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2

과거제 변질을 보라… 능력주의도 결국 신분제

뜨거운 감자 ‘이준석 현상’… 공정한 경쟁, 이렇게 본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을 앞세우고 선거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기존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고안된 통치 기술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뜨거운 감자가 된 능력주의를 주제로 세 필자의 긴급 지상 논쟁을 싣습니다.

①최진석(찬성): 가짜 표창장이 公正인가

②노정태(반대): 자칫하면 新계급사회 된다

③임명묵(제3의 의견): 20대에게 ‘공정한 경쟁’은 찬반, 그 이상

/일러스트=양진경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창대(변요한)는 나주 사는 장 진사(김의성)의 사생아. 매일 뜻도 모르는 성리학 경전을 달달 외운다. 과거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유배 온 정약전(설경구)을 만나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주는 대신 글공부를 한 창대는 드디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과거를 보고 심지어 소과에 합격한다. 생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대과 시험에서는 떨어지고 만다. 나주 목사는 창대를 위로하며 과거 시험의 진실을 알려준다. 대과는 글 솜씨가 아니라 집안의 힘으로 붙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조선의 길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능력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조선은 능력주의 사회였다. 유명무실한 과거제를 앞세워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고 성리학 경전이나 달달 외우던 그 모습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능력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펴낸 책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책은 2034년을 배경으로 한다. ‘마이클 영’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1860년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보통교육이 시작된 후, 몇 번의 역사적 변곡점을 거치며 노골적인 계급사회였던 영국이 능력주의를 내세운 위선적인 계급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풍자하는 책이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짚고 있다고 스스로 설명한다. 하지만 비판의 무게 추는 단점으로 쏠려 있다. ‘능력주의'의 서문을 읽어보자. “나는 능력주의가 얼마나 자만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고, 책을 썼다고 간주되는 저자를 포함해서 스스로 능력주의 체제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드러내려고 했다.”

능력주의가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개인의 타고난 소질과 노력을 합쳐 ‘능력’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만들고 그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나누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다. 처음 한두 번은 말 그대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능이나 근성 등 소위 ‘공부머리’ 역시 유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 역시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능력주의에 적합한 이들을 선별하고, 그들끼리 맺어지며 재생산하게 함으로써 결국 ‘능력주의자들을 위한 신분제’가 되고 만다.

그래도 음서(고관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방식)보다는 과거가 낫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음서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나온 것이 과거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능력주의가 더 나쁠 수도 있다. 음서제가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반면, 과거제는 그 자체가 실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에, 집권 세력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의 지배 계층은 훨씬 더 공고하게 군림한다.

조선의 경우가 그랬다. 좋은 집안에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지배 계층이 사람됨의 도리가 담겨 있는 책을 달달 외워 과거에 합격까지 하니 백성들은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권력이 된 능력주의는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인도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조정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있지 않을 것이다. ‘자산어보'로 돌아가보자. 정약전은 인간의 평등과 구원을 믿는 ‘서학쟁이’다. 서양 배에서 떨어뜨린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식을 내뱉는다. 그렇다. 우리는 먼 바다를 향해 돛을 펼쳐야 한다.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제 실력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법 앞의 평등을 전제로 한 글로벌 자유시장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노정태]

2021-06-20

비극에 탐닉하는 사회, 활개 치는 ‘방구석 코난’

[노정태의 뷰파인더㊴] 광주 건물 붕괴에서 故손 모씨 사건까지

● 쓰러진 에릭센과 BBC의 영상
●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대중
CCTV를 통해 ‘진실’ 엿보다?
● 경각심 없는 블랙박스 방송
● 수술실 CCTV 설치? 환자 인권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5월 28일 고(故) 손 모 씨 사건과 관련해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수색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CCTV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인다. [뉴스1]

 

6월 13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3차전. 레바논을 상대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다. 상대의 파울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처리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손흥민은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며 손가락으로 ‘23’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며 카메라에 키스를 했다. 시청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위한 세레모니였다.

