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31

2012년 독서 목록

  1. 20120112 -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옮김,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 예술, 기술, 전쟁』(서울: 현실문화, 2011)
  2. 20120114 - Terry Eagelton, /The Meaning of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3. 20120118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서울: 책세상, 2011)
  4. 20120120 - 에릭 A. 해블록, 이명훈 옮김, 『플라톤 서설』(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1)
  5. 20120125 -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서울: 문학과지성사, 1999)
  6. 20120127 - 리처드 플로리다, 이원호, 이종호, 서민철 옮김, 『도시와 창조 계급』(서울: 푸른길, 2008)
  7. 20120131 - 서형, 『부러진 화살』(서울: 후마니타스, 2012), 개정판.
  8. 20120206 - Chris Hedges, /Death of the Liberal Class/ (New York: Nation Books, 2010)
  9. 20120208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서울: 을유문화사, 2009)
  10. 20120212 - Roy F. Baumeister, John Tierney /Willpower: Rediscovering the Greatest Human Strength/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11).
  11. 20120226 - 맥스 브룩스, 장성주 옮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서울: 황금가지, 2011)
  12. 20120228 - 아룬다티 로이, 최인숙 옮김, 『생존의 비용』(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13. 20120306 - 브룩 글래드스톤 글, 조시 뉴펠드 그림, 권혁 옮김, 『미디어 씹어먹기』(서울: 돋을새김, 2012)
  14. 20120319 - 조너선 스턴, 윤원화 옮김,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서울: 현실문화, 2010)
  15. 20120325 - 조너선 샤프란 포어, 송은주 옮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서울: 민음사, 2011)
  16. 20120326 - 제임스 길리건, 이희재 옮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서울: 교양인, 2012)
  17. 20120326 - 리처드 윌킨슨, 김홍수영 옮김, 『평등해야 건강하다』(서울: 후마니타스, 2008)
  18. 20120409 - 페리 앤더슨, 안효상, 이승우 옮김,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카를 슈미트에서 에릭 홉스봄까지』(서울: 길, 2011)
  19. 20120418 - 류짜이푸, 임태홍, 한순자 옮김, 『쌍전: 삼국지와 수호지는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20. 20120418 - 제임스 R. 베니거, 윤원화 옮김, 『컨트롤 레벌루션: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기원』(서울: 현실문화연구, 2009)
  21. 20120421 - 박성민, 강양구 대담, 『정치의 몰락』(서울: 민음사, 2012)
  22. 20120429 - 정준호,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서울: 후마니타스, 2011)
  23. 20120511 - 셰리 버먼, XXX 옮김, 『정치가 우선한다』(서울: 후마니타스, 2011(?))
  24. 20120512 - 이영준, 『페가서스 10000마일』(서울: 워크룸프레스, 2012)
  25. 20120513 - 카를 슈미트, 나종석 옮김,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서울: 길, 2012)
  26. 20120521 - 막스 베버,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소명으로서의 정치』(서울: 후마니타스, 2011)
  27. 20120524 -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서울: 꾸리에, 2012)
  28. 20120528 - 포시디우스, 이연학, 최원호 옮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경상북도 대구: 분도출판사, 2008)
  29. 20120531 - 루돌프 파이퍼, 정기문 옮김, 『인문정신의 역사』(서울: 길, 2011)
  30. 20120603 -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알리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독재자의 핸드북: 사상 최악의 독재자들이 감춰둔 통치의 원칙』(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31. 20120603 -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경기도 파주: 창비, 2012)
  32. 20120604 - 강영안,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경기도 파주: 한길사, 2012)
  33. 20120613 - 세라 손튼, 이대형·배수희 옮김, 『걸작의 뒷모습』(서울: 세미콜론, 2011)
  34. 20120617 - 노라 에프런, 김용언 옮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서울: 반비, 2012)
  35. 20120827 - 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서울: 자음과모음, 2012)
  36. 20120831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37. 20120906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 생활의 발견』(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1)
  38. 20120909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으로 나이드는 법』(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2)
  39. 20120912 - 김용언, 『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서울: 강, 2012)
  40. 20120920 - 히가시노 게이고, 양억관 옮김, 『용의자 X의 헌신』(서울: 현대문학, 2007)
  41. 20120923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경기도 파주: 유유, 2012)
  42. 20120925 - 찰스 다윈, 이한중 옮김, 『찰스 다윈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서울: 갈라파고스, 2003)
  43. 20121017 - 티에리 크루벨리에, 전혜영 옮김, 『자백의 대가: 크메르 루즈 살인고문관의 정신세계』(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44. 20121018 - 김종배, 『30대 정치학』(서울: 반비, 2012)
  45. 20121025 - 장우철, 『여기와 거기』(경기도 파주: 난다, 2012)
  46. 20121101 - 위화, 김태성 옮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47. 20121112 - 이반 투르게네프, 최진희 옮김, 『첫사랑』(서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48. 20121118 - 프란츠 폰 리스트, 심재우, 윤재왕 옮김, 차병직 해제,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49. 20121123 - 브뤼노 라투르,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경기도 고양: 사월의책, 2012)
  50. 20121126 - 김어준, 지승호 엮음, 『닥치고 정치』(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1)
  51. 20121127 - 김어준, 『건투를 빈다』(경기도 파주: 푸른숲, 2008)
  52. 20121129 - 김규항, 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쾌도난담』(서울: 태명, 2000)
  53. 20121210 - 셸리 케이건, 박세연 옮김,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엘도라도, 2012)
  54. 20121217 - 이진, 『원더랜드 대모험』(서울: 비룡소, 2012)
  55. 20121220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 - 고전적 자본주의 옹호론』(서울: 나남출판, 1994)
  56. 20121226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1』(서울: 민음사, 2012)
  57. 20121227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2』(서울: 민음사, 2012)
  58. 20121231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3』(서울: 민음사, 2012)



    상반기는 군생활, 하반기는 밥벌이. 여러모로 아쉬웠던 한 해였습니다.

    2012-12-12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이 사건의 경우 '이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겁을 주는 일이, 두 방향 모두에서 가능하다. 국가정보원이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악성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제보를 받고 강남의 한 오피스텔을 경찰과 선관위, 기자들이 급습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가정보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찰', 혹은 '권력기관의 권한 남용'이 언제든지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그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 집에서 익명으로 악성댓글을 달고 있다고 해서 경찰이 문을 따고 쳐들어오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다.

    스스로를 어떤 주체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입장은 갈라진다. 자신을 여당 혹은 현 정부의 대립하는 '야당적 주체'로 바라본다면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매우 경악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공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의 시민'으로 본다면, 고작 인터넷에서 악성댓글을 단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집에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이 지리멸렬하게 전개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영향 혹은 반작용만을 불러일으킬 경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우려가 동시에 현실화될 수도 있다. 요컨대 현재의 '야권'은 계속 검찰과 국정원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그와 정비례해서 시민적 자유에 대한 침해도 커지는 것 말이다. 해당 사안을 두고 벌이는 언론플레이의 수준과 사건의 전개 과정을 놓고 볼 때, 사태는 더욱 비관적이기만 하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당신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되어가는 것 같다.

    2012-12-11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경제학자 두 명이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다. 경제학자 A가 B에게 제안했다. 자네가 저 개똥을 먹으면 내가 100달러를 주겠네. B는 고심 끝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00달러를 벌었다. 좀 더 가다보니 개똥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에는 B가 A에게 같은 제안을 했고, A가 개똥을 먹어서 100달러를 B로부터 받았다.

    정산을 해보자. 두 사람 모두 개똥을 먹었고, 100달러씩 벌었지만 또 100달러를 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개똥만 먹고 한 푼도 못 번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달러씩 서로 두 번 거래를 한 셈이어서, GDP(국내총생산)는 200달러 올라간다. GDP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할 때 경제학자들이 인용하곤 하는 경제 우화 중 하나다.

