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3

[신동아] 의사 투사 만든 건 8할이 文의 ‘반쪽 공공성’

일러두기: 신동아에 '뷰파인더'라는 고정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매주 한 편씩 다양한 시사 이슈를 다룹니다.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정통 시사 월간지의 웹 지면 및 종이 지면을 허락해주신 편집부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의사 투사 만든 건 8할이 文의 ‘반쪽 공공성’

[노정태의 뷰파인더①] 툭하면 ‘공공성’ 외치는 與, 본질은 民 쥐어짜기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
2020-09-13 10:00:01
 
  • ● 대단지 아파트, 주택가에는 없는 편의 제공
    ● 학교부지 기부채납, 건폐율 제한 등 민간 의지한 덕
    ● 공적 재원 투명하게 걷는 대신 민간에 부담 떠넘겨
    ● 병원 안 짓고 당연지정제로 민간 통제해 공공의료 지탱
    ● 금전 부담 넘기려 1981년 사립 유치원 설립 허용
    ● 원아 1人당 보조금 지급 방식 탈피 어려워
    ● 공공의대 설립·지방 강제근무? 수가 조절·병원 확충부터
    ● 비용 전가할 대상 찾는 與, 조선시대식 사고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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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 우리 동네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몇몇 모퉁이와 전봇대 근처가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다. 재활용 쓰레기 놓는 곳과 종량제 봉투 버리는 곳 사이에 암묵적 구분은 있지만 명확한 규칙은 없다. 사람들은 집에서 적당히 분류해 온 캔, 비닐, 종이 등을 이미 쌓인 쓰레기 위에 또 버린다. 

평생을 한국에서, 그중에서도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런 광경을 일종의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였다. 내 생각의 틀이 깨진 건 모든 사람이 일상의 온갖 자투리를 시시콜콜 떠벌이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대가 시작되면서였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겪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관리사무실이 너무 엄격하다’는 둥, ‘재활용 기준이 혼란스럽다’는 둥, ‘일회용 그릇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다’는 둥,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새로 설치돼 너무 좋다’는 둥. 온갖 낯선 이야기의 바탕에 공히 깔린 전제가 있었다. 주택가와 다른 어떤 ‘시스템’이 있다는 것. 그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모종의 강제력을 행사하고 입주자 역시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복도와 공공성이라는 화두의 출현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총 편집을 맡은 다섯 권짜리 대작 ‘사생활의 역사’를 펼쳐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생활의 영역과 공적 영역이 대립한다고 여기지만, 발생론적으로 따져보면 두 공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주거 공간에는 복도가 없었다. 방과 방은 쭉 이어져 있었다. 왕이 사는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옥에도 복도는 없었지만 한반도의 주거용 건축물은 모두 단층이고 문을 열고 나가면 마당 등 실외 공간과 연결됐다. 유럽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많았는데도 복도가 없었다. 

이에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었다. 내 방이 건물의 안쪽에 있고 현관을 통해 나가려면 중간에 다른 사람의 방을 지나가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남이 옷을 갈아입는 중이건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중이건,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방을 통과해야 한다. 프라이버시(privacy)를 지키는 것도 혹은 지켜주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사뭇 달랐다. 방과 방 사이에, 그 누구의 방도 아닌 오직 사람의 이동과 연결만을 위한 공간인 복도라는 형태가 출현했다. 내가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남이 들이닥칠 위험도, 또 남이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부득이하게 침해할 우려도 복도의 출현으로 확연히 줄었다. 

복도는 방과 방 사이, 방과 현관 사이를 연결하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을 갖지 못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자기 방이 아닌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해야 한다. 또 복도를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삼거나 방에서 넘쳐나는 물건 따위를 늘어놓는 용도로 써서도 안 된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복도에 짐 쌓아두고 쓰레기 놓는 얌체 입주자 문제로 흔히 생기는 갈등을 연상해 보면 된다. 

공용 공간의 존재는 ‘공공성’이라는 화두를 수면으로 끌어냈다. 공적 자원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누군가가 이를 사적으로 유용하지 못하게끔 강제하는 규칙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참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공적 자원’을 형성, 유지, 관리해야 하는 임무가 공적으로 주어진 거다.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없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4일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 사이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공공재’에 빗댄 피켓이 보인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4일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 사이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공공재’에 빗댄 피켓이 보인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물론 아파트의 관리 방식이 완벽하지는 않다. 층간 소음을 비롯해 여러 문제가 있을 테고,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 갖춰진다 한들 자기 이익만 챙기고 공적 영역을 무시하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단 시스템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경우와, 시스템을 갖출 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의 낡은 주택가에는 공용 공간으로 쓸 수 있는 부지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동네’에서의 가족 같은 삶에 대한 동경을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아파트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알지도 못하고 경험할 생각도 없는 주택가의 현실이 이렇다. 허구한 날 싸운다. 쓰레기 때문에 싸우고, 주차 때문에 싸운다. 처음 택지를 구획할 때 쓰레기 모을 장소도 차를 대놓을 장소도 따로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위치에 사는 사람은 자기 집 앞이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여서 일주일에 사흘은 창문을 열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사 온 뒤에야 깨닫는다(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내가 이런 일까지 겪었다는 건 아니다). 공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공용 부지 자체가 부재했던 탓이다. 

