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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

[별별시선]청와대로 가지 말자

요즘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2008년의 나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우리는 저 버스를 당장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렇게 평화적인 투쟁에만 집착하고 합법적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반성이 시작된 것은 비슷한 시기 태국에서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나서서 정권이 뒤집히면, 이번에는 빨간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정부를 끌어내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고 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좌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뒤집히면서 민주적 권위가 쇠약해지면, 군부가 총칼로 안정을 제공한다. 당장 경제 성장을 원하는 중산층은 일단 군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중산층은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찾아 군부가 아닌 민주 세력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1987년에, 성공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두 축이 견고하게 버텨냄으로써, 그중 한쪽이 군부와 살림살이를 합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졌을 때에도 민주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가 1 대 1로 맞붙는 경우,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로 뽑혔지만 군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살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12월5일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에 2008년 촛불시위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뜨거운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다.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과 맞서지만 세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대규모 집회를 통해 ‘세력 과시’를 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매번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정해진 식순처럼 경찰버스를 훼손하고 캡사이신 섞인 최루액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적당히 늦은 시간이 되면 집에 간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오고 경찰의 폭력이 벌어지지만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7년째다.

설령 어쩌다가 경찰 버스를 뛰어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로 가서 대체 뭘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나 그 외 중요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시위대는 경찰의 주장대로 ‘폭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청와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반면 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면 모든 언론은 일제히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지금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가 짜놓은 외통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 많은 국민들에게 시위의 쟁점들을 알리고 지지를 끌어내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청와대로 가지 말자. 대신 방향을 돌려,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시위대의 방향을 불타버린 남대문으로 돌리면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권력자 대신, 수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해법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입력 : 2015.11.29 20:56:16 수정 : 2015.11.29 21:02: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11292056165#csidxdce0acec71fddcda0123b58627a3766

2015-11-02

[별별시선]국민은 선진국, 대통령은 후진국

요즘 반성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간파한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초중앙집중적 1극 사회이며 그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러므로 ‘에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나라가 회까닥 뒤집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그러한 퇴행적 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개인적 숙원 사업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에, 교육부 관료들은 알아서 기는 쪽을 택한다.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이, 해방 후 70년간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해온 공통의 의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과 진영을 막론하고, 시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모든 한국인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대립 구도를 검토해보자. 이것은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쪽에 방점을 찍을지를 놓고 벌어지는 입장 대립이다. 발전된 산업국가를 만드는 것이 먼저인지,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를 만드는 게 먼저인지가 논점일 뿐이지, 양자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선진국을 만들자.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이 품어온 가장 근본적인 목적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진국인가?’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다. ‘어떻게 선진국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의사결정과 집행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가치를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 산업화 세력의 논리인 것이다. 반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적인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이 나라가 더 이상 선진화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만은 다르다. 그는 ‘내 아버지가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굳이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해방 이전, 개항 이후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선진화 아젠다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건 이 나라는 과거에 비해 더 나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박근혜만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높일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다시 후진국이 되어도 좋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40% 선에서 오가고 있음에도, 이것이 박근혜 한 사람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야권에서 갈등의 축을 ‘친일 독재 미화 반대’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 현상이다.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을 고스란히 반복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력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국정화에 찬성하지 않지만 야권의 정치적 레토릭에 동의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가 제기하는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의 수준이 후진국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 방글라데시, 수단, 터키 등 소위 후진국으로 여겨지는 국가들만이 선택하고 있는 그 길을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가 없다.

국민은 선진국을 지향하는데, 대통령은 후진국으로 역주행한다. 박근혜는 해방 후 70년을 관통하는 선진국 건설의 의지와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정작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도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인물임에도 말이다. 조국 선진화의 길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부디 아버지의 명예를 올바른 방법으로 지켜주기 바란다.


입력 : 2015.11.02 20:48:40 수정 : 2015.11.02 21:09: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022048405&code=990100#csidxbccd7df7e5526db84dad4d43c11aed8

2015-10-04

[별별시선]기성세대의 염치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지난달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의 칼럼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론이다. 인용문에서 지적된 ‘청년 논객’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답해볼 필요가 있겠다.

칼럼이 게재될 무렵, 새누리당은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 같은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청년들을 중장년층과 대립하게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홍기빈의 지적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그의 논리 구조가 결국 ‘피해자 탓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호남이 고립된 것은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절반을 군사독재 세력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바로 그 3당 합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의 있습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다. 호남의 고립은 호남의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김영삼의 지지 기반인 영남이 등을 돌려서 벌어진 일이다.

청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보다 높을까? 정부의 주장대로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야 없겠으나, 청년 실업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에 진보 진영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절대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를 ‘1차 노동시장’이라고 하고, 후자를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는 임금, 고용안정성,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한 번 ‘눈높이를 낮추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유사 신분제에 가깝다. 당연히 청년들은 처음부터 ‘1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만을 묻는다. 하지만 조합주의에 빠져버린 노동계 역시 이 사태에 있어서 결코 결백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기빈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다수화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률 10%대를 맴도는 한국의 노동계가 진작에 수행했어야 한다.

청년들은 정부에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 진영을 믿지 않을 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잘 조직되어 있는 일부 대기업 생산직에서 이미 가족이나 친지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대물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대체 청년들이 뭘 어쨌어야 한다는 말인가? ‘청년 담론’은 때로 보수의 분할 통치 방안으로 동원된다. 하지만 청년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의 영역에 분할 통치와 이간질이 가능한 차별이 존재함에도, 그것을 미리 바로잡아놓지 않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좀 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염치라고, 한 ‘청년 논객’은 외치는 바이다.


