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주간경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주간경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6-03-03

[북리뷰] 정치의 계절, 지식인의 역할을 묻는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이학사, 8천원


내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식인이라니, 그런 구닥다리같은 용어를 사용하냐'며 되려 핀잔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나눈 후 문득 궁금해졌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진정 오늘날 효용을 다한 것일까. 20세기의 중후반부, 21세기의 초반부와 달리, 2010년대에는 그 단어가 그저 오작동할 뿐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르트르 뿐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르트르가 일본의 도쿄와 교토에서 1965년 9월과 10월에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물론 사르트르 특유의 실존주의적, 다시 말해 휴머니즘적 관점을 투영하여 재해석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이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강연을 염두에 둔 원고였던 탓에 집중해서 읽으면 전제 지식이 없어도 어렵잖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첫째 날 하이데거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에 대해 사람들이 쏟아붓는 불만과 비판을 종합하여,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12쪽)이라는 가설적 정의를 끌어낸다. 가령 드레퓌스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레퓌스라는 한 군인과 군 참모부의 갈등이다.

그러나 자칭 타칭 지식인들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 중 군인은 없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 시를 잘 짓는 사람,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과학자 등이 '참견'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얻은 명망을 바탕으로, 그러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야의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사람들이다.

강연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지식인의 기능"에서 사르트르는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도전한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르려고만 한다면 그는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진정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64쪽)

사르트르는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이러한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편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지 않더라도, 보편성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그의 말은 여전한 울림을 지닌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호남 사람, 이주민 등 다양한 이름 하에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해석'은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의 존재를 놓고 볼 때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사르트르는 오직 글을 쓸 뿐인 작가를 다른 분야의 지식인과 다르게 여긴다.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보편성을 창조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와 갖는 진정한 관계는 비-지식으로 남는 것"(139쪽)이라는 말은, 작가의 작품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그 어떤 '보편성'도 기대하지 않는다. 화끈하게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고 편을 드는 것이 더욱 정당하다는 인식 탓이다. 한때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보편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의 편에 서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풍토가 되살아나기를 희망한다.


2016-02-28

[북리뷰] 지금 당장 전국 고등학교에 보내야 할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창비, 9천8백원.


우리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마치 욕설이나 비하의 표현처럼 사용되기도 하는 그런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범위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만큼 넓어진다.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개그맨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엠마 왓슨이 유년기를 보낸 영국에서도, 그리고 그러한 서구 제국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했던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도, 여전히 페미니즘은 '불편한 단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열네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오콜로마의 집에서 무언가에 대해 언쟁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책에서 배운 설익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지요. 논쟁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한참 주장하고 또 주장했더니 오콜로마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기억납니다. "있잖아, 너 꼭 페미니스트 같아."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말투에서 알 수 있었지요. "너 꼭 테러 지지자 같아"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거든요.(12쪽)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는 것, 이것은 지구 어디에서나, 인류의 절반을 구성하는 여성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겪게 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멸칭은 때로, 페미니즘을 제외한 다른 논의의 지점에서 스스로의 진보성을 주장하는 남자들에 의해 발화되는데, 이 또한 마치 동전의 뒷면처럼 세계 어느 곳에서나 관찰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 전혀 반대하지 않을 사람들이, '우리는 이 사회에 현존하는 여성차별에 대해 맞서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나이지리아의 소설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TED 강연 대본과, 그 외 두 편의 에세이를 합쳐 묶은 작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필요에 의해 한 번 읽고, 이 서평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다. 두 번째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소감이 같다. 표제작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오늘날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해야 하는 보편적 인식의 최소한이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능란하게 꿰어내는 본문을 지나 곧장 결론으로 향해보자. "그리고 오래전 그날 내가 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아무리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부정적 함의를 덧씌운다 한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변할 수는 없다. 스스로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자신이 억압의 주체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현대 사회의 기본적 공리인 '모든 사람의 평등'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스웨덴어판은 2015년 12월 출간되었다. '스웨덴 여성 로비'라는 단체는 직후 이 책을 스웨덴의 모든 16세 학생들에게 선물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과 달리 스웨덴은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는 나라가 아닌 만큼, 이 책은 스웨덴의 고등학생들이 가장 널리 읽는 단 한 권의 책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바로 이 책이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 역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주변에 권하기를,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활발한 독서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016.03.01ㅣ주간경향 116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1-28

[북리뷰] 우리 주변의 제제들을 위하여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동녘, 1만원.

