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15

'일반 시민'을 넘어서

집회를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는 발상은 착각이다.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축제를 집회처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바와 같이, 축제의 탈을 쓴 집회가 아닌, 집회의 탈을 쓴 축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6월 10일 그 많은 인파가 모이고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군중들 속에서 진짜 '집회'를 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KBS 앞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그 광경을 목격한 몇몇 우익 단체들은 항의 집회를 연답시고 엉뚱하게 MBC에 찾아가 별 짓을 다 했는데, 그러자 대책회의의 차량과 집회 행렬이 길고 긴 행진을 하게 된 것이 13일의 금요일 밤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다.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행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추산으로 1만여명 이상의 대오를 유지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명박이 물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람들도 탈진하지 않고 있다. 기나긴 고난의 행군은 시위가 지나치게 지리멸렬해질 가능성을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편하게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중간에 집에 간다. 여의도에 도착하고 나니 '구호빨'이 예전에 비해 훨씬 잘 먹힌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축제를 즐기고자 모인 사람들은 반면, 끈덕지게 광화문을 사수하며 적은 인원으로 효율성 있게 놀고 있다. 역시 13일의 금요일 밤에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남아있는 깃발은 오직 10대 연합에서 가져온 것 뿐이었는데, 내가 학부 다닐 때 '문선'이라 부르던 그것을 하며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이 분열은 매우 긍정적이다.

화물연대의 파업으로 인해 부산항이 마비될 지경이다. 화물연대가 부산항을 봉쇄하고 있지 않다 뿐이지 사실상 그 기능은 멈췄다고 봐야 한다. '생계형 파업'이라는 말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먹고 사는 문제'라는 말이 정치적인 긍정성을 띌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화물연대는 이명박 정권의 핵심 정책에 대한 정치적인 반대를 내걸고 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예전에 비해 턱없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트럭 운전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몇 개 국가가 있는데 그 이름이 다 기억나지는 않고, 사진을 저장해 둔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물류가 멈춰버린 결과 슈퍼마켓의 진열장들이 아래 사진처럼 되어버리고 말있다.


(바르셀로나의 한 슈퍼마켓. 레몬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


과연 한국의 '일반 시민'들도, 이명박이 순순히 말을 들을리는 거의 없으므로 물류대란의 여파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런 파업을 긍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유가 파고 속에서 꽁치가 풍작인 터라 어민들이 울상이라는 기사가 현재 네이버 메인화면에 떠있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유럽의 어부들은 EU를 상대로 가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세부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차이가 있지만, 유가 상승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경제 위기는 닥쳐오고 있고, 한국의 정치 세력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명박산성을 재축조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경찰이 광화문의 봉쇄를 터줄 가능성은 그야말로 0이다. 이명박이 시민들의 말을 곱게 들어줄 턱이 없다. 집회가 끝난 후 다음날 아침 곱게 회사에 출근하는 '일반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게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는 사실로부터 큰 충격을 받겠지만,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집회가 다양한 방면으로 분열되는 것과 동시에, '일반 시민'과는 다른 사람들이 자꾸 끼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가 종종 눈에 띈다. 어느 '진보 매체'에서 촛불시위의 초창기에 참여자를 묘사하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청바지에 티셔츠, 굽 높은 구두에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크로스백을 매고 있는 사람들'. '일반 시민'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이는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규정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규정은 '서울말'이라는 단어를 통해 지역 토착어를 소외시키킨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계급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반 시민'이라는 단어가 마찬가지 논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차마 그런 말까지 하지 못하지만, 익명으로 찌질거리는 일에 익숙한 일련의 '네티즌'들은, 평화로웠던 촛불집회가 폭력시위로 변질되게 된 원인을 노숙자와 노가다꾼들의 가세에서 찾곤 한다. 농담이 아니다. 이 기사에 달린 썩어나는 리플들을 보라. 물론 나도 술냄새 펄펄 풍기는 아저씨들이 꽥꽥 소리지르는 것이 아주 못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반응은 그런 즉각적인 쾌와 불쾌의 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다. '알바'를 성토하는 것들을 일단 빼보자. 그러면 의견의 8할은 '사진을 봐라, 20대가 주범이다'이고, 나머지 2할이 노숙자 욕인데, 후자가 직설적으로 노숙자를 '시민'의 범주에서 몰아내고 있다면 전자는 다소 교묘한 방식으로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후자가 사회 하층민에 대한 정치적 배제에서 멈추는데 반해, 전자는 그들의 존재를 아예 인식론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인식론적 차단이 적용되는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조선일보 등에 광고가 안 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기뻐하면서, 화물연대의 파업으로 인해 이명박이 화주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들 또한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팽팽하게 고조되어 있는 반 정부 시위대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시민'들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히 칸트의 도덕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칭찬받을만한 일이 못 된다.

그러므로 촛불시위대는 '일반 시민'의 벽을 넘어 노동조합과 적극적인 연대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그 벽을 넘어서는 일은, 촛불시위의 물결 속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들이 단순히 여러 단체에서 나누어주는 피켓을 수동적으로 받아드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대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나 읽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연대의 손길을 먼저 내밀고 있는 쪽은 그 잘나신 '일반 시민'들이 아니다. 6월 7일 신촌 로터리에서 연세대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와 내 친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다.