강남좌파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서로 돌보고 아끼고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세상에 없다. 대한민국 대다수 주택가와 같이, 공용 목적으로 있어야 할 부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화목한 동네 생활이 불가능하다. 마치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남의 방을 들락거려야 했고, 이에 사생활이라는 게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살면 사이가 더 좋아지기는커녕 싸울 일만 늘어난다. 복도가 생기면서 프라이버시가 확립되고 근대적 자아가 탄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주택보다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단지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표준적 주택가가 제공하지 않는 ‘공공성’을 제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다. 대규모로 재개발할 경우 입주자들이 초등학교 부지 등을 기부채납하게 돼 있다. 내부 조경은 잘 가꿔져 공원처럼 산책하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그 또한 주택가에도 있어야 하지만 실상은 없다.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니 우리 동네를 재개발하자고 하면 다들 찬성한다. 더 나은 삶은 내 집뿐 아니라 수많은 공용 공간에서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 떠넘긴 국가의 역할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까지 파업에 가세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대한전임의협의회 소속 의사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까지 파업에 가세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대한전임의협의회 소속 의사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개인적 체험까지 덧붙여가며 길게 설명한 이유는 살아보지도 않은 ‘아파트 찬가’를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또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다. 애초에 공용 공간을 고려하지도 않고 구획된 토지 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너무 불편하고 싸울 일도 많다. 새로 개발되는 아파트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내 집 앞에 쓰레기가 쌓일 일도,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불편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이 글에서는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등은 논외로 한다). 

정작 그 해결 방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 구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새로 단지를 개발할 때 초등학교 부지 등의 기부채납을 요구하는 경우를 예시로 삼아보자. 너무 일반화된 방식이라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학교 부지는 공교육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중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다. 미국처럼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부지 비용은 국가가 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공원 같은 녹지 및 휴식 공간을 국가가 마련하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지을 때 건폐율이나 용적률 등의 제한을 둬 주민들이 나누어 부담하게 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개별적 사안에서는 그러한 접근법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성’ 개념을 엄밀히 따져보면 이상한 일이다. 국가가 공적 존재로서 제 기능을 한다면, 많은 공원 부지를 직접 확보하고 이를 주거 용지 곳곳에 적절히 배치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는 공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전체 사회를 위한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세금이라는 공적 재원을 투명하게 걷고 활용하는 대신, 사적 영역으로 그 부담을 떠넘기는 방식이 일반화돼 있다. 비단 주거 문제뿐 아니라 수많은 영역에서 같은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공공의 비용을 공적인 방식으로 걷는 대신, 다양한 경로를 활용해 사적인 영역에서 부담토록 하는 것이다. 

의사 파업 문제의 본질도 결국은 공공성의 비용이라는 논쟁거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밑에는 대한민국 의료 제도의 핵심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지정 의료기관으로 정해져 있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환자 본인부담금 제외 후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야 한다. 국가는 시술, 처방 등 모든 의료 행위에 병원이 청구할 수 있는 액수를 미리 정해 놓는다. 요즘 부쩍 많이 거론되는 ‘의료수가’다. 

환자, 즉 국민 처지에서 보면 이 제도는 대체로 좋다. 경제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건강보험에 가입한 상태인 만큼, 치료비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자기부담금도 낼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의료급여 대상자로 따로 보호받는 만큼,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나라는 아닌 셈이다. 

반대로 병원 처지에서 이 제도는 좋지 않다. 의료 행위는 넓은 의미의 서비스다. 병원은 서비스의 가격을 스스로 설정할 수 없다. 경제학 원리를 적용해 보면 의료수가가 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격 설정에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느 정도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 말도 원론적으로 옳다.

학교·병원·유치원 짓는 대신 택한 방법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관계자들이 각 병원에 보낼 손피켓을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관계자들이 각 병원에 보낼 손피켓을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한국 의료의 공공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국민은 언제라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비용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퍽 저렴하다. 국민 대부분은 현재 수준의 의료 공공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의 제도 변화는 원치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단체의료연합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당연지정제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7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게 됐는데, 당시에 의료보험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정 의료기관을 확보해야만 했었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이나 개인의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민간의료기관을 강제 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낯선 용어가 나오지만 본질을 두고는 기시감이 든다. 국가가 직접 땅을 사서 학교를 만드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짓도록 허락하면서 주민들에게 학교 부지 비용까지 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병원은 개인이 짓고 운영하되 모든 민간 의료기관을 예외 없이 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삼아, 모든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하면 같은 병원비가 나오도록 만들었다. 국가가 수가를 결정하므로 의료비 상승에 대한 국민적 불만 역시 통제가 가능해졌다. 

위에서 정책을 내리면 밑에서는 대책을 만드는 법.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더 많은 약을 처방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 의약분업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의약분업이 이루어지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 즉 비급여진료 항목이 늘었다. 이전까지는 별 인기가 없던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등이 각광받은 까닭이다. 그 상태로 20여 년이 흘렀다. 두 번째 의사 파업을 통해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주제가 다시 화제로 떠올랐다. 즉 큰 골자에서 보면 1977년 이후 지금까지 상황은 같다. 국가가 병원을 직접 운영하는 대신, 민간 병원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공 의료는 굴러가고 있다. 

