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GettyImage]
매주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 우리 동네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몇몇 모퉁이와 전봇대 근처가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다. 재활용 쓰레기
놓는 곳과 종량제 봉투 버리는 곳 사이에 암묵적 구분은 있지만 명확한 규칙은 없다. 사람들은 집에서 적당히 분류해 온 캔,
비닐, 종이 등을 이미 쌓인 쓰레기 위에 또 버린다.
평생을 한국에서, 그중에서도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런 광경을 일종의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였다. 내 생각의 틀이 깨진 건 모든 사람이 일상의 온갖 자투리를 시시콜콜 떠벌이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대가 시작되면서였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겪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관리사무실이 너무 엄격하다’는 둥, ‘재활용 기준이 혼란스럽다’는
둥, ‘일회용 그릇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다’는 둥,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새로 설치돼 너무 좋다’는 둥. 온갖
낯선 이야기의 바탕에 공히 깔린 전제가 있었다. 주택가와 다른 어떤 ‘시스템’이 있다는 것. 그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모종의
강제력을 행사하고 입주자 역시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복도와 공공성이라는 화두의 출현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총 편집을 맡은 다섯 권짜리 대작 ‘사생활의 역사’를 펼쳐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생활의 영역과 공적 영역이 대립한다고 여기지만, 발생론적으로 따져보면 두 공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주거 공간에는 복도가 없었다. 방과 방은 쭉
이어져 있었다. 왕이 사는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옥에도 복도는 없었지만 한반도의 주거용 건축물은 모두 단층이고 문을 열고
나가면 마당 등 실외 공간과 연결됐다. 유럽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많았는데도 복도가 없었다.
이에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었다. 내 방이 건물의 안쪽에 있고 현관을 통해 나가려면 중간에 다른 사람의 방을 지나가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남이 옷을
갈아입는 중이건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중이건,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방을 통과해야 한다.
프라이버시(privacy)를 지키는 것도 혹은 지켜주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사뭇 달랐다. 방과 방 사이에, 그 누구의 방도 아닌 오직 사람의 이동과 연결만을 위한 공간인 복도라는 형태가 출현했다. 내가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남이 들이닥칠 위험도, 또 남이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부득이하게 침해할 우려도 복도의
출현으로 확연히 줄었다.
복도는 방과 방 사이, 방과 현관 사이를 연결하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을 갖지 못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자기 방이 아닌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해야 한다. 또 복도를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삼거나 방에서 넘쳐나는 물건
따위를 늘어놓는 용도로 써서도 안 된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복도에 짐 쌓아두고 쓰레기 놓는 얌체 입주자 문제로 흔히 생기는 갈등을
연상해 보면 된다.
공용 공간의 존재는 ‘공공성’이라는 화두를 수면으로 끌어냈다. 공적 자원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누군가가 이를 사적으로 유용하지 못하게끔 강제하는 규칙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참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공적 자원’을 형성, 유지, 관리해야 하는 임무가 공적으로
주어진 거다.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없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4일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 사이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공공재’에 빗댄 피켓이 보인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물론
아파트의 관리 방식이 완벽하지는 않다. 층간 소음을 비롯해 여러 문제가 있을 테고,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 갖춰진다 한들 자기
이익만 챙기고 공적 영역을 무시하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단 시스템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경우와, 시스템을 갖출 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의 낡은 주택가에는 공용 공간으로 쓸 수 있는 부지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동네’에서의 가족 같은 삶에 대한 동경을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아파트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알지도 못하고 경험할 생각도 없는 주택가의 현실이 이렇다. 허구한 날 싸운다. 쓰레기 때문에 싸우고, 주차 때문에 싸운다. 처음
택지를 구획할 때 쓰레기 모을 장소도 차를 대놓을 장소도 따로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위치에 사는 사람은 자기 집
앞이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여서 일주일에 사흘은 창문을 열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사 온 뒤에야 깨닫는다(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내가 이런 일까지 겪었다는 건 아니다). 공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공용 부지 자체가 부재했던 탓이다.