    이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러나, 모종의 깔끔한 ‘상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한다. 업무를 완수하면 ‘요즘 경기가 통 안 좋아서’같이 구질구질한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B가 A의 제안을 받아들여 본인도 100달러를 벌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 속에 두 명의 경제학자와 두 개의 개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A와 B가 100달러를 매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A의 제안을 받았을 때 B는 100달러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구강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100달러를 벌게 된 B는 또 반대로,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고,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담뱃불을 붙이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A에게 같은 제안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 시점에서 말하자면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B이다. 그에게는 100달러가 있지만 A에게는 없다. 100달러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가 아니라 B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돈은 곧 힘이다. A는 B에게 개똥을 먹이는 대신 그만큼 자신의 ‘힘’을 넘겨준 것이다.

    여기서 우화의 형태를 조금 바꿔보자. 갑은 모종의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고, 을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다. 이 조합이라면 갑이 을에게 ‘젊은 벗의 재능을 기부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또한 을이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써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그 일을 수락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논의의 공정함을 위해 갑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 정말 좋은 곳이어서, 을의 재능기부는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을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본래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갑은, 동료에게 짓궂은 내기를 제안한 경제학자 A와 달리, 을에게 자신의 돈, 즉 ‘힘’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이 월급을 받아서 전액을 다시 갑의 ‘사회적기업’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갑의 돈은 을의 통장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기부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을에게는 없다. 을은 재능기부를 함으로써 ‘기부’ 그 자체뿐 아니라, 다른 그 어떤 행위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건 마지못해 하는 일이건 일은 일이다. 좋아하던 것도 직업으로 삼으면 힘들긴 매한가지다. 개똥을 먹고 돈을 받는 경제학자들의 비유는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사랑해도 매 순간 충만하고 행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한 20대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포장지로 감싸도 노동착취일 뿐이다. 이 구조적 모순에 온몸으로 맞서는 후보에게, 이번 대선에서 나는 한 표를 던진다.

    입력 : 2012-11-28 21:24:44수정 : 2012-11-28 21:24:44

    2012-11-22

    『마르부르크 강령』에 대해 몇 가지





    이와 같이 트위터에 쓰자, 다음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취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첨언을 한다. 내 논점은 다음과 같다.

    1. 리스트의 목적사상이 형법과 법철학에 대단히 큰 자취를 남긴 업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차병직이 해제에 쓴대로 그것은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그러나 국내에서는 목적론적 입법론에 기반하여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를 시행하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 법의 역사상 큰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된다.
    3. 2의 맥락을 소개하지 않고 오직 1에만 치중하는 차병직의 해제는 (고종석 등 일부의 찬사와 달리) 비판적으로 독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법이 특정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법익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동성애에 대한 차별법 등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논리 전개가 리스트의 법철학에서 도출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법익을 침해할 경우, 그것도 '상습적'으로 침해할 경우, 리스트의 법철학이 지니는 '인간적' 풍모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리스트는 범죄자를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 (98쪽)

    그렇다면 '개선 불가능한 범죄자'는 어떻게 정의되고 또 어떤 대우를 받는가? 리스트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따위가 아니라, "걸인, 부랑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사기꾼, 뚜쟁이, 정신이나 육체가 퇴폐한 자" 등을 "모두 사회질서에 철저히 반하는 무리들이고,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집단이 바로 상습범들"(100쪽)로 바라본다. 그런데 범죄통계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누범자가 범죄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또 개선 불가능한 자가 누범자의 다수를 차지"(101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상습범에 대한 리스트의 궁극적 해법은 다음과 같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 (104쪽. 굵은 글씨는 원문, 밑줄은 인용자)

    우리는 사형을 '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형제가 언젠가는 폐지될 수 있겠지만, 리스트가 '개선이 불가능한 상습범'으로 몰아붙이던 이들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사이코패스'가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을 죽여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은, 물론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주장을 이어받는 이들의 개별적인 도덕성으로 인해 중화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보호감호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절도 혐의로 구속된 지강현은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사법기관들은 그를 "개선 불가능한 자들"의 일부로 보았고, 그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강현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그는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한국 사회에 목적론적 법철학이 소개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거나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도 좋고 훌륭한 (법)철학들이 한꺼번에, 그 논쟁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우상(idol)으로 수입되는 것이 문제이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이, 정작 '원문'을 번역해서 제공하지는 않고, 자신들이 유학 시절 떼어온 책을 찔끔찔끔 찢어서 논문만 쓰는 식으로 전반적인 지성계를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의는 더욱 추잡해진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칸트, 들뢰즈, 헤겔, 스피노자가 무엇인지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이다.

    『마르부르크 강령』의 재출간은 바로 그 구태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사건이다. 목적론적 법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법학을 배우거나 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이제는 그 실체를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차병직의 해제를 읽으며 새삼스러운 실망감을 느낀 것은,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지적한 거의 모든 논의를 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맥락에서 목적사상이 어떤 식으로 오용되어왔는지, 그에 대한 한국과 독일 및 기타 대륙법계 국가에서의 지적 반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2년의 리스트가 한국어로 출현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1882년의 리스트가 1988년의 지강현에게 도합 17년의 수감생활을 선고하게 된 그 맥락을 설명하고, 바로 그런 문제로 인해 리스트의 법철학조차 '문명화'되는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는 것을 말했어야 한다. 그런 고민과 배려 없이 학생과 대중들에게 그저 '쉽고', '재미있게', '고전'을 소개하려고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적 태만의 증거일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프란츠 폰 리스트 지음, 차병직 옮김,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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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리스트의 법철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한계를 해제에서 전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리스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한 면도 포함되어 있다. 교화의 필요성에 따라 형벌이나 보안처분이 지나치게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무용한 인간은 사회에서 완전히 쫓아내야 한다는 단호한 생각도 그대로 수용하기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나치 정권에 이용되기도 했다. (161쪽)
    그러나 '단점'을 지적하는 것과, '역사적' 텍스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전자의 활동을 통해, 특정 시대의 어떤 텍스트가 탈역사화되고, 우상이 되는 경우를 적어도 나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그러하다고 결정지어져 있는) '좋은' 글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얼마나 타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지성계의 오랜 관성이며, 그 관성에 거스르고자 하는 자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당하고 매도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누군가 그것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해서 '지적 태만'등의 용어를 쓰는 것은, 내 강퍅한 심성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2012-10-25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 반대하여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 -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36쪽)

    비트겐슈타인, “윤리학에 대한 강의”, 소품집

    2012-10-24

    [2030콘서트] 내곡동 특검은 경제민주화 시험대

    ‘경제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모든 대선 후보가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보니 사회적으로도 ‘프랜차이즈 빵집도 동네 빵집이다’라는 식의 공허한 말장난이나 오가고 있을 뿐, 내실 있는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회의 이견들을 수렴, 조절, 집행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가 의미 있는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확고한 의지와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할 사저 부지 구입을 둘러싸고, 이광범 특별검사가 지휘하는 특검팀이 한창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5일에는 대통령의 아들인 시형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 사저 부지 구입건은 대통령의 친·인척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개발 비리 사건이다. 대통령 사저가 건설되면 당연히 그 일대 토지와 건물의 가격이 동반 상승한다. 문제는 그러한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주체, 즉 대통령 혹은 청와대 비서실 등이, 대통령의 친·인척 혹은 본인이 그 이익을 집어삼킬 수 있도록 모종의 ‘배려’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형 개발 비리’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일요일에 대형마트가 장사를 하냐 안 하냐, 프랜차이즈 빵집이 가맹점에 뜯어내는 돈이 얼마냐 등도 중요하지만,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습하는 이 과정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급격하게 신분제 사회로 되돌려놓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토지 자산 지니계수는 0.689로 나온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평등한 것이고,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한 것인 만큼, 한국에서의 토지 분배는 대단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상위 1%가 땅값 기준으로 45.3%를 소유하고 있으니만큼 저 수치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땅 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동네 빵집을 하건 과일장사를 하건 농사를 짓건, 나름의 방식으로 땀흘려 일하고 돈을 번다.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젊은 남성들은 군대에 가고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다. 군대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유지되고, 징병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비용 또한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이 부담하고 있다. 상위 1%가 절반 가까이, 혹은 절반이 넘도록 소유하고 있는 ‘그들만의 땅’에서, 우리는 일하고 그들에게 임차료를 바치고 심지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을 조금 더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국고를 유용해 땅장사를 시도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특검의 직접적 수사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질 낮은 농담처럼 보인다.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축재하는 행위를 처벌하지도 않으면서 재벌 개혁은 또 무슨 헛소리인가.