(노점상을 밝히고 있는, 소주병에 꽂힌 촛불)



(포장마차의 윗부분에 붙어있던 안내문)


서울서부지역 노점상 연합은 6월 7일부터 10일까지, 밤 8시에서 9시에 걸쳐 전등을 소등하고 대신 촛불을 켜놓는 것으로 촛불시위에 대한 연대의 뜻을 밝혔다. 물론 이런 사실을 '일반 시민'들은 거의 모를 뿐 아니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다. 이것은 폭력과 비폭력 이전의 문제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염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혹은 대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며,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일반 시민'이라는 단어에 이 촛불시위를 그토록 가둬놓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해, 이 촛불시위에 승리하기 위해, 예전보다 훨씬 더 너그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계급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시민적 교양의 토대를 단단하게 다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연대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나는 아직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홍보물을 함께 나누어주는 것 정도가 지금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이다. 중요한 것은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며, 따라서 노동자이다. 더 많은 '일반 시민'들이 벽을 넘어 노동자가 되는 날, 승리는 한 걸음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볼이 터져라 오뎅을 먹고 있음.
이 사진을 다른 곳으로 퍼가는 일은 절대 허용되지 않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만 권하지 않습니다)

댓글 30개:

  1. 며칠인지는 잊어버렸는데, 전노련이 순두부 1만개를 뿌린 날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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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술냄새 펄펄 아저씨들 꽥괙'에 조금 뜨끔해진 사람입니다. 6월 10일자 술주정뱅이들 이야기 하나 링크합니다.
    http://odonuri.tistory.com/entry/6월-10일-그리고-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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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나가다 우연히 봤습니다. 지난 글과 이번에 올리신 글 정말 잘읽었구요. 촛불시위를 축제로만 즐겼던 길들여진 패배주의자란 생각에 자성하게 되는군요.
    (비아냥 아닙니다 ^^)노동자 시각으로!! 새로운 연대의 의미로!! 꼭 그곳에 가서 오뎅을 먹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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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말을 그대로 바꾸면 노동자이기 이전에 소비자이기도 하죠. 노동자 시위보다 소비자 시위가 더 쉽고 파급력도 더 크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같은 사람은 소비자 운동, 소비자의 포지션에서 저항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하죠. 꼭 노동자의 포지션에서 목숨걸고 저항하는게 항상 승리에 더 가까워지는 거라는 편견은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그저 더 힘든 길일 뿐일 수도 있으니까요. 힘이 든다고 해서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실제로 보이콧은 간디가 말한 비폭력 저항의 전략 중에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죠.

    저는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소비자 운동인 촛불시위를 왜 굳이 노동자 운동으로 바꾸려고 하는지를요. 제가 보기엔 촛불시위의 가장 큰 '장점'은 일할 때 투쟁하는게 아니라 소비자로서 일 끝내고 투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일할때 투쟁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훨씬 더 줄어버릴 겁니다. 그리고 꼭 그럴 필요도 없구요. 사람들에게 더 힘든 길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게 항상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승리 역시 더 힘들어질 뿐더러 사람들도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그것이 기존 좌파 노동자 운동의 한계였죠. 파업은 목숨걸고 해야 하지만 소비자 운동은 일 끝나고 항의전화만 몇번 걸어주면 됩니다.

    게다가 간과하시고 있는게 있으신데 촛불시위는 소비자들의 '연대'입니다. 거기서는 계급이 중요한게 아니라 '소비자'라는 정체성으로 모두가 한데 묶이는 것이죠. 제가 보기엔 좌파들도 자신들의 프레임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좌파들도 이젠 진보해야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그런 것처럼요. 노동자 운동에 집착하는 한 촛불시위와는 별로 생산적인 접점을 낼 수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 노동자 차원에서 저항하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을 놔두고 굳이 힘들게 목숨걸고 싸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격렬하게 싸워야 승리가 쟁취된다고 믿는 것은 비유하자면 예술가가 혼신을 다해 만들어야만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과 비슷한 오류라고 봅니다. 어떤 예술은 아이디어 하나로도 쉽게 만들어지고 그게 혼신을 다해 만든 작품보다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는 거니까요.

    즉 가장 힘든 길, 목숨걸고 올인하는 길이 항상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거죠. 님은 목숨걸고 올인하는 것을 시민들에게 요구하고 계신데 그게 꼭 승리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승리로 가는 최적화된 길도 아니라는 거죠. 승리를 바라시는 건지 아니면 그저 목숨걸고 싸우는 걸 보고 싶으신 건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에서도 전략/전술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소비자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효과적인 전략/전술입니다. 기존 좌파들이 사람들에게 노동자의 차원에서 저항하기를 고집하는 한 그들은 쉽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좋은 전략 하나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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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동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노동자 포지션보다는 소비자 포지션으로 저항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노동자 포지션으로는 자기 회사에 저항할려면 말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리스크가 지나치게 큽니다. 그런데 소비자로서 저항하는 건 리스크가 없죠. 그리고 효과는 오히려 더 큽니다.(조중동에 광고올리는 회사들에 대한 불매운동은 안티조선도 못했던 일을 아주 쉽게 해내고 있습니다.) 리스크를 늘리는게 항상 효과를 더 늘리는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해야될지 몰라도 소비는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소비자로서 라는 것이죠. 자꾸 시위를 좌파의 기존 프레임에 맞추고 그쪽으로 유도하려고 하지 마시고 오히려 좌파가 그동안 자신의 프레임에 갇혀 간과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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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저는 그래서 반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소비자가 되는 날 우리는 승리할 거라고 말입니다. 맑스는 노동자에겐 국경이 없다고 말했지만 노동자는 자기 회사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소비자에게야말로 정말로 국경이 없습니다. 만국의 소비자들은 정말로 단결할 수 있습니다. 연대할 수 있습니다. 님의 글은 본문에서도 언급하셨듯이 너무 도덕적 우월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직장에 출근하는 것이 비도덕적인 게 되는 겁니까. 시위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한다고 해서 우리가 승리에 더 가까워질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도덕적 우월성 투쟁과 승리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안하는 사람들조차 특별히 님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님에게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제가 님을 비난하는게 되니까요.) 자꾸 시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고 하고 계도하고 훈계하려고 하고 이런게 좀 보기 그렇네요.

