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보수·진보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지음·왕수민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9000원
선거가 끝났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은 선전했다. 한편 경기도지사와 인천시장이라는 두 자리를 놓치면서 야권 내에서는 책임 소재를 묻고 따지는 분위기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그렇다. 같은 정당의 다른 정파를 지지하는 사람들, 다른 정당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야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 실패의 원인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삿대질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바깥을 향하기도 한다. ‘아니 어떻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도덕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자기 집값 올려주면 장땡인 거야?’ 같은 분노의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2014년의 우리에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도덕성의 유무 혹은 강약으로 치환하는 화법이 매우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다. 나와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그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서평을 읽는 독자 중에도 최소한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누리당 같은 ‘친일 독재 수구 꼴통’ 정당에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반대로 굳건한 새누리당 지지자들 가운데에는 야권 지지자들을 ‘어리고 싸가지 없는 것들’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지않은 현실이다. 한편 민주당 계열의 야당을 지지하는 이들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을 ‘분열주의자, 새누리당 2중대’로 치부하기도 하며, 진보정당에 한 표를 던지는 이들은 민주당 계열 지지자들을 또 나름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의 골은 매우 깊으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상대방을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고 설득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번 지방선거는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정당해산심판 소송에 걸려 있던 탓에 이른바 ‘야권연대’마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번 선거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단일화’로, 표와 표를 합치자는 계산만 횡행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정치적 지지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완전히 다른 도덕적 사고방식을 가진, 혹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묘사하는 일에 너무도 익숙한 채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의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바른 마음>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도 바로 이와 같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이 낙태, 동성애 등의 사안을 따라 크게 불거지고 있는 미국에서 ‘리버럴’과 ‘보수’는 상호 대화의 가능성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수준이다. ‘리버럴’이 볼 때 ‘보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생명권을 들먹이며 산모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가부장주의자들이다. ‘보수’는 ‘리버럴’을 인간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재수없는 먹물들로 본다.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경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조너선 하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상대방을 괴물로 취급하지 말라고. 다만 그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에서 나름의 ‘도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먼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고. 주제는 간명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연구 및 사례로 뒷받침되고 있다. ‘수구 꼴통’들은 도저히 답이 없다고, 저 ‘싸가지 없는’ 진보는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뒤적여보기 바란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17ㅣ주간경향 108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6101410091&code=116
2014-06-17
2014-06-08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보수적인 성향의 언론들은 일제히 교육감 직선제를 공격하고 있다.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4년마다 교육감이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바뀌니 교육공무원들이 혼란스럽다는 등의 논리가 동원된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에서 임명한 교육부 장관과 진보적인 교육감의 손발이 안 맞으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린 말이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감 선거의 직접적 이해관계자이지만, 교육은 아주 장기간에 걸친 국가적 방향을 움직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는 사람이 투표하기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론 중, 그 상관없는 사람들의 교육감 투표권을 뺏는 대신,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던가?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국민에게는 그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
중앙 정부와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 또한 그렇다. 온 나라가 똑같은 유형의 사람을 붕어빵처럼 찍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산업역군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야만 할 이유를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교육 행정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안정성과 관료적 경직성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로 뽑으면, 적어도 직선제를 하지 않을 때보다는, 내부 파벌이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무언가를 보수 언론이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보적일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교육감 선거의 반대 근거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직선제로 어떤 조직의 장을 뽑으면, ‘윗선’에서 누군가가 낙점되어 내려올 때에 비해, 시끌벅적하고 어찌 보면 난잡하다. 선거에 드는 비용 자체가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해당 조직의 구성원들은 누가 자신들의 ‘보스’가 될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혼돈은 결국 민주주의의 필요조건들이다. 결국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검증된 교육감 진영을 갖춘 채, 그들에게 학생들과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반발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을 ‘민주화’하려면, 그 조직의 최종적인 책임자를 직선제로 뽑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 선거를 통해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국민 전체가, 교육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교육은 비로소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뽑힌 교육감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교육감 직선제를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많은 직선제 선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령 검찰총장을 국민 직선제로 뽑는다면 어떨까? 국민의 표로 심판받는 검찰 조직이 과연 지금처럼 권력의 해바라기 노릇만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 검사라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선에 나서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국민 검사’가 발에 차이고 넘쳐날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검찰총장, 다음번 선거에서도 재선되고 싶은 검찰총장은, 현역 대통령의 비리까지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검찰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6·4 지방선거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거가 필요하다. 