    지금은 대선 정국이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만큼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형성해내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는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만 지식인들의 담론은 ‘재벌 빵집 대 동네 빵집’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누군가는 친·인척을 동원한 땅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특검의 수사 대상에까지 오르내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의혹 사건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또 실천하려 하는지, 그 인식 수준과 집행 의지가 총체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범죄 사실이 확인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민주화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2.10.24 21:28: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242128385&code=990100&s_code=ao051#csidxa0dfb0dbe5c609bb447d348b9d922fe

    2012-10-16

    인용: '유학'의 의미

    ‘유학’이란 말엔, “구미의 유명 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유명 건축가 아래서 잠시 도제로 일하며 선진 방법론을 체득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스승과 비슷한 건물 좀 짓고, 교수되고, 제자 키우고, 더 큰 건물 짓고, 나중에 노년기에 접어들면 자신이 키운 파벌을 기반으로 조선 시대의 낙향 선비처럼 정치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뜻이 숨어있다. - 임근준(aka 이정우)

    2012-10-11

    실수, 기록, 실험실

    이처럼 실수의 수를 늘림으로써 힘을 얻는 기술적 장치로 실험실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과 과학자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들간의 차이는 인식적 기반이나 사회적 기반에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인은 탐욕스럽고, 자기 이해관계로 가득차 있으며, 근시안적이고, 혼란에 빠져 있으며, 항상 협상할 태세가 되어 있고,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고들 하는 반면, 과학자는 사욕이 없고, 멀리 내다보며, 정직 내지는 최소한 엄격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며, 확실성을 추구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많은 차이들은 모두 하나의 간단한 물질적 차이를 인위적으로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인즉, 정치인은 실험실을 갖고 있지 않고 과학자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실물 규모에서 한 번에 한 건씩 작업하며, 지속적으로 세상의 이목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이런 일들을 그럭저럭 해내며 “저 바깥에서” 성공을 거둘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반면 과학자는 축소 모형을 가지고 작업하며, 자신의 실험실 내에서 실수의 수를 늘리면서도 대중의 눈으로부터는 감추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고, 모든 실수를 해봄으로써 “확실성”을 얻기 전까지는 실험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중 한쪽은 잘 “모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잘 “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는 “지식”에 있지 않다. 만약 우연히 이들의 위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면, 이제 실험실에 있게 된 바로 그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이던 정치인은 정확한 과학적 사실들을 뽑아낼 것이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실물 규모의 정치구조의 키를 잡게 된 정직하고 사욕이 없으며 엄격하던 과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지고 불확실하며 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과학의 특수성은 인식적, 사회적, 혹은 심리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규모를 역전시켜 대상을 읽을 수 있게 만들고 시험을 더 자주 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실수를 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실험실의 특수한 구성에 있다.

    나에게 실험실을 달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들어올리리라(브루노 라튀르)

    2012-10-10

    '한글과 한국어는 다르다고요'에 대하여

    한글날도 지난 마당에 굳이 한마디 덧붙여본다. 꼭 한글날이 되면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데, 이런 날만 되면 방송에서 ‘한글 파괴’라고 떠들어댄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직 그 표현만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하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차피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그리고 찌아찌아족인지 뭔지 하는, 이제 정신 차리고 한글을 버린 어딘가의 소수민족을 빼고 나면, 한글을 자국어의 표기 체계로 쓰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하고 보더라도, 한국어 외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 효율적인 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글과 한국어는 1:1 대응 관계를 이룬다. 세종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혹은 한자를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발성하게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당연히 한글로 창작된 문헌이 없었으므로, 한자 발음 표기를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한들 어쨌건 그것은 ‘한국어 전용 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글과 한국어는 별개의 객체지만, 한국어가 없는 한글은 우리가 아는 ‘한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이 없는 한국어는 어떨까? 한글은 직접적으로 한국어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온, 사실상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한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현대 한국어가 발전했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바로 이 언어일 수는 없다. 한글과 한국어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한글날을 전후로 많은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글과 한국어를 억지로 분리시켜서 사고하고, 그 이면에 제국주의적 욕망을 깔면,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찌아찌아족에 대한 ‘한글 전파’라던가, 한국에서 주최하고 한국인이 심사하는 ‘세계 문자 올림픽’인지 뭔지 하는 병신같은 이벤트 따위가 다 그렇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 사용자에게도 한글이 ‘과학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글이 한국어를, 한국어만을 위한 문자 체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발상이다.

    물론 매체들이 ‘한글 파괴’라고 거들먹거리는 현상 중 대부분은 ‘한국어의 비관습적 사용 양태’이며, 그런 호들갑에는 좋게 이해해줄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 논리가 ‘한글과 한국어는 다르다고요’에서 하염없이 맴돌 뿐이라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담론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불공평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

    2012-10-07

    에바 TV판을 아주 오랜만에 봤는데

    1. 신지한테 미안해졌다. 신지’만’ 찌질하다고 생각하고 막 욕하고 그랬었는데, 그냥 그 세계가 통째로 찌질함.
    2. 내 마음속의 누님 캐릭터였던 미사토를 떠나보냈다. 현재의 내가 미사토보다 나이가 많아져서가 아니다. 어렸을 땐 당차고 멋있고 애틋하고 가슴도 크고 그래서 좋아했는데, 지금 보니까 신지랑 별로 다를 바 없음. 근데 그건 그 세계가 그냥 다 그래서 딱히 탓할 수도 없고, 그냥 안녕…
    3. 작화의 퀄리티와 복붙 수준이 매우 경탄스러웠다. 인류보완계획까지 3년여 남은 시점에서 에바를 복습하는 사람들은 30초 넘는 정지화면에 대사만 왔다갔다하는 장면들을 ‘연출’로 이해해줄만큼 너그럽지는 못했다.
    4. 이 총체적 찌질 월드 속에서, 인조인간 레이 2호가 가장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 같다.
    5. 이카리 겐도와 신지 부자에게는 근거 없이 여자를 호리는 페로몬이 뿜어나오는데, 특히 전자의 페로몬에 기대어 인류보완계획이 추진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6. 즐겁게 보는 건 좋은데, 야시마 작전 이후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같은 대사를 보면서 ‘푸헤헤’하고 웃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퀀스 전체에 대한, 해당 대사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단지 뒷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시대의 것을 그렇게 맥락 없이 조롱하는 것은 너무도 촌스러운 일이다.
    7. SF&판타지 도서관 좋더라. http://www.sflib.com/

    2012-09-29

    문화와 자본주의

    최근 20년간, 동아시아 지역에 걸처 가장 기쁜 성과 가운데 하나는 이곳에 고유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중국, 한국, 타이완의 놀라운 경제 발전을 들 수 있으리라. 각국의 경제 시스템이 보다 강하게 확립되어 문화의 등가교환도 가능해졌고, 많은 문화적 성과(즉, 지적재산)이 국경을 넘어 오가게 됐다. 공통의 규칙이 정해져, 일찍이 이 지역에서 맹위를 떨친 해적판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고 (또는 그 수가 대폭 줄었고), 어드밴스(선급금)와 인세의 대부분은 정당하게 지불되게 됐다.

    센카쿠 열도 분쟁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 블로그의 한국어 번역본을 참조하였음.
    센카쿠 열도 분쟁은 바로 이 ‘동아시아 문화권’을 해치고 있다고 하루키는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의 밥줄이 줄어든다’는 식으로 희화화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겠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이 내용을 살펴보자.

    여기서 하루키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경제권’이 ‘하나의 문화권’으로 상승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경우, ‘경제적 세계화’는 ‘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한 작가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에는 겸연쩍지만, 사라지게 될 때에는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만한 무언가가 된다.