    무엇보다 기준이 너무 자의적입니다. 출근하는건 전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동자 파업과 연대할지 말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거지 님이 강요할 일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비도덕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님이 촛불시위 내부에서 님 나름대로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는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도 촛불시위 내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자 파업과 연대해야만 도덕적인 거다 출근하면 비도덕적이다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뿐입니다. 피켓을 읽어보든 노동자 파업과 연대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 맘입니다. 님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특히 그건 도덕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좌파적 차원의 문제일 뿐이죠.) 소비자로서, 시민으로서, 시위에 나가고 다음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동자 파업과 연대하지 않는게 무슨 잘못이 되는 건 전혀 아닙니다. 님에게 '그 잘나신'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로서 투쟁하는게 소비자로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건 단지 님의 편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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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저는 그래서 반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소비자가 되는 날 우리는 승리할 거라고 말입니다. 맑스는 노동자에겐 국경이 없다고 말했지만 노동자는 자기 회사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소비자에게야말로 정말로 국경이 없습니다. 만국의 소비자들은 정말로 단결할 수 있습니다. 연대할 수 있습니다. 님의 글은 본문에서도 언급하셨듯이 너무 도덕적 우월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직장에 출근하는 것이 비도덕적인 게 되는 겁니까. 시위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한다고 해서 우리가 승리에 더 가까워질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도덕적 우월성 투쟁과 승리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안하는 사람들조차 특별히 님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님에게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제가 님을 비난하는게 되니까요.) 자꾸 시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고 하고 계도하고 훈계하려고 하고 이런게 좀 보기 그렇네요.

    무엇보다 기준이 너무 자의적입니다. 출근하는건 전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동자 파업과 연대할지 말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거지 님이 강요할 일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비도덕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님이 촛불시위 내부에서 님 나름대로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는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도 촛불시위 내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자 파업과 연대해야만 도덕적인 거다 출근하면 비도덕적이다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뿐입니다. 피켓을 읽어보든 노동자 파업과 연대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 맘입니다. 님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특히 그건 도덕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좌파적 차원의 문제일 뿐이죠.) 소비자로서, 시민으로서, 시위에 나가고 다음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동자 파업과 연대하지 않는게 무슨 잘못이 되는 건 전혀 아닙니다. 님에게 '그 잘나신'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로서 투쟁하는게 소비자로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더 좌파적이긴 하겠죠. 좌파가 되어야만 도덕적인 것이다? 그건 단지 님의 편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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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촛불집회로 인해 소외받는 계층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소외받는 계층에 대한 몇몇 네티즌들의 시선은 너무 차갑다고 느껴집니다. 저도 그렇지는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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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촛불집회로 인해 소외받는 계층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소외받는 계층에 대한 몇몇 네티즌들의 시선은 너무 차갑다고 느껴집니다. 저도 그렇지는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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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글쎄요. 소비자들이 100만 모였는데 정부와 집권세력이 두려워 하던가요? 학원심야교습 연장, 의료민영화서부터 시작해서 집시법 강화 언론 통제 강화 기타 등등 지 할짓 다하고 있지 않나요?

    리스크가 적다고 하시는데 물론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한계도 분명하다는 생각은 안드시나요?

    촛불이 백만이 모이거나 말거나, 세상이 그냥 아무일 없다는 듯 돌아가게 내버려둬서는 쟤들은 경찰 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일 얼마든지 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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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상한 모자/ 나 못 받아먹었네 그려...


    odogabi/ 저도 맥주 캔 하나 정도는 홀짝거리곤 하죠. 하지만 정말 추한 주정뱅이들은 자기네 깃발을 태극기보다 먼저 컨테이너 위에 올렸던 '아고라'였습니다. 왜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양철북/ 한 곳만 그런게 아니라, 서울 서부지역 노점상들은 다 참여했으니 어디서건 상관 없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한 연대는 화물연대와 그 외 파업을 시작할 민주노총 등에 대한 연대라는 것도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익명/ "소비자 운동인 촛불시위"라는 규정 자체가 이미 촛불시위의 외연을 좁히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파업하지 않는 '일반 시민' 100만명보다, 파업하지 않는 '일반 시민' 10만명과 파업하는 노동자 10만명이 연대하는 것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정국이니까요.