사립 유치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돈이 없었다. 필요한 대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영역에 금전적 부담을 넘겨왔다. 북한에서 아이들을 탁아소에 보내 보육 부담을 줄여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7년생)가 갓 유년기에 들어설 무렵이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1981년부터 사립 유치원 설립을 허용했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사립 유치원에 힘입어 보육 대란을 피했다.

文 국공립 유치원 40% 공약? 실현 가능성 제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부터)이 8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공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부터)이 8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공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문제는 2012년부터 정부가 무상보육을 정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무상보육을 실시하려면 정부가 사립 유치원을 전부, 혹은 상당수 매입해 국·공립 유치원으로 만들고 직접 경영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공공의료를 달성하는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이 정부가 직접 공공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에도 나라에는 돈이 없었다. 201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형단설유치원을 국·공립으로 지어 전체 유치원의 40% 비중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은 그저 사립 유치원에 원아 한 명당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정도의 여력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지원금을 회계 처리하는 방식 등을 놓고 사립 유치원 측과 교육부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게 사립 유치원 사태의 핵심이다. 사립 유치원을 마땅찮게 여기는 대중적 시선과는 별도로, 모든 사립 유치원을 비리의 온상인 양 몰아간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을까. 

모든 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단순한 선악 구도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거 형태인 아파트 또한 마찬가지다. 주택가에 없고 나라가 해결해 주지도 않는 공용 공간이 아파트에는 있다. 게다가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악인 데다, 여름에는 영상 30도를 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에 가까운 추위가 찾아오는 기후를 갖고 있다. 사이사이가 뚝뚝 떨어진 단독주택보다 여럿이 모여 있는 집합주택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기형적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1차 의료기관이 널리 퍼져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어느 동네건 원장이 한가하게 앉아 있는 내과 의원 하나쯤은 있다. 이를 통해 전 지구적 코로나19 위기를 상대적으로 무사히 넘기고 있다. 정작 공공의료 시스템이 선진적이라 평가받던 국가들은 의료 체계가 유연하지 못해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해 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여러모로 잘못돼 있다. 국가가 직접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그 비용은 결국 국민적 합의하에 (준)조세 형식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는 기본적인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낙후된 지방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공공의대를 만들고 졸업생을 지방에서 의무 복무하게 하자는 발상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공공의대에 시민단체 추천으로 누구를 음서로 넣네 마네 하는 음흉한 의도를 빼고 보더라도, 정말이지 납득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주택가에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만드는 대신 누구 한 명 찍어서 저 집 앞에는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고다. 공공성을 달성하기 위한 비용을 더 쉽게, 더 만만하게, 더 확실히 전가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내자는 소리다. 자칭 민주 진보 정권에서 이런 발상을 떠올렸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공공의료가 더 필요하면 수가를 조절하고 공공병원을 확충하는 식으로 대응하며, 늘어나는 비용에 대해서는 정권이 국민적 이해와 합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는 조선이냐 대한민국이냐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다. 평소에는 세금을 잘도 뜯어가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된 상비군 하나 굴리지 못해 ‘의병’에 의존하던 조선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의 의료보험 체계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전두환 정권의 사립 유치원 허용을 어떻게 바라보건,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고 지금과 같은 방식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하물며 ‘별도의 의대를 만들어서 남들이 원치 않는 지방 근무를 강제하자’니, 현 집권 세력의 인식 수준은 임진왜란 시절에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다시 반복하자.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차분하고 정직하게,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에 대해 토론해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신동아 2020년 10월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09-12

[노정태의 시사철]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노정태의 시사哲]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아무튼, 주말] 로버트 액설로드와 ‘협력의 진화'

일러스트=안병현
일러스트=안병현

“오늘 밤 여러분과 사회 실험을 해보겠다.” 강 위에 떠 있는 배 두 척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미치광이 악당 조커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한 척에는 선량한 시민들, 다른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두 배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기폭 장치는 상대방의 배에서 가지고 있다. 내 목숨이 상대의 판단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조커는 조건을 제시한다. 상대편 배를 먼저 폭파하는 쪽은 살려준다. 하지만 둘 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정을 넘긴다면 두 배 모두 폭파한다.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익이다. 아니, 살아남으려면 배신해야만 한다. “누가 먼저 누를까? 하비가 잡아들인 악질 범죄자들? 아니면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 잘 선택해. 빨리 결정하라고. 상대가 먼저 누르면 후회해도 늦으니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표작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이다. 2008년작이지만 ‘다크나이트‘는 여전히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탄탄한 줄거리를 통해 배트맨 시리즈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와 ‘사회적 신뢰’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이론의 고전적 문제 중 하나다. 중범죄를 저지른 두 공범이 취조실에 따로 붙잡혀 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버리면 중범죄로는 기소할 수 없고 경범죄로 2년형을 살게 된다. 둘 다 자백하면 각각 6년형이 예상된다. 경찰은 그들을 유혹한다. 네가 상대를 배신하면 너는 석방이고 자백하지 않은 상대는 10년형을 살게 된다고. 어떻게 해야 할까?

둘 다 입을 다물고 2년형을 받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통해 분석해보면 결과는 다르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건 나는 자백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자백했을 때 내가 받을 형량은 석방 혹은 징역 6년이 된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에 따라 징역 2년 혹은 10년이다. 징역 1년을 -1로 본다면 자백할 경우의 기대값은 -6인데, 자백하지 않으면 -12가 되는 것이다.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일단 자백을 해야 한다.

