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6

수술실에 CCTV 달자고? 현대판 ‘파놉티콘’에 스스로 들어갈 텐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조지 오웰의 ‘1984’로 본 ‘CCTV 의무화법’의 위험성

 

윈스턴 스미스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하급 당원으로서 개성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때 ‘영국’이라고 불렸던 오세아니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세아니아의 곳곳에는 지도자 ‘빅 브러더’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빅 브러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진 정교한 그림이다. 게다가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정권 홍보 방송을 내보내는 텔레비전이지만, 동시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모든 이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이 흔히 그렇듯이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몇몇 장면이나 구절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1984>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의 작동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약간 공부가 필요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인 ‘파놉티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마치 도넛처럼 중앙이 비어 있는 원형 건물을 떠올려보자. 건물은 총 6층이며 층마다 감방이 늘어서 있다. 원형 건물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서 있다. 죄수들의 감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다. 반면 감시탑 창문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단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구조다. 벤담은 이런 감옥을 고안하고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알다시피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비인간적 감옥을 고안했을까? 18세기 말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산업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온 낯선 이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람 몸을 훼손하거나 때리는 식의 처벌은 선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전례 없이 수형자가 늘어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범죄자를 처벌, 교화, 재교육할 새로운 방안이 절실했다.

파놉티콘은 그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벤담의 설명을 들어보자.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완전한 지배 장치,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조지 오웰로 돌아가 보자. 1984년 4월 4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느 날, 윈스턴은 펜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짓은 그 자체로 ‘사상죄’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독자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텔레스크린 혹은 파놉티콘의 감시를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기에 무엇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국민이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응징하려 든다.

과연 소설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는 방방곡곡 CCTV가 설치된 세상에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공공 장소 CCTV의 필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째고 피를 쏟으며 목숨이 오가는 곳인 수술실 내부에도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여론 몰이를 보면, 인권도 프라이버시도 윤리적 감수성도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런 입법 시도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의사회(WMA) 데이비드 바브 회장은 지난 22일 의사협회에 보낸 영상에서 “이 법안은 ‘조지 오웰’적 성격이 짙어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에 가깝다”며 법안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대리 수술이나 성폭력 등 의료진의 일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규약을 확립하고 동료 간 리뷰를 강화하는 등,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이 있다. CCTV는 그런 목적 달성에 부적합하다.

반면 부작용만은 확실하다. 전신 마취 수술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대개 완전 탈의 상태로 진행한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과 수술 과정 등을 담은 전자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 방식으로는 검색도 접근도 어려운 ‘다크웹’에는 아동, 시신, 동물 등에게 성욕을 품는 자들이 찍은 온갖 끔찍한 영상이 돌아다닌다. ‘한국 수술실 영상’들은 다크웹의 핫 아이템으로 거래될 것이다. 돈과 관심을 노리는 유튜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 협박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도 충분하다.

유출자를 엄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잡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후약방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를 불신하면서 CCTV 영상 관리 업체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해킹 위험도 있다. 원자력, 잠수함 등 기밀 등급 높은 자료도 털린다. 수술실 CCTV 영상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건 허황된 꿈이다. 일단 찍은 영상은 유출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여성 연예인 등 대중의 선정적 관심이 쏠리는 사람의 수술 영상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안보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고위급 인사의 의료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수술을 받는 영상이 다크웹에서 거래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외국인, 특히 무슬림 여성들의 의료 관광 수요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중국마저도 수술실 내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윈스턴의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사상 경찰에 체포된 그는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라고 강요당하며 세뇌된다. 결국 오세아니아의 대다수 국민처럼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CTV는 감시 도구이며 인권침해 수단이다. 의료인에 대한 불만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일부 정치인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부추겨 국민 스스로 파놉티콘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건 정말 나쁜 정치다. 파놉티콘의 죄수가 아닌 시민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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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과거제 변질을 보라… 능력주의도 결국 신분제

뜨거운 감자 ‘이준석 현상’… 공정한 경쟁, 이렇게 본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을 앞세우고 선거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기존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고안된 통치 기술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뜨거운 감자가 된 능력주의를 주제로 세 필자의 긴급 지상 논쟁을 싣습니다.

