이 소설의 묘사처럼만 벌어진다면 실로 역사적 행운일 수밖에 없다.

일본에 핵 쏘는 군국주의 판타지

그럼에도 ‘우리의 소원은 전쟁’의 줄거리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강민준이 군대에 두 번 가게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한의 치안을 한국이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이 도맡게 됐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적이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지나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사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타국에 군대를 보내 치안을 유지하고 통치하는 상황 자체를 잘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입해 북한의 치안과 행정을 수립해야 할 테지만, 소설 속에서는 한국 정부에 그런 의지가 없는 상황이 제시된다. 결과는 예상할 수 있는 바다. “김씨 왕조 시절의 북한은 불량 국가, 막장 국가였다. 김씨 왕조가 붕괴된 뒤 북한은 좀비 국가가 되었다. 국가라는 탈을 간신히 쓴 약육강식의 무정부 사회였다.” 

독자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재미있다. 액션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장르 소설을 처음부터 지향하고 만든 작품이다. 김씨 집안의 세습 독재가 끝난 후 디스토피아가 돼버린 북한 지역은 그러한 이야기의 무대로서 완벽하게 작동한다. 작가는 미국의 전직 군인이자 탐정 캐릭터인 ‘잭 리처’를 오마주한 전직 북한 특수부대원 ‘장리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래서인지 독자의 반응도 좋았고, 비록 실제 제작되지는 않고 있지만 영화 판권도 금세 팔렸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제2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거듭나지 못했다. 두 작가가 등에 업고 있는 대중적 정념의 차이 때문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북한의 핵을 용납하고서라도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말하자면 ‘뜨거운’ 정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소설이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어본 적도 없거니와, 저비용항공의 출현 이후에는 돈 몇 푼만 생기면 국내 여행 대신 일본 여행을 택하던 젊은이들이 불현듯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인증 샷을 올리던 지난해 이맘때의 광경을 떠올려보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가 지지 기반이 약해졌다 싶으면 반일감정을 부추겨 동력으로 삼았을 만큼 광복 이후 이 땅에서 반일주의는 실패한 적 없는 대중 동원 코드다. 

반면 ‘우리의 소원은 전쟁’에는 ‘차가운’ 정념이 깔려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울하다. 김씨 일가가 정당치 못한 방식으로 권력을 틀어쥔 채 북한 주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군사 행동도 불사하자고 목청을 높이자니 ‘틀딱’(노인을 비하하는 말)처럼 보일 것 같고, 전쟁은 더더욱 피하고 싶고, 그렇다고 북한이 붕괴하는 것도 딱히 원치 않는, 끝없는 ‘판단 보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최선의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전제하더라도 디스토피아 속에서 벌어지는 액션 활극은 일본에 핵을 쏘는 군국주의 판타지를 능가할 만한 말초적 쾌락을 안겨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북한의 현실뿐 아니라 그 북한을 바라보는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시각을 한결 더 잘 반영하는 쪽은 장강명이다. 최근 통일연구원이 수행한 ‘통일의식조사 2020’을 보면 “북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20대와 30대 모두 65% 이상이 ‘관심 없다’고 답했다. 연령대를 전체로 넓혀놓고 봐도 61.1%가 ‘관심 없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응답자 중 10.5%에 불과했다.

덜 군국주의적이며 더 휴머니즘적인

국민 중 절반 이상은 사실 북한에 관심이 없고, 전쟁만 나지 않으면 만족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사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험적인 대북정책이 연이어 시도됐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대중 서사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민족합체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실의 대북정책은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정전협정 체제를 종식시키자는 민족합체물에 더욱 가까워졌고 말이다. 

민족합체물을 대체할 만한 북한 소재 서사가 없다는 점은 보수 및 중도 진영이 북한 관련 어젠다 설정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북한을 절대악으로 삼는 반공주의 서사는 원래 인기가 없었고 질이 낮았기에 시장에서 자연스레 퇴출됐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진보 진영에서 민족주의적 열망을 고스란히 흡수해 민족합체물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숙달하는 동안 보수·중도 진영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그 결과 대한민국은 국민의 90%가 김정은을 믿지 않으면서도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북한이 원치도 않는데 남북철도를 놓겠다고 설쳐도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북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의 이야기 속에 북한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변화한 현실에 맞는 대북정책 뿐만이 아니다. 북한을 바라보고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민족합체물’보다 덜 군국주의적이며 더 휴머니즘적인 어떤 사고와 서사의 양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신동아 2020년 8월호

원문 링크: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129320/1

2020-07-19

인용: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문학과 도덕성

저는 '도덕성'이라는 단어가 일본 문학에서는 '더러움'과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말은 확립된 도덕성에 반하는 경우에만 나타납니다.

하루키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 교수 시절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