입력 : 2015.10.04 20:48:37 수정 : 2015.10.04 20:52: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48375&code=990100#csidxf53f26551e49056a682ddaf2c5c432b

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62052105

2015-08-09

[별별시선]조선왕조 대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다 ‘일제 잔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들은 모두 옳았는가? 역사학자 도면회 교수는 바로 그러한 통념에 도전했다.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를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기존 연구 성과에서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적 사례로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심지어는 태형이 갑오개혁기에 폐지되었다가 일제 통치하에서 부활했다고 서술한 개설서나 교과서도 많다.”

‘일제시대’에 대한 이미지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악은 일본에서 왔고, 설령 일제가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선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수탈을 하기 위한 투자였으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점,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 “태형은 갑오개혁기에 폐지되기는커녕 중앙과 지방에서 법적 한도를 넘어 인명 살상에 이를 만큼 남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려 왔으므로 국정을 개선하면 한국인의 민심도 쉽게 수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옳았다. 관군이 무너지고 있을 때 의병이 일어나 전세를 역전시켰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못한 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해제를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그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조선왕조와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헌법 전문을 펼쳐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나라다. 물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는 고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의 모든 과거가 포함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그 지배층이 지켜주지 못한 망국의 백성들의 저항에서 시작한 나라인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지 벌써 7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대한민국을 부수고 조선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고 사직단을 ‘복원’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태릉선수촌을 헐고 태릉과 의릉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망한 왕조의 귀신 모시는 자리가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그 시민들을 대신해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 훈련했던 운동선수들의 피땀 어린 공간을 밀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퇴행적인 문화재 ‘복원’ 시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가치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대신 조선왕조 시대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사고방식이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 제11조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대적인 8·15 특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이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수가 없다.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사면 조칙이 더욱 빈번하게 반포되어 재판기관의 존재를 무색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망국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듯하다. 경제적 격차는 신분제의 부활처럼 무겁다. 젊은이들은 ‘헬조센’에서 탈출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지옥을 뜻하는 ‘헬’과 조선의 일본식 발음 ‘조센’을 합친 말이다. 해방 70년, 조선왕조를 이겨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입력 : 2015.08.09 21:26:38 수정 : 2015.08.09 21:28: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92126385&code=990100#csidx647113877f821889e0a27d5af591661

2015-07-12

[별별시선]엄마 없는 하늘 아래

“방송에서 백종원을 ‘백주부’라고 한다. 집안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주부다. 주부는 대체로 엄마다. 백주부를 ‘백종원 엄마’라고 풀면 백종원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대중이 백종원을 통해 얻으려는 건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 그렇다, 엄마다.”

최근 예능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외식업자 백종원을 둘러싼 대중적 열광을 두고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내린 평가다. 발언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일단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황교익은 <집밥 백선생>을 보긴 했을까?

<집밥 백선생>은 연령대별로 나름 안배된, 하지만 요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네 남자에게 백종원이 아주 기초적인 레시피와 기술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타깃 시청자는 ‘엄마의 사랑’이 결핍된 ‘한국 맞벌이 부부의 1호 자식들’인 ‘1980~1990년대생’이 아니다. 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갑자기 자기 손으로 밥을 챙겨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중년 남성들이다. 그것은 <집밥 백선생>의 1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방송을 하다 보면 제작진이 의도한 타깃 시청자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상세한 시청률 표가 없으니, 논의를 위해 일단 황교익의 말대로 1980~1990년대생들이 <집밥 백선생>에 열광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집밥’이니까 ‘주부’가 하는 것이고, ‘주부’니까 ‘엄마’일 것이라는 자동연상은 적잖은 의문을 남긴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집밥 백선생>에서 가장 차별화된 키워드는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좋은 선생이다. 학생의 수준에 맞춰 아주 기초적인 내용부터 가르쳐준다. 이렇게 만들면 무슨 맛이 날지 상상해보라고 한 후, 당장 실습부터 해서 출연자들의 결과물에 대해 리뷰해주고,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그러니 시청자들 역시 손쉽게 따라해볼 용기를 낼 수 있다. 방송에 나온 식재료가 다음날 품귀 현상을 빚는 것은 괜히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밥’과 ‘엄마’가 분리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오직 여성에게만 쏠리던 가사노동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비로소 남자들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도 ‘집밥’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TV를 통해 전국에 유포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통조림을 이용한 생선 요리’편을 떠올려보자. 왜 통조림을 쓰는가? 백종원은 생선을 사온 후 냉장고에 넣었다가 조리하고 잔여물을 버릴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비린내가 나고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이 TV에서 요리를 했지만, 가사노동의 덧없는 고통을 이렇게 공정하게 전달하고 설득한 사람은 없었다.

황교익의 식재료 중심주의에는 분명 경청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러나 백종원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분석하는 그의 시선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경제력도 부족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는 면에서, 무심하고 또 잔인하다. “맞벌이로 바빠 내게 요리 한 번 가르쳐준 적이 없는 엄마와 달리 부엌의 온갖 인스턴트 재료로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백종원의 인기 비결이라고 황교익은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아이가 집밥을 못 먹고 자라는 것은 엄마가 맞벌이를 안 해도 될 만큼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빠 탓 아닌가?