①최진석(찬성): 가짜 표창장이 公正인가

②노정태(반대): 자칫하면 新계급사회 된다

③임명묵(제3의 의견): 20대에게 ‘공정한 경쟁’은 찬반, 그 이상

/일러스트=양진경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창대(변요한)는 나주 사는 장 진사(김의성)의 사생아. 매일 뜻도 모르는 성리학 경전을 달달 외운다. 과거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유배 온 정약전(설경구)을 만나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주는 대신 글공부를 한 창대는 드디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과거를 보고 심지어 소과에 합격한다. 생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대과 시험에서는 떨어지고 만다. 나주 목사는 창대를 위로하며 과거 시험의 진실을 알려준다. 대과는 글 솜씨가 아니라 집안의 힘으로 붙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조선의 길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능력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조선은 능력주의 사회였다. 유명무실한 과거제를 앞세워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고 성리학 경전이나 달달 외우던 그 모습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능력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펴낸 책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책은 2034년을 배경으로 한다. ‘마이클 영’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1860년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보통교육이 시작된 후, 몇 번의 역사적 변곡점을 거치며 노골적인 계급사회였던 영국이 능력주의를 내세운 위선적인 계급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풍자하는 책이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짚고 있다고 스스로 설명한다. 하지만 비판의 무게 추는 단점으로 쏠려 있다. ‘능력주의'의 서문을 읽어보자. “나는 능력주의가 얼마나 자만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고, 책을 썼다고 간주되는 저자를 포함해서 스스로 능력주의 체제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드러내려고 했다.”

능력주의가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개인의 타고난 소질과 노력을 합쳐 ‘능력’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만들고 그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나누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다. 처음 한두 번은 말 그대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능이나 근성 등 소위 ‘공부머리’ 역시 유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 역시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능력주의에 적합한 이들을 선별하고, 그들끼리 맺어지며 재생산하게 함으로써 결국 ‘능력주의자들을 위한 신분제’가 되고 만다.

그래도 음서(고관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방식)보다는 과거가 낫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음서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나온 것이 과거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능력주의가 더 나쁠 수도 있다. 음서제가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반면, 과거제는 그 자체가 실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에, 집권 세력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의 지배 계층은 훨씬 더 공고하게 군림한다.

조선의 경우가 그랬다. 좋은 집안에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지배 계층이 사람됨의 도리가 담겨 있는 책을 달달 외워 과거에 합격까지 하니 백성들은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권력이 된 능력주의는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인도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조정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있지 않을 것이다. ‘자산어보'로 돌아가보자. 정약전은 인간의 평등과 구원을 믿는 ‘서학쟁이’다. 서양 배에서 떨어뜨린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식을 내뱉는다. 그렇다. 우리는 먼 바다를 향해 돛을 펼쳐야 한다.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제 실력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법 앞의 평등을 전제로 한 글로벌 자유시장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노정태]

2021-06-20

비극에 탐닉하는 사회, 활개 치는 ‘방구석 코난’

[노정태의 뷰파인더㊴] 광주 건물 붕괴에서 故손 모씨 사건까지

● 쓰러진 에릭센과 BBC의 영상
●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대중
CCTV를 통해 ‘진실’ 엿보다?
● 경각심 없는 블랙박스 방송
● 수술실 CCTV 설치? 환자 인권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5월 28일 고(故) 손 모 씨 사건과 관련해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수색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CCTV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인다. [뉴스1]

 

6월 13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3차전. 레바논을 상대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다. 상대의 파울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처리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손흥민은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며 손가락으로 ‘23’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며 카메라에 키스를 했다. 시청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위한 세레모니였다.

