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만행에도 文정권은 '저 망나니 착해질 수 있다'며 악행 방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09.26. 10:01●‘北 이기자, 잘 살아보자’는 퀘스트의 힘이 번영의 동력
●北 몰락하자 남북 힘 합쳐 외세 이기자는 서사 범람
●박정희에 멈춘 보수, 옛 대북관 넘어서는 담론 못 만들어
●그 틈새서 반미주의 세례 586, 낭만적 대북관 들이밀어
●현실의 北, 해수부 공무원 총살 후 시신훼손 만행
●北은 韓의 짐, 이웃에 폐 끼쳐도 뒷감당은 우리 몫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北에 술값 못 찔러줘 안달
●北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 게 ‘선진국’ 대한민국의 퀘스트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맥키는 선언한다. 이 책은 이야기의 전형이 아니라 원형에 관한 것이라고. 시대·장소·문화·인종을 불문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의 틀이 있다. 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구조는 어렵지 않다. 주인공(hero)이 있고, 주인공이 이루어야 할 목표(quest)가 있다.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반(反)주인공, 즉 안티히어로(anti-hero)가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이러한 원형적 구조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게 맥키의 설명이다.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주인공도 퀘스트도 아니다. 안티히어로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 그 안티히어로의 행동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냐에 따라 관객의 집중도가 오르내린다. 영화나 드라마의 흥행 여부는 이에 달려 있다. 이야기가 막히면 악역을 다시 검토해볼 것! 맥키의 책뿐 아니라 모든 시나리오 작법서에서 공히 지적하는 내용이다.
‘북한을 이긴다'와 '잘 살아보세'
대한민국, 특히 한국 보수 정치에 그 '악역'은 북한이었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 한일협정을 맺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 구도가 더욱 분명해졌다. 박정희는 1961년 대통령에 당선했다. 북한 김일성 체제의 황금기인 1960년대와 겹친다. 북한의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은 실로 놀라웠다. 일본에서 공부한 화학자 리승기가 1950년 월북한 후 합성 섬유 비날론(Vinalon) 생산 단지를 건설해낸 것 또한 1961년. 갓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모든 면에서 북한을 이기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 즉 퀘스트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북한을 이긴다.' 그 퀘스트는 도덕적 당위도 포함하고 있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37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온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이 끝난 지 고작 10여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전쟁의 참상과 공포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되는 '감춰진 진실'이 아니었다. 모든 이가 보고 듣고 겪어서 아는 실질적 위협이었다.
보수는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대한민국도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 그 원인은, 아주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북한을 이긴다'는 퀘스트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박정희 정권의 모티프는 경제 번영을 향한 열망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온 국민을 일종의 전시체제로 몰아넣었다. 진보 진영에는 바로 그런 이유로 박정희 정권과 그들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의 화약고였으니 말이다. 한국 보수 정치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에서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맞서기 위해 국민을 산업역군이자 전쟁용사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군인 출신의 정치인들은 근대적 시스템에 익숙했다. 한마디로 유능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북한에 맞서 잘 살고 잘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목적의식과 동기 부여에 국민이 호응했다. 분명한 전략은 분명한 국가적 서사(national narrative)로 이어졌다. 국가적 서사는 국민 각각을 그 서사 속의 주체로 재정립했다.
기아와 영양실조의 땅
이 서사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한 시대가 끝나간다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당시만 해도 평범한 한국인이 접할 수 있는 세계 소식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냉전의 종말과 그로 인한 변화를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실감했다.북한은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고 쌀과 라면 등을 사재기하게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부터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은 내전 상태의 소말리아를 연상케 할 만큼 처참한 기아와 영양실조의 땅이었다. 김일성은 죽었고 김정일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 경제를 개발해야 한다. 잘 살아보자, 잘 살아남아보자.' 1961년 이후 30년 넘게 지속된 대한민국의 서사에 일대 변곡점이 다가왔다. 주인공은 그대로이고 퀘스트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는데, 안티히어로가 제풀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시간을 한국 사회는 갖지 못했다. 1990년대의 흥청망청하는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의 충격 때문이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30년을 달려왔는데 망했다. 순식간에 거지가 됐다. 적어도 그 시점에는 다들 그렇게 느꼈다. 어떻게든 다시 잘 살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게 아니었다. 네가 망하건 말건 나는 잘 살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렸다.