아빠가 돈 벌고 엄마가 살림하고 애 둘 낳아 기르는 4인 가족 모델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집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엄마’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구시대적, 여성차별적 세계관은 더더욱 현실 적합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집밥 백선생>의 성공은 변화한 세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엄마주의자’들이 엄마의 손맛 타령을 한다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는 생존을 삶으로 바꾼다. 다 큰 어른들이 엄마 집밥 타령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 부끄럽다. 많은 남자들이,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스스로의 삶을 가꾸어나가면 좋겠다.


입력 : 2015.07.12 21:23:15 수정 : 2015.07.12 21:24: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122123155

2015-06-14

[별별시선]페미니즘을 위하여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이 주제로 등장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요?’ 하는 사람들 말이다. 경험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입력 : 2015.06.14 20:42:23 수정 : 2015.06.14 20:45: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덧붙임1: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 공개했을 때만 해도 '모든 페미니즘이 옳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2016년 7월 현재,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라고 주장한 이 글의 관점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메갈'을 타자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은 "#내가메갈이다"라고 해쉬태그를 달아, 그러한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덧붙임2: 내가 편집부에 보냈던 원래 제목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2016/07/29)

2015-05-17

[별별시선]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투쟁

▲ “법적으로는 미성년자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 미성년자 취급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인생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20대 논객’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2010년에는 뒤늦은 입대를 했는데, 제대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20대가 아니므로 ‘20대 논객’ 꼬리표를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20대’를 위한 지면은 ‘2030’을 위한 것으로, 혹은 청년세대 전체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이등병이 예비역 병장 되듯 나는 20대 논객에서 청년 논객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서 청년을 29세까지로 한정하자 30세를 넘긴 미취업자들의 반발이 쏟아진 사례를 생각해보자. 결국 대상 연령을 34세까지 늘리면서 불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대체 몇 살까지가 ‘청년’인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다 컸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이다.

여기서 ‘미성년자 취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들은 취업준비생이거나 갓 취업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인정된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은 지금도 수없이 연구되고 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디까지나,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미성년자에 불과하기에,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있을지언정 그들에 ‘의한’ 대안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청년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는 경우가 문제다. ‘착한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든다. 젊은이들의 반발은 공포와 괴담에 휩쓸린 비이성적 여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일단 소득대체율부터 50%로 못박아야 한다고 야권은 요구했다. 적잖은 청년들은 반발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보수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린다 해도 당장의 노인 빈곤 문제와는 무관하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 진보 세력은 세대 간 연대니 공동체의 의무니 하는 원론적인 정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은 복지예산 비중이 너무 낮은 나라다. 또한 지나치게 많이 쌓인 연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주가 방어에 쓰임으로써, 결국 저소득층의 돈으로 자산시장을 지탱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야권은 ‘2060년쯤 되면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쟁여둔 곶감은 자신들이 다 빼먹는다는 전제하에, ‘그때까지는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청년들이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08년 이후 언론 지면에 등장한 젊은 논객들에게는 나름의 자체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가시화하되 기존의 진보적 가치, 조직, 여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논객들뿐 아니라 청년층 전반의 지배적 기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토록 ‘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당장은 보답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진보 개혁 세력에게 좋은 것이 청년에게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청년들 또한 진보 개혁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다. 늙은 진보의 편에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대신,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립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감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72109495&code=990100&s_code=ao122

2015-04-19

[별별시선]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통령제를 택한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국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 때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다. 누군가가 행정수반이면서 동시에 국가원수라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계몽주의자들과 미국 헌법의 작성자들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립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만, ‘민주주의임에도 선거로 왕을 뽑는다’는 대통령제의 근본적 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대통령제만의 결함이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하거나, 세습된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에도, 모든 국가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경우,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이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인 바로 그날, 박근혜는 팽목항에 들러 문자 그대로 ‘쓱 둘러본’ 후 다시 차량에 탑승하여 청와대로 발길을 옮겼다. 만약 청와대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족들과 사전에 성의껏 만남을 갖고 일정을 조율했다면, 팽목항 분향소가 임시 폐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먼 길을 달려온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혹은 박근혜를 ‘모시는’ 청와대는, 그런 결과를 애써 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단둘이 만났고, ‘국정 현안’을 논의한 후, 중남미 해외 순방에 나섰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해외 순방 중이다.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국가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자격을 지닌 단 한 사람이다. 거대한 참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날 이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국민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국민이 대한민국에 손가락질하면 자신의 왼뺨과 오른뺨을 모두 대주어야 할 사람이다. 설령 사고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책임이 전혀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순방 중이다. 그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임시로 권한을 대행하게 될 국무총리는 현재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은 겹겹이 버스로 차벽을 세워둔 전경들에게 가로막힌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러운 경찰의 경고 방송과 물대포뿐이다.