강남좌파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서로 돌보고 아끼고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세상에 없다. 대한민국 대다수 주택가와 같이, 공용
목적으로 있어야 할 부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화목한 동네 생활이 불가능하다. 마치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남의 방을 들락거려야 했고, 이에 사생활이라는 게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살면 사이가 더 좋아지기는커녕
싸울 일만 늘어난다. 복도가 생기면서 프라이버시가 확립되고 근대적 자아가 탄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주택보다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단지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표준적 주택가가 제공하지 않는 ‘공공성’을 제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다. 대규모로 재개발할 경우 입주자들이 초등학교 부지 등을 기부채납하게 돼 있다. 내부
조경은 잘 가꿔져 공원처럼 산책하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그 또한 주택가에도 있어야 하지만 실상은 없다.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니 우리 동네를 재개발하자고 하면 다들 찬성한다. 더 나은 삶은 내 집뿐 아니라 수많은 공용 공간에서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 떠넘긴 국가의 역할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까지 파업에 가세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대한전임의협의회 소속 의사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개인적 체험까지 덧붙여가며 길게 설명한 이유는 살아보지도 않은 ‘아파트 찬가’를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또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다. 애초에 공용 공간을 고려하지도 않고 구획된
토지 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너무 불편하고 싸울 일도 많다. 새로 개발되는 아파트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내 집
앞에 쓰레기가 쌓일 일도,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불편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이 글에서는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등은 논외로 한다).
정작 그 해결 방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 구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새로 단지를 개발할 때 초등학교 부지 등의 기부채납을 요구하는 경우를 예시로 삼아보자. 너무 일반화된 방식이라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학교 부지는 공교육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중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다. 미국처럼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부지 비용은 국가가 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공원 같은 녹지 및 휴식 공간을 국가가 마련하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지을 때 건폐율이나 용적률 등의
제한을 둬 주민들이 나누어 부담하게 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개별적 사안에서는 그러한 접근법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성’ 개념을 엄밀히 따져보면 이상한 일이다. 국가가 공적 존재로서 제 기능을 한다면, 많은 공원 부지를 직접 확보하고 이를
주거 용지 곳곳에 적절히 배치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는 공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전체 사회를 위한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세금이라는 공적 재원을 투명하게 걷고 활용하는 대신, 사적 영역으로 그 부담을 떠넘기는
방식이 일반화돼 있다. 비단 주거 문제뿐 아니라 수많은 영역에서 같은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공공의 비용을 공적인 방식으로 걷는
대신, 다양한 경로를 활용해 사적인 영역에서 부담토록 하는 것이다.
의사 파업 문제의 본질도 결국은 공공성의
비용이라는 논쟁거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밑에는 대한민국 의료 제도의 핵심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지정 의료기관으로 정해져 있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환자 본인부담금 제외 후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야 한다. 국가는 시술, 처방 등 모든 의료 행위에 병원이 청구할 수 있는 액수를 미리 정해 놓는다. 요즘
부쩍 많이 거론되는 ‘의료수가’다.
환자, 즉 국민 처지에서 보면 이 제도는 대체로 좋다. 경제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건강보험에 가입한 상태인 만큼, 치료비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자기부담금도 낼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의료급여 대상자로 따로 보호받는 만큼,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나라는 아닌 셈이다.
반대로 병원
처지에서 이 제도는 좋지 않다. 의료 행위는 넓은 의미의 서비스다. 병원은 서비스의 가격을 스스로 설정할 수 없다. 경제학 원리를
적용해 보면 의료수가가 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격 설정에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느 정도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 말도
원론적으로 옳다.
학교·병원·유치원 짓는 대신 택한 방법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관계자들이 각 병원에 보낼 손피켓을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한국 의료의 공공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국민은 언제라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비용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퍽 저렴하다. 국민 대부분은 현재 수준의 의료 공공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의 제도 변화는 원치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단체의료연합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당연지정제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7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게 됐는데, 당시에 의료보험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정 의료기관을 확보해야만
했었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이나 개인의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민간의료기관을
강제 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낯선 용어가 나오지만 본질을 두고는 기시감이 든다. 국가가 직접 땅을 사서
학교를 만드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짓도록 허락하면서 주민들에게 학교 부지 비용까지 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병원은 개인이
짓고 운영하되 모든 민간 의료기관을 예외 없이 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삼아, 모든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하면 같은 병원비가
나오도록 만들었다. 국가가 수가를 결정하므로 의료비 상승에 대한 국민적 불만 역시 통제가 가능해졌다.