    즉 ‘시장’과 ‘작가-지식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

    2012-09-24

    고종석 생각

    공적인 자리에서건 사적인 대화에서건, 누군가 내게 존경하는 문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다소 어물거리며 이렇게 답하곤 했다. 존경한다는 표현까지는 과도할 수 있지만, 고종석의 문체와 어조를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렇게 과거의 일을 기술함으로써 나는 현재에 대한 대답을 피해왔다. 사실 지금도 그런 종류의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젊은 시절의 나는, 속된 말로 고종석 ‘빠돌이’였다. 20대 초, 한창 게시판 글쓰기를 하던 무렵에는 그의 책을 놓고 고스란히 베끼는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가난했다. 경기도 부천에서 서울의 동북부에 위치한 대학교까지 오가는 교통비와, 매달 빠져나가는 학자금 대출금 따위를 내고 나면 호주머니에 남는 돈이 없었다. 1000원짜리 길거리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면서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읽었고, 문학과지성사의 문고판으로 나와 개중 저렴했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만약 안티조선 운동이 없었다면 나는 고종석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석이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이른바 ‘논객’ 노릇을 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반독재파쇼한나라당수구꼴통’을 새된 목소리로 몰아붙이는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염치와 도리를 알고 지키는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그는 호남인이고 그것은 그의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지만, 말하자면 강준만처럼, 자신의 ‘호남적 정체성’을 공적인 글쓰기의 원동력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그를 향한 지지자들의 기대를 하나씩 하나씩 꺾어나갔다. 고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엘리트 사회 내에서 비주류였고, 본인을 정치인으로 발탁해준 김영삼에게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후 김대중에게 영입되면서, 야당 내에서도 비주류가 되었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민주당의 세를 꺾어버린 것,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고 또 비참하게 거절당한 것 등은 모두 그 비주류 컴플렉스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동시에, 민주당을 누빔점으로 삼아 세상을 향해 발언하던 두 명의 안티조선 논객이 중심을 잃었다. 『김대중 죽이기』가 대표작인 강준만이 그 혼미에 빠져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아하고 맵시있는 문장을 선보이며, 안티조선 필자들 중 이른바 ‘문화면’ 역할을 도맡았던 고종석 또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어떤 시점부터, 고종석은 ‘논객’으로서 힘을 잃었다.

    ‘소통’을 제 화두로 삼고 논객으로서의 생명을 이어가려고 시도한 강준만과 달리, 고종석에게는 그런 종류의 의지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친구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본 여자들,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고 만날 수도 없는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흥미로운 젊은이들을 지면에 소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돌아오는 마감을 쉽게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고, 이미 내면의 불꽃을 잃어버린 본인의 발언권을 활용하여 후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석훈이 역설한 ‘20대 칼럼니스트’의 필요성에 귀를 기울인 몇몇 신문사들에 의해, 마치 나이트클럽처럼 연령 제한을 두는 순회 칼럼 지면들이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나 또한 그 덕을 보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고, 나는 “노정태라는 사내“가 되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종석은 절필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그의 말을 즐겨 인용하고 있다. 왜 이렇게 순진하냐고, 알 것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냐고, 끝내 한마디씩 하는 모양이다. 어떤 ‘운동’이 ‘조직’이 되고 불가능해보였던 싸움이 승리로 끝난 게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돌’이 자신의 팬클럽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박혀있던 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백낙청을 운운하며 글쓰기의 무력함을 이야기하는 고종석의 허무를 왜 이해 못하는지, 혹은 외면하는지, 나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문인이 절필을 하면 그것은 돌아오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절필 이전의 자신과 얼마나 완벽하게 단절하느냐, 혹은 얼마나 주도적으로 그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정치적 중심을 잃었고, 자신이 알거나 아끼거나 궁금해하는 타인들의 이야기를 거의 다 풀어놓은 그다. 이제 한 사람의 산문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고종석의 독자로 남아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 뿐이다.

    2012-09-19

    [2030 콘서트] 2012년, 논객 없는 대선

    필자가 2010년 가을 무렵 입대를 선택한 것은 2012년 여름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연말이 대선이니 이른바 ‘논객’들의 활약이 도드라질 것이고, 따라서 긴 공백을 뚫고 입지를 확보하는 일도 좀 더 쉬워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한 장의 전역증을 주민등록증 뒤에 살포시 감춰놓고 다니게 된 지금, 그 계산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19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객’이 활약할 만한 입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조건들이란 무엇인가?

    첫째, 피아 대립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편’과 ‘너희편’을 확실히 나눠서, 내 글이 먹혀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 ‘우리편’에 모종의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가 그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게 논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독자들도 비로소 설득된다.

    셋째, 그 논객들의 활약을 실어줄 수 있는 언론들 역시 스스로의 입장을 확실히 해둔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특정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인혁당 사건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문명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후기 박정희 정부의 직접적인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유신정권의 공과 과를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 비단 ‘판결이 두 개’인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라,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그늘의 깊이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어떤가? 최근 항간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문재인의 캠프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끌어안은 셈이다. 물론 그것은 ‘대한민국 남자’다운 태도일 수 있지만,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자세일지는 매우 의문이다.

    한편 1997년 대선 후로 얼마 전까지는 전통적인 여야 구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좀 더 진보적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국민승리21부터 가시화된 진보정당 운동이 대안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찌질’거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쨌건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에 부끄럽지 않게 현실정치에 대한 담론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인 김규항의 말마따나, 예전에는 ‘신념대로 찍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신념을 비춰볼 수 있는 현실 속의 거울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 분열과 파산이 ‘통합’의 기치하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잔여 세력과 국민참여당 계열의 정치인, 진보신당의 간판급 얼굴들이 모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주사파’의 활약에 힘입어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은 다시 한 번 탈당 보따리를 쌌다. 급격하게 힘을 잃은 진보신당은 사회당과 살림을 합쳤지만 그로 인해 어떤 상승 효과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 총선 당시 관악을 공천에서 부정선거를 한 이정희는 국민들 앞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 눈물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춘다. 진보정치는, 적어도 제도권 속에서는, 죽었다.

    당시 이정희의 부정선거를 기묘한 논리로 옹호하던 진중권은 현재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칼럼을 쓰는 9월19일 새벽 1시45분 현재, 안철수는 유력한 대선 후보이지만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은 대선 후보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안철수’인 셈인데, 필자는 그런 양자역학적 후보를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이 못된다. 게다가 19일 오후 3시, 그가 대선 출마와 관련하여 중대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신문사의 마감 시한으로 인해 그 내용을 이 칼럼에 반영할 수도 없다.

    지지 세력뿐 아니라 심지어 운도 없으니, 필자에게 ‘논객’의 시대는 정말 끝났나보다.


    입력 : 2012.09.19 21:27:47 수정 : 2012.09.19 23:10: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92127475&code=990100&s_code=ao051#csidx500b31ec2f053909a49051e82ceac15

    2012-09-16

    매개념 문제

    인터뷰를 마치며 박 교수는 걱정스런 얼굴로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그런 우려에 박 교수는 “지식인의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30년대 말의 조선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평생 약자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을 벼려온 박노자의 존재는 ‘지엔피 인종주의’에 빠져 외국인과 소수자 차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의 아들 율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인터뷰였습니다.

    집안일 많이 하며 죄악을 씻고 있어요”(한겨레, 2012년 9월 15일)
    김두식이 박노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후, 마지막 정리 발언으로 한 말. 여기서 ①과 ②의 논리적 관계를 추적해보자.

    (1)은 일종의 대전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진보신당 사람들이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인다고 김두식은 말하고 있지만, 어차피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정정할만한 다른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적어도 화자에게는) 진보신당의 지식인들이란 까대기에만 능숙한 청맹과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이지만, 진보신당에 선뜻 표를 주지 못한다.

    이 사이에 빠진 소전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새 알 수 있다. ‘나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임의로 (1.5)라고 번호를 부여해보자. 그렇다면 이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된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1.5) 저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의 집단에는 표를 주지 않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즉, 그래서 저는 진보신당에 표를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매개념’, 즉 대전제와 소전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이 결론에서는 “좋아하는 사람들”로 슬쩍 바뀌어있다. 하지만 이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매개념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즉 김두식에게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이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같은 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색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물론 ‘애정어린 비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지만, 굳이 분석해 보았다.

    김두식은 현실과 담 쌓은 지식인들을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투표하지는 않는다는, 즉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서 오늘의 보람을 찾도록 하자.

    2012-09-04

    고종석의 안철수와 최장집 생각

    [고종석 칼럼] 안철수 생각, 한겨레, 2012년 9월 2일.

    [최장집칼럼]책임정치를 위하여,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

    누군가 늘 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양자 모두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한 문필가가, 현재 가장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정치학자의 주장을 오해하는 모습을 보며, 괜히 한 마디 덧붙인다.