이 국면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현장에서 물대포를 같이 맞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물대포를 맞지 않고 추모 행사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와의 입장에서 균형자 노릇을 해야 한다. 청와대로 흥분한 시민이 뛰어들어올지 모른다고 겁내는 정부와, 캡사이신 최루액에 눈물 흘리는 국민들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과 정치적 명운을 걸고 이들을 다독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감을 느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박근혜가 내팽개치고 가버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났고, 국무총리가 검찰의 수사 대상인 지금, 상징적 군주이며 국민의 구심점인 ‘대통령’ 자리는 사실상 비어 있다. 이럴 때 어떤 정치인이 정부, 경찰, 세월호 유족, 시민들을 설득해 광화문에서 평화적으로 추모 행사가 진행되는 장면을 이끌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국민들은 아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진정한 ‘대통령’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김무성과 유승민, 문재인, 박원순 등에게 모두 열려 있는 정치적 기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표류하는 대한민국은 그런 선장을, 책임지고 비난을 감수하며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192042255&code=990100&s_code=ao122

2015-03-22

[별별시선]밥이 공부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발언이다. 무상급식이냐 의무급식이냐,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 등으로 해묵은 논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준표의 발언이 지니고 있는 더 큰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43억원의 무상급식 지원비를 서민 자녀 지원사업에 투입한다는 것이 홍 지사의 입장이다. 그런 그가 ‘공부’와 ‘밥’을 대비시킬 때, 과연 그 ‘공부’는 무엇인가? ‘개천의 용’이 사라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노라는 홍 지사.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한 자신의 ‘휴먼 스토리’를 슬며시 포개어 놓는다.

요컨대 홍준표에게 ‘공부’란 남을 이기는 공부, 남보다 더 높은 시험성적을 얻어내어 판검사 되는 공부, 그래서 ‘개천’ 출신들이 ‘용’되어 개천을 탈출하기 위한 공부인 셈이다.

왕년의 학생 홍준표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도 붙으면 속된 말로 ‘팔자 바꾼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입시제도가 턱없이 복잡해진 탓에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하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루트로 명문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역균형선발로 대학에 들어오면 ‘지균충’,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하면 ‘기균충’, 학생들은 끝없는 차별에 부딪힌다. 명문대 입학했다고 어깨 쭉 펴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명문대 나온 취업준비생이 될 뿐이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홍준표는 여전히 개발독재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새마을노래를 들으며 굶주린 배를 안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명문대 가고 판검사 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개천의 용’으로서, 20세기의 가난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과연 그 20세기 ‘개천의 용’ 모델은 지금까지 유효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배고픔을 참고 공부해서 명문대 가고 사법시험이나 기타 취업 관문을 통과하면,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나는 나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부질없는 짓이며, 따라서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에 대해, 그 교육을 통해 배분되는 직업들 사이의 소득 형평성에 대해, 각 가구의 자산 불평등에 대해 총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학교 교육과 국가고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무상급식을 철회하며 ‘공부해’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학생들이 희망을 느낄 성 싶은가?

‘개천의 용’을 위한 공부, 한 사람의 승자를 위해 아흔아홉 명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홍준표가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무상급식 발목잡기’에 나섰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개천의 용’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공부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아도취적이기도 하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계약서 쓰는 법, 노동3권 보장받는 법,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지키는 법, 협상하고 합의하는 법 등 기존의 교육 과정에서 무시되었지만 실은 반드시 필요한, ‘내 밥그릇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밥 먹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그렇다. 이제는, 밥이 공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05&code=990100&s_code=ao122

2015-02-22

[별별시선]우리의 명예를 찾아서

“연대는 설악산 소탕작전을 교대하고 휴식하는 사병들을 위해 이 굴 속에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놓고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면 되었다. 굴 속은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비닐 우비의 베드시트를 덮은 침대이다. 가마니를 드리운 굴 문 앞에는 언제나 병사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리영희.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위 문단은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책 <역정>의 198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저 문단에서 인용된 ‘시설’은 국군이 운영하던 것이다. 국군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 놓았다. 그 과정에 대해 리영희는 별다른 설명을 붙이고 있지 않다. 그렇게 ‘데려다 놓은’ 여자를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면 되었다”.

“전쟁 중의 이야기인데 적이 있는 전선에 가기 위해서 ‘코코포’라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는 반드시 삐야(ピ-屋)가 있다. 삐야라는 것은 위안소를 가리킨다.” <게게게의 기타로> 등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일본 호러 만화의 거장 미즈키 시게루의 회고 만화에서 인용한 대사다. ‘삐’는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만, 작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많은 남자를 한 명의 여자가 처리하는 것이다. (중략) 병사들도 지옥에 있었지만 이건 지옥 그 이상이 아닌가, 라고 화장실로 나온 조선삐를 보고 생각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무기를 손에 들고 북한과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가 남겨놓은 수많은 악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리영희가 증언하는 바,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하는 은전”이 대표적이다.

한국군은 일본군이 하던 그대로 위안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본군의 위안소에는 “일본삐” “나와삐(오키나와 출신)” “조선삐” 등이 있었던 반면, 한국군의 위안소에는 같은 한국인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다.

2015년 2월17일. 대한민국의 법원은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청구를 받아들여 “책 내용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광고 등을 할 수 없다”는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의 몇몇 구절이 종군위안부를 성매매 여성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이다.