자백하는 것이 내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이 범죄자들은 언제나 자백한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면 징역 2년으로 끝났을 것을 징역 6년으로 늘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상대가 자백하여 징역 6년이 10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 위험을 뒤집어쓰느니 자백하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모두에게 차악의 결과를 낳는 상황, 그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다.

앞서 말한 ‘다크나이트‘의 장면은 엄밀히 말해 죄수의 딜레마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조커가 두 배를 모두 폭발시킬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쪽은 선량한 시민, 다른 쪽은 범죄자가 타고 있다고 하니, 한쪽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영화 속 시민들은 투표를 감행하여 396대 140으로 버튼을 누르자는 결정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나이트‘의 시민, 선원, 범죄자들은 기폭 장치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는다. 딜레마에 등장하는 두 죄수와 달리 서로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조커는 바로 그런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갈라놓은 후, 너는 착한 사람이고 저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니 남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속삭인다.

지난 8월 31일, 우리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현실에 강림한 모습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 게시물 덕분이었다. 코로나 현장에서 고생한 의료진의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며, 간호사들만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의료진을 갈라놓고 간호사를 앞세워 의사들을 공격하려 든 것이다.

팩트부터 확인하자. 6월 25일 현재, 방역 현장에 뛰어든 자원봉사자는 총 3819명. 그 중 의사는 1790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563명, 임상병리사 등 기타 인력은 466명이었다. 숫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수 아이유가 코로나 1차 파동 당시 의사협회에 방호복을 기부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권은 늘 이랬다. 국민을 반으로 나누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부동산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들 모두 공급을 늘리는 대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가르고, 임대인과 임차인을 나눈 후, 너희들은 나쁘다고 손가락질 하는 식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도 그렇다.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자연스럽게 전체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항의가 빗발치자 팔자 좋게 취직 준비하는 취준생과 고생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을 또 나눈다. 우리가 국민이 아닌 죄수인가. 대체 왜 이런 딜레마를 강요하는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로 믿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수학자, 생물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등이 모두 고민하던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미시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였다. 그는 ‘협력의 진화‘에서 신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게임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된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상대를 믿는다. 상대가 신뢰를 돌려주면 계속 신뢰한다. 하지만 배신하면 다시는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을 ‘팃포탯 전략’이라 하는데, 게임의 실행 횟수가 누적될수록 팃포탯 전략은 기회주의적 배신자의 입지를 좁히고 상호 협력을 낳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도록 기준을 잡고 관리하는 강력한 국가가 문명 발전의 필수 요소인 이유다.

대한민국은 고담시가 아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이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한 줌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공감 능력을 지닌 시민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자.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09/12/FUR77LEORREGTGR3X6FP5F6K7Q

2020-09-02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내 판단·생각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연애' 수작
부동산 정책도 공공의대도 정부가 하는 정신 조종 폭력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유명한 심리학 실험.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고백하면 승산이 높아진다. 안정된 곳에 있을 때와 달리 불안감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그 가슴 뛰는 것을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온 청춘 연애물에는 남자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깡패나 치한 흉내를 내게 한 후 자신이 그 악당을 쫓아내는 용사인 척 하다가 들켜 망신당하는 전개도 곧잘 등장했다. 불안하면 ‘내 편’을 찾고 쉽게 호감을 느끼며 의지하게 된다는 계산의 반영인 셈이다.

하지만 그딴 수작은 연애 시장에서 퇴출당한 지 오래다.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몰아가고,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며,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상대를 놀라게 하고 달래주는 것, 병 주고 약 주는 짓은 더 이상 연애의 기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정신 조종 폭력 행위인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연극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정착시킨 표현이다.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그 작품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정신적인 궁지로 몰아간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용어 자체는 이렇듯 학대당하는 여성에 대한 상담에서 비롯했지만, 가스라이팅의 범위는 남녀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사이의 따돌림, 직장이나 군대 등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등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할 수도 있다. 스물세 번인지 몇 번인지 수도 없이 갈아엎는 문재인표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정책 내놓았다가 분위기 안 좋으면 손바닥처럼 뒤집고, 특례에 예외에 유예 조치 따위를 허둥지둥 꺼내 든다. 이제는 공인중개사나 회계사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에 파악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국민은 처음에 문재인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그저 서툴러서 그렇거니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많은 장관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김현미 장관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며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불안과 혼돈은 문재인 정권의 선의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도 있구나. 국민이 부동산과 관련해 불안과 혼돈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선의’ 그 자체일 수도 있겠구나.

부동산 ‘패닉 바잉‘이 시작되고, 특히 30대 젊은이들이 ‘영끌’하여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시장을 믿어서가 아니다. 문재인을 믿지 못해서다. 집값이 안정적으로 오를 것이라는 신뢰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요동칠지 알 수 없다는 불신이, 국민의 발걸음을 부동산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패닉 바잉에 나선 젊은 실수요자들을 향해 ‘다주택자 매물을 영끌해서 받아준다니 안타깝다’고 비아냥댄 김현미 장관의 발언도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적 행동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의 모든 고위 인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지금이라도 서울, 그것도 강남의 아파트를 사야 한다. 그걸 따라 하는 청년들에게 국토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빈정거리고 비웃는다. 졸지에 수억원의 빚을 진 30대로서는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효과다. 내 판단과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긴 채 그저 복종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가재 붕어 게로 개천에 주저앉아, 저 위에서 선량한 손길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맥없이 기다리게 길들이는 것.