    “안철수 생각”이라는 제목 하의 고종석 칼럼에서 주목해 읽어볼만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대의제 정당정치를 중시하는 정치학자들도 안철수를 꺼린다. 이 정치학자 집단을 대표한다 할 최장집은 지난주 ‘책임정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칼럼에서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의제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오랜 신념을 생각하면 조금도 놀랍지 않은 발언이다. 그런데 최장집의 지지 조건을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는 박근혜일 수밖에 없다. (강조는 인용자)
    나는 고종석이 저러한 단언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하다. 최장집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최장집은 한국의 대통령제가 ‘책임정치’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은 정당이 아니라 캠프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고, 임기 말년 지지율이 떨어지면 자신의 정당과 거리를 둔다.
    임기 전반에 대통령은 “집권당 없는 대통령”이고자 여러 형태로 당의 영향력을 제어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의 당정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당이 오히려 멀어지고자 한다. 대통령은 대선에 가까워오면서 오히려 당에 부담이 되고, 이제 당이 나서서 “대통령 없는 집권당”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청와대-집권당 관계는 대통령을 유능하고 좋게 만드는 데 있어서나, 정당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나 실패하게 된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 결과 ‘이명박 심판론’을 들고 총선에 나선 야권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갈아치우고 ‘나도 이명박을 심판하겠다’고 나선 박근혜와 대립각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대선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이명박의 실정을 비판하기 위해 같은 당(이지만 다른 계파)인 박근혜를 찍겠다고 나서면, 사실상 유의미한 정치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즉, 최장집의 이 칼럼은 ‘나는 박근혜를 찍겠다’는 내용으로 이해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고종석은 그렇게 읽고 있다. 왜일까? 잘 모르겠다. 최장집 칼럼은 전체적으로 현재 ‘캠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선 국면이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상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쪽은 같은 당의 대통령을 심판하겠다는 대선후보인 박근혜 아닌가.

    고종석은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최장집의 말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박근혜가 ‘책임정치’를 구현하려면, 이명박 정부 심판론에 편승하지 않고, 그 공과 과를 모두 이어받겠다는 태도를 내밀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어쩌면 아버지의 독재를 사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현재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종석이 안철수를 ‘지지’ 혹은 ‘응원’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박근혜와 안철수가 낳을 수 있는 1mm의 차이를 위해,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는 정치학자의 원론적인 주장마저도 히스테리컬하게 ‘그것은 박근혜 지지가 아니냐’라고 묻는다. 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정치 토론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심히 안타깝고 씁쓸하다.

    2012-08-26

    안철수의 국민연금 생각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106쪽. 강조는 인용자.

    2012-07-18

    2010.10.10 - 2012.07.18

    2012년 7월 19일부로 저는 다시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기대 섞인 우려, 혹은 우려 섞인 기대와 달리, 단 하루의 추가 복무 없이 병장 만기 꽉 채우고 나왔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간략하게 몇 가지 항목만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군 복무 형태는 카투사, 근무지는 미 2사단 1여단 모 대대 모 중대, 병과는 통신병입니다. 몸 쓰는 일과 머리 쓰는 일을 골고루 다 하며 후회 없는 군생활을 하다가 나왔습니다.


    2. IOTV 입고 뛰어다니고 통신망 설치하는 것 외에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2-1. 『마이크로스타일』 번역 및 출간.

    2-2. 《프레시안북스》에 서평 기고.

    2-3. DOMINO 동인 활동.


    3. 이 블로그는 2011년 8월 17일 비공개로 전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날 제가 2사단 지역대에 소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군인의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이우람'이라는 분이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보 시면 아시다시피 저 글은 '정치의 이론적 해석'에 대한 글이지 '정치적 지지나 비난'을 담고 있지 않으므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최장집이나 손학규 같은 실존 인물이 거론되고 있으며, 어쨌건 민원이 들어왔으니 뭔가 조치가 취해지기는 해야 한다는 이유로 블로그 폐쇄를 지시받고 그 당일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4. 물론 군대는 군대니까 모든 게 다 쉽거나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나이가 많은 채 군대를 간 덕에 논산훈련소와 KTA(KATUSA Training Academy)는 쉽게 넘겼지만, 자대에 가보니 얘기가 좀 달랐습니다.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한 불굴의 이성이 본인의 처지마저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개인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당시 썼지만 공개하지 않은 다음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2011년 1월 16일)


    5. 하지만 그것도 이른바 '짬'을 좀 먹으니, 대략 일병 꺾이고 난 다음부터는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01학번인데, 저보다 많게는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이른바 '이중의 시차'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시점부터는 선임이건 후임이건 다 제 밑으로 동생들이 되고 말았지만, 저는 워낙 스스로에게 엄격한 탓에 특정 시점을 넘기까지는 함부로 말을 놓고 하대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군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6. 본연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논객질'이라는 특정한 활동의 범주가 있습니다. 다들 군대 오면 비로소 '대중'의 존재를 느끼고 논객질의 한계를 고민한다던데, 저는 카투사라 그런지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미숙한 다수의 고학력자들이 새로운 차원의 '계몽'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 당장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무튼 돌아왔습니다. 고전 명작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며 이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2012-02-11

    이정렬 판사가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에 대해 재판한다면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탈락에 대한 논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관련된 뉴스의 링크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나는 그의 전체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가카’라는 외재적 거악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나 사기업 혹은 기타 생활세계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자기 구속과 억압이다. 다른 수많은 사례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작은 두목’들이 휘두르는 조직 내의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이옥형 서울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은 바로 그 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제 판사들은 법원장으로부터 근무평정을 좋게 받지 못하면 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꼭 사건처리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건처리를 못하면 그것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잘해도 조직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원만해도 판결에 나타난 국가관이 이상하여 균형감이 없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좋지 않은 평정을 받을 수 있다.
    서기호 판사의 글(링크)
    이 항변의 내용은, 공교롭거나 공교롭지 않게도, 최근 큰 논란을 불러온 ‘석궁 테러’의 가해자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그것과도 같다. 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상기해보자.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는 실력자이지만, 입시 문제의 출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재직중인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교수, 평소 다른 교수 및 재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막말을 했다는 그런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당시 서울고등법원에 재직중이던 이정렬 판사는 본인이 주심을 맡은 이 사건에서 성균관대학교는 김명호 교수를 복직시킬 필요가 없다는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 판결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김명호 교수가 해당 재판의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갔고, 그는 이후 살인미수로 수사받고 상해죄로 기소되어 징역 4년형을 살고 현재 석방된 상태다. 이미 나는 그 형사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이번에는 지난 글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사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이정렬 판사는 ‘김 교수가 판결문을 읽어보았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판결문은, 이정렬 판사의 자부심 넘치는 발언처럼,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다. 학생들에게 욕을 얼마나 했느냐, 욕 먹은 학생들은 다들 앙심을 품어서 그런 것이냐, 따위의 자질구레한 ‘진실게임’은 다 접어두고 판결문의 기본적인 논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구 교육법(김명호 교수가 재임용 심사를 받을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같은 법에 따르면,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그러므로 성균관대학교가 교수의 임용과 관련하여 연구 실적과는 무관한 요소들, 가령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평가의 항목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다.

    4. 그런데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항목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대학측이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보건대 그 평가는 정당하다(또한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고 있지 않다).

    5. 따라서 성균관대학교의 재임용 불가 처분은 정당하다.

    이와 같이, 이정렬 판사는 철저하게 해당 사건과 관계되는 법률을 찾아내고, 그에 기반한 판결을 내린다. 그를 ‘우리편’으로 만들어준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과 ‘꼴통’으로 만들어준 억대 내기 골프 무죄 판결 모두를 관통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 판례나 ‘국민감정’보다 현행법으로부터 도출되는 법도그마틱을 우위에 두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그를 ‘튀는 판사’로 언론에 오르내리게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물론 ‘가카새끼 짬뽕’으로 인한 유명세는 별개로 쳐야 한다).

    물론 그 원칙은 정당한, 혹은 우리 모두가 정당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판사가 법도그마틱이 아닌 다른 요소를 통해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들은 안정적인 법 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그 판결문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법을 통해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수의 임용에 교육자로서의 자질 같은 주관적 평가를 개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항변은 판사가 아니라 입법부를 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논리가 서기호 판사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 단계씩 그 논리를 따져보도록 하자.