에릭센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과 함께 뛴 적 있는 덴마크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그는 6월 13일(한국시간) 열린 2020 유럽축구챔피언십(유로 2020) D조 1차전 덴마크 대 핀란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전반 42분 무렵 다른 선수와의 충돌 없이 갑자기 쓰러졌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의료진이 달려와 응급처치를 하는 가운데 동료 선수들이 에릭센을 둘러싸고 벽을 쳤다. 환자의 모습을 방송 카메라나 관중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중계 카메라 역시 처음에는 (카메라맨의 ‘본능’에 따라) 쓰러진 에릭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으나, 곧 경기장의 원경과 관중석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BBC 스포츠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방송사들은 지탄을 받았다. 에릭센이 쓰러진 직후 모습이 다소 노출됐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방송을 통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BBC 스포츠 해설위원 게리 리네커는 “중계 화면은 대회 주최 측인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송출한 장면이고 BBC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볼 권리’와 상식선
프로 스포츠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손흥민이나 에릭센 같은 축구선수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탁월한 축구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즐기는 수많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센의 모습을 촬영해 ‘알 권리’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한 시청자는 없다. 외려 시청자는 에릭센이 쓰러진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이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는 점을 이유로 유럽축구연맹과 각국 방송사를 비난했다. 즉 시청자에게는 ‘볼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걸맞은 상식과 감수성을 근거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반대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식’이 막상 우리 현실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난 4월 25일 발생한 고(故) 손 모 씨의 사망 사건을 떠올려보자. 논의해야 할 점이 많지만, 특히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경찰의 발표를 믿지 못한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CCTV가 왜 없느냐”, 혹은 “CCTV 영상을 무편집본으로 공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인이 익사한 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CCTV 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당연한 사실이 있다. 설령 그런 영상이 존재한다 한들 경찰이 그것을 아무에게나 보라고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손 씨가 익사한 현장의 CCTV 영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영상은 누군가가 사고로 죽은 모습, 혹은 (일각에서 꾸준히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사람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라는 소리다. “경찰은 진실을 공개하라”는 이들은, 그러므로 “경찰은 사람이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멈춰서 이 상황을 제3자의 눈으로 보자. 누군가가 죽기 직전, 혹은 죽는 그 장면을, 대중이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는 CCTV를 통해 ‘진실’을 엿보는 행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졌다. 그러한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다양한 사건 사고 현장을 담은 CCTV나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
몇 년 전, 특히 남자들이 많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여성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 등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이는 모습을 담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그런 영상에는 흔히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와, 종종 로드킬(야생동물 찻길사고)을 야기하는 ‘고라니’를 합친 비하 용어가 첨부됐다.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찍은 영상 속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돌려보면서 그 위에 여성혐오까지 끼얹고 있던 셈이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것은 여성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교통사고 현장을 담은 모습이 여러 방식으로 촬영되고, 때로는 편집돼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갔다. ‘폭력에의 탐닉’은 많은 경우 여성혐오와 공생 관계를 이뤘다. 여자가 차에 치이면 ‘X라니’, 여자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면 ‘김여사’라고 손가락질하는 식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유출되고 유통되는 데 대해 진작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정 반대로 흘러갔다. 공적 논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공중파 방송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모아놓고 방송하는 별개의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지금도 매주 방송되고 있는 SBS의 ‘맨 인 블랙박스’ 얘기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으로 공중파 방송을 만들어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심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방심위가 ‘맨 인 블랙박스’를 제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식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아날 방송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 벌어진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참사에 대한 언론 보도만 해도 그렇다.

사고 당일,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사고 당시의 모습이 수도 없이 뉴스로 보도됐다. 건물이 풀썩 쓰러지는 광경, 자동차가 깔리는 모습, 간신히 사고를 피한 차량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 아무런 제지 없이 노출됐다.