에릭센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과 함께 뛴 적 있는 덴마크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그는 6월 13일(한국시간) 열린 2020 유럽축구챔피언십(유로 2020) D조 1차전 덴마크 대 핀란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전반 42분 무렵 다른 선수와의 충돌 없이 갑자기 쓰러졌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의료진이 달려와 응급처치를 하는 가운데 동료 선수들이 에릭센을 둘러싸고 벽을 쳤다. 환자의 모습을 방송 카메라나 관중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중계 카메라 역시 처음에는 (카메라맨의 ‘본능’에 따라) 쓰러진 에릭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으나, 곧 경기장의 원경과 관중석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BBC 스포츠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방송사들은 지탄을 받았다. 에릭센이 쓰러진 직후 모습이 다소 노출됐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방송을 통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BBC 스포츠 해설위원 게리 리네커는 “중계 화면은 대회 주최 측인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송출한 장면이고 BBC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볼 권리’와 상식선
프로 스포츠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손흥민이나 에릭센 같은 축구선수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탁월한 축구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즐기는 수많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센의 모습을 촬영해 ‘알 권리’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한 시청자는 없다. 외려 시청자는 에릭센이 쓰러진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이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는 점을 이유로 유럽축구연맹과 각국 방송사를 비난했다. 즉 시청자에게는 ‘볼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걸맞은 상식과 감수성을 근거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반대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식’이 막상 우리 현실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난 4월 25일 발생한 고(故) 손 모 씨의 사망 사건을 떠올려보자. 논의해야 할 점이 많지만, 특히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경찰의 발표를 믿지 못한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CCTV가 왜 없느냐”, 혹은 “CCTV 영상을 무편집본으로 공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인이 익사한 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CCTV 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당연한 사실이 있다. 설령 그런 영상이 존재한다 한들 경찰이 그것을 아무에게나 보라고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손 씨가 익사한 현장의 CCTV 영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영상은 누군가가 사고로 죽은 모습, 혹은 (일각에서 꾸준히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사람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라는 소리다. “경찰은 진실을 공개하라”는 이들은, 그러므로 “경찰은 사람이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멈춰서 이 상황을 제3자의 눈으로 보자. 누군가가 죽기 직전, 혹은 죽는 그 장면을, 대중이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는 CCTV를 통해 ‘진실’을 엿보는 행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졌다. 그러한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다양한 사건 사고 현장을 담은 CCTV나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
몇 년 전, 특히 남자들이 많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여성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 등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이는 모습을 담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그런 영상에는 흔히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와, 종종 로드킬(야생동물 찻길사고)을 야기하는 ‘고라니’를 합친 비하 용어가 첨부됐다.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찍은 영상 속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돌려보면서 그 위에 여성혐오까지 끼얹고 있던 셈이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것은 여성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교통사고 현장을 담은 모습이 여러 방식으로 촬영되고, 때로는 편집돼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갔다. ‘폭력에의 탐닉’은 많은 경우 여성혐오와 공생 관계를 이뤘다. 여자가 차에 치이면 ‘X라니’, 여자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면 ‘김여사’라고 손가락질하는 식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유출되고 유통되는 데 대해 진작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정 반대로 흘러갔다. 공적 논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공중파 방송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모아놓고 방송하는 별개의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지금도 매주 방송되고 있는 SBS의 ‘맨 인 블랙박스’ 얘기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으로 공중파 방송을 만들어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심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방심위가 ‘맨 인 블랙박스’를 제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식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아날 방송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 벌어진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참사에 대한 언론 보도만 해도 그렇다.

사고 당일,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사고 당시의 모습이 수도 없이 뉴스로 보도됐다. 건물이 풀썩 쓰러지는 광경, 자동차가 깔리는 모습, 간신히 사고를 피한 차량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 아무런 제지 없이 노출됐다.