    1. 헌법 제101조 3항에 따라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 헌법 102조 3항에는 대법원과 각급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위 헌법 조항들은 법원조직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법관의 근무성적의 평가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44조의2 (근무성적의 평정) ①대법원장은 판사 및 예비판사에 대한 근무성적을 평정하여 그 결과를 인사관리에 반영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동무성적평정에 관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3. 그런데 대법원규칙(2012년 1월 1일 개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6조(임용기준)

    판사임용대상자에 대해서는 법률지식 및 법적 사고 능력, 공정성, 청렴성, 전문성, 의사소통능력, 품성, 적성, 공익성 등을 참작하여 법관 수급 사정에 따라 임용 여부를 결정한다.

    4. 대법원규칙은 “법적 사고 능력”뿐 아니라 “공정성”과 “품성”을 임용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로 측정될 수 없는 요소가 평가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다.

    5. 그러므로 서기호 판사는 법원의 재임용 거부에 대해 항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앞서 우리는 조직과 기관마다 속속들이 박혀있는 작은 두목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동일한 논리를 지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분위기나 문화나 ‘빌어먹을 꼰대 새끼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하게, 혹은 이정렬 판사의 방식대로 따져보면, 바른 말 하는 당신보다는 당신에게 ‘젊은 친구가 세상을 모르네’라고 말하는 ‘꼰대’가 법정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법에 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개인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인격을 판단하는 주체는 적어도 당신보다는 더 힘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에게는 김명호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서기호 판사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법이 개인에게 특정한 ‘인격’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면, 두 사건은 상호 교환 가능하다.

    허재현 한겨레 기자를 비난하기 위해, 김명호 교수를 ‘완전히 4차원’으로 몰아붙여간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몇몇 언론은 진중권이 김명호 교수를 닦달한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조로 서기호 판사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려 든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잘릴 만하니까 잘렸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서 판사는 심사 하루 전인 6일 자신의 근무 평정을 판사 내부 통신망에 스스로 공개했”는데, “그는 초반 7년 동안 ‘상·중·하’에서 ‘하’를 5회, ‘중’을 2회 받 았고 ‘상’은 한번도 받지 못했”고, “이후 A~E 까지 5단계로 평가한 3년간은 C를 2회, B 를 1회 받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그 평가의 내용이 반드시 법관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고, 대법원규칙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명호 교수의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송 따위로 인해 그 ‘인격적’, ‘품성적’ 내용이 공개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뿐이다.

    ‘김명호는 4차원이지만 서기호는 천사표’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조선일보는 세심하게 팩트를 던진다. “그는 또 변호사가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을 그대로 오려 붙여 ‘72자(字) 짜리’ 무성의한 판결문을 썼다가 변협의 공개 항의를 받는 등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요새는 판사도 Ctrl-c Ctrl-v 하느냐’는 식의 조롱 대신, 근무 평점이 중간인 사람이 어떻게 뒤에서 2등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궁금하다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이미 조선일보는 ‘그 둘 빼고 중하위권은 다 알아서 나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계속 진중권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논의의 이성적 수위를 공고하게 높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어떠한 인격과 품성과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법에 써놓고 강제하는 것이 가능한 나라, 100개의 조직마다 100명의 원님이 호령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메커니즘에 의해 짓밟힌 누군가를 향해 ‘알고 보면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실망했다. 이성과 상식을 부르짖지만 그 방법론은 과연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열정으로부터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맥락을 분리하고, 그 문화적 기제의 바탕에 깔린 제도적 장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깝깝한 이유는 늙었는데 죽지도 않는 노인부대가 정신줄 놓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나 찍고 자빠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속의 인간을 분리하고, 사건 자체의 문화적 측면과 법적 측면을 별개의 것으로 고찰하는 사고의 구조가 확립되고 보편화되지 않는 한 현재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불거진 두 개의 사건을 바라보는 한 총명한 논객의 발화를 검토해보고 있노라면, 밤은 깊고 갈 길은 멀 뿐이다.

    진중권은 ‘김명호 민사사건 담당, 일명 튀는 판사로 유명한 이정렬 판사네요’라며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김명호 교수에 대한 판결이 옳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트위터에 흘린 바 있다. 바로 그 이정렬 판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기호 판사의 경우를 바라보면, 그러나, 그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뭘 어쩌자는 말인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현재 상황이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는 위기 의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닳고 닳은 인용구로 긴 글을 끝내야겠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2012-02-04

    시바스 리갈과 비키니

    MBC의 부장급 여성 직원께서 52년만의 맹추위를 무릅쓰고 벗어주신 덕분에 이 논란의 본질이 또렷해졌다. 사안의 본질은 섹스 혹은 젠더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인간 혹은 생물의 본능적 욕망인 섹스 그 자체와, 그 위에 덧입혀진 군사독재 시절 혹은 ‘유교 꼰대’적 문화의 갈등이 이 사안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개방적인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섹스 위에는 문화적 레이어가 존재한다. 상호 합의된 자유로운 성욕이라는 최소한의 개념에도 역시 근대적 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좀 덜 개방적인 문화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 ‘가문간의 결합’, ‘인구학적 지속 가능성’ 따위가 섹스의 직접적인 노출을 막는 차단막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기제가 단지 문화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권력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경우이다. 가령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은 젊은 여자를 끼고 놀고 싶다는 욕망을 ‘조국 발전에 힘쓰시는 각하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일로 승화시켰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는, 그만큼 성폭력에 대해서도 둔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치, 거스를 수 없는 대의를 타고 누군가의 욕망이 흘러넘칠 경우,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들이 그것을 거스르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는 성욕 억제제를 먹고 있으니 안심하고 비키니 사진을 보내라’고 김용민은 말했다. 육 여사를 잃고 나라 근심에 지친 각하를 달래드리는 거지, 결코 네놈들이 생각하는 그런 천박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박정희의 채홍사들은 둘러댔을 터이다. 나는 두 발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권력’을 단지 국가나 젠더 사이의 위계적 차이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풍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다. 대체 MBC의 그분은 왜 벗었는가? ‘이건 단지 찧고 까부는 건데 너무 진지하게 비판한다’는 항변의 뉘앙스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애들 장난인데 왜 그래?’라고 말하고 싶고, 그러므로 ‘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무색하게 하기 위해 ‘언니’로서, ‘선배’로서, 혹은 ‘형님’으로서 총대를 매는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보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이제 문제의 ‘비키니녀’들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나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은 다만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탐스러운 육체를 많은 이들에게 과시하고픈 욕망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벗을 수 있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레진 블로그에 축전을 보내고 공개되고 서로 좋아라 하는 그 행위에는, 지금의 이것과 같은 이중의 음습함이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와 가카를 깔 수 있는 자유 등등, 절대적 까방권이 될 수밖에 없는 선량한 대의가 마치 입안에 감도는 미원의 맛처럼 뒤덮혀있다는 것이다. 수신자 정봉주와 엿보게 되는 수많은 남자들을 흥분시키려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그와 같이 고상한 목적으로 사탕발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꼼수에서 둘러대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섹스에 대한 권력적 포장을 완성시킨다.

    ‘나는 자발적으로 벗었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데, 정작 그 자발적인 육체의 섹슈얼한 맥락은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가운데(혹은 “찧고 까부는” 일이라는 식으로 모에빔 처리되어), 국가와 민족과 민주주의의 성전에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비키니 사진을 보내는 이들을 슬럿워크와 비교하는 것은 그래서 결코 온당하지 않다. 슬럿워크는 추상적인 여성의 자유를 ‘홍보’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게 아니라, 걸레처럼 싸보이게 입고 다니는 것 자체가 여성의 자유의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꼼수를 듣고 지지하고 응원의 사진을 보낸 여성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꼼수를 ‘초월’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과 이후의 어정쩡한 해명을 통해 김용민과 나꼼수 제작진이 만들어낸 ‘섹스를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변태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적인 맥락 작용을 추인해버린 것이다.

