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건은 애초에 논의할 건수가 못 된다. 만약 석궁이라는 무기가 마치 장전된 총과 같다면 말이다. 김 교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석궁을 쏘면 멧돼지의 가죽도 뚫는 화살이 날아간다. 그런데 사람이 그걸 배에 맞고
깊이 1센티미터가 안 되는 상처를 입은 채 무사히 집에 걸어갔다가 병원에 걸어서 갔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이 조건을 인정한다면, 김 교수의 가방에서 사시미 칼이 나오건 말건, 그가 석궁 발사 연습을 했건 말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발사하였고, 그 발사된 화살이 판사의 배에 상해를 입혔다’라는 검찰 측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강력한 석궁의 화살이 발사되었고 맞았다면, 판사는 사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와 그 외 언론 등을 통해 접한 모든 논리는 바로 이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정상적으로 석궁이
발사되었다면 그 정도 피해에서 멈출 리가 없는데, 어떻게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거나,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있지 않다거나 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김명호 교수가
석궁을 고의로 발사했다는 사실을 반박하기 위한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와이셔츠와 통화 기록과 혈흔 감정 등등에 대한 모든 논의, 즉 ‘재판이 개판’이 되어버린 시점의 이야기들을 모두
접어둔 채, 일단 석궁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자. 검찰은 김 교수가 석궁에서 화살을 ‘발사’하였고 그로 인해 ‘발사된’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이며, 몸에 맞지
않고 바닥에 부딪쳤기 때문에 부러졌고, 경찰 검찰 사법부 병원 등 모든 기득권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부러진 화살을 숨긴 채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겠으나, 하나의 형사 사건으로서 석궁 사건이 갖는 핵심적인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발사’된 석궁이 사람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경미한 상해(전치 5주?)만을 남길 수 있는가. 김 교수
역시 어떤 식으로건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석궁이 발사되더라도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는 수준으로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다면, 와이셔츠에서 눈에 보이는
혈흔이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김 교수가 가지고 갔고 석궁에서 발사된 그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다.
판사: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1회의 요지는 검찰에서 설명한 것 외에 … [피의자, 즉 김 교수는] 석궁의 위력에 대해서 검찰에서 사람에게 쏠 경우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신문에 대해서 다다미 연습을 할 때에 어떤 곳은 1쎈치 정도 꽂히고 다다미가 풀려진 곳은 좀 더 깊이 꽂혔는데 그렇게 치명적인 위력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박홍우가 화살을 배에 맞아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피고인이 발사한 화살에 다친 것을 인정하느냐는 신문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화살을 맞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로서는 화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서 김 교수는 본인 스스로, ① 자신이 연습할 때에는 다다미에 꽂히는 화살의 깊이가 그다지 별 볼일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②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죽이거나 큰 상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취지의 항변을 한다. ③ 발사자의 미숙한 조작에 의해 석궁의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은 뒤이어 등장한 증인에 의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조준을 잘못했다던지 하는 경우는 어떤가요.
답 ☞ 조준이 잘못되는 경우가 아니고, 시위를 걸 때 초보자인 경우 시위가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석궁이 발걸이가 한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동식 석궁이라고 하는데, 양발을 사용해서 석궁 줄을 당길 수도 있고
한발을 놓고 당길 수가 있는데, 지금 사용한 석궁 같은 경우는 왼발 또는 오른발 어느 발을 사용하든 한쪽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몸 중심에서 한쪽으로 어느쪽이든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활대에 있는 힘이 중심으로 몰려와서 바로
화살 뒤를 가격해야 되는데 한쪽으로 쏠린 현상일 때는 파워가 좀 떨어집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영화에서는 이와 같이, 제대로 장전된, 즉 화살누름판에 의해 화살이 물려 있는 석궁이라 하더라도 미숙한 조작자로 인해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공판에 출석한 두 명의 증인 중 두 번째 사람의 증언에만 초점을 맞춘다.