이미 남들이 그런 영상을 찾아서 시청률과 조회 수를 끌어올리고 있다면, 다른 언론사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 역시 특정 언론이 사건 현장의 CCTV나 블랙박스를 공개하는 것을 막지 않는데, 다른 언론에 대해서만 제지를 가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국의 미디어는 여과 없이 쏟아지는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보도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사회적 책무다. 하지만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을 쉴 새 없이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공개하는 것은 언론의 바람직한 사회적 기능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사안을 해석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건물 붕괴 사고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경찰, 소방서가 합동으로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광주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영상을 온 국민이 되풀이해서 보는 게 과연 이 시점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안전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되새기게 해주는가? 왜 그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사고 현장의 부상자를 구조하는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보도 행태가 성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영상을 가져다 써야 조회 수가 늘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온갖 ‘유출 영상’에 우리가 중독돼 있는 탓이기도 하다. 언론이 나쁜 대중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고, 언론 소비자가 언론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최근 현안으로 넘어와 보자.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8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반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법안이 계류 중인 상태다.

수술실 내 CCTV 설치에 대한 찬반론을 깊게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몰래 찍는’ 데 익숙해졌는가. 왜 우리는 교통사고 현장, 기타 사고 장면, 범죄 현장 등 통상적으로 보기 어렵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볼 권리’를 요구하는가.

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면 환자 인권 보호에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나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충격 수술실 CCTV 영상’ 따위가 수없이 돌아다니며 더 많은 환자의 인권이 유린될 위험을 생각해봐야 한다.

수술실로 간 ‘방구석 코난’
찍어놓은 영상은 언제 어떤 식으로건 유출될 수 있다. CCTV 영상을 돌려보고 품평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의 인권을 짓밟을 여지가 생긴다.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CCTV를 설치할 경우, 의료진은 CCTV에 익숙해지고 그 중 위험성이 높은 ‘예비 범죄자’는 CCTV를 피해 어떻게든 범죄를 저지를 방법을 모색할 테다. 마취된 채 알몸으로 수술을 대기하는 환자는 CCTV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CCTV와 차량용 블랙박스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방구석 코난’ 혹은 ‘네티즌 수사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수술실 내 CCTV 의무화 법안은 ‘방구석 코난’을 수술실에 들여놓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제다. 우리에게 인권이란 대체 무엇인가?

#광주참사 #손모씨사건 #수술실CCTV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16

나의 첫 프로그래밍(?)

정확히 말하면 elisp(emacs lisp) 코드 다섯 줄(주석 제외)에 불과하지만, 나름 성취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록 삼아 올려둡니다.

코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defun new-file-with-date-time ()
  "날짜-시간 표기된 새 파일 만들기"
  (interactive)
  (find-file (format-time-string "~/Dropbox/txt/%y%m%d-%H%M%S.txt")))
(global-set-key (kbd "C-c C-n") 'new-file-with-date-time)
;; 날짜 시간 표기법은 이 링크를 참고 https://www.gnu.org/software/emacs/manual/html_node/elisp/Time-Parsing.html

이게 뭐 하는 거냐. 제가 글 쓸 때 쓰는 emacs라는 텍스트 에디터가 있습니다. 1976년에 만들어진,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프트웨어입니다.

구시대의 유물답게 emacs는 수많은 세팅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그 단점은 반대로, 본인이 원하면 기존에 없던 기능을 써서 넣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저 코드는 이런 뜻입니다. 이맥스에서 어떤 파일을 편집중이건, ctrl-c ctrl-n 을 입력하면, 210616-203308.txt 같은 이름의 새 파일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지금 이 순간'을 파일명으로 삼은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내용을 입력한 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 경로는 제가 텍스트 파일을 모아두는 드롭박스 내 txt 폴더.