이미 남들이 그런 영상을 찾아서 시청률과 조회 수를 끌어올리고 있다면, 다른 언론사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 역시 특정 언론이 사건 현장의 CCTV나 블랙박스를 공개하는 것을 막지 않는데, 다른 언론에 대해서만 제지를 가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국의 미디어는 여과 없이 쏟아지는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보도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사회적 책무다. 하지만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을 쉴 새 없이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공개하는 것은 언론의 바람직한 사회적 기능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사안을 해석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건물 붕괴 사고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경찰, 소방서가 합동으로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광주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영상을 온 국민이 되풀이해서 보는 게 과연 이 시점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안전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되새기게 해주는가? 왜 그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사고 현장의 부상자를 구조하는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보도 행태가 성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영상을 가져다 써야 조회 수가 늘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온갖 ‘유출 영상’에 우리가 중독돼 있는 탓이기도 하다. 언론이 나쁜 대중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고, 언론 소비자가 언론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최근 현안으로 넘어와 보자.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8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반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법안이 계류 중인 상태다.

수술실 내 CCTV 설치에 대한 찬반론을 깊게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몰래 찍는’ 데 익숙해졌는가. 왜 우리는 교통사고 현장, 기타 사고 장면, 범죄 현장 등 통상적으로 보기 어렵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볼 권리’를 요구하는가.

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면 환자 인권 보호에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나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충격 수술실 CCTV 영상’ 따위가 수없이 돌아다니며 더 많은 환자의 인권이 유린될 위험을 생각해봐야 한다.

수술실로 간 ‘방구석 코난’
찍어놓은 영상은 언제 어떤 식으로건 유출될 수 있다. CCTV 영상을 돌려보고 품평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의 인권을 짓밟을 여지가 생긴다.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CCTV를 설치할 경우, 의료진은 CCTV에 익숙해지고 그 중 위험성이 높은 ‘예비 범죄자’는 CCTV를 피해 어떻게든 범죄를 저지를 방법을 모색할 테다. 마취된 채 알몸으로 수술을 대기하는 환자는 CCTV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CCTV와 차량용 블랙박스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방구석 코난’ 혹은 ‘네티즌 수사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수술실 내 CCTV 의무화 법안은 ‘방구석 코난’을 수술실에 들여놓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제다. 우리에게 인권이란 대체 무엇인가?

#광주참사 #손모씨사건 #수술실CCTV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16

나의 첫 프로그래밍(?)

정확히 말하면 elisp(emacs lisp) 코드 다섯 줄(주석 제외)에 불과하지만, 나름 성취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록 삼아 올려둡니다.

코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defun new-file-with-date-time ()
  "날짜-시간 표기된 새 파일 만들기"
  (interactive)
  (find-file (format-time-string "~/Dropbox/txt/%y%m%d-%H%M%S.txt")))
(global-set-key (kbd "C-c C-n") 'new-file-with-date-time)
;; 날짜 시간 표기법은 이 링크를 참고 https://www.gnu.org/software/emacs/manual/html_node/elisp/Time-Parsing.html

이게 뭐 하는 거냐. 제가 글 쓸 때 쓰는 emacs라는 텍스트 에디터가 있습니다. 1976년에 만들어진,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프트웨어입니다.

구시대의 유물답게 emacs는 수많은 세팅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그 단점은 반대로, 본인이 원하면 기존에 없던 기능을 써서 넣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저 코드는 이런 뜻입니다. 이맥스에서 어떤 파일을 편집중이건, ctrl-c ctrl-n 을 입력하면, 210616-203308.txt 같은 이름의 새 파일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지금 이 순간'을 파일명으로 삼은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내용을 입력한 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 경로는 제가 텍스트 파일을 모아두는 드롭박스 내 txt 폴더.

이 '자체 확장 기능'은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합니다. 1)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내용을 빨리 적어놓기 2) 메모에 고유 식별자(날짜-시간) 부여하기 3) 모바일에서도 접근 가능하게 하기(드롭박스라서 자동 싱크)

저는 프로그래밍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영어로 어떻게 어떻게 구글 검색을 좀 해보면 남들이 쓴 코드를 찾아볼 수 있고, 그걸 붙여넣어 실험해보다 보면 작동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런 식이다보니, 솔직히 저 코드에서 (interactive)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가 원하는 기능을 스스로 구현해냈으니, 그거면 된 거죠.