가수 아이유의 노래 'Zeze'로 인해 촉발된 논란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니, 적잖은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 제제에게 퍽 깊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다시 읽어보았다.

적어도 이 서평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이 책의 줄거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브라질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제제라는 소년이 살고 있다. 나이는 여섯 살, 학교에 갓 다니기 시작한, 한창 말썽을 부리는 나이다. 그런데 역자가 붙인 주에 따르면, 제제의 본명은 주제(요셉의 포르투갈식 발음)고, 그의 성은 바스콘셀로스다. 다시 말해 작가와 이름이 같다. 자전적 소설이다.

제제는 말썽을 부리고 가족들에게 늘 얻어맞는다. 가벼운 체벌을 당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빨이 부러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맞는다. 신체적 폭력만이 전부가 아니다. 제제의 아버지는 실업자가 된 상태고, 가족은 가난에 시달린다. 여섯살 소년이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담배를 사 주고 싶어서 구두통을 둘러매고 거리로 나선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단의 꽃병에 꽃을 꽂아두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이 전혀 부당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요컨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60년대 상파울루 인근 브라질의 모습은 어느 시점까지의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한국은 기적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아버지의 실직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아이들을 심하게 두들겨 패는 나라였던 것이다. '구두닦이 소년'만큼 특정 연령대에게, 향수로 포장된 가난의 기억과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도 그리 흔치 않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유독 이 소설만큼은 모국 브라질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의 인기를 한국에서 누리고 있다. 반면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놀랍지 않은 일이다. 20세기 중후반부의 한국인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늘 두들겨 맞고 있는 가난한 소년 제제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가 트위터에서 '뽀르뚜가는 밍기뉴와 마찬가지로 제제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친구'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작은 소동이 벌어졌던 이유도 아마 그런 것 때문일 것이다. 제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줄 수 있다는 부유한 포르투갈 사람이 가난한 동네에 들락거리는데, 두 사람은 "우리 사이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자고 굳게 약속"(190쪽)했고 그 약속이 끝까지 지켜진다. 또 다른 상상의 친구인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가 잘려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시점과, 제제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교통사고로 뽀르뚜가가 '사라지는' 시점이 일치하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제제는 어른이 된다. 하나이며 둘인 상상의 친구를 떠내보내면서 말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소년의 성장과 눈뜸에 대한 빼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을 바라보는 20세기의 한국인과 21세기의 한국인의 감상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제제가 겪는 고통만큼이나 비극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폭력과 학대 속에 혼자 커나가며 상상의 친구로부터 가까스로 위안을 찾는 제제의 이야기가 '평범한 소년의 성장담'쯤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픈 과거는 문학의 몫으로 남겨두자. 우리 주변에 아직도 '제제'가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2016.02.16ㅣ주간경향 1163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1-14

[북리뷰] 남자가 페미니즘 서적을 읽는다면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현실문화연구, 8500원

'아직 우리의 수준은 근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섯불리 탈근대를 논한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무렵 많은 이들이 비판해왔다. 여성주의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던 지난 해, 그리고 올해에 이르기까지, 일부 지식인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논하는 광경을 보는 내 심정이 바로 그렇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다각도로 차별당하고 있다는 것을, 프라이버시부터 생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층위에서 안전을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새해가 밝아온 후에도 똑같은 사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개탄을 넘어 계몽으로 나아가보자. 심사숙고 끝에 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고전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꺼내들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적어도 말 한 마디라도 덧붙이고 싶은 남자가 있다면, 가장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것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미국에서 1985년 처음 출간되었다. 2001년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1995년에 출간된 개정판이다. 10년이 지난 후 개정판이 나왔고, 그 후로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운동가로서의 나는 이 책이 아직도 읽히고 있다는 데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독자들 대부분이 이 책의 내용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느낀다면 더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15쪽)