이 '자체 확장 기능'은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합니다. 1)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내용을 빨리 적어놓기 2) 메모에 고유 식별자(날짜-시간) 부여하기 3) 모바일에서도 접근 가능하게 하기(드롭박스라서 자동 싱크)

저는 프로그래밍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영어로 어떻게 어떻게 구글 검색을 좀 해보면 남들이 쓴 코드를 찾아볼 수 있고, 그걸 붙여넣어 실험해보다 보면 작동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런 식이다보니, 솔직히 저 코드에서 (interactive)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가 원하는 기능을 스스로 구현해냈으니, 그거면 된 거죠.

이런 글을 왜 쓰나 싶지만, 자랑? 기록? 뭐가 됐건 그냥 올려봅니다.

(참고로 제가 이준석의 '엑셀 시험' 어쩌구를 보고 콧방귀를 뀐 이유도 이런 겁니다. 저는 learning curve가 굉장히 가파른 고대 유물 소프트웨어를 즐겨 쓰는 사람이고, 심지어 간단한 스크립트도 짭니다. 하지만 이게 저의 '글쟁이'로서의 '능력'과 상관 있나요? 없습니다. 좋은 글쟁이는 글을 제 시간에 읽기 좋게 쓰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HWP에서 원고지 매수 확인하는 기능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죠.)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대표에게 ‘공정’을 묻는다

[朝鮮칼럼 The Column] 이 대표, 노인 기초연금 소득 하위 70%에만 주고
상위 30%에는 안 준다며 불공정한 제도라고 지적
없는자의 몫 줄여서라도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변인 공개오디션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덕담부터 건네자.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과 취임을 축하한다. 이전에도 30대 당대표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신생 군소 정당이 아니다. 원내 102석을 지닌 제1 야당이다. 36세 당대표는 실로 이례적 사건이며 탁월한 성취다.

그러나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처럼,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르는 법. ‘이준석 현상’이 종전 정치 문법에 지각변동을 불러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갈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적 관점, 특히 ‘공정’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 빈곤 문제를 생각해보자. 최근 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며 축포를 터뜨리고 ‘국뽕’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노인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다른 OECD 가입국과 같은 층위에서 논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가 펴낸 ’2019 자살 예방 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2015년 기준 10만명당 58.6명이었다. OECD 평균인 18.8명을 훌쩍 뛰어넘고, 38.7명으로 2위인 슬로베니아와도 격차가 크다.

왜 그럴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27.7%가 생활비 문제를 꼽았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이 OECD 평균의 약 세 배에 가까운 나라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노년층 내 빈부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중위 소득을 100으로 봤을 때 소득이 50%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상대적 빈곤’이라 한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상대 빈곤율은 48.8%에 달한다. 절반에 가까운 노인들이 통계적으로 빈곤층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경쟁의 나라인 미국조차 노인 상대 빈곤율은 같은 해 기준 21%에 불과하다. 12.1%인 OECD 평균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령연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명박 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이라 이름을 바꾼 후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액을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렸다.

이쯤에서 이준석 대표가 2019년 펴낸 ‘공정한 경쟁’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 대표는 현재 기초연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다. 소득 하위 70%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책을 직접 인용해본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밝히자면, 기초연금 제도에는 결함이 있다. 기초연금 수급액을 소득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 노인 40만명은 기초연금을 받으면 그만큼 생계 급여가 깎인다. 생계 급여를 산정하는 가구의 소득 인정액에서 기초연금액을 빼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지만, 그 경우 연 1조6000억원가량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가 기초연금을 ‘불공정’하다 말하는 것은 하위 70%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이에게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초연금이 없어도 생활과 생존에 지장을 받으리라 보기 어려운 상위 30%가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 10만명당 58.6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하위 70%에게 돌아갈 몫을 깎아서라도, 상위 30%의 불만을 달래야 한다는 소리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공정’은 누구를 위한 어떤 공정일까.

나는 이준석 대표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일원이다. 위 세대가 하듯이 ‘이준석 현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런 시각이야말로 그를 한 사람의 ‘청년’이나 ‘유망주’로 묶어두고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지한 태도로 토론을 시작해보자. 없는 자의 몫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을 ‘공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