부동산 정책뿐일까? 정부는 코로나 2차 유행이라는 공포 속에서 공공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음서의대’를 만들어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사 면허를 주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코로나부터 잡자는데, 정부는 ‘전면 철회’라는 말을 절대 안 한다. 방역을 정치화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는 쪽은 의사가 아니라 정부다. 하지만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은 정부에 있다. 국민과 의사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겠다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군가가 ‘나쁜 연애’ 하듯이 정치를 하고 있다. 소위 ‘문빠’들은 악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문프’가 멋져보인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 가스라이팅을 중단하라.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0/09/02/XQP3MTNQNBG5XDPGNUCGK3HAO4/

2020-08-29

[노정태의 시사철]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르네 지라르와 ‘희생양 메커니즘’

[노정태의 시사철]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일러스트= 안병현

늦여름 주말을 위한 납량특집 코너. 1976년 미국, 이혼을 앞둔 부부가 자동차로 대륙 횡단 중이다.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서 나와 국도로 접어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10대 청소년. 차와 충돌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미 목에 칼로 그어진 상처와 출혈로 죽기 직전이었다. 아내는 일단 시신을 싣고 대도시까지 가자고 하지만 남편은 사건을 신고해야 한다며 인근의 개틀린이라는 작은 도시로 향한다. 어색한 분위기에 라디오를 틀자 어떤 소년이 외치는 설교가 울려 퍼진다. "속죄! 오직 새끼 양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를 받으리니!"

아내의 경고를 무시하고 개틀린 시내로 진입한 남편 버트는 섬뜩한 사실을 알게 된다. 1964년의 어느 날, 리처드 디건이라는 열여덟 살 소년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19세 이상의 모든 마을 사람을 다 죽였다. 인간이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옥수수가 죽어가고 있으므로 속죄의 제물로 인신공양을 해야 한다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든 것이다. 그는 본인도 19세가 된 날 옥수수밭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개틀린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지배하는 광기의 공간이 된 것이다. 버트와 아내 비키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단연 손꼽히는 걸작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고작 40여쪽에 지나지 않는 단편이지만 그 악몽과도 같은 여운은 실로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가 낳은 인문학의 거장 르네 지라르가 드러낸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볼 때다.

사람은 모여 산다. 서로 모방한다. 그러나 인간의 군집 생활과 모방 본능이 좋은 방향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향한 폭력 역시 상호 모방과 경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복수했고, 복수할 테니까, 우리도 복수한다. 이렇듯 서로를 모방하고 있는 한 폭력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이나 재난으로 인해 공동체가 충격에 빠져 방향을 잃기도 한다. 자칫하면 서로를 탓하며 자멸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다.

여기서 원시적인 해법이 등장한다. '희생양'이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자, 배제된 자, 약자가 주로 희생양으로 지목된다. 희생양은 발언권이 없다. 따라서 만장일치로 폭력이 결정된다. 서로를 향하던 돌과 주먹이 오직 희생양 하나로만 쏠리게 하면 '공동체'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퍼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 보편적인 폭력의 근원인 셈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그런 사례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유대인 혐오는 나치 독일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중세 시대부터 유럽에 만연해 있었다. 관동대지진이 벌어지자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늘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며,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뭉친다. 학교, 직장, 군대처럼 모든 곳에서 크건 작건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라르의 통찰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희생양을 만든 자들, 희생제의를 벌인 자들은, 희생양을 성스러운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을 '폭력과 성스러움'이라 한 것은 그래서이다. 희생양에게 집단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 도리어 그 희생양을 숭배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폭력과 광기를 직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혐오와 숭배는 하나다. 그 대상을 '우리'가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 '우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숭배와 혐오가 하나라는 것, 폭력과 성스러움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의사들을 대하는 현 정권과 지지층의 태도 때문이다. 의료진 '덕분에'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다며 배지 나눠주고 인증샷 릴레이 챌린지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의사들을 적폐로 몰아가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라. 심지어 아직 코로나 유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광훈 목사가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인 것을 현명한 행동이라 말할 수는 없다. '턱스크'를 쓰고 구급차를 탄 모습을 보며 나도 화가 났다. 심지어 '바이러스 테러 음모론'까지 퍼뜨리고 있으니 더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어리석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비호감이라 해도 정부의 희생양 만들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임시공휴일을 만들고 온갖 할인 쿠폰을 뿌리며 외출과 소비를 부추긴 원죄는 분명 정부에 있으며, 감염의 위험을 늘린 것은 광화문 집회나 해운대 해수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희생제의로 불만을 잠재우는 원시 부족국가가 되었을까.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향한 청와대와 정부의 끝없는 찬양과 칭송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최재형 감사원장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숭배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에 거스르는 발언이나 행동을 할 경우 순식간에 '양념'을 끼얹고 조리돌림 하겠다는 협박이 깔려 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와대에 모여 앉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벌이는 끝없는 희생제의의 광기 속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곪아가고 있다.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이 집값 폭등의 원인이건만, 이제는 청년과 평범한 주부들까지 투기꾼으로 몰아가는 추미애 법무장관의 발언을 보면,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개틀린의 옥수수밭을 헤매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도 우리의 공포 가득한 현실은 적어도 당분간은 끝나지 않을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지라르의 철학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는 ‘희생양’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지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 종교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배제하고 추방하며 얻는 가짜 평화가 아니라 포용하고 품어내는 진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을 멈추고 과학의 힘으로 질병과 맞서야 할 때다. 합리와 이성과 믿음과 신뢰로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8/2020082803318.html