여기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말하는 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건 단순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가 초판을 발행한 1985년과 달리, 1995년에는 여성 뿐 아니라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페미니즘 혹은 성 정치의 논의 대상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젠더 범주 그 자체에 의문 부호를 던지는 것이 당대의 지적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은, 1985년에는 남성들이 지배하던 지성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1995년에는 다각화된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도전과 반발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6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남자에게는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가장 먼저 권하게 된다. 이 책은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여성차별의 쟁점들로 들어간다. 넓은 독자들을 염두에 둔 페미니즘 잡지 <미즈>에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의 페미니즘 이론은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그와 정 반대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도 이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 내의 다양한 입장과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을 입구로 삼는 편이 낫다. 3세대 페미니즘이 극복하려 했던 2세대 페미니즘의 논의가 무엇인지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고 나면, 여성주의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맥락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여성주의 내에도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문장을 달달 외우지 말고, 차라리 '화이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트랜스젠더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트랜스젠더: 신발이 맞지 않으면 발을 바꿔라?"를 읽는 편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실천이면서 동시에 이론이다. 실천을 위한 이론이고, 이론 그 자체가 실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론의 언어에 친숙한 남자들이 책 한 권 달랑 읽고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웃지 못할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남자들이여, 일단 구구단부터 떼고 나서 미적분을 논하기로 하자.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그 좋은 출발점이다.


2015-12-29

[북리뷰]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늦게 온다

달력과 권력
이정모, 부키, 1만2800원.

새 해가 시작되는 이맘때, 달력은 일상 속의 사물을 넘어 하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은 인위적으로 단절되고 그것이 하나의 개념들을 이루어내며, 그 개념의 내용을 보기 좋게 편집하고 구성한 사물이 바로 달력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본에 체류중이던 생화학자 이정모는 도서관에서 독일의 과학 잡지 <게오(GEO)>를 펼쳐들었다. 1999년 1월의 일이다. 새로운 천년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에 전 세계가 들떠있던 시절이다. '지난 천년은 총 며칠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본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윤년 규칙을 조합해 답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그가 내놓은 정확한 계산보다 열흘이나 적었다. "율리우스 달력과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윤년 규칙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열흘이나 틀린 것이다."(5쪽) 그 결과에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독일의 공립도서관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참고 문헌의 바다를 헤엄치며, 달력의 과학적 측면 및 그에 얽힌 사회 문화 권력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달력과 권력>이 탄생하게 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다.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로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19쪽) 정답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한 건의 살인 사건도 없었고, 그 누구도 물건을 사고 팔지 않았다. 아무도 농사짓고 밥짓고 집짓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칙령에 의거해, 그동안 사용하던 율리우스(카이사르) 달력의 오차를 바로잡고자 열흘을 통째로 빼버린 탓이다.

1582년 10월의 로마 달력에는 5일부터 14일까지가 빠져 있다. 하지만 이 달력은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다. 또는 못된 폭군이 재미 삼아 백성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달력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이 달력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달력으로, 제대로 된 달력이었다. 어쨌든 이 달력에 따라 사람들은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밤에 잠들어 다음 날인 금요일 10월 15일 아침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20쪽)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유럽의 열흘. 그것은 고대 로마부터 중세 유럽을 거쳐 당시까지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 달력의 오차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달력과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 결과 농사에 지장이 왔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춘분을 기점으로 삼아 계산하는 부활절의 날짜 또한 맞지 않게 되었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삼는 온갖 기독교 행사들의 날짜가 어그러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유럽은 제 시간을 되찾았고, 기독교를 믿는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면서, 그레고리우스 달력은 오늘날 세계의 표준 달력이 되었다.

<달력과 권력>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아쉬운 책이다. 율리우스 달력을 거쳐 그레고리우스 달력이 확정되기까지의 문화사가 책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을 차지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의 혁명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담아 만든 달력들을 소개하고 그 실패를 곱씹어본다. 그러나 이후 온갖 고대 문명의 달력들과 조선 세종때 만들어진 칠정산 등을 소개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면 책의 구성에 일관성이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력을 개혁하려던 온갖 시도들이 그 뒤를 잇는데, 그 자체는 재미있지만, 책의 탄력은 이미 떨어진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30분 늦게 밝는다. 최근 시차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달력을 만들고 공표하는 것은 결국 권력의 본질 중 하나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시간을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추는 것이니 말이다. <달력과 권력>은 이러한 주제를 다룬 첫 번째 책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과학 교양 저자들이 시간과 힘의 문제를 다뤄주면 좋겠다.