이런 글을 왜 쓰나 싶지만, 자랑? 기록? 뭐가 됐건 그냥 올려봅니다.

(참고로 제가 이준석의 '엑셀 시험' 어쩌구를 보고 콧방귀를 뀐 이유도 이런 겁니다. 저는 learning curve가 굉장히 가파른 고대 유물 소프트웨어를 즐겨 쓰는 사람이고, 심지어 간단한 스크립트도 짭니다. 하지만 이게 저의 '글쟁이'로서의 '능력'과 상관 있나요? 없습니다. 좋은 글쟁이는 글을 제 시간에 읽기 좋게 쓰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HWP에서 원고지 매수 확인하는 기능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죠.)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대표에게 ‘공정’을 묻는다

[朝鮮칼럼 The Column] 이 대표, 노인 기초연금 소득 하위 70%에만 주고
상위 30%에는 안 준다며 불공정한 제도라고 지적
없는자의 몫 줄여서라도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변인 공개오디션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덕담부터 건네자.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과 취임을 축하한다. 이전에도 30대 당대표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신생 군소 정당이 아니다. 원내 102석을 지닌 제1 야당이다. 36세 당대표는 실로 이례적 사건이며 탁월한 성취다.

그러나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처럼,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르는 법. ‘이준석 현상’이 종전 정치 문법에 지각변동을 불러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갈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적 관점, 특히 ‘공정’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 빈곤 문제를 생각해보자. 최근 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며 축포를 터뜨리고 ‘국뽕’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노인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다른 OECD 가입국과 같은 층위에서 논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가 펴낸 ’2019 자살 예방 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2015년 기준 10만명당 58.6명이었다. OECD 평균인 18.8명을 훌쩍 뛰어넘고, 38.7명으로 2위인 슬로베니아와도 격차가 크다.

왜 그럴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27.7%가 생활비 문제를 꼽았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이 OECD 평균의 약 세 배에 가까운 나라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노년층 내 빈부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중위 소득을 100으로 봤을 때 소득이 50%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상대적 빈곤’이라 한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상대 빈곤율은 48.8%에 달한다. 절반에 가까운 노인들이 통계적으로 빈곤층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경쟁의 나라인 미국조차 노인 상대 빈곤율은 같은 해 기준 21%에 불과하다. 12.1%인 OECD 평균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령연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명박 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이라 이름을 바꾼 후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액을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렸다.

이쯤에서 이준석 대표가 2019년 펴낸 ‘공정한 경쟁’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 대표는 현재 기초연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다. 소득 하위 70%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책을 직접 인용해본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밝히자면, 기초연금 제도에는 결함이 있다. 기초연금 수급액을 소득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 노인 40만명은 기초연금을 받으면 그만큼 생계 급여가 깎인다. 생계 급여를 산정하는 가구의 소득 인정액에서 기초연금액을 빼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지만, 그 경우 연 1조6000억원가량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가 기초연금을 ‘불공정’하다 말하는 것은 하위 70%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이에게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초연금이 없어도 생활과 생존에 지장을 받으리라 보기 어려운 상위 30%가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 10만명당 58.6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하위 70%에게 돌아갈 몫을 깎아서라도, 상위 30%의 불만을 달래야 한다는 소리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공정’은 누구를 위한 어떤 공정일까.

나는 이준석 대표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일원이다. 위 세대가 하듯이 ‘이준석 현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런 시각이야말로 그를 한 사람의 ‘청년’이나 ‘유망주’로 묶어두고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지한 태도로 토론을 시작해보자. 없는 자의 몫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을 ‘공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6-13

‘검수완박’ 文정권이 軍에는 사법독립 촉구? 표리부동!