더 많은 권력이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이른바 ‘권력기관’이라는 검찰의 수장은 국민이 뽑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권력의 칼자루를 국민이 직접 손에 쥐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니 말이다.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보수적인 성향의 언론들은 일제히 교육감 직선제를 공격하고 있다.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4년마다 교육감이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바뀌니 교육공무원들이 혼란스럽다는 등의 논리가 동원된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에서 임명한 교육부 장관과 진보적인 교육감의 손발이 안 맞으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린 말이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감 선거의 직접적 이해관계자이지만, 교육은 아주 장기간에 걸친 국가적 방향을 움직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는 사람이 투표하기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론 중, 그 상관없는 사람들의 교육감 투표권을 뺏는 대신,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던가?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국민에게는 그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
중앙 정부와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 또한 그렇다. 온 나라가 똑같은 유형의 사람을 붕어빵처럼 찍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산업역군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야만 할 이유를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교육 행정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안정성과 관료적 경직성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로 뽑으면, 적어도 직선제를 하지 않을 때보다는, 내부 파벌이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무언가를 보수 언론이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보적일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교육감 선거의 반대 근거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직선제로 어떤 조직의 장을 뽑으면, ‘윗선’에서 누군가가 낙점되어 내려올 때에 비해, 시끌벅적하고 어찌 보면 난잡하다. 선거에 드는 비용 자체가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해당 조직의 구성원들은 누가 자신들의 ‘보스’가 될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혼돈은 결국 민주주의의 필요조건들이다. 결국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검증된 교육감 진영을 갖춘 채, 그들에게 학생들과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반발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을 ‘민주화’하려면, 그 조직의 최종적인 책임자를 직선제로 뽑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 선거를 통해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국민 전체가, 교육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교육은 비로소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뽑힌 교육감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교육감 직선제를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많은 직선제 선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령 검찰총장을 국민 직선제로 뽑는다면 어떨까? 국민의 표로 심판받는 검찰 조직이 과연 지금처럼 권력의 해바라기 노릇만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 검사라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선에 나서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국민 검사’가 발에 차이고 넘쳐날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검찰총장, 다음번 선거에서도 재선되고 싶은 검찰총장은, 현역 대통령의 비리까지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검찰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6·4 지방선거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거가 필요하다. 더 많은 권력이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이른바 ‘권력기관’이라는 검찰의 수장은 국민이 뽑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권력의 칼자루를 국민이 직접 손에 쥐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니 말이다.
입력 : 2014-06-08 20:30:45ㅣ수정 : 2014-06-08 20:30:4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82030455&code=990100&s_code=ao122
2014-06-03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1만6500원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 선택 이론을 발견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령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심령주의를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옹호했다.
19세기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자력 같은 전혀 모르던 에너지가 발견되거나, 플루토늄 같은 원소의 존재가 확인되거나, 전화처럼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 모든 것들이 과학의 산물이었다. 과학은 인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과학의 힘이 한계를 모르고 뻗쳐나간다면, 그것은 마땅히 죽음마저 정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으로 죽음의 벽을 넘겠다는 발상은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과학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과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심령주의는 심령주의를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이 와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0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재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다. 모든 것에 과학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사적 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과학적 전개 원리를 밝히고 그에 따라 혁명의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을 떠올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영국의 부르주아들과 죽음에의 접근방식이 달랐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이미 죽은 자와의 대화 및 접촉을 시도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20세기의 소련인들은 인간의 육체 그 자체가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시신은 지금껏 이런 저런 방식을 동원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젠가 그 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 존 그레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과 평화를 논하며 이 책을 마무리짓는다. 그의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 만한 지점도 있는 반면,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싱겁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가이아 이론 등을 받아들여 지구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주창하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배신감이 들기까지 한다. 대단히 유려하면서도 신랄한 문체로 구시대의 오류를 해체하던 본문과 달리, 결론이 너무도 ‘온건’하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그의 상태에 대한 뉴스가 연일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심장 스텐스’니 ‘저체온 요법’이니 하는 생소한 의학용어들을 접하노라면 바로 이 책, <불멸화 위원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멀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03ㅣ주간경향 1078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261745001&code=116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1만6500원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 선택 이론을 발견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령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심령주의를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옹호했다.