2020-08-27

[신동아] 386이 민주화 세대? 현대사 최고의 상징조작

일러두기: 이것은 인터넷과 지면에 실린 판본이 아닌, 편집부의 마지막 교정 이전 단계의 최종 원고입니다. 저는 현재 정치권의 주류를 '반미 세대'라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편집부는 최종적으로 '반미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표현을 택했습니다. 신동아와의 협의 하에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는 '원문'을 게시합니다.

지면에 올라온 글은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156772/1


386이 민주화 세대? 현대사 최고의 상징조작

主流 1960년대 생의 동북공정 뺨치는 ‘민주공정’


●불현듯 얻은 ‘민주화 운동가’의 명예
●1987년 항쟁, 양김·언론·검찰·재야·시민 합작품
●학생만 시위? 도시 빈민도 경찰에 돌 던지며 싸워
●1995년 與, 필요에 의해 386에 민주화 훈장 달아줘
●70년대 운동권과 80년대 운동권 분기점 반미주의
●美로부터 해방? 87년 전두환 무력진압 막은 게 미국
●실제 기여한 만큼만 누리게 제몫 찾아줘야

*사바나 초원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 혹은 ‘주류 교체가 완성됐다.’ 이제는 너무 흔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다. 그러니 문장 속 단어를 하나씩 짚어가며 따져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산업화 세대’란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은퇴 연령대에 이른 1차 베이비부머를 주로 지칭한다. ‘민주화 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나이가 된 이른바 ‘386 세대’를 뜻한다.
 
대한민국 권력의 무게추가 1950년대 생에서 1960년대 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은 반박할 여지가 크지 않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86 세대는 민주화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징조작’이자 ‘프로파간다(Propaganda)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 세력으로의 포장


사람들은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에 대해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종의 정치적 관용구가 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듯 별다른 비판 없이 민주화 세대라는 용어가 사용됐을까. 기원은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대사회학 전문가인 박재홍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6년 ‘교수신문’에 ‘先산업화 後민주화, 정치적 세대구분 옳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박 교수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용어가 정착된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50∼60대 산업화 세대와 30∼40대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의 기원은, 제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영입대상 인사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정계 원로 등의 안정 희구세력을 산업화 세력으로, 재야 운동을 하는 개혁 세력을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1995년 당시 신한국당이 민주화 세력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던 대상은 386 세대뿐만 아니라 재야 운동권 전반을 포괄했다. 물론 어찌됐든 당시 집권 여당이 386 세대에 민주화의 훈장을 달아줬다는 점은 분명하다.

1995년은 구소련이 붕괴하고 몇 년이 지난 뒤다. 북한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는 왕년의 운동권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고 있던 무렵이기도 하다. 정작 이들은 변변히 내세울만한 경력이 없었다. 일부는 출판·영화·음악 등 문화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정치가 ‘소프트 파워’(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와 거리를 둬왔던 시절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학생 운동권에 대한 불신 섞인 눈빛도 여전히 존재했다. 386 세대가 사교육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 운동권의 ‘장기(長技)’는 조직력이다.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386 세대를 ‘젊은 피’로 수혈키로 결정한 뒤 민주화 세력이라는 레토릭(rhetoric)을 활용하며 이미지를 세탁해줬다. 당시 집권당이 직접 나서서 민주화 세력(혹은 세대)이 완전무결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역사적 공헌이 있다고 포장해준 것이다. 바야흐로 일부 386 세대 인사들의 삶에 새로운 활로가 뚫렸다.

설령 신한국당의 간택을 받지 못했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김영삼이 386 세대 출신 운동권을 영입하자 평생 ‘빨갱이’라고 음해 받아왔던 김대중 역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는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김대중은 32세의 김민석(前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서울 영등포 을에 출마시켰다. 각각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송영길과 우상호 역시 1990년대 후반 김대중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386 세대가 비로소 사회 주류로서 첫 걸음을 뗐다.

중국 동북공정에 견줄 ‘민주공정’


정리하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권은 30대 젊은 인물을 영입하려 했다. 당시 30대가 386 세대다. 이들 세대 사이에는 합법·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직 활동을 해본 경험은 있으되 사회 진출에는 어려움을 겪던 고학력자 무리가 떠돌았다. 하지만 당장 정치권에 진출할만한 그럴듯한 경력이 전무했다. 이에 그들이 필요했던 주류 정치권은 앞장서서 386 세대 일부에 민주화 세대라는 훈장을 달아줬다.