독자의 양심에 질문을 던져보자. 리영희가 묘사한 한국군 위안소는 과연 정당한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올 때, 설령 그 여성들을 강제로 납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사들이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고 해서, 여성들이 수많은 남자들의 성욕 해소 대상이 됨으로써 심각한 학대를 당한 사실 자체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소에서 설령 ‘조선삐’를 폭력적으로 납치해오지 않았거나, 그들에게 경제적 대가를 지불했다 한들,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이 갑자기 아무런 비난을 받을 수 없는 일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강제로 납치한 게 아니니 문제 없다, 돈 줬으니 된 것 아니냐’는 것은 일본의 극우들이 일본군 위안소를 부정할 때 동원하는 논리다. 그러한 억지주장에 맞서는 해법은 ‘돈을 받지 않았다,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제로 납치당한 사례가 많건 적건, 금전적 보상이 있었건 없었건, 국가가 여성을 전쟁터에 동원하여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인권 침해’라는 입장을 단단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여성 인권을 짓밟은 파렴치한 전쟁범죄다.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는 일본의 극우와 맞서면서 동시에 일본 및 전 세계의 양심적 세력들과 손을 잡을 수 있으며, 대한민국이 스스로 저지른 여성 인권 학대에 대해서도 올바른 반성과 재발 방지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명예를 되찾길 희망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22034055&code=990100&s_code=ao122

2015-01-25

[별별시선]네 최고 존엄에 침을 뱉으마

“내 좋은 친구인 가스파리 박사가 만약 내 어머니를 욕한다면, 그는 주먹질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은 도발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모욕하거나 희화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발언이다.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신앙심 역시 존중받아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가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우리는 이와 같은 의견을 숱하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그들이 테러범이 되도록 만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타인의 종교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악의 씨앗을 뿌린 서구 제국주의가 더 나쁘다 등등….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주장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 첫 번째이다. 이것을 ‘가치 상대론’이라고 하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타인이 소중히 하는 무언가를 침해할 경우, 물론 그래도 테러는 나쁘지만, 이른바 ‘원인 제공자’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 두 번째일 것이다. 이것을 ‘도발론’이라고 불러보자.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근거는 함께 작동한다. 앞서 인용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부터가 그렇다. 나의 것이건 타인의 것이건 신앙심은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소중하므로, 그것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주먹질’을 불러오는 도발 행위가 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발생 직후 주요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이 내놓은 성명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이슬람교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결코 성전으로 부르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지만,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발은 나쁜 행동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결국은 ‘도발론’으로 향하는 셈이 된다.

종교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이 내놓은 발언들도 같은 틀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신앙심 대신 종교의 자유 혹은 서구 사회의 소수자로서 탄압받지 않을 자유가 ‘가치 상대론’의 저울 위에 올라 표현의 자유와 비교 대상이 된다.

‘도발론’의 경우도 그렇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부터 시작해, 값싼 이주노동자를 얻기 위해 문화적 차이가 큰 무슬림들에게 취업 비자를 쉽사리 내주었던 서유럽 국가들의 역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극우적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극우 정당이 모두 ‘원인 제공자’로 간주되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여타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사실관계를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일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이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두고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든가, ‘종교적 심성을 도발하지 말라’ 같은 말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광경을 보면,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명백히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 어머니를 욕하면 주먹질을 각오하라”고 농담처럼 말할 수 있었지만, 불과 500여년 전의 프랑스인들은 바로 그런 이유를 들먹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벌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테러범들은 명백히 그들이 믿는 신과 그 신의 말씀을 가져다준 예언자의 이름을 외치며 범행을 저질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한국의 ‘샤를리 에브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학살 앞에서 애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장막 너머의 신성한 권력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만큼의 시민적 권리를 발견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수많은 선각자들이 많은 것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신성불가침의 최고 존엄’과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인류 진보의 역사는 종교와 신앙과 권위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온 역사다. 그 희생과 헌신을 배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도 샤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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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8

[별별시선]‘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넘어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1988년 10월로 돌아가보자. 그해 10월8일 한 젊은 범죄자가 일당들과 함께 호송 중 탈출했다. 그는 560만원을 훔쳤는데 새로 도입된 보호감호제 때문에 징역만 17년에 10년의 보호감찰 처분이 덧붙었다. 560만원을 훔쳤는데 감옥에서 27년이다. 반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밝혀진 것만 수십억원에 달하는 사기 및 횡령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고작 2년 정도 옥살이를 한 후 풀려났다.

절도는 타인이 점유하고 있는 재물을 훔치는 것이고, 횡령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재물을 훔치는 것이다. 두 범죄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도둑질이다. 하지만 1988년의 대한민국은 560만원을 훔친 사람에게 27년간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명령하면서 수십억원을 훔친 사람은 고작 2년 만에 그 죄를 사하여 주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에서 터져나온 절규였다.

‘지강헌사건’이 벌어진 후 벌써 26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느리지만 분명 우리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회장님’들은 얼마를 횡령하고 무슨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배임을 저지르건, 거의 무조건적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음을 떠올려보자. 당시에는 ‘기업인 가석방’ 따위는 논의의 대상도 아니었다. 애초에 ‘회장님’들이 감옥에 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갇혀 있는 ‘회장님’을 가석방해야 한다는 여론몰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2014년의 대한민국은 1988년보다 분명 법 앞의 평등이 조금씩이나마 실현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잠시 눈을 감옥 밖으로 돌려보자. 굳이 남의 돈을 훔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늘 겪으며 살아간다. 교통사고의 과실 비율 계산 및 수리비 산정 방식 때문에 그렇다. 고급차를 탄 사람과 소형차를 탄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는데, 과실 비율이 9 대 1로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고급차를 탄 사람이 9배는 더 잘못했지만, 그의 차는 고급차이기 때문에 수리비가 5000만원이고, 소형차는 100만원이다.