19세기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자력 같은 전혀 모르던 에너지가 발견되거나, 플루토늄 같은 원소의 존재가 확인되거나, 전화처럼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 모든 것들이 과학의 산물이었다. 과학은 인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과학의 힘이 한계를 모르고 뻗쳐나간다면, 그것은 마땅히 죽음마저 정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으로 죽음의 벽을 넘겠다는 발상은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과학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과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심령주의는 심령주의를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이 와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0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재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다. 모든 것에 과학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사적 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과학적 전개 원리를 밝히고 그에 따라 혁명의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을 떠올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영국의 부르주아들과 죽음에의 접근방식이 달랐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이미 죽은 자와의 대화 및 접촉을 시도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20세기의 소련인들은 인간의 육체 그 자체가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시신은 지금껏 이런 저런 방식을 동원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젠가 그 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 존 그레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과 평화를 논하며 이 책을 마무리짓는다. 그의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 만한 지점도 있는 반면,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싱겁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가이아 이론 등을 받아들여 지구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주창하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배신감이 들기까지 한다. 대단히 유려하면서도 신랄한 문체로 구시대의 오류를 해체하던 본문과 달리, 결론이 너무도 ‘온건’하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그의 상태에 대한 뉴스가 연일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심장 스텐스’니 ‘저체온 요법’이니 하는 생소한 의학용어들을 접하노라면 바로 이 책, <불멸화 위원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멀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03ㅣ주간경향 1078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261745001&code=116
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많은 이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고, 동시에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 채 오해하고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오늘 이야기할 <희생양> 역시 바로 그러한 고전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책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신화를 검토하여 그 속에서 한 가지의 공통 요소를 추출해낸다. 하나의 희생물을 폭력과 죽음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다른 잠재적인 희생양들의 안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신화 속에 이러한 희생 제의의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신화가 집단이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박해를 품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 소수자의 범주는 매우 넓으면서 동시에 극단적이다. 신체 및 정신 장애인뿐 아니라 너무도 아름답거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 한 사회 내의 지배집단에 속하지 않는 소수파의 누군가, 외국인 혹은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 등이 모두 쉽사리 희생양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예시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시피, 하나의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모두의 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제의 구도는 아주 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시선 역시 역사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종횡무진으로 훑어나간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등장인물들부터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기에 흥분한 군중 앞에 손쉽게 희생양으로 바쳐질 수 있었던 18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그 목록은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다.
비교적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희생양을 만드는 신화적 구조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종종 반복된다고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결코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실은 인류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강변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군중 앞에 내밀어 ‘스캔들’을 벌이던 그 때 이후로 인류는 기존의 신화적 집단폭력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지라르의 핵심 주장이다.
지라르는 성경 속에도 희생양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단지 그 사실만을 연거푸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거듭되는 희생양 구조를 적극적으로 돌파해낸 이가 바로 예수이며, 예수의 희생 이후로는 동일한 폭력의 구조가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인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 반복되는 모순들을 바라보며 르네 지라르라는 인문학자는 어떻게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말이다. 인문학의 역할이란 구조적 폭력을 개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2014.05.20ㅣ주간경향 107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121551431&code=116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많은 이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고, 동시에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 채 오해하고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오늘 이야기할 <희생양> 역시 바로 그러한 고전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책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신화를 검토하여 그 속에서 한 가지의 공통 요소를 추출해낸다. 하나의 희생물을 폭력과 죽음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다른 잠재적인 희생양들의 안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신화 속에 이러한 희생 제의의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신화가 집단이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박해를 품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 소수자의 범주는 매우 넓으면서 동시에 극단적이다. 신체 및 정신 장애인뿐 아니라 너무도 아름답거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 한 사회 내의 지배집단에 속하지 않는 소수파의 누군가, 외국인 혹은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 등이 모두 쉽사리 희생양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예시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시피, 하나의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모두의 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제의 구도는 아주 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시선 역시 역사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종횡무진으로 훑어나간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등장인물들부터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기에 흥분한 군중 앞에 손쉽게 희생양으로 바쳐질 수 있었던 18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그 목록은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다.