    현재 노동조합들의 파업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과격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동권들이 촛불시위의 비폭력 수준에 맞춰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모습이죠. '목숨을 건다', '과격하다'라는 식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주로 수구언론들이 쟁의중인 노동자들을 몰아갈 때 사용하는 어휘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촛불시위 참여자들에게 '좌파'의 프레임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잘난 시민님들' 같은 표현으로 다소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분들과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사용한 표현입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지 않고요.

    제가 말하는 모든 문제 제기들은 철저히 전략적이고 계산적입니다. 도덕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이번 집회를 통해 유의미한 사회적, 제도적 변화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거죠. 저 또한 집회 나갔다가 돌아와서 출근하는 사람인데, 다른 시민들을 비난하겠습니까? 다만 그런 '일반 시민'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물어/ 저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집회에 참여해서 개새끼 소새끼 소리지르고 술냄새 풍기시는 분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죠. 네티즌들의 차가운 시선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익명/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지금도, 온갖 악법들이 상정되고 있고 또 이명박은 뒷구멍으로 운하를 파네 마네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연기하네 등등 쇼를 하고 있죠. 단순한 거리 행진만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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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안녕하세요.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 편집을 맡고 있는 미류 라고 합니다. 다소 급하게, 촛불집회와 관련된 비폭력,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좌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패널로 참여 가능하실지 연락을 드리려고 하는데 메일주소나 연락처를 rights@chol.com 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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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날짜와 시간이 맞다면 참여할 의향이 있습니다. 메일로 연락처를 보내드릴테니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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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노동자 입장에서 저항하는게 소비자 입장에서 저항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노동에는 밥줄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목숨을 언급한 것은 그런 먹고사니즘의 의미에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반면에 소비자로서 저항을 하는 것은 밥줄은 커녕 리스크가 제로입니다. 파업과 불매운동 둘중에 어느것도 더 파급력이 클지 생각해보면 당연히 불매운동이 더 큽니다.

    파업 - 리스크 만빵 + 파급력 중간
    불매운동 - 리스크 제로 + 파급력 최강

    뭐 이정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노동자들의 파업은 촛불시위의 반 이명박 노선과 직접적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연대라고 하지만 큰 틀은 공유해야 하는 거니까요. 지구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촛불시위가 전부 구호를 외칠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촛불시위에 한해서는 비폭력과 반 이명박은 본질까지는 아니어도 하위 문제들을 묶는 집합 혹은 가족유사성 명제 정도는 되는 거 같습니다.

    참고로 저도 폭력시위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폭력시위가 하기 싫은 사람은 비폭력 시위를 할 수 있는 거고 그들이 폭력시위 하고 싶어할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봅니다. 저도 전략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저는 이번 촛불시위가 탈근대적 시위, 그리고 소비자 운동의 파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식을 가졌으면 하는 시위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코멘트를 달고 있는 거구요.

    동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소비자운동과 비폭력시위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도 폭력시위를 지지하는 거구요. 그런데 폭력시위같은 것은 타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강요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비폭력하자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어렵구요.

    그리고 소비자 운동과 비폭력시위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노동자 운동과 파업이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폭력시위는 지지하지만 노동자 운동과 파업같은 노동자의 포지션에서 저항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비효율적이고 리스크도 크기 때문이죠. 파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노동자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는 거지만 촛불시위 자체는 소비자 운동으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뭐 서로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는 있겠지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파업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지가 변수가 되겠네요. 그리고 파업 자체만으로는 이슈를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고 기존 이슈와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일 거 같습니다.

    소비자운동은 다들 자기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말이지만 바로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내 문제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노동자 파업은 노동자들의 문제입니다. 냉정한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요. 그들이 반 이명박 구호에 동참하는 거 까지야 상관없겠지만 거기까지 신경써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지구상에 촛불시위가 신경써야할 문제들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외연의 확대도 좋지만 크게 잡아 반 이명박 전선 정도로 집중력을 갖는 것도 중요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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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어쨌든 지금 촛불시위를 하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이 시위를 하는 일은 참 좋은 것인데 그것을 굳이 냉소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들에게 뭔가 제안을 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단죄라든지 비난 이런건 승리를 위해서도 플러스가 되는 일이라고 보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는 지금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고 그런 나름의 성과를 외면하고 올 오어 낫씽으로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태를 해결하는 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습니다. 폭력시위로 국가전복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도 나름의 성과는 내고 있으니까요. 선거가 가까이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없어서 그건 좀 아쉽게 되었네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이런 말을 하게된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려는 이유라든지 기준이 외부적이고 자의적이라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촛불시위가 좌파들의 기준을 맞춰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좌파들이 촛불시위를 욕하는 거다 라고 말한다면 할말 없지만요. 즉 처음부터 맞지 않는 기준으로 비난을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들면 탈근대적인(형식) 소비자 운동(내용)에서 좌파적인(형식) 노동자 운동(내용)을 기대한다든지 하는 것요. 어쩌면 기대가 너무 큰 것일지도 모르구요. 촛불시위는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더 상황변화를 위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즉 우리가 촛불시위 하나에만 올인해서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거죠.

    만에 하나 님이 바라시는 것처럼 촛불시위의 성격이나 외연이 변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변화시키려면 좀 더 전략에 있어서 비난, 단죄, 도덕적 추궁, 이런 것보다는 부드러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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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파급력'을 산출하는데 행위자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을 끼워넣는것부터가 개념 오류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불살라 노동 3권을 지키고자 했던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그런 계산 방식대로라면 파급력이 0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념 혼동과 더불어, 제가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없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참고로 저도 폭력시위를 지지하는 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폭력시위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파업이 폭력시위입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자의적인 개념을 도입하시면 곤란합니다.