위에서 정책을
내리면 밑에서는 대책을 만드는 법.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더 많은 약을 처방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 의약분업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의약분업이 이루어지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 즉 비급여진료 항목이 늘었다. 이전까지는 별 인기가 없던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등이 각광받은 까닭이다. 그 상태로 20여 년이 흘렀다. 두 번째 의사 파업을 통해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주제가
다시 화제로 떠올랐다. 즉 큰 골자에서 보면 1977년 이후 지금까지 상황은 같다. 국가가 병원을 직접 운영하는 대신, 민간
병원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공 의료는 굴러가고 있다.
사립 유치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돈이 없었다.
필요한 대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영역에 금전적 부담을 넘겨왔다. 북한에서 아이들을 탁아소에 보내 보육 부담을 줄여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7년생)가 갓 유년기에 들어설 무렵이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1981년부터 사립 유치원 설립을 허용했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사립 유치원에 힘입어 보육 대란을 피했다.
文 국공립 유치원 40% 공약? 실현 가능성 제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부터)이 8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공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문제는 2012년부터 정부가 무상보육을 정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무상보육을
실시하려면 정부가 사립 유치원을 전부, 혹은 상당수 매입해 국·공립 유치원으로 만들고 직접 경영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공공의료를 달성하는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이 정부가 직접 공공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에도
나라에는 돈이 없었다. 201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형단설유치원을 국·공립으로 지어 전체
유치원의 40% 비중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은 그저 사립 유치원에 원아 한
명당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정도의 여력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지원금을 회계 처리하는 방식 등을
놓고 사립 유치원 측과 교육부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게 사립 유치원 사태의 핵심이다. 사립 유치원을 마땅찮게 여기는 대중적
시선과는 별도로, 모든 사립 유치원을 비리의 온상인 양 몰아간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을까.
모든 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단순한 선악 구도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거 형태인 아파트 또한 마찬가지다. 주택가에 없고
나라가 해결해 주지도 않는 공용 공간이 아파트에는 있다. 게다가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악인 데다, 여름에는 영상 30도를 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에 가까운 추위가 찾아오는 기후를 갖고 있다. 사이사이가 뚝뚝 떨어진 단독주택보다 여럿이 모여 있는
집합주택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기형적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1차 의료기관이 널리 퍼져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어느 동네건 원장이 한가하게 앉아 있는 내과 의원 하나쯤은 있다. 이를 통해 전
지구적 코로나19 위기를 상대적으로 무사히 넘기고 있다. 정작 공공의료 시스템이 선진적이라 평가받던 국가들은 의료 체계가
유연하지 못해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해 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여러모로
잘못돼 있다. 국가가 직접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그 비용은 결국 국민적 합의하에 (준)조세 형식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는
기본적인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낙후된 지방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공공의대를 만들고 졸업생을 지방에서 의무
복무하게 하자는 발상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공공의대에 시민단체 추천으로 누구를 음서로 넣네 마네 하는 음흉한 의도를
빼고 보더라도, 정말이지 납득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주택가에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만드는 대신 누구 한 명 찍어서 저
집 앞에는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고다. 공공성을 달성하기 위한 비용을 더 쉽게, 더 만만하게, 더
확실히 전가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내자는 소리다. 자칭 민주 진보 정권에서 이런 발상을 떠올렸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공공의료가 더 필요하면 수가를 조절하고 공공병원을 확충하는 식으로 대응하며, 늘어나는 비용에 대해서는 정권이 국민적 이해와
합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는 조선이냐 대한민국이냐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다. 평소에는 세금을
잘도 뜯어가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된 상비군 하나 굴리지 못해 ‘의병’에 의존하던 조선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의 의료보험
체계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전두환 정권의 사립 유치원 허용을 어떻게 바라보건,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고 지금과 같은 방식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하물며 ‘별도의 의대를 만들어서 남들이 원치 않는 지방 근무를 강제하자’니, 현
집권 세력의 인식 수준은 임진왜란 시절에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다시 반복하자.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차분하고 정직하게,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에 대해 토론해야 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신동아 202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