이 경우 우리의 도로교통법은 총 수리비 5100만원을 9 대 1로 분할한다. 소형차 운전자는 사실상 본인 잘못이 매우 경미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차 수리비 100만원뿐 아니라 상대방 차량의 수리비 410만원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도로 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할 수 있다. 값싼 차를 타고 다니면 설령 내 과실이 매우 적더라도, 비싼 차와 충돌했을 경우 덤터기를 쓰게 된다는 말이다.

도로 위의 법이 이런 식이니, ‘운전대만 잡으면 성격이 확 달라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내가 고급차를 몰고 있다면 값싼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 앞에서는 운전을 좀 함부로 해도 된다. 사고 나면 가난뱅이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형차 운전자는 고급차 운전자 앞에서 잘못도 없는데 쩔쩔매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지금껏 우리는 이토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인 가석방’에 반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시민사회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도로 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조장하는 교통사고 과실 산정 방식의 변화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선진국은 교통사고 발생 시 두 운전자 중 조금이라도 과실이 큰 사람이 수리비를 전액 부담하는, 이른바 ‘51% 룰’을 적용한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두 적극적으로 방어 운전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교통 법규를 알아서 잘 지키는 가운데 갓 운전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은 경찰과 공권력에 대한 존중심을 익힌다.

단지 감옥에 갇힌 ‘회장님’들이 형량을 다 채우고 나오는 것을 넘어서, 일상적으로 타인과 부대끼는 도로 위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하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법 앞의 평등과 예측 가능한 절차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2014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기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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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30

[별별시선]최장집, 김상률, 통합진보당

“김일성은 국내의 민중적 지지 기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대남한 강경 정책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지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신감 등 모든 대내외적 조건들이 압도적 우세에 있었다. 그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최장집의 책에서 인용된 문구다. 당시 ‘월간조선’은 이 ‘발견’을 대서특필하며 최장집을 청와대에서 쫓아냈다. 뒤이어지는 문장이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오판을 유도하였던 요소는 한반도의 국내 정치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치적 조건, 즉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던 냉전 체제의 성격과 그곳에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의 힘이었다”라는 것은 그 시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문장 하나, 표현 하나를 꼬투리 잡아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소유는 열강에 에워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민족 생존권과 자립을 위해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현재 정당해산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핵심 인사가 내뱉은 말이 아니다. 김상률 신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2005년 저서 <차이를 넘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적어도 인용된 문장의 ‘수위’만 놓고 보면, 1998년의 최장집이나 2005년의 김상률이나, 비슷한 말을 했다. 오히려 김상률의 경우가 더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지나간 일이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니 말이다. 이에 고무된 보수 언론들은 앞다투어 <차이를 넘어서>를 입수한 후 ‘문제 발언’들을 더욱 캐내기 시작했다. 최장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후 맥락 없이 툭툭 잘려나간 문장들이, 신문 지면을 수놓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 전략적 판단에는 역지사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 입장에서야 당연히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려 들 테니 말이다. 문제는 저 인용된 문장이 과연 북한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정치적 입장은 다르다’는 것인지, 언론 보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1998년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인지, 비판하기 위해 남의 말을 적어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실제로 동의하는 정치적 주장인지 아무런 구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인용된 문구가 언론 지면을 장식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니 어떻게 저런 빨갱이가 청와대에 들어가나’라는 대중의 비난 어린 손가락질이, 이번 경우에는 대통령 쪽으로는 결코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선고를 앞두고 있다. 나 너 우리가 ‘종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선고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북한이라는 ‘적’을 상정해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군사독재 국가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것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국면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된다면 우리는 1998년 이전으로 후퇴한다.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청와대에 ‘종북’ 의혹을 받는 수석이 임명될 수도 있는, 2014년 이후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최장집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설명하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김상률은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책에 적힌 내용은 에드워드 사이드 및 미국 좌파 지식인들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니 말이다. 통합진보당 역시 그들 스스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 존속되어야 한다. 그들의 시대착오적 대북관을 심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이며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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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별별시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어린 시절의 내게 신해철은 넥스트의 신해철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쓰고 부른 바로 그 신해철이었다. 그는 동성동본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가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북한을 향해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자고 노래했고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리들을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있는 공교육을 비판했다. H.O.T.의 데뷔곡은 ‘전사의 후예’인데, 학교폭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아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라고 노래한다.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는 이른바 ‘기성세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90년대는 ‘문화 전쟁’이 한창이었다. 연세대학교의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직을 잃은 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무한궤도’를 통해 혜성처럼 데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초 사범이라는 딱지를 달게 된 신해철은 1995년에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한 송가를 불렀다.

신해철의 저항은 구체적이었다.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식의 추상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성동본 연인들의 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한국 사회는 “대마가 가지고 있는 환각 증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과장함으로 인해서 예술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고 인간 쓰레기로 만든다”고,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목청을 높였다. 가수로서, 또 라디오 DJ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두 번째 이름으로 삼았다.