비교적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희생양을 만드는 신화적 구조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종종 반복된다고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결코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실은 인류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강변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군중 앞에 내밀어 ‘스캔들’을 벌이던 그 때 이후로 인류는 기존의 신화적 집단폭력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지라르의 핵심 주장이다.
지라르는 성경 속에도 희생양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단지 그 사실만을 연거푸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거듭되는 희생양 구조를 적극적으로 돌파해낸 이가 바로 예수이며, 예수의 희생 이후로는 동일한 폭력의 구조가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인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 반복되는 모순들을 바라보며 르네 지라르라는 인문학자는 어떻게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말이다. 인문학의 역할이란 구조적 폭력을 개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2014.05.20ㅣ주간경향 107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121551431&code=116
2014-05-1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 참사는 언론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그렇다.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구조의 손길이 좀 더 빨리 현장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오보의 책임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2014년 4월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기울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도 함께 뒤집혀버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참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버렸다. 이것은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포진하고 있는 언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언론을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언론 참사의 진행 추이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언론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오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구조된 단원고 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학생의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거나, 희대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검색어 노출을 노린 보험사 간접광고 기사를 내보내는 등의 일들 말이다. 막장 보도, 패륜 보도, 무슨 말을 붙여도 개운치 않다.
그 뒤를 따른 것은 희망 고문이었다. 어쩌면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몰 후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되었을 시점부터 언론은 ‘에어포켓’과 ‘희망’만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60시간 동안 에어포켓 속에서 탄산음료를 마시며 버틴 누군가의 사례가 꾸준히 언론에 등장했다.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나이지리아 인근의 해수 온도가 높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에어포켓만 있으면 72시간까지 생존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이 이명(耳鳴)처럼 울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어포켓에라도 한줌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심정을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민 전체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객관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할 언론이, 근거도 논리도 없이 막연한 ‘희망’만을 사흘 넘도록 떠들어대는 그 광경의 초현실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며 생존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이미 침몰 당일 ‘JTBC 뉴스 9’에서 보도된 바 있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는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언론계의 백전노장 손석희마저도 그 말에 충격을 받고 10여초간 할 말을 잊었다.
물론 그 전문가의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과 희망사항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언론은 희망사항을 보도해서는 안된다. 희망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한 현실 인식과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하는 네 글자짜리 단어 퍼뜨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다 한들 뒤집힌 배 속에서 생존자를 무사히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역시 많은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의견을 모았지만, 그것은 언론이 보도하고자 하는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이빙 벨’과 관련한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짚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세월호 침몰 사흘째인 4월18일부터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6일 침몰 당일에는 에어포켓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던 손석희의 JTBC가, 이틀 후에는 이종인 대표를 인터뷰해 “다이빙 벨은 조류와 상관 없이 20시간 연속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5월11일 이종인 대표가 현장에서 자진 철수할 때까지 다이빙 벨을 둘러싼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초반의 구조 실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해경의 출동은 늦었거나, 적어도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 및 선박직 승무원들은 제 목숨을 건지는 일에 급급했다. 청와대는 스스로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임해 떠맡지 않았고, 그래서 부처 간 혼선이 더욱 가중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더한다 해도, 다이빙 벨이 ‘해결사’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전원 구조’ 오보, 막장 인터뷰, 에어포켓 희망 고문 등의 사안을 검토해보면, 진보 언론이라고 분류되는 곳들은 그렇지 않은 언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의 품위와 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그러나 다이빙 벨 논란으로 접어들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갔다. 구조 활동을 벌이는 언딘이라는 민간업체와 해경에 대한 불신이 다이빙 벨에 담겨 여론의 바닷속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빙 벨 파동은 헛소동으로 마무리됐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0년대 초, 나는 당시 대학에 입학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안티조선 운동과 그 중심에 서 있던 논객들의 세례를 받았다. 감히 이런 주어를 써도 된다면, 우리는, 언론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시민적 언론운동이 발흥하고 꽃피었던 그 시절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히 부정적이다. 언론 소비자 운동, 언론을 바라보는 시민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 내부의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특정 언론사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와 지지의 진영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현장에서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KBS와 MBC의 일선 기자들이 집단 항명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언론을 통해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이끄는 이 사회 속에서 희망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는 공포에 질려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신문과 방송을 불신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구조받을 수 있다고 가짜 희망을 떠들어대던, 세월호 선내 방송 취급을 하고 있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스스로를 구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입력 : 2014-05-14 21:25:45ㅣ수정 : 2014-05-16 17:52: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142125455&code=990100&s_code=ao189
세월호 참사는 언론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그렇다.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구조의 손길이 좀 더 빨리 현장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오보의 책임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2014년 4월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기울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도 함께 뒤집혀버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참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버렸다. 이것은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포진하고 있는 언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언론을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언론 참사의 진행 추이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언론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오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구조된 단원고 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학생의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거나, 희대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검색어 노출을 노린 보험사 간접광고 기사를 내보내는 등의 일들 말이다. 막장 보도, 패륜 보도, 무슨 말을 붙여도 개운치 않다.