화살을 아래로 눌러 고정시켜주는 하향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화살을 계단 위에서 아래로 겨누고 발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언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답 ☞ 예, 끌려 들여와 있으니까 아예 대 놓고 쏴도 들어가 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또 하나는 내려 쐈을 경우 파워가 없다고
한다면 화살누름판이 없을 때, 아니면 빠져나왔을 때 파워가 없는데, 송파경찰서에서 의도한거는 이렇게 놓고 쐈을 경우에 파워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금 들어갔잖습니까? 박홍우 판사가 그런 의도를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화살누름판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나와서 쐈을 때 조금 들어갔다면 이해를 한다 이겁니다. 근데 하향사격을 하면 혼자 흘러 내려옵니다. 화살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쏠 수 있느냐. 화살누름판이 없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있는 상태에서 흘러 내려온다면 이렇게 되면
파워가 약한 것은 당연한데, 이 상태에서 이렇게 하향사격을 한다면 계단위에서 쐈다고 하더라고요 두 계단위에서 쐈다고 한다면화살이
흘러내려 오는데 어떻게 쏘냐 그 말입니다.
사실상 발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요 ?
답 ☞ 불가능하다, 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화살이 이만큼 내려오는 사이에 쏘겠냐? ‘느덜 물어보는 의도를 나는 이해를
못한다’ 그렇게 밖에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경찰들이 박홍우 전치 2주 상처에 가장 가까운 상황이 바로 불완전 장전
상태이고, 그 상태는 화살 누름판에 눌려져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헌데, 그 상태는 계단 위에서 하향 조정을 하게 되는 경우,
그냥 화살이 흘러 내려오니 발사가 불가능 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고영환씨가 지적하며 경찰들 보고 ‘니들의 의도가 뭐냐?’
즉, 증거조작하는 수작아니냐?라고 물었다는 것)
아~ 그런의도셨습니까?
답 ☞ 그러니까(물어보는 취지를 모른다는 듯이) 재판장님, 이해하셨습니까? 인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에 한 가지 논리적 함정이 있다. 화살은 화살 누름판에 제대로 물려 있지 않아서 불완전하게 발사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물렸다고 할지라도 양쪽 현에 고르게 힘이 받히지 않으면 역시 완벽하게 발사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증인 A는
후자를, 증인 B는 전자를 설명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직 증인 B 뿐이다. 두 가지의 원인은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고,
둘 중 하나만 성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오발의 조건 모두 석궁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화살을 쏘게 만드는 충분조건이다. 따라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고 싶다면, 검찰은 두 조건 중 하나에서만이라도, 불완전하게 발사된 화살이 피해자에게 경미한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없이 증명해야 한다.
3.
김 교수의 상해죄에 대한 유죄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논점이 바로 이것이지만,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언론 기사 중 이 지점을 제대로 짚은 것은 대단히 드물다. 경향신문에 등장한 한 기사에서 핵심적인 쟁점을 요약하였는데, 그 중
한 문단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대목을 인용해보자.
김 전 교수는 항소심에서 석궁으로 박 부장판사를 맞힌 일이 없다고 했다. 영화에서 김 전 교수의 변호사는 ‘석궁이 제대로 맞을
경우 수십㎝ 두께의 돼지고기를 뚫고, 잘못 장전되면 발사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한다. 화살이 빗나가 벽을
맞히면 화살촉이 뭉툭해지고 화살이 부러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전문가들은 “석궁의 시위를 당기는 2개 손가락에 균일하게 힘이 분배돼야 하지만 초보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기 힘들다. 이렇게 장전하면 화살이 부러지거나 쪼개지고 심지어 사과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냈다.
‘석궁 사건의 진실’ 쟁점②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공방(경향신문)
기사의 내용에 따르자면, 석궁에서 발사(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오발)된 화살이 ‘빗나가고’, ‘벽이나 그 외 단단한 곳’에
맞아서 ‘부러질’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고 그것이 박 판사에게 경미한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그쪽이 훨씬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훨씬 단순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 본인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의 석궁 실력은 변변치 않았고 과녁을 제대로 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커스가 시작된다.