    정봉주의 발기를 기대하고 벗었다면 왜 본인의 진실을 말하지 못할까? 벗긴 벗되 그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바라고 비키니를 입은 채 가슴을 모아올렸나? 비키니 응원녀들의 두 개의 진심은 모두 순수하고 진정성 넘치는 것이기에, 서로 충돌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재미를 보는 건 결국 꼭데기에서 그 구조를 만들고 조정하는 자들 뿐이다. 박정희의 섹스가 국가와 민족의 과제로 승화되던 그 변태성이, 역시나 이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에서 나는 ‘마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꺼내서 과시하지도 못하는, 자칭 민주투사들이 서로 민망하게 노는 모습이 유출되었을 뿐이다. 정봉주가 옥중에서 투약한다는 성욕감퇴제가 대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 남자들이나 그 여자들이나 결국 태극기 망또를 두르고 민중가요 부르며 팬티를 벗어재끼는 변태들처럼 보일 뿐이다.

    2012-01-13

    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1.

    이 건은 애초에 논의할 건수가 못 된다. 만약 석궁이라는 무기가 마치 장전된 총과 같다면 말이다. 김 교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석궁을 쏘면 멧돼지의 가죽도 뚫는 화살이 날아간다. 그런데 사람이 그걸 배에 맞고 깊이 1센티미터가 안 되는 상처를 입은 채 무사히 집에 걸어갔다가 병원에 걸어서 갔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이 조건을 인정한다면, 김 교수의 가방에서 사시미 칼이 나오건 말건, 그가 석궁 발사 연습을 했건 말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발사하였고, 그 발사된 화살이 판사의 배에 상해를 입혔다’라는 검찰 측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강력한 석궁의 화살이 발사되었고 맞았다면, 판사는 사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와 그 외 언론 등을 통해 접한 모든 논리는 바로 이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정상적으로 석궁이 발사되었다면 그 정도 피해에서 멈출 리가 없는데, 어떻게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거나,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있지 않다거나 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김명호 교수가 석궁을 고의로 발사했다는 사실을 반박하기 위한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와이셔츠와 통화 기록과 혈흔 감정 등등에 대한 모든 논의, 즉 ‘재판이 개판’이 되어버린 시점의 이야기들을 모두 접어둔 채, 일단 석궁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자. 검찰은 김 교수가 석궁에서 화살을 ‘발사’하였고 그로 인해 ‘발사된’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이며, 몸에 맞지 않고 바닥에 부딪쳤기 때문에 부러졌고, 경찰 검찰 사법부 병원 등 모든 기득권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부러진 화살을 숨긴 채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겠으나, 하나의 형사 사건으로서 석궁 사건이 갖는 핵심적인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발사’된 석궁이 사람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경미한 상해(전치 5주?)만을 남길 수 있는가. 김 교수 역시 어떤 식으로건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석궁이 발사되더라도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는 수준으로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다면, 와이셔츠에서 눈에 보이는 혈흔이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김 교수가 가지고 갔고 석궁에서 발사된 그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다.
    판사: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1회의 요지는 검찰에서 설명한 것 외에 … [피의자, 즉 김 교수는] 석궁의 위력에 대해서 검찰에서 사람에게 쏠 경우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신문에 대해서 다다미 연습을 할 때에 어떤 곳은 1쎈치 정도 꽂히고 다다미가 풀려진 곳은 좀 더 깊이 꽂혔는데 그렇게 치명적인 위력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박홍우가 화살을 배에 맞아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피고인이 발사한 화살에 다친 것을 인정하느냐는 신문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화살을 맞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로서는 화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서 김 교수는 본인 스스로, ① 자신이 연습할 때에는 다다미에 꽂히는 화살의 깊이가 그다지 별 볼일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②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죽이거나 큰 상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취지의 항변을 한다. ③ 발사자의 미숙한 조작에 의해 석궁의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은 뒤이어 등장한 증인에 의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조준을 잘못했다던지 하는 경우는 어떤가요.
    답 ☞ 조준이 잘못되는 경우가 아니고, 시위를 걸 때 초보자인 경우 시위가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석궁이 발걸이가 한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동식 석궁이라고 하는데, 양발을 사용해서 석궁 줄을 당길 수도 있고 한발을 놓고 당길 수가 있는데, 지금 사용한 석궁 같은 경우는 왼발 또는 오른발 어느 발을 사용하든 한쪽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몸 중심에서 한쪽으로 어느쪽이든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활대에 있는 힘이 중심으로 몰려와서 바로 화살 뒤를 가격해야 되는데 한쪽으로 쏠린 현상일 때는 파워가 좀 떨어집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영화에서는 이와 같이, 제대로 장전된, 즉 화살누름판에 의해 화살이 물려 있는 석궁이라 하더라도 미숙한 조작자로 인해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공판에 출석한 두 명의 증인 중 두 번째 사람의 증언에만 초점을 맞춘다. 화살을 아래로 눌러 고정시켜주는 하향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화살을 계단 위에서 아래로 겨누고 발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언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답 ☞ 예, 끌려 들여와 있으니까 아예 대 놓고 쏴도 들어가 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또 하나는 내려 쐈을 경우 파워가 없다고 한다면 화살누름판이 없을 때, 아니면 빠져나왔을 때 파워가 없는데, 송파경찰서에서 의도한거는 이렇게 놓고 쐈을 경우에 파워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금 들어갔잖습니까? 박홍우 판사가 그런 의도를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화살누름판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나와서 쐈을 때 조금 들어갔다면 이해를 한다 이겁니다. 근데 하향사격을 하면 혼자 흘러 내려옵니다. 화살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쏠 수 있느냐. 화살누름판이 없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있는 상태에서 흘러 내려온다면 이렇게 되면 파워가 약한 것은 당연한데, 이 상태에서 이렇게 하향사격을 한다면 계단위에서 쐈다고 하더라고요 두 계단위에서 쐈다고 한다면화살이 흘러내려 오는데 어떻게 쏘냐 그 말입니다.

    사실상 발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요 ?
    답 ☞ 불가능하다, 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화살이 이만큼 내려오는 사이에 쏘겠냐? ‘느덜 물어보는 의도를 나는 이해를 못한다’ 그렇게 밖에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경찰들이 박홍우 전치 2주 상처에 가장 가까운 상황이 바로 불완전 장전 상태이고, 그 상태는 화살 누름판에 눌려져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헌데, 그 상태는 계단 위에서 하향 조정을 하게 되는 경우, 그냥 화살이 흘러 내려오니 발사가 불가능 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고영환씨가 지적하며 경찰들 보고 ‘니들의 의도가 뭐냐?’ 즉, 증거조작하는 수작아니냐?라고 물었다는 것)

    아~ 그런의도셨습니까?
    답 ☞ 그러니까(물어보는 취지를 모른다는 듯이) 재판장님, 이해하셨습니까? 인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에 한 가지 논리적 함정이 있다. 화살은 화살 누름판에 제대로 물려 있지 않아서 불완전하게 발사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물렸다고 할지라도 양쪽 현에 고르게 힘이 받히지 않으면 역시 완벽하게 발사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증인 A는 후자를, 증인 B는 전자를 설명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직 증인 B 뿐이다. 두 가지의 원인은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고, 둘 중 하나만 성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오발의 조건 모두 석궁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화살을 쏘게 만드는 충분조건이다. 따라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고 싶다면, 검찰은 두 조건 중 하나에서만이라도, 불완전하게 발사된 화살이 피해자에게 경미한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없이 증명해야 한다.

    3.

    김 교수의 상해죄에 대한 유죄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논점이 바로 이것이지만,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언론 기사 중 이 지점을 제대로 짚은 것은 대단히 드물다. 경향신문에 등장한 한 기사에서 핵심적인 쟁점을 요약하였는데, 그 중 한 문단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대목을 인용해보자.
    김 전 교수는 항소심에서 석궁으로 박 부장판사를 맞힌 일이 없다고 했다. 영화에서 김 전 교수의 변호사는 ‘석궁이 제대로 맞을 경우 수십㎝ 두께의 돼지고기를 뚫고, 잘못 장전되면 발사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한다. 화살이 빗나가 벽을 맞히면 화살촉이 뭉툭해지고 화살이 부러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전문가들은 “석궁의 시위를 당기는 2개 손가락에 균일하게 힘이 분배돼야 하지만 초보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기 힘들다. 이렇게 장전하면 화살이 부러지거나 쪼개지고 심지어 사과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냈다.
    ‘석궁 사건의 진실’ 쟁점②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공방(경향신문)
    기사의 내용에 따르자면, 석궁에서 발사(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오발)된 화살이 ‘빗나가고’, ‘벽이나 그 외 단단한 곳’에 맞아서 ‘부러질’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고 그것이 박 판사에게 경미한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그쪽이 훨씬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훨씬 단순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 본인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의 석궁 실력은 변변치 않았고 과녁을 제대로 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커스가 시작된다.