실은 산업화 뿐 아니라 민주화에 끼친 1960년대 생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 돌 던지고 싸운 1960년, 혹은 박정희에 맞선 투쟁이 펼쳐진 1970년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1980년대에 386 세대가 대학생 신분으로 전두환의 신군부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긴 투쟁의 역사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기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세력의 크기나 당사자들이 겪은 고난의 비중을 보더라도 그렇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정치 거목은 의원직 박탈, 가택연금,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 사형 선고 등을 겪으면서도 군부독재 종식을 향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양김을 따르는 가신 그룹, 즉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역시 무수한 고초를 치렀지만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고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데 기여했다.

그에 비하면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학생들이 민주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그리 크지 않다. 물론 신군부가 볼 때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의 권력의 핵심을 위협할 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했다. 학생 운동권은 권력을 갖기에 너무도 어렸다.

1987년 항쟁이 전개된 과정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점은 분명하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라는 두 거대 기성 언론이 반기를 들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했다. 신군부는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검찰이 반발해 사건을 수면 위로 꺼내 정치 쟁점으로 승화시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저항적 기독교 세력, 이른바 ‘재야’의 원로들이 힘을 보탰다. 게다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명의 지도자가 대안으로 존재했다. 국민 여론이 그 두 명을 통해 언제든지 정권 교체의 물결로 이어질 개연성이 컸다.

당시 대학생들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시위를 했고, 서울대생 박종철과 연세대생 이한열이 희생됐다. 그들의 죽음은 정권을 쓰러뜨릴 더 큰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촉발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기저에 깔린 동력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국민 사이에서 꾸준히 누적돼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렇기에 서울에서 시위가 격화하자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정권에 반대하며 목청을 드높였다. 대학은 고사하고 중학교도 못 나왔을 도시의 기층 빈민들이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결국 신군부는 항복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했고 헌법은 개정됐다. 신군부가 권력을 몽땅 빼앗긴 건 아니지만 양김과 그 추종 세력인 상도동, 동교동계에 힘이 실렸다. 제6공화국은 개막과 함께 ‘3김 시대’(김영삼·김대중·김종필)로 전환됐다. 그러니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주체사상 문건을 달달 외우며 이 나라를 혁명적으로 들어 엎을 궁리나 하던 젊은이들의 힘으로 신군부가 쓰러졌다고 포장하는 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견할만한 ‘민주공정’이다.

1983년생이 월드컵 겪었다고 월드컵 신화 만들었나?


1987년 항쟁 무렵 대학에 다녔던 이들을 그럼에도 민주화 세대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87년 정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87년의 대격변을 스스로 만들어낸 덕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가 2002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을 경험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나는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건 타당하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나 혹은 내 또래들이 만든 건 아니다. 월드컵에서 뛴 선수 중에는 내 또래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월드컵 자체는 분명 내 윗세대의 작품이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작은 부품이자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월드컵 세대와 달리 386 세대의 자의식이 매우 비대하다는 데 있다. 386 세대는 처음부터 주류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나라의 의사결정 및 여론을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을 정치권에서 소환한 방식 자체가 그 세대의 비대한 자의식을 더욱 부추겼다. 학생운동 좀 하다가 야인으로 떠돌았는데 불현듯 ‘민주화 운동가’라는 명예를 얻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386 세대는 어떤 이름으로 호명돼야 마땅할까? 잠시 세대 문제를 연구한 최초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의 지혜를 빌리자. 만하임은 ‘세대 문제’에서 세대를 구분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세대 위치. 이는 1980년대 생, 2000년대 생처럼 출생 시기에 따라 나누는 방식으로 가치 평가와 무관하다. 386 세대에는 80년대 학번이라는 범주가 덧붙지만, 기본적으로는 1960년대 생이라는 세대 위치가 그들을 개념화한 셈이다.

둘째, 실제 세대. 세대 위치가 사회적 요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을 뜻한다. 가령 1929년생과 1924년생은 세대 위치상으로는 유사하지만 실제 세대는 확연히 구분된다. 1924년생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 입대 연령인 스무 살이 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한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후 1950년 한국전쟁에서 또 입대 연령에 포함돼 두 번의 군 생활을 한, 지지리도 운 나쁜 ‘묻지 마라 갑자생’이다. 반면 1929년생은 입대 연령, 즉 성인이 됐을 때 이미 일제가 망했다. 태평양전쟁까지 몸소 겪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 부역 논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셋째, 세대 단위. 지역·소득·교육·기타 변수에 따라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을 묶는 개념이다. 386 세대라는 이름에서 80년대 학번에 방점을 찍으면 비슷한 시기 대학을 함께 다닌 경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세대 단위에 주목하는 셈이다. 같은 논리에 따라 민주화 세대라는 명칭은 세대 단위 안에서도 특정 집단을 다시 분류하는 개념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 중,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고 훗날 자신들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용어일 테니 말이다.

386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反美


만하임의 구분 방식을 고려할 때, 1980년 이후 학생운동을 했고 이를 정치적 자산 삼아 지금은 주류가 돼있는 세대 단위를 지칭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용어는 따로 있다. 그들은 민주화 세대가 아닌 ‘반미 세대’로 호명돼야 한다. 반미주의는 1970년대까지의 운동권과 1980년대 이후의 운동권을 가르는 가장 큰 분기점이다.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해당 세대 단위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그렇다면 반미 세대는 왜 반미주의에 경도됐을까.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그들의 ‘공식적’인 미국관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광주 항쟁이 발생할 무렵 미국은 항공모함을 한국 쪽으로 보내고 있었고, 따라서 군사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 공수부대를 원천 차단하거나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광주의 비극을 방치했는데, 이는 어쩌면 방치를 넘어선 적극적 공모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시작전권은 유엔사령부에 있고 결국 미군의 허락 없이 한국군은 움직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주의 비극 배후에는 미국이 있고 우리는 1980년 현재까지도 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민족은 해방돼야 한다. 미국을 혼내주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민족국가를 되찾기 위해, 북한과 적극적으로 손잡거나 민중의 저항을 꾀하는 등 혁명을 모색해야 하며, 미국의 꼭두각시인 일본과는 더욱 철저하게 대립해야 한다.’