와이셔츠의 혈흔 감정을 육안으로만 했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혈액의 흔적은 대단히 극미량일 경우에도 시약을 통해
검출되고, 섬유에 한 번 스며들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노모의 손빨래로 완벽하게 지워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튼
속옷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었고, 사건을 통해 발생한 모든 혈흔은 단 한 사람의 혈액이라고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그 피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갔다 온 것은, 공격받은 ‘동물’이라면 일단 자신의 거점으로 피신한 후 다음의 행동을 취한다는
일반적인 행동의 논리상,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하다. 옷을 갈아입은 것은 ‘피해자’가 아닌 ‘판사’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약점과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할 법한 행동이다. 즉 동물처럼
숨었다가 판사로 다시 등장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김 교수가 이 모든 사실관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하고, 음모론의
본질적인 속성상 그것은 한없이 팽창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한다. 경찰은 증거를 숨겼고, 검찰은 그 과정을 지휘하였으며,
병원의 의사들도 박 판사의 상처에 대해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사법부, 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재판 테러범’들이 있다.
4.
이 거대한 서사에 동의할지 하지 않을지는 당신의 자유다. 내가 말하는 ‘당신’은 이 사건과 관련된 판사 및 검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무궁무진한 서서가 자아분열을 시작할 때, 그것을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검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검사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지, 피고인은 무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 중 석궁으로 인한 상해와 관련해서, 검사와 판사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페이스에 서서히 말려들어갔다. 화살이
벽에 맞아 부러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어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할 판에, 화살이
오발되어 부러졌고 그 화살을 경찰이 숨겼고 등등으로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의혹’에 일일이 답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내용들이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98%의 진실’을 형성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의혹’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 전에,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경험적 세계의 법칙 안에서 그와 같은 상해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검찰 측에서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했느냐이다.
물론 검사와 판사는 그 증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피고인 본인의 진술도 있고, 증인들의 증언도 있고, 다 있다고
보고 그 논점에 대해서는 더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방심’이 이 재판을 개판으로 만든 주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고인의 유죄를 피고인이 납득하도록, 혹은 반박하지 못하도록 입증하지 않고,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 후 유죄 판결을 내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차 공판 이후 어느 지점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은 소송 전략을 조용히 변경한다. 의혹을 뿌리고 더 큰 소동을 피운다. 그
바탕에는 ‘발사된 석궁에 맞았다면 그 사람이 살아있을 수가 없다’는 상식 혹은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법원은 그 논점에 대한
반박의 가능성을 이미 지적해놓고도, 피고인이 슬쩍 그것을 밀어놓은 채 자신만의 쇼에 돌입하자, ‘증거신청을 기각하겠습니다’를
반복한다. 피고인과 변호인측이 바로 그 반응을 얻기 위해 그런 ‘의혹’들을 제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재판부는 해
보았을까?
법학을 공부할 때, 학생들은 논점을 하나 하나 나열한 후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논박한다. 그렇게 답안지를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논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같은 구멍을 향해
미끄러지고,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서 연거푸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에는 하나의 핵심이 있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못 박고 넘어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 석궁 상해사건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다.
화살은 발사된 후 부러졌는가, 아니면 부러진 채 발사되었는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하여 몇 번의 실험 결과,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돼지고기에 10센티미터 이상 푹 박혀든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런 광경을 본 대중들은 ‘화살이 발사된 후 부러졌다’는 시나리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달된 전문가의 손으로 발사된 것이고, 피의자 김명호 교수에 의해 발사된 것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5.
한국 사법 역사상 가장 괴로운 사건 중 하나인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화장실 안에 두 사람의 용의자가
있었고, 두 사람 중 하나가 피해자를 칼로 찔러서 숨지게 했다. 하지만 검찰의 잘못된 수사와 기소로 인하여 두 사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금은 새로운 증거가 나와서 다시 절차가 진행중이지만, 아무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로 여태까지
기억되고 있다.