    와이셔츠의 혈흔 감정을 육안으로만 했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혈액의 흔적은 대단히 극미량일 경우에도 시약을 통해 검출되고, 섬유에 한 번 스며들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노모의 손빨래로 완벽하게 지워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튼 속옷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었고, 사건을 통해 발생한 모든 혈흔은 단 한 사람의 혈액이라고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그 피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갔다 온 것은, 공격받은 ‘동물’이라면 일단 자신의 거점으로 피신한 후 다음의 행동을 취한다는 일반적인 행동의 논리상,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하다. 옷을 갈아입은 것은 ‘피해자’가 아닌 ‘판사’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약점과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할 법한 행동이다. 즉 동물처럼 숨었다가 판사로 다시 등장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김 교수가 이 모든 사실관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하고, 음모론의 본질적인 속성상 그것은 한없이 팽창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한다. 경찰은 증거를 숨겼고, 검찰은 그 과정을 지휘하였으며, 병원의 의사들도 박 판사의 상처에 대해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사법부, 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재판 테러범’들이 있다.

    4.

    이 거대한 서사에 동의할지 하지 않을지는 당신의 자유다. 내가 말하는 ‘당신’은 이 사건과 관련된 판사 및 검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무궁무진한 서서가 자아분열을 시작할 때, 그것을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검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검사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지, 피고인은 무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 중 석궁으로 인한 상해와 관련해서, 검사와 판사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페이스에 서서히 말려들어갔다. 화살이 벽에 맞아 부러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어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할 판에, 화살이 오발되어 부러졌고 그 화살을 경찰이 숨겼고 등등으로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의혹’에 일일이 답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내용들이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98%의 진실’을 형성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의혹’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 전에,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경험적 세계의 법칙 안에서 그와 같은 상해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검찰 측에서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했느냐이다.

    물론 검사와 판사는 그 증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피고인 본인의 진술도 있고, 증인들의 증언도 있고, 다 있다고 보고 그 논점에 대해서는 더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방심’이 이 재판을 개판으로 만든 주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고인의 유죄를 피고인이 납득하도록, 혹은 반박하지 못하도록 입증하지 않고,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 후 유죄 판결을 내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차 공판 이후 어느 지점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은 소송 전략을 조용히 변경한다. 의혹을 뿌리고 더 큰 소동을 피운다. 그 바탕에는 ‘발사된 석궁에 맞았다면 그 사람이 살아있을 수가 없다’는 상식 혹은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법원은 그 논점에 대한 반박의 가능성을 이미 지적해놓고도, 피고인이 슬쩍 그것을 밀어놓은 채 자신만의 쇼에 돌입하자, ‘증거신청을 기각하겠습니다’를 반복한다. 피고인과 변호인측이 바로 그 반응을 얻기 위해 그런 ‘의혹’들을 제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재판부는 해 보았을까?

    법학을 공부할 때, 학생들은 논점을 하나 하나 나열한 후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논박한다. 그렇게 답안지를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논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같은 구멍을 향해 미끄러지고,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서 연거푸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에는 하나의 핵심이 있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못 박고 넘어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 석궁 상해사건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다.
    화살은 발사된 후 부러졌는가, 아니면 부러진 채 발사되었는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하여 몇 번의 실험 결과,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돼지고기에 10센티미터 이상 푹 박혀든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런 광경을 본 대중들은 ‘화살이 발사된 후 부러졌다’는 시나리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달된 전문가의 손으로 발사된 것이고, 피의자 김명호 교수에 의해 발사된 것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5.

    한국 사법 역사상 가장 괴로운 사건 중 하나인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화장실 안에 두 사람의 용의자가 있었고, 두 사람 중 하나가 피해자를 칼로 찔러서 숨지게 했다. 하지만 검찰의 잘못된 수사와 기소로 인하여 두 사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금은 새로운 증거가 나와서 다시 절차가 진행중이지만, 아무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로 여태까지 기억되고 있다.

    왜 두 사람 모두 무죄인가? 증언이 철저하게 불일치했고,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휘두르는 재현 과정에서, 검찰에서 지목한 주범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가 실제 시신에 남은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칼로 찔러서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더구나 검찰은 두 사람을 하나의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기소하지 않고, 한 사람은 주범으로 한 사람은 공범으로 기소했다. 그리하여 주범이 무죄가 되는 순간 종범도 무죄가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안타깝고 억울하며 분노할만한 사건이지만, 국가가 개인을 처벌하는 과정이 얼마나 치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는 범인들을 비난하는 것 만큼이나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을 하지 못해 그들을 풀어줘버린 검찰과 경찰을 비판해야 한다. 열 사람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잡아넣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 사람의 범인을 놓치지 않고 적법절차에 의해 처벌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김명호 교수를 상해죄로 처벌함에 있어서 피의자와 그의 재판을 바라보는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한 것의 책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형사 피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 혹은 재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오직 ‘올바른’ 것만 따지자면, 박흥우 판사는 석궁에 맞은 후 본인의 집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지 말았어야 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에 의한 피신이면서, 판사로서 몸에 벤 품위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김명호 교수가 수많은 논점 일탈과 가상의 시나리오를 들이대며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행동 역시, 즉각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고인석에 서면 누구나 피흘리고 쫓기는 투우가 된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그 피고인이 진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깨끗한 결말을 내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사법 체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성과 논리와 법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처벌을 받는 것 말이다.

    6.

    영화 ‘부러진 화살’의 개봉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우리 사회의 이성이 얼마나 뭉툭하기 짝이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진중권은 다시금 용감한 반대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영화를 ’98% 진실’로 몰아붙이는 경향성에 일침을 가했다. 그 정신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박수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김명호 교수를 단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재판을 개판으로 만드는 주범’으로만 몰아붙이는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도 사그러들지 않는 분노를 표하고 싶다. 어쩌다가 그는 이토록 야만적이고 상스러운 방식으로 이성과 합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재판 기록을 직접 보세요, 이 사람 완전히 사차원입니다. 이것이 진중권이 말하는 이성과 합리라면, 나는 그가 내미는 ‘빨간약’을 단호히 거절하겠다.

    한편 ‘튀는 판사’로 잘 알려진 이정렬 판사의 대응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법원의 내부 규칙을 어겨가면서 김명호 교수의 복직 신청에 대한 민사소송의 결정 과정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원래 김 교수가 승소할 사건이었는데, 3월 2일 이후 접수된 성균관대의 반대 논거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아서 패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가 ‘김명호는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식의 매도에 일조하는 것임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그는 ‘김 교수가 상처받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더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 과정에서 ‘사립학교의 교원 임용에 대하여, 학문적 성취 외의 다른 주관적 요소가 판단의 대상이 되는지, 된다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남는 것은 법의 논리에 대한 설명과 납득이 아니라, ‘나는 사법 피해자다’와 ‘사법부야말로 억울하다’는 두 가지의 감정적 호소 뿐이다.

    물론 그는, 모든 판사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판결문을 읽어보라. 하지만 판결문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법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더불어 판결문 자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판결문을 보라’는 답변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이해되는지, 과연 법원의 구성원들은 모르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므로, 용기가 없는 자들의 이성은 뭉툭하기만 하다. 사건의 핵심, 논쟁의 심장으로 뚫고 들어갈 만큼 충분히 뾰족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지 못해 싸우는 검은 소처럼 김명호 교수는 좌충우돌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흘린 피를 보며 열광하는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이 모든 광란의 서커스를 멈추라고 말하는 조커 역시 엉뚱한 무덤에 침을 뱉는다. 이 무질서한 사육제 속에서 우리는 훨씬 더 냉철하면서도 뜨겁게 이 사건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