그 뒤를 따른 것은 희망 고문이었다. 어쩌면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몰 후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되었을 시점부터 언론은 ‘에어포켓’과 ‘희망’만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60시간 동안 에어포켓 속에서 탄산음료를 마시며 버틴 누군가의 사례가 꾸준히 언론에 등장했다.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나이지리아 인근의 해수 온도가 높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에어포켓만 있으면 72시간까지 생존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이 이명(耳鳴)처럼 울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어포켓에라도 한줌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심정을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민 전체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객관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할 언론이, 근거도 논리도 없이 막연한 ‘희망’만을 사흘 넘도록 떠들어대는 그 광경의 초현실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며 생존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이미 침몰 당일 ‘JTBC 뉴스 9’에서 보도된 바 있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는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언론계의 백전노장 손석희마저도 그 말에 충격을 받고 10여초간 할 말을 잊었다.
물론 그 전문가의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과 희망사항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언론은 희망사항을 보도해서는 안된다. 희망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한 현실 인식과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하는 네 글자짜리 단어 퍼뜨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다 한들 뒤집힌 배 속에서 생존자를 무사히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역시 많은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의견을 모았지만, 그것은 언론이 보도하고자 하는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이빙 벨’과 관련한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짚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세월호 침몰 사흘째인 4월18일부터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6일 침몰 당일에는 에어포켓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던 손석희의 JTBC가, 이틀 후에는 이종인 대표를 인터뷰해 “다이빙 벨은 조류와 상관 없이 20시간 연속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5월11일 이종인 대표가 현장에서 자진 철수할 때까지 다이빙 벨을 둘러싼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초반의 구조 실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해경의 출동은 늦었거나, 적어도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 및 선박직 승무원들은 제 목숨을 건지는 일에 급급했다. 청와대는 스스로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임해 떠맡지 않았고, 그래서 부처 간 혼선이 더욱 가중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더한다 해도, 다이빙 벨이 ‘해결사’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전원 구조’ 오보, 막장 인터뷰, 에어포켓 희망 고문 등의 사안을 검토해보면, 진보 언론이라고 분류되는 곳들은 그렇지 않은 언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의 품위와 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그러나 다이빙 벨 논란으로 접어들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갔다. 구조 활동을 벌이는 언딘이라는 민간업체와 해경에 대한 불신이 다이빙 벨에 담겨 여론의 바닷속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빙 벨 파동은 헛소동으로 마무리됐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0년대 초, 나는 당시 대학에 입학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안티조선 운동과 그 중심에 서 있던 논객들의 세례를 받았다. 감히 이런 주어를 써도 된다면, 우리는, 언론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시민적 언론운동이 발흥하고 꽃피었던 그 시절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히 부정적이다. 언론 소비자 운동, 언론을 바라보는 시민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 내부의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특정 언론사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와 지지의 진영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현장에서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KBS와 MBC의 일선 기자들이 집단 항명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언론을 통해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이끄는 이 사회 속에서 희망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는 공포에 질려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신문과 방송을 불신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구조받을 수 있다고 가짜 희망을 떠들어대던, 세월호 선내 방송 취급을 하고 있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스스로를 구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입력 : 2014-05-14 21:25:45ㅣ수정 : 2014-05-16 17:52: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142125455&code=990100&s_code=ao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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