 [노정태의 뷰파인더㊳] 헌병 동원하고 맹견 풀어 ‘예비군 윤석열’ 사냥

● 삼권분립 작동 않는 평시 軍법정
● 장군의 지위는 말 그대로 ‘왕’
● ‘中과 대립’ 대만도 평시 軍법정 폐지
● “독립적 재판” 文 일성, 진심일까
● 검찰을 軍검찰처럼 만드는 박범계案
● 공수처의 ‘자연인 윤석열’ 수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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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과 김오수 검찰총장이 6월 3일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청에서 만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18일 발생한 공군 A 중사의 사망 때문이다.

A 중사는 같은 부대 내의 상급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할 당시 녹음을 해두었고, 자신의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며,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했다. 심지어 성폭력이 발생한 차량은 가해자의 후임인 제3자가 몰고 있었다. 증인까지 있는 사건이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은 사건 해결에 있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고 자신과 다른 곳에 배치해달라는 A 중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급자인 B 준위는 최대한 ‘좋게좋게’ 넘어가고자 했다. 피해자를 불러 저녁식사를 하며 달래려 들었다. 가해자인 장모 중사가 조사와 동시에 제5공중기동비행단으로 이동조치 된 날짜는 3월 17일. 사건 발생 후 보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상담 프로그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A 중사는 4월 15일, 제20전투비행단 성고충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가 4월 30일 내린 결론은 전혀 달랐다. “자살 징후 없었으며 상태가 호전됐다.”

군내에서 법적인 조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은 국선변호사 제도를 운영 중이다. 공군 법무실 소속 군법무관이 국선변호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직무유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행태를 보였다. 국선변호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했다는 뜻이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겪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군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 초기 국선변호사를 믿고 별도의 법적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본인의 지휘계통을 따라 사건을 보고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군은 A 중사를 버렸다. 사건을 드러내고 수사하기는커녕, 다른 부대로 전출해달라는 A 중사의 요청마저도 마지못해 들어줬다. 새로운 부대 역시 A 중사를 배척했다. A 중사는 연인과 혼인신고를 한 그날 스스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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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모 중사가 6월 2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장 중사는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돼 미결수용실에 구속 수감됐다. [국방부 제공]
이런 비극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한두 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 특유의 폐쇄적 집단주의 같은 문화적 요인이 적잖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평시 군사법정이 바로 그것이다.

A 중사 사건은 부대 내의 인맥과 관계를 고려하는 군사법정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8월에 전역할 예정이었다. 이에 군 검찰이 가해자의 전역만 기다리면서 시간 끌기로 일관했다는 의혹에 휩싸여있다. 가해자를 구속 수사하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취하면 부대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부대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회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의 사건 은폐의 핵심 원인 아니었을까.

평시에도 군사법정은 군인 사이의 사건을 관할한다. 현행 체제에서 장군의 지위는 ‘왕’과 같다. 삼권분립은 작동하지 않는다. 군 검찰이 소속되는 보통군검찰부, 군 판사가 소속되는 보통군사법원 모두 편제상 군단급 부대의 휘하 조직이다. 군 검사는 수사 감독 및 기소 등의 재판 과정에서, 군 판사는 판결 과정에서 모두 지휘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군 지휘관은 법조인 자격이 없는 일반 장교를 재판관으로 참여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 심판관 제도 때문이다. 이 또한 군 내부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지금껏 용인돼왔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군 지휘자의 뜻을 거스르는 수사와 기소 등이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렵다. 설령 재판까지 간다 해도 군 지휘자가 ‘꽂아 넣은’ 다른 군인이 판사 노릇을 할 개연성도 있다.

그나마 이게 ‘개선된’ 형태다. 2017년부터 시행중인 현행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사단급 이하 부대에서는 보통군사법원을 가질 수 없다. 그 전까지는 사단장, 즉 ‘투 스타’(2성급 장군)들도, 자신의 부대에서 조선시대의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지녔다. 여차하면 아무나 감옥에 넣고, 또 감옥에서 꺼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과 전쟁 상태다. 휴전 상태일 뿐 종전 협정을 하지 않았다. 일각의 터무니없는 낙관적 태도와 달리 북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보다 훨씬 강한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대만조차도 2018년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했다.