    저 또한 오늘도 촛불시위를 위해 광화문에 나갔던 사람입니다. 촛불시위를 제가 냉소할 까닭이 없지요. 제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촛불시위를 오직 그들이 말하는 '일반 시민'들만의 것으로 한정지음으로써, 이명박 정권의 횡포를 막아낸다는 최초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오는 그런 이들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비난, 단죄, 도덕적 추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부터가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엿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 리플을 통해 익명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시던 분은, 다음 아고라나 그 외 다른 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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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저는 파업이 폭력시위라고 한게 아니라 님이 폭력시위를 지지하시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전에 글들을 읽어보고서 말이죠. 비폭력 시위에 반대한다는 건 폭력시위를 지지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파급력을 위험으로 산출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 둘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즉 위험이 높아보이는 것이 항상 파급력도 높지는 않다는 거죠. 제가 파급력을 판단하는 건 당연히 위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별도의 기준에서 였습니다.

    어쨌든 시위대의 일부에게 냉소를 보내는 건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냉소라는 것이 비폭력과 출근, 시민, 이런 일반적 조건들에 광범위하게 뿌려지고 있는게 이 글 아닌가요?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 자체가 소중하다는 얘기였구요, 그들을 냉소해서 우리가 얻을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님의 글에 대해 덧글을 달고 있는 것인데 아고라에 가서 얘기하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아고라엔 님의 글이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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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집회를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는 발상은 착각이다.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축제를 집회처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바와 같이, 축제의 탈을 쓴 집회가 아닌, 집회의 탈을 쓴 축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6월 10일 그 많은 인파가 모이고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군중들 속에서 진짜 '집회'를 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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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의 글의 첫 단락입니다. 더 인용할 필요도 없이 이거랑 마지막 부분의 '그 잘나신' 하나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대부분'을 떨궈내고 '진짜' 집회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만 가지고 촛불시위를 하시려구요? 진짜, 가짜를 나누는 거 자체가 그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겁니다. 님이 무슨 촛불시위의 사제인가요? 촛불의 교리를 우리에게 정해주시게 말입니다. 님이 사제적 유형이라는 것은 (즉 자의적 기준으로 이분법적으로 잘잘못을 가리고 잘못된 것을 단죄하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유형) 눈치 깠지만요, 사제적 유형인 거 자체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금 님이 말씀하시는 촛불 교리는 완전히 자의적이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현실에 적용되든 안되든 간에 그걸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거죠.

    님은 진정성이라든지 도덕적 결벽성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 했던 파급력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진정성이 있다고 항상 파급력이 좋은 건 아닙니다. 그래요 실제로 구분할 방법은 없지만 어쨌든 진정성이 별로 없는 촛불 시위 참가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럼 그들을 솎아내고 몰아내면 촛불시위가 더 파급력을 갖게 됩니까? 아니라는 거죠. 그저 더 진정성이 있게 될 뿐이죠.

    님은 여기서 진정성이 있게 되는 것과 파급력이 늘어나는 것을 혼동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정확히 제가 앞서 말한, 위험이 증가하는 것과 파급력이 증가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진정성도 위험도 파급력과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님의 단어를 가져와보자면 개념 오류라는 거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구성원들의 진정성이 순수하고 더욱 강해지고 구성원들에 대한 위험이 더욱 증가하는게 승리에 최적화된 상태인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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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이것을 저는 예술의 비유로 말한 바 있습니다. 님은 아마 비평을 하셨다면 진정성의 사제가 되고도 남았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예술은 진정성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항상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구요. 그것을 소비자 운동으로 설명한 거구요.

    다시 반복하자면 저는 님이 말하신 개념 오류를 행하고 있는게 아니라

    진정성과 위험, 그리고 파급력과 승리 간에 인과관계의 부재, 즉 반비례든 비례든 모든 일체의 관계의 부재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저 격렬하게 싸우고 싶은 것과 (여기엔 분명 진정성과 위험 둘다 필요합니다.) 목표를 이루고 싶은 것을 혼동하지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진정성과 위함을 감수하는 행위가 도덕적이긴 하죠. 하지만 도덕적이라고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닙니다.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항상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구요.

    물론 그 반대도 아니죠. 제가 그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셔서 개념오류라고 하시는데 저는 비례도, 반비례도 주장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저는 비관계, 즉 인과관계의 부재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진정성이 없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이건 더 이상하죠. 제 말을 이렇게 이해하셨다면 당연히 오해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때로는 님의 그 결벽적인 진정성과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와 도덕성의 추구와 미학적 차원의 추구, 그런 것들이 만들어낸 님의 기준에 이 촛불시위가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 촛불시위가 잘못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님의 기준에 맞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촛불시위는 님의 비위에 맞기 위해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님에게 '그 잘나신'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단지 님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촛불시위에 더이상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님과는 기준이 달라서 그사람들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제가 그사람들 중 한명이 되기도 합니다. 님도 누군가가 보기엔 그사람들 중 한명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사람들은 다들 기준이 다르기도 하니까요.)

