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8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

In short, if the world economy is to get through this crisis in reasonable shape, creditworthy surplus countries must expand domestic demand relative to potential output. How they achieve this outcome is up to them. But only in this way can the deficit countries realistically hope to avoid spending themselves into bankruptcy.

Some argue that an attempt by countries with external deficits to promote export-led growth, via exchange-rate depreciation, is a beggar-my-neighbour policy. This is the reverse of the truth. It is a policy aimed at returning to balance. The beggar-my-neighbour policy is for countries with huge external surpluses to allow a collapse in domestic demand. They are then exporting unemployment. If the countries with massive surpluses allow this to occur they cannot be surprised if deficit countries even resort to protectionist measures.

We are all in the world economy together. Surplus countries must willingly accommodate necessary adjustments by deficit countries. If they decide to sit on the sidelines, while insisting that deficit countries deserve what is happening to them, they must prepare for dire results.
Martin Wolf, "Global imbalances threaten the survival of liberal trade", The Financial Times, 2008년 12월 2일


'수출이 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보다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수출을 살려야 한다'는 그 주장에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마틴 볼프의 이 칼럼은 그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마틴 볼프의 칼럼 자체가 아니라, 여기서 주장하는 바의 통속화된 형태가 횡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일종의 중상주의적 관점이 회귀할 수 있고, 그것은 곧잘 (극단적인) 네셔널리즘과 손을 잡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수출국가들)이 현 국면에서 자국 내 소비 비중을 높여야 하고, 수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것은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권고'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런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감정 상하기 시작하면, 국제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간단한 도식을 그려보자.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를 하나의 직선 위에 놓고 바라본다면, 최근 10년 동안은 '세계주의'가 득세해왔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프리드먼 같은 '평평한 지구'론자들이 자유무역이 킹왕짱이고 전 지구적 분업을 하면 효율이 높아지고 금융 시장이 팽팽 돌아가서 쿨하고, 등등을 외치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의 세계도 그랬다. 벨 에포크 당시, 크루그먼이 케인즈를 인용하며 말하듯, 세계는 지금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그 고리가 그렇게 쉽게 깨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컨대 세계주의가 졸지에 국가주의로 처박히고 만 것이다(여기서 국가주의는 nationalism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지금, 100년 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중요하지만, 국민국가의 역할과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치밀하게 짜여진 국제적 공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철학적, 제도적 기반 또한 절실해지고 있다. 케인즈주의의 복귀를 둘러싼 논의만큼이나 이 또한 중요할 터인데, 아직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려운 일이다.

댓글 4개:

  1. 아마 10년동안 득세해 왔다는 그 세계주의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이 아니라 글로벌리즘을 가리키시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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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네 그렇죠. 글로벌리즘이 코스모폴리터니즘으로 진화하기 위한 시간을 벌지 못한채 금융위기가 닥쳐왔다고 생각합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의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만큼 세계적으로 연결된 사회주의를 낳았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충분히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블로그에 게시된 글은 거친 추측에 가까운 것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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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두 번째 문단의 "횡횡"은 의미상 "횡행"으로 쓰셔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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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점심 먹기 전에 급하게 쓰고 나간 글이라 확인을 못 했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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