민주공화국은 법치국가다. 군대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삼권분립이 작동하지 않는 곳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지난 6월 6일 A 중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후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A 중사의 부모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후에는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최근 군과 관련해 국민이 분노한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며 “군 사법 독립성과 군 장병이 독립적으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군사법원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요구했다.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문 대통령의 입장에 동의한다. 사법의 독립성은 신성한 것이다. 군 장병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재판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인권의 최후 보루와도 같다.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문 대통령의 진심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사법부,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사하는 경찰 등은 군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가 사법 영역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한 뒤 같은 기준을 군에 요구해야 설득력을 지닌다.

문 대통령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행보를 고집하고 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한 김오수 검찰총장과 박범계 법무장관이 빚고 있는 마찰만 해도 그렇다. 법무부는 ‘검찰직제개편안’을 통해 검찰의 독립적 수사권을 사실상 완전히 박탈하려 하고 있는 반면, 현 정권에서 임명한 (아마도) 마지막 검찰총장인 김오수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직제개편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인해 검찰은 부패, 공직, 경제, 선거, 방위사업, 대형 참사의 6대 범죄를 제외한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인지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다. 그런데 박범계의 ‘직제개편안’은 그마저도 수사하려면 법무부의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국가건 행정부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정치적 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법치주의는 남아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지역별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는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및 검사들의 사건 기소와 공소에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법무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 지휘 감독한다’는 검찰청법 제8조가 바로 그 안전판이다. 저런 장치가 없다면 대한민국 검찰청은 일개 사단장이 쥐락펴락하던 군 검찰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박범계가 요구하는 직제개편안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지위를 포기하고, 법무장관의 충견이 되라는 소리다. 각 지청은 ‘총장의 요청에 따라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륙법과 영미법을 떠나 법치국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퇴행이다.

반복해보자. 현재 박범계 법무장관이 요구하는 검찰직제개편안은 검찰을 송두리째 군 검찰과 같은 권력의 개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검찰총장을 통해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검사가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군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하던 2017년 이전의 군사법정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군 검사와 군 판사를 군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군사 문제와 무관한 군인의 일반 범죄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왜 문재인 정권은 동시에 검사와 판사를 청와대의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가?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을 수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6월 10일 보도되면석 국민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공수처는 6월 4일 윤 전 총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3부(최석규 부장검사)에 배당했다고 한다. 일단 윤 전 총장은 ‘공직자’가 아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공수처가 수사에 착수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설령 그가 공직에 있을 당시 벌어졌던 사안이라 해도 ‘공직자’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구가 자연인 윤석열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상식의 선에서 납득 불가능하다.

공수처라는 조직의 태생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법치주의가 도입된 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법치주의를 능멸하는 제도가 생긴 적은 없었다. 현재 공수처는 여당이 독단적으로 법을 바꿔 대통령이 야당의 뜻과 무관하게 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공직자를 대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는다. 공수처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군 사법제도와 비교하자면 ‘사단장 직속 헌병+검찰’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군대 비유로 끝내보도록 하자. 군인 및 군 경험자들은 고위 장성들을 흔히 ‘똥별’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문 대통령은 그들의 수사권, 기소권, 사법권을 빼앗는 개혁을 하고 있다. 개혁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아마 ‘똥별’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군인이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온전히 대우받을 때 우리의 국방력도 질적으로 나아진다.

공직에서 물러난 윤석열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모자 거꾸로 쓰고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 신세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헌병을 동원하고 맹견을 풀어 한낱 예비군을 잡으려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사법원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런 표리부동한 이중성이야말로 이번 정권의 본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현재 모습은 그가 개혁하겠다는 ‘똥별’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여군사망 #군사법정 #공수처 #윤석열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