    누구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있는 거고 배제하고 싶은 사람은 있는 거겠죠. 그런데 제가 보기엔 님의 기준은 너무 결벽증적이고 높아요. 그리고 그 기준을 말하는 방식도 너무 까칠합니다. 욕먹어서 변화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건 그냥 나오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님의 글을 보고 다음부터 안나오게 될지도 모를 그 한명이 저에겐 너무 소중합니다. 최소한 설득으로, 좀 부드럽게 제안하는 방식을 선택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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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집회에 가보고 크게 느낀 것은 '계층의 다양함'이었습니다. '일반 시민'은 중심 집단도 없고 오히려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시위대를 지칭하는 것이겠죠. 저는 오히려 '성공'의 요건을 그런 점에서 찾습니다.

    아시겠지만, 집회에 가보면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있지도 않고 모두 모여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근처에 앉아서 노닥거리는 사람, 적당히 음식점에 가서 구경이나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역시 느낀 것은 과연 목숨을 걸고 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분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불성실한 시위 태도가 되겠죠.

    당장 이런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다면, 언론과 정부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시위대의 성과도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저와 같이 온건한 사람들과는 어쩌면 목표 자체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폭력 시위에 대해서도, 당장 '파이프 사용'건이 나온 이후부터, 시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동료분들은 촛불시위대를 '폭력시위대'로 규정하고, 폭력진압은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성공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바꾸는 것이고, 폭력의 문제에 의해서 기존의 시위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탈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노무현 정권에서의 반 FTA 시위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마지막에는 농민과 노조만 남는다면 국민적 여론을 모으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화물연대의 깃발을, 서부지역 노점상연합회의 깃발을 들고 촛불시위에 참석해야하는건가요? 그냥 촛불만 들고 참석하면 성공할 수 없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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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to 익명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남긴 기나긴 리플에서 알수 있는 단 한가지는 "나는 배때기에 칼이 들어와도 나보다 소외된 계층을 위해 십원한장 희생하기 싫다"는 결연함입니다. 그거 빼고는 솔직히 아무 내용이 없는거 같습니다. 제 말이 틀렸다면 저 "익명"이라는 사람이 남긴 엄청난 분량의 리플에 도대체 무슨 영양가 있는 내용이 있는지, 다른분이 좀 지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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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to 익명 2

    전 오히려 님의 독해능력이 의심스럽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좌파여야 한다? 그런데 님에겐 유감일지 몰라도 촛불시위는 애초에 좌파시위가 아닙니다. 촛불시위를 좌파 시위로 만들지 마시고(그래봤자 어차피 좌파들 자신들 밖에 안남을 테니까요.) 그냥 따로 좌파들끼리 시위를 새롭게 만드세요. 진정성있고 순수하고 결벽증적이고 도덕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시위를 말이죠. 님들의 좌파 프레임에 맞는 시위를 말이죠. 왜 맞지도 않는 곳에 와서 당신들은 좌파가 아니야 라고 비난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요. 우리는 좌파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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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익명님은 소비자 운동을 탈근대적, 노동자 쟁의를 근대적 운동 형태의 전형으로 간주하십니다만, 이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같습니다. 무엇보다 소비자 운동과 노동자 쟁의의 특성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소비자 운동에서 소비자 이익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명박산성에서 MB나오라고 소리치고 이명박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듯, 노동자 쟁의에도 역시 기본적으로 생디컬리즘적 목표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혁명적 노동자 조직은 매우 특수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노동자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생디컬리즘적 목표를 위한 수준의 투쟁입니다.

    1. 소비자 운동과 생디컬리즘적 노동자 쟁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비자 운동의 목표는 기업의 수익을 가능한 한 최소화(강조 지점의 차이에 따라 적정화라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만)하는데 있고, 생디컬리즘적 쟁의의 목표는 그렇게 얻은 기업의 수익 가운데 최대한의 몫을 임금으로 얻는데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2. 소비자 운동의 이러한 한계로 인해, 생디컬리즘적 쟁의와의 연합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미국산 쇠고기나 조중동은 충분히 더 나은 것으로 판단되는 대체제가 있기에 이런 식의 운동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KTX 승무원 파업때문에 철도를 불매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하루 150만명의 시민이 사용하는 수도권전철은 말 할 것도 없고, 철도공사의 최고급 열차인 KTX조차도 서울과 대구, 부산을 왕래할 때에는 아주 일반적인 선택이 되어 있습니다. 철도를 불매할 경우 철도보다 비싸고 빠르다는 보장도 없는 승용차를 타거나, 그도 아니면 모든 면에서 후진 버스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철도는 하루에 수백만명 규모의 소비자가 접근하는 경우이므로 그들에게 특정한 의제가 얼마나 공유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소비자 이익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점 앞에서 소비자 운동은 멈춥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많은 경우 정당한 수준의 생디컬리즘적 쟁의조차도 소비자 운동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생필품일수록 그리고 소비자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독점일수록 소비자 운동이 해결할 수 있는 지점과 생디컬리즘적 운동이 활동할 수 있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클 것입니다. 이는 소비를 포기함으로서 얻는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거나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겠습니다. 결국 아무래도 익명 님이 언급하신 양식의 소비자 운동으로는 이번 시위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공공서비스 부분에 대한 개입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3. 화물연대의 생계형 파업 즉 생디컬리즘적 파업은 소비자운동의 의제를 결합했기에 현재까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건설노조나 금속노조 등 다른 노조경우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건설노조는 "대운하 안짓는다" 정도의 카드가 있긴 한데, 금속은 제가 보기엔 없을 것 같군요. 입증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려는 측에게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산별노조별 파업을 진행할 방침이므로 산별노조마다 소비자 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 의제를 내어놓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습니다.