1980년 이전에는 진보가 반미주의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친미 우파였던 장준하, 반공 진보 기독교 사상가였던 함석헌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기층 단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임미리가 <경기동부>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 훗날 성남시로 승격하는 경기도 광주군에서는 1971년 8·10 사건 이후 빈민운동, 야학운동, 선교활동 등이 활발히 벌어졌다. 무리한 강제 이주의 폐해와 개발 및 보상 과정에서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명맥은 훗날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광주’ 출신의 학생들이 나타나 ‘경기동부’의 모태가 되었다. “대학가에 퍼진 광주 학살 미국 책임론을 감안하면 그 뒤 성남의 청년·학생운동이 NL쪽으로 기운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물론 대학가의 반미 감정이 동일하지는 않았다. 특히 서울과 광주의 인식 차이가 컸다. 박찬수는 <NL 현대사>에서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 인사의 말로는, 당시[1985년] 공동 투쟁을 준비하면서 서울과 광주 사이에 반미 구호의 수준과 미국문화원 타격 수위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세의 변화는 분명했다. 이듬해인 1986년 9월 8일 전남대 5·18 광장에서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출범식이 열렸다. 이 조직은 훗날 PD로 진화하는 CA(제헌의회) 계열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학생 수백 명은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도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제를 몰아내자’,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미제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고, 사흘 후에는 같은 장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반미투)’가 출범했다.

운동 내부에 속한 이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복잡한 노선 투쟁이 있었겠으나, 외부자의 시각에서 볼 때 거대한 흐름의 변화는 분명해 보인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혹은 순수하게 군부와 시민의 대결만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학가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주한미국대사관 한국과장을 역임한 전직 외교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반미 세대의 탄생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979~1980년 사건들 이후 발생한 반미주의 내러티브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7년에도 한국인들은 미국의 행동을 과거와 똑같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다. 이 반미 내러티브는 계속 살아남았으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특히 소위 386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세대 사이에 남아 있다.”

그들은 민주화 된 대한민국 추구하지 않았다


설령 반미 세대의 반미 내러티브가 사실이라 해도 이후 현대사의 진행을 놓고 보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이 기여한 바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반미 세대의 관점에서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을 논하는 김형민(필명 산하)은 1987년 항쟁의 성공 이면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진보 성향 인터넷매체 뉴스톱에 실린 ‘6월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칼럼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미국이지 싶다. 미국 CIA는 판세를 읽은 후 주한미군에서 탱크 5대를 지원받아 특전사, 수방사 등의 한국군 부대 정문 앞에 가서 고장이라도 난 듯 버티고 세워 놓았다고 한다. 즉 ‘나오지 마라’는 시위를 한 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주한 미국 대사 릴리였다. 그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력을 동원하지 마십시오. 레이건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군대를 동원한다면 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될 겁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에게 할 소리 수준은 넘어 있었다. 릴리는 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군바리야. 정말 그러면 너도 죽어.’”

미국에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방관한 책임이 있다고, 즉 반미 세대의 생각에 어느 정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해도 미국은 1987년 전두환의 무력 진압 시도를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 서울이 제2의 광주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한 번 새겨진 적개심과 증오는 뇌에 새겨진 문신과 같다. 사실과 논리를 아무리 부어서 박박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반미 세대다. 반미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과 이념을 버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자신의 젊은 시절, 그 청춘을 함께한 친구와 동료, 그들이 제공하는 편안한 인간관계와 따스한 추억을 모두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미는 한 세대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즉 존재의 이유가 되고 말았다.

반미 세대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는 없는가?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미 세대가 곧 민주화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추구하지 않았다. 과거 학생 운동권이었으나 현재 편의점주로 활동하고 있는 봉달호(필명)는 ‘신동아’ 7월호에서 정직하게 고백한다.

“반미, 종북이 본질이었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랄까. 물론 강도를 잡은 것은 맞지만 원래 자신의 의도를 고백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반성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역사 재평가와 제몫 찾아주기


그 ‘강도’를 반미 세대가 혼자 잡은 것도 아니다. 1987년 항쟁의 성공에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와 그들을 믿고 따르던 세력, 그리고 묵묵히 투표하고 시위에 참여한 다수의 시민들이 있었다. 또 1980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정 간섭 논란의 여지를 무릅쓰고 신군부를 억누른 미국의 역할 또한 재평가돼야 한다.

다시 말해 자칭 민주화 세대의 역사적 공헌과 위상은 과대평가됐다. 물론 그들의 역할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반미 세대라는 올바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민주화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취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것이다. 민주화 세대는 없다. 다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반미 세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기여한 바에 걸맞도록 제 몫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다.

약력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