2016.01.12ㅣ주간경향 115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17

[북리뷰] 기후변화, 이제는 '회의'할 시간이 없다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세종서적, 1만6천원


2010년대에 들어서 멸종된 종(種)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온난화 회의론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들의 세력은 건재한 것처럼 보였다. 대기 중 탄소 농도와 지구의 평균 기온이 거의 확실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에 거의 모든 진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온난화 회의론자들은 태양 흑점이나 통계의 오류 등을 운운하며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받아왔던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파리에서 막을 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총회(COP21)를 보더라도 그렇다. 전 세계 195개국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 모든 나라의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면, 이제는 더 이상 온난화 회의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및 온실가스의 위험성에 대해, 늦게나마 전 세계가 눈을 떴다. 이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할 시점이다.

국내의 여론 동향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후 변화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책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던가 <쿨 잇> 같은 온난화 회의론자의 책이 더 잘 팔리는 그런 나라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인지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가 쓴 <6>을 펼쳐보자.

이 책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기온이 2˚C, 4˚C, 6˚C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15˚C씩 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목요일의 기온이 수요일보다 6˚C 높다는 것은 외투를 집에 두고 나오면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6˚C 상승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23쪽)

지금보다 지구기온이 6도 낮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빙하기라고 부른다. 지금보다 5도 이상 높았던 시절도 지질학적으로 발굴되어 있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PETM)'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PETM은 지질학적 기록 중에서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태워댄 탓에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가장 가까운, 자연의 실제 사례"(247쪽)라고 저자는 그가 참고한 수많은 과학 논문 중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절 지구는 우리가 아는 지구가 아니었다. 바다는 뜨겁고 끈적한 산성 액체였고, 해수면의 온도가 높은 탓에 엄청난 토네이도가 얼마 남지 않은 육지를 후려쳤다.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중요 항구 도시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진작에 물에 잠긴 상태다. 물론 인류에게는 지능과 기술이 있으므로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동식물들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대신 수렵과 채집 및 작은 규모의 농업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동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구기온이 평균 3도 이상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탄소 배출량을 아무리 줄인다 한들 소용이 없다. 이미 배출된 탄소가 지구 기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을 포함해 많은 곳에 묻혀있는 탄소가 더욱 배출되는, 이른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허리케인 카타리나, 2010년 러시아의 산불,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지구기온 평균 1도 상승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온난화 회의론자들에 의해 낭비된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고 여론이 형성되기를 희망한다.


2015.12.29ㅣ주간경향 115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03

[북리뷰] 그 가스등을 보라

가스등 이펙트
로빈 스턴, 랜덤하우스코리아, 1만4천800원


'데이트폭력'의 핵심은 '데이트'가 아니라 '폭력'에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이 적용되고 발현되는 양태는 다른 폭력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적으로 친밀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속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양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빈 스턴은 미국에서 20여년간 심리상담가, 교사, 우드헐리더십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온 리더십 강사 및 컨설턴트다. 그는 데이트나 결혼 등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며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가스라이팅'을 발견하고 이론화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알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또 다른 폭력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알아보자. 고전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드먼이 연기하는 젊은 가수 폴라는 나이 많은 남자 그레고리와 결혼한 후 자신감을 잃고 회의에 빠진다. 그레고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집안의 물건이 없어지고, 위치가 바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그레고리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폴라는 점점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사실인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히스테리에 빠진다. 그레고리가 서랍을 뒤지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 가스의 압력 때문에 자기 방에 켜둔 가스등은 불빛이 약해지는데, 그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결국 창밖에서 그 가스등이 흐릿해지는 현상을 목격한 형사의 증언을 통해 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접고 그레고리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괴롭힘은 성별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남자들은 이른바 '신병'으로 부대에 갓 배치될 무렵 비슷한 일을 겪는다. 뻔히 다 아는 것을 일부러 틀리게 물어본다거나, 반대로 절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물어본 후 상대가 당황하면 윽박지르는 식으로, '갈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스라이팅'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22쪽) 그 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가 로맨틱한 이벤트를 연출하는 남자? 그 남자는 상대방 여자에게 억지 감동을 뽑아냄으로써 상대방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는 남자 역시, 상대방의 가스등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하물며 그 여자를 때리는 남자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가스등 이펙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책이다. 데이트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가령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입버릇처럼 '뚱뚱하다'고 놀리는 게 어떠한 종류의 폭력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짓궂은 애정도 관계의 미숙함도 관심의 표현도 아니다. 상대방의 자아를 흔들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려는 폭력적 영향력 확장, 즉 가스라이팅이다.