    4. 노정태님은 노동조건 일반이라는 문제를 통해 대부분의 인구를 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호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할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전 인구가 반드시 호명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생, 특히 10대의 경우 확실히 노동시장에 대한 경험이나 인식이 약할 것입니다. 또한 특정 산업 부분의 노동자로서 생각한다면, 거래 관계로 맺어진 다른 산업 부분은 역시 회사의 고객이거나 자신이 그 부분의 소비자가 되는 관계로 맺어질 것입니다. 기업간 거래 관계에 해당하지만, 어쨌든 산별파업으로 인해 멈춘 거래 관계 속에 있는 각 party는 같은 목표를 향해 있는 자들이라고 간주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번 절은 제가 지레짚은 것일 수 있으니 걸러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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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제가 노정태님의 글을 읽은 바로는 이글은 교묘한 선동이 맞습니다. 좌파는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고 반면에 우파는 '그 잘나신' 일반시민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정태님도 언급하셨듯이 촛불시위는 우파적 시위이고 우파가 '대부분'입니다. 자기이익을 위해 나온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게 싫고 좌파적 시위를 하고 싶으면 촛불시위 안에서 할게 아니라 따로 만들면 됩니다. 왜 촛불시위가 일반시민으로 한정되어야 하는가? 라는 말은 그대로 이렇게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왜 촛불시위가 좌파적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말이죠. 좌파들에겐 물론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촛불시위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탐나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선동을 하는 거구요. 근데 촛불시위가 정말 좌파(노정태님의 말로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적이 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게 될 겁니다.

    좌파의 입장에선 인원이 늘겠지만 시위 전체의 입장에선 인원이 훨씬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만적님의 말처럼 소비자가 아닌 노동자로 호명하면 사람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왜 사람을 줄어들게 하면서까지 굳이 노동자로 호명해야 할까요. 이런 교묘한 선동을 통해 제가 발견하는 것은 좌파들의 무임승차, 기회주의, 사람을 탐내는 욕심 뿐입니다. 자율주의, 포스트모던 시위를 조소하던 다함께가 촛불시위에서 찌라시를 뿌리는 이유도 뭐겠습니까. 사람이 탐나서 그러는 거죠. 이건 노정태님 식으로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 못됩니다.(다함께는 분열을 조장한다고 욕을 먹었고 노정태님은 분열이 긍정적이라고 쓰셨네요.)

    만적님/ 저는 민영화라든지 공영방송 이런 문제도 소비자 운동의 맥락으로 얼마든지 저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영화는 그걸 막지 않으면 미래에 곧바로 소비자 문제가 되기 때문이고 공영방송도 특정 방송을 안보고 다른걸 보는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언론은 말할 것도 없구요) 소고기, 교육, 대운하, 민영화, 언론 이렇게 다섯가지를 핵심으로 본다면 이 다섯가지 안에서는 소비자운동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단지 저도 만적님처럼 노동자 파업과 소비자운동이 연계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업 대신에 소비자 운동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구요. 좀 더 넓게 잡아서 반 이명박이라는 구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촛불시위에 동참하는 건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다면 그들과 연대하는 것은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아이들과 연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런 식으로 완전히 별개의 사안을 다 연대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연대해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게 된다는 거죠.