그의 느닷없는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당시 신해철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처럼 낭만적인, 요즘 말로 ‘중2병’스러운 가사는,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반감과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음미되어야 한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로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다는, 철들지 않는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동성동본 연인을 앞에 둔 누군가로 상정하고는 “아직 단 한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사회와 대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번 구체적인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동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 비록 학생일지라도 학교에서 ‘사랑의 매’를 맞지 않고 싶은 욕망. 비록 법으로 금지된 대마초를 흡입한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멸시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 소년의 꿈과 희망은 현실의 벽 앞에 자주 부딪쳤다. 우리는 언젠가 그 벽이 깨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그는 얄리를 따라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1997년 7월16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의해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법 제809조 제1항이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승리를 제외하고 나면, 신해철이 지지했던 구체적인 욕망들은 아직도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한 표 차이로 간통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미 합법화 혹은 비범죄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마의 재배와 사용이 엄격하게 처벌되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 보호는 학부모가 선출하는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과, 그 개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나라다. 공개적으로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김조광수 감독이 제출한 혼인신고서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죄다. 모든 사랑은 합법이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995년의 신해철이 만들었던 노래를,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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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별별시선]성역 없는 진상규명, 진상 없는 성역규명

세월호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하면서 이른바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 초기부터 넓은 의미에서 야권과 적잖이 다른 입장을 표명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결말 앞에 한없이 착잡한 심정이다.

야권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세월호특별법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 중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논의의 쟁점이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 야권의 설명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미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성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을 수사하고 기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특검이 됐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됐건, 수사를 하고 기소를 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많은 경우 공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러므로 세월호특별법에 부여하고자 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성역’을, 다시 말해 청와대를 겨냥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까지 왔으니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자. 굳이 범위를 더 넓히자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정도가 기존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셋째, 그렇다면 야권은 세월호특별법을 통해, 청와대를 수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요구를 상대방이 받아줄 턱이 없다. 설령 야권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모두 압승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선거에 졌기 때문에 세월호특별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기보다는, 통과시킬 수 없는 법을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에 선거에서 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전국 단위의 지방선거라 해도 지방선거는 어디까지나 지방의 살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선출하는 선거다. 제아무리 규모가 커도 재·보선은 국회의 빈자리를 채워넣기 위한 선거다. 하지만 야권은 이 각각의 선거에 세월호특별법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뉘앙스를 한껏 깔았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성역’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여권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세월호특별법’을 ‘박근혜 특별법’쯤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어느새 세월호에서 박근혜로 넘어가 버렸다. 닳고 닳은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임’을 빼앗긴 셈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내릴 수 없는 배>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호가 침몰한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사람들은 여객선이 아니라 박근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27년 된 노후 선박 바캉스호가 세월호 참사 다음날 안전검사를 통과해 운항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특별법’에 정신이 팔려 ‘세월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의원을 포함해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단식까지 해가며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진상 없는 성역 규명’뿐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배에 대해, 그 배의 침몰 원인 등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이번 세월호 정국을 통해,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이 한국 사회의 성역으로 올라섰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인신공격과 비방을 삼가라고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훈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스스로를 성역으로 규정하는 성역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구시대적 사고방식에 맞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과 시민들의 몫이다. 가족과 친지를 잃고 형언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 것부터가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을 앞세웠던 야권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통렬한 반성과 자기 비판을 요구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52105485&code=990100&s_code=ao122

2014-09-09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지금까지 쓴 칼럼 및 서평들

2014-04-20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http://basil83.blogspot.kr/2014/04/blog-post.html

2014-05-06
[북리뷰]초대형 참사는 작은 사고로부터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찰스 페로 지음·김태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html

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_20.html

2014-05-2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http://basil83.blogspot.kr/2014/05/1.html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http://basil83.blogspot.kr/2014/07/blog-post.html

2014-08-03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3.html

2014-08-25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html

2014-08-26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함인선 지음·마티·1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26.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http://basil83.blogspot.kr/2014/08/28-28.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뉴욕타임스’에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그 제목은 “In Ferry Deaths, a South Korean Tycoon’s Downfall”(여객선 사고, 한국의 한 부호의 몰락)이었다. 200개에 육박하는 댓글 중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고, 한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도 화제가 됐다. “북한은 공산주의의 문제를 보여주고, 남한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물론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가 한국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을 폭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문제의 기사를 읽어보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목포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세월호에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

세월호가 보여준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한국선급은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개조했을 때, 그것이 안전의 기준선을 넘지 않았는지 제대로 감독했어야 한다.

한국해운조합은 세월호에 실린 화물이 너무 많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지나치다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단체다. 만약 지금까지 밝혀진 대로, 세월호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진 이유가 제대로 묶여 있지 않은 컨테이너 때문이라면, 그 책임 중 적지 않은 부분이 한국해운조합에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세월호라는 배는 인천에서 제주도까지의 항로를 수도 없이 오갔다. 세월호 참사는 그 수많은 항해 중 어떤 하나가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다. 적지 않은 분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어떤 음모, 특히 정권 차원에서의 음모를 직감하고 있는 듯하지만, 배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이 참사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이 감수했던 ‘위험’의 범위 안에 속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리 기업을 감독해야 할 공적 프로세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선급은 사실상 선주들의 이익단체이고, 한국해운조합의 양심적인 직원들은 문제를 고발할 수 있을 만한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배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외부의 관리·감독 없이, ‘셀프 감시’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안여객선의 안전 기준이 실제로 점점 후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일명 ‘윤 일병 사건’에서 보게 되는 모습이 그와 같다. 현 법체계상, 군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은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법권도 행사한다. 그러니 본인이 지휘하는 부대가 ‘이상무’이기를 바라는, 그렇게 무사히 전역해서 연금을 수령하는 편안한 삶을 꿈꾸는 지휘관들은, 내부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고 죽이는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감추려 든다.