이 책은 너무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본다. 책의 대부분이 피해자의 심리 분석과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의 논지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탓하기'로 향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비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저 흔들리는 수많은 가스등을 보라. 그것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이 명백한 폭력들을 우리는 지적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2015.12.15ㅣ주간경향 115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19

[북리뷰] 미셸 우엘벡이 말하지 않은 것들

복종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1만4500원

지난 1월 7일, 파리에 위치한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실이 공격당했다. 그 상처가 아물어가나 싶었던 11월 13일 다시금 대형 총기 난사 및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11월의 파리 테러에서는 총 132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을 당했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 사건이 벌어지던 날,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 현지에서 출간되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우엘벡의 친구 한 사람이 당일 IS의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은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혹은, 더 큰 분기점이 될 이번 파리 테러의 전주곡과도 같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2년의 프랑스. 소설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과, 힘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당, 그리고 모하메드 벤 아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끄는 이슬람박애당이 대선을 앞두고 3파전을 벌인다. 1차 투표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국민전선이 1위, 그리고 이슬람박애당이 2위를 기록한 것이다. 사회당은 정권을 얻기 위해 이슬람박애당과 손을 잡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들은 장관 자리의 절반, 알짜배기인 재정부와 내무부 등을 넘겨받는 댓가로, 이슬람박애당에게 교육과 결혼에 대한 권한을 넘겨준다.

교육과 결혼. 어찌 보면 비교적 사소한 것 같지만 그 함의는 실로 깊고 중대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를 만나 대화중인 프랑스의 정보 요원은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100쪽) 이슬람박애당은 대체 어떤 사회적 변화를 불러오려는 것일까?

"우선 이슬람은 어느 경우에도 남녀공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몇몇 전문과정만이 개방될 뿐이죠.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초등교육을 마친 뒤 가사교육 학교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결혼 전에 문학이나 예술 공부를 이어가고요.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죠."(101쪽)

대기업이 아니라 가족기업 중심으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낸 후 가사수당을 지급하는 등, 우리가 알던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슬람박애당은 서서히 뒤흔든다. 실업률에 시달리는 가난한 남자들에게는 자영업자의 꿈을 불어넣어주고,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부유한 남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 도입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성 로비'를 벌인다. 모든 교육 기관이 이슬람 교육 기관이 된 탓에, 개종을 하지 않으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프랑수아는 개종하고, 젊은 부인을 맺어주겠다는 약속도 받은 채, 다짐한다. "조금은 이런 식으로 몇 년 전에 내 아버지가 혜택을 입었듯,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두번째 삶의 기회가 되리라."(363쪽)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도외시한다. 중년 남자 지식인을 화자로 삼고 있으면서, 중년 남자 지식인이 어떻게 종교화, 보수화 속에서 '태평천하'를 누리는지 신랄하게 풍자하기 위한 기법이다.

<복종>은 이슬람포비아를 느끼는 프랑스 사회를 바라보는 한 위선적인 중년 남성 지식인을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각을 서사화해 담아낸 작품이다. 바로 그렇게 이 책은 남자 대학 교수의 눈을 통해 이슬람교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 지점을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으로 남겨둔다.


2015-11-04

[북리뷰] 남성 과잉 사회? 여성 혐오 사회!