왜 두 사람 모두 무죄인가? 증언이 철저하게 불일치했고,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휘두르는 재현 과정에서, 검찰에서 지목한
주범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가 실제 시신에 남은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칼로 찔러서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더구나 검찰은 두 사람을 하나의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기소하지 않고, 한 사람은 주범으로
한 사람은 공범으로 기소했다. 그리하여 주범이 무죄가 되는 순간 종범도 무죄가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안타깝고 억울하며 분노할만한 사건이지만, 국가가 개인을 처벌하는 과정이 얼마나 치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는 범인들을 비난하는 것 만큼이나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을 하지 못해 그들을 풀어줘버린 검찰과 경찰을
비판해야 한다. 열 사람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잡아넣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 사람의
범인을 놓치지 않고 적법절차에 의해 처벌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김명호 교수를 상해죄로 처벌함에 있어서 피의자와 그의 재판을 바라보는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한 것의 책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형사 피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 혹은 재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오직 ‘올바른’
것만 따지자면, 박흥우 판사는 석궁에 맞은 후 본인의 집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지 말았어야 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에 의한
피신이면서, 판사로서 몸에 벤 품위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김명호 교수가 수많은 논점 일탈과 가상의 시나리오를 들이대며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행동 역시, 즉각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고인석에 서면 누구나 피흘리고 쫓기는 투우가 된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그 피고인이 진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깨끗한 결말을 내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사법 체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성과 논리와 법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처벌을 받는 것 말이다.
6.
영화 ‘부러진 화살’의 개봉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우리 사회의 이성이 얼마나 뭉툭하기 짝이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진중권은 다시금 용감한 반대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영화를 ’98% 진실’로 몰아붙이는 경향성에 일침을 가했다.
그 정신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박수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김명호 교수를 단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재판을 개판으로 만드는 주범’으로만 몰아붙이는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도 사그러들지 않는 분노를 표하고 싶다. 어쩌다가 그는 이토록 야만적이고 상스러운 방식으로 이성과 합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재판 기록을 직접 보세요, 이 사람 완전히 사차원입니다. 이것이 진중권이 말하는 이성과 합리라면, 나는 그가 내미는
‘빨간약’을 단호히 거절하겠다.
한편 ‘튀는 판사’로 잘 알려진 이정렬 판사의 대응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법원의 내부 규칙을 어겨가면서
김명호 교수의 복직 신청에 대한 민사소송의 결정 과정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원래 김 교수가 승소할 사건이었는데, 3월 2일 이후
접수된 성균관대의 반대 논거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아서 패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가 ‘김명호는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식의 매도에 일조하는 것임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그는 ‘김
교수가 상처받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더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 과정에서 ‘사립학교의 교원 임용에 대하여, 학문적 성취 외의 다른 주관적 요소가 판단의 대상이 되는지,
된다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남는 것은 법의 논리에 대한 설명과
납득이 아니라, ‘나는 사법 피해자다’와 ‘사법부야말로 억울하다’는 두 가지의 감정적 호소 뿐이다.
물론 그는, 모든 판사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판결문을 읽어보라. 하지만 판결문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법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더불어 판결문 자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판결문을 보라’는 답변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이해되는지, 과연 법원의 구성원들은 모르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므로, 용기가 없는 자들의 이성은 뭉툭하기만 하다. 사건의 핵심, 논쟁의 심장으로 뚫고 들어갈
만큼 충분히 뾰족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지 못해 싸우는 검은 소처럼 김명호 교수는 좌충우돌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흘린 피를 보며 열광하는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이 모든 광란의 서커스를 멈추라고 말하는 조커 역시
엉뚱한 무덤에 침을 뱉는다. 이 무질서한 사육제 속에서 우리는 훨씬 더 냉철하면서도 뜨겁게 이 사건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