한국선급으로서는, 모든 일이 무사히 잘 돌아간다고 가정할 경우, 세월호의 증축과 개조를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28사단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군부대의 지휘관들도 내부의 가혹행위를 그저 덮어두고 쉬쉬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이유로 ‘참사’가 되어버렸다. 공식적인 지휘 통제권을 가진 누군가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그 피해는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이 승객들에게 제대로 탈출 안내 방송을 했더라면, 그리고 윤 일병이 소속되었던 의무대의 부사관이 가해자 병장의 가혹행위를 저지했더라면 말이다.

이후의 전개도 비슷하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작 한국의 연안여객선 관리의 복마전에 대한 조사 및 처분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듯,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군은 자신들이 가진 재판권을 전혀 내놓을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의 접점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그들이 ‘내부’에서 행사하던 관리·감독의 권리를 ‘외부’로 끌어내야 한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햇볕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2014-08-03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일종의 교통사고인가?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에 이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역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및 피해자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언론, 정치인,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발언에 대해 격렬한 반대의 뜻을 표하고 나섰다.

물론 그러한 발언이 나온 맥락과 시점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의 여권 인사는 정부와 여당으로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다. 내게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무릅쓰고, 감히 물어보겠다. 세월호 참사는, 그렇다면, 교통사고가 아닌가?

경향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김혜진 국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많은 이들이 분노한 건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속에서, ‘교통사고’는 ‘구조 실패’보다 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선행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가 향후 방지해야 할 것은 사고 그 자체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이미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망자와 생존자, 실종자와 그 모든 이들의 가족 및 친지들이 겪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고통을 그냥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 잔인한 현실이 존재한다. 이미 벌어진 비극으로서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동정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저질러진 일, 이미 벌어진 비극 앞에서, 우리의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세월호의 침몰과 그로 인한 대량의 인명 손실을 그저 ‘세월호의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런 위험을 끌어안고 있다.

‘세월호는 일종의 해상 교통사고’라는 발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발한 것은 그런 면에서 최선의 대응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교통사고’처럼,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살다 보면 우연히 겪기도 하는 일이, 이렇듯 참사로 비화될 수 있다고 응수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참사’는 과거의 사고이며, 희생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이 겪은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확률적으로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며, 현재와 미래의 사고이다.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누가 놀러 가라고 했냐, 누가 죽으라고 했냐’고 막말을 퍼붓는 어르신들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확률상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즉 ‘교통사고’라는 프레임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논의의 폭을 사회 전체로 끌어올릴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라고 누군가가 어떤 맥락 속에서 ‘막말’을 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에게 ‘너는 교통사고 안 당할 것 같냐’고 ‘막말’을 되돌려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럼 그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정부가 뭘 했냐’고 쏘아붙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미 벌어진 비극을 놓고 더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끌어올리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또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시민운동가 랄프 네이더는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를 통해,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 자동차가 교통사고의 위험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광범위하게 규합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움직임이다. 누군가가 이미 겪은 ‘참사’에서, 너와 내가 당할지 모르는 ‘사고’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는 것 말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른다 해도 정부의 잘못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프레임 속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가 겪었고, 겪을 수도 있으며, 최선을 다해 예방해야만 하는, 그런 비극적인 교통사고인 것이다.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원인’을 찾느냐 아니면 ‘범인’을 찾느냐에 따라 근대인과 전근대인의 경계선이 나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적인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하려 한다. 반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와 맞닥뜨리면 원인이 아닌 ‘범인’을 파악하고 솎아내는 일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느냐 하는 것, 사고의 ‘이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가’ 세월호 침몰을 만들었는가, 침몰 원인이 아닌 ‘범인’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비난의 화살이 날아다니는 경로가,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는 눈에 띄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사고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거대 함선 속에 뛰어들어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것은 해경의 명백한 직무 태만이라는 책임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중적 차원에서 보자면 온 국민이 격양된 상황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세월호 침몰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채, 국가정보원부터 청와대까지 온갖 주체가 개입한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1987년 항쟁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터졌듯, 그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특정 사건으로 돌려놓기 위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 가운데 특히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이런 입장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작 세월호 사고가 난 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국가정보원에서 이렇게 대통령에게 불리한 조작 사건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둘째, 비행기가 폭파되자마자 폭파범 ‘마유미’를 체포해 국민 앞에 사냥감처럼 전시하였던 1987년과 달리, 지금은 멀쩡히 국내에서 도피 중인 것으로 여겨지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잡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일단 유병언의 신병을 확보한 다음 ‘거사’를 치렀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국가정보원이 지금처럼 막대한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만약 세월호 침몰이 어떠한 종류의 정치 공작이라면, 이런 공작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김어준뿐 아니라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침몰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언론인의 의무라는 말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조사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침몰은 어떤 사고였는지, 우리는 최소한의 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 단원고 학생들을 해치고자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사고인가? 아니면 어떤 대단히 큰 규모의 해상 운송 사고인데, 그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대단히 많을 뿐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면 우리는 ‘원인’을 밝혀야 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그리 후련하고 속 시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범인’보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세월호 승객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또한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범인’이 누군지 묻고 따지는 그런 식의 음모론에 대해, 성숙한 시민사회의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사고를 사고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올바른 대응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062042245&code=990100&s_code=ao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