    노정태님은 좌파적 사안을 촛불시위가 연대해서 떠맡기를 바라고 계신 거 같습니다. 이게 촛불시위를 좌파적으로 만드는 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좌파와 우파는 목표 자체가 다른데 노정태님은 선동을 하면서 마치 좌파적 목표가 부재하는(노정태님 표현으로 말하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가 부재하는) 사람은 촛불시위에 놀러나온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매도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교묘함이야말로 선동의 일반적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일반시민'이 노정태님에게 '그 잘나신'이라는 말을 들을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가 부재한다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그들 자신이 이미 좌파가 아닌 한 말이죠. 왜냐하면 그 말들은 좌파적 기준을 가지고 말해진 것이니까요. 저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에 좌파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좌파가 아닌 사람들을 '그 잘나신' 일반시민으로 매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좌파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단지 좌파와 연대하라는 말이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좌파와 연대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이미 좌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저 교묘한 선동이고 말장난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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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기나긴 고난의 행군은 시위가 지나치게 지리멸렬해질 가능성을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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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말은 결국 행군으로 지루함을 심심함을 극복했다는 말입니다. 광화문에 있으면 지루하니까 kbs로 행군하자는 것이 어떻게 광화문에서 그대로 있는 사람들과 행군하는 사람들을 구별시켜주는 행위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여기엔 윤리적, 정치적 우월함은 없어 보입니다. 심심하니까 kbs로 가는게 어째서 진짜 '집회'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는 심리적 증거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겐 그저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지는데 말이죠. kbs로 행군해서 광화문에 그대로 있던 것보다 나은 뭔가 실질적인 성과를 올렸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kbs로 행군하는 사람들만이 진짜이고 광화문에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러 나온 거다 라고 구별짓기에는 근거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건 그냥 자의적 기준에 불과합니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혹은 대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며,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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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이 일반시민이라고 한다면 촛불시위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일반시민입니다. 그런데 일상을 파괴해야만 '진짜' 집회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는 건가요. 이것 역시 자의적 기준에 불과합니다. 노정태님은 촛불의 사제로서 자의적 교리를 통해 이분법적으로 촛불을 명백하게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진짜' 집회를 원하는 소수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염치(다른 말로 하면 좌파가 되겠죠)를 가진 노정태님 편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잘나신' 대부분의 놀러나온 축제를 즐기러 나온, 자신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하는 일반시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분법의 (노정태님 말로는 분열된)기준 자체를 자의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기 때문에 이분법 자체가 허구적이라는 겁니다. 노정태님은 진짜 가짜를 나눠서 자꾸 가짜를 단죄하고 비난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시는데 기준 자체가 자의적이고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노정태님이 속한 쪽이 진짜이고) 이런 행위 자체가 사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대체 누가 촛불의 교리를 만들 권리를 노정태님에게 부여했단 말입니까. 저는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사제의 이분법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히 노정태님의 글에서 위험한 것은 가짜가 대다수이고 실질적인 촛불시위의 핵심 주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차라리 촛불시위 전체를 가짜라고 선언해버리고 따로 새로운 컨셉으로 활동하는게 낫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결국 촛불시위에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묘한 선동을 통해 촛불시위의 사람들은 별로 잃지 않으면서 시위의 컨셉만 바꾸려고 하는 거죠. 노정태님이 원하는 진짜 시위로 말이죠. (물론 이것이 좌파적 시위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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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논지에 별 상관 없을지도 모르는 딱 한가지 의문이 드는데,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 그렇게 넘사벽이 있는 건가요? 왜 노동자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요? 회사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은 다 노동자 아닌가...거창하게 나는 좌파다 나는 우파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저 '단어'들에 지나치게 많은 컨텍스트가 부여되는거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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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익명/ '모든 사람은 좌파여야 한다'거나, '모든 사람들이 좌파의 대의에 따라야 한다', 등등의 발상은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익명으로 리플을 다시는 가운데 상상해내신 거죠. 그래놓고 저더러 '좌파가 아니라서 잘못이냐?'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시면 참 난감합니다. 저는 촛불시위가, 동질한 사람들끼리 무조건 많이 모이고 보는 것을 넘어서,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요구사항을 국가를 향해 주장하기 위해 모이는 광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식적인 발상에 대해 '그것은 좌파들이 촛불시위를 차지하려는 발상'이라고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시는 것이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거의 다 전달되었고, 더 반복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적/ '혁명적 노동자'와 '일반 노동자'를 구분하는 일은, 물론 중요할 수 있겠지만, 지금 제가 이 포스트에서 다루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지나치게 세밀한 '좌파적'인 논의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리플입니다만, 대답해드릴 내용이 마땅치 않군요.


    plath/ '근로자'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화를 호도하는 정책이 참 절묘하게 맞아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다들 일은 하기 싫고 돈을 쓰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며 오직 소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어불성설인데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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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to 익명

    집회가 다양한 방면으로 분열되는 것과 동시에, '일반 시민'과는 다른 사람들이 자꾸 끼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가 종종 눈에 띈다. 어느 '진보 매체'에서 촛불시위의 초창기에 참여자를 묘사하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청바지에 티셔츠, 굽 높은 구두에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크로스백을 매고 있는 사람들'. '일반 시민'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이는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규정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규정은 '서울말'이라는 단어를 통해 지역 토착어를 소외시키킨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계급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반 시민'이라는 단어가 마찬가지 논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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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하게, 이부분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시죠. 저는 님의 논지가 전혀 상관없는 맥락 하에서 자의적으로 좌파-우파의 이분법을 끌고간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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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to 루시엘님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부분만 해도 언급할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님이 제시하신 부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서 상관없는 맥락이 되는건 아니라는 거죠.

    to plath님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노동자로서 저항하는 것과 소비자로서 저항하는 게 엄연히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노동자는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고 그래서 동일인인 것이죠. 문제는 노동자의 포지션에서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소비자의 포지션에서 저항할 것인가 입니다. 저는 여기서 소비자운동의 중요성을 리스크와 파급력이라는 두 요소를 가지고 노동자운동과 비교해서 설명한 것이구요.

    to 노정태님

    저는 이제 할말을 다 했고 더 해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노정태님이 알아서 잘 판단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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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이 글에서 저는 노정태 씨가 오히려 일반 시민들을 인식론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글 후반부에 적힌 내용을 빌어, 일반시민들에게 "우리는 훨씬 더 너그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되돌려 드리고 싶군요.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다른 사안에 비해 상대적으로라도)무관심했을 거라고 보시는 시각은 너무 협소해 보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촛불을 밝힌 노점상연합회 상인들처럼, 광장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자기 집에서 유무형의 촛불을 밝힌 일반 시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외면하시는 건지 의문스럽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이렇게 작위적으로 '유도'하고 이끌어가는 방식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심각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달아 반대 취지의 댓글을 올리는 데 대하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인터넷에서 조성된 여론과는 많이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물론 사는 데 바빠서죠) 또다른 부류의 '일반 시민'인 저희집 식구가 촛불을 응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그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기로 마음 먹은 탓에 계속 그렇게 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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