게다가 북한이 너무도 비참하게 몰락했다. 물론 우리도 외환위기로 힘들었지만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린 북한의 경제적 비참은 그보다 빨리 시작됐다. '꽃제비'로 불리는 어린이들이 굶주려 구걸하러 다니는 처지가 됐다는 소식까지 알려지자 북한을 향한 한국인의 경각심은 급격히 사그라졌다. 그런 나라와 경제적으로 대결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북한을 상대로 경쟁심을 품는 것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그 빈자리를 채워 넣은 것은 김진명을 필두로 한 수많은 대중소설 작가들이 만들어낸 '민족 합체물'의 서사였다. '신동아' 8월호(‘여권이 조장한 북한 판타지 기원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북한의 천연 자원 및 저렴한 노동력과 한국의 기술력이 결합하면 일본쯤은 가볍게 누를 수 있는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환상적 서사가 대북 담론의 주류 자리를 꿰찼다.
낭만적 대북관과 찌질한 대일관
‘민족 합체물'의 판타지는 범여권에 더욱 친화적이다.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공천을 받아 김진명이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설정된 범여권의 공식적인 북한관은 그런 모습을 띠고 있다.문제는 현재의 야권, 전통적 보수가 과연 어떤 눈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느냐다. 지금도 북핵은 우리 안보의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온갖 군사 도발을 통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위협해온 유일한 집단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을 유지해온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북 정책에 '정책'으로서, 혹은 그 배후의 '철학'으로서, 김대중·노무현 시절의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가. 외려 박근혜는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북한을 일종의 미개척 노다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민족 합체물'의 서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소리다.
그것은 박근혜 혼자만의 탓이 아니다. 보수진영 전체가 북한관을 업데이트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북한은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우리에게 더 이상 큰 위협이 아니게 된 시점에 핵을 개발하다가 발각됐다. 그렇다면 북한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성장이라는 20세기 대한민국의 내러티브 또한 전면적 수정이 이뤄졌어야 한다.
정작 보수진영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김대중의 당선 앞에 원투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박정희가 세팅해놓은 틀 위에서 고민 없이 내달리는 경주마 같은 존재들이었다. 세상의 규칙이 통째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연이어 당선돼 10년의 집권기를 가졌지만 국정교과서 논란 같은 퇴행적 이벤트나 벌였을 따름이다.
20세기가 아닌 21세기의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최악의 실패 국가인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 진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반미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586 세대가 한층 더 낭만적으로 변한 대북관, 그리고 한층 더 지독하면서도 찌질해진 대일관을 들이밀며 우리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로 인도하고 있다.
호주머니 사정 넉넉해지면 착해질 수 있다?
대관절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한들, 세계 최악의 실패 국가이며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강제수용소를 숱하게 운영하는 최악의 인권 탄압 집단이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뀔 리는 없다. 보수뿐 아니라 진보 역시 이런 기본적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민족 합체물'과 같은 판타지에 몰두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친하게 지낼 수는 없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다른 이웃에게도 폐를 끼친다. 결국 뒷감당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 북한은 짐이다. 하지만 남에게 떠넘길 수도 없다. 술 마시고 싸우고 빚지고 행패부리는 나쁜 친척 같은 존재다.
반인륜적 만행까지 저지르는 나쁜 친척. 북한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현 정권의 대북 정책에서 잘못된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관계국이 볼 때 한국과 북한은 한 나라였지만 분단된 사이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한국이 북한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북한의 잘못에 대해 우리가 먼저 미안해하며, 북한이 바람직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문재인 정권은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북한이 외국과 우리에게 행패를 부려도 그저 비위를 맞추고 굽신 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나쁜 친척이 술 마시고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데, 혼내고 말리기는커녕 뒷주머니로 술값 더 찔러주지 못해 안달이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고 나면 저 망나니가 착해질 수도 있다고, 이웃들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해가며 실실 웃고 있는 꼴이다. 이렇듯 누군가의 악행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사람을 영어로 'enabler'라고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의 enabler인 셈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해 한 외국 석학은 한국 언론에 질문을 던졌다. 통일에 찬성하느냐고 물으면 젊은이들 상당수가 반대한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보자. 북한이 무너진다면 중국이 관리해야 할까? 한국이 관리해야 할까? 이렇게 묻는다면 다들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이 문답 속에 북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다. 박근혜 때도 그랬고 문재인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대박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한때 우리를 위협하여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군사적 강화를 부추겼던, 수족관의 메기 노릇을 해주었던 북한은, 이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삐뚤어진 탑과 같다. 게다가 그들은 핵무기도 가지고 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상태로 행패부리는 나쁜 친척의 손에 흉기까지 들려 있는 셈이다.
해악의 최소화와 '사람 구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