남성 과잉 사회
마라 비슨달, 현암사, 1만8천원

<사이언스>의 중국 특파원인 저자는 10대 시절을 아시아에서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중국사를 공부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비슨달의 어머니는 이혼 후 홍유라는 이름의 중국인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일종의 공동 육아 체계를 구축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마침내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꿈을 품고 말이다. "마오쩌둥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에 갈 때까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9쪽)

그가 유학 시절 목격하고, 다시 기자의 신분으로 돌아간 중국의 하늘은, 그러나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어느 교실에 가도 남학생들이 여학생보다, 자연 성비를 넘어 월등히 많은 현상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아이이자 홍유의 아이였던 나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처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12쪽)

우리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의 30대가 가장 극심하게 겪고 있는 성비 불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한국에서 성 감별 열풍이 한창일 때 첫아이의 성비는 거의 정상 수치인 104였지만 둘째의 출생 성비는 113, 셋째는 185, 넷째는 209였다. 한 부부가 딸보다 아들을 낳을 확률이 1대2를 넘어선 것이다."(50쪽) 남자는 많고 여자는 없는 사회, 남성 과잉 사회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남성 과잉 사회, 혹은 여아 집단 선별 낙태가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조명한다. 성비가 무너진 나라에서는 태아 선별 낙태 기술이 도입되기 전부터 태어난 여아를 살해하곤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하던 초기부터 발견된 바, "120만 명이 거주하는 한 정착지에서 매년 약 2만 명의 여아가 죽는 것으로 나타"(99쪽)나기도 했던 것이다. 1960-1970년대 미국의 대중들을 사로잡은 '인구 폭탄'에 대한 공포가 그 위에 불을 붙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식물학자 폴 에를리히가 쓴 책 <인구 폭탄>이 200만 부 넘게 팔리면서, 무지막지하게 불어난 인구, 특히 아시아인들이 미국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대중적 공포가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기가 양산 후 보급되기 시작했다. 1억 6천만 명이 넘는 여아들이 '사라져'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성비가 무너진 사회의 성차별적 문화보다는, 인구 조절과 통제라는 대의를 내세우고 여아 선별 낙태를 방조하거나 심지어 지원한 미국의 정책과 과학자들을 향한 비난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같은 기술이 서구와 아시아에 동시에 보급되었을 때, 유독 아시아의 성비만이 크게 균형을 잃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기술 차원의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 보급 전까지는 태어난 여아를 죽이던 문화권에서, 이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미리 '처리'해버린 후, 수십년 후 자기 아들이 장가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며 한탄하고 있다. 저자와 달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문화권 속에 살고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다.

여성 혐오는 남성 과잉의 원인이다. 남자들이 '결혼 시장에서 소외되어' 여성 혐오를 한다는 설명은, 그 남자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는 해주겠지만,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여아 살해 풍습이 신기술을 만나 폭발하는 매커니즘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 야만을 직시하라. 그래야 문제가 보이고,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5.11.17ㅣ주간경향 115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20

[북리뷰] 용인 벽돌 투척 사건, 형벌과 정의를 묻는다

마르부르크 강령
프란츠 폰 리스트, 강, 1만5천원

일군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리고, 세력화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철학의 개념과 현실의 작동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골이 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법철학자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법은 세상의 작동 방식을 추상화한 관념 체계이니 말이다.

프란츠 폰 리스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으로, 19세기 독일 형법학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불러온 인물이다. 이른바 형법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 중 '신파'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파'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범인의 책임 능력과 행위에 따른 예측 가능한 처벌이 형법과 형사정책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신파'는 범죄라는 행위는 범죄자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우리의 판단 대상은 행위인가 아니면 행위자인가?"(84쪽, 강조는 원문)

근대 형법의 근본 원칙들을 생각해보자. 형법은 원칙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자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뿐, 과거에 살인을 했던 '살인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행위자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인식과 통제력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직 행위시에 존재하는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간통을 해도 간통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기계적으로 같은 행위에 대해 같은 형량을 부여한다면, 가령 오래도록 괴롭힘을 당하던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경우와, 가정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끝내 부인을 살해한 경우에 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 법 적용은 정의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그는 범죄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98쪽) 개선 가능한 부류에 대해 인도적 처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104쪽)

'행위 뿐 아니라 행위자도 바라보는' 형사 체계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사회 내에 혹형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 리스트의 목적사상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어떤 수형자들에게 구제 불능의 딱지를 붙인 후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도범이었던 지강현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관찰제도로 인해 징역 10년에 보호관찰 7년을 추가로 선고받고는, 급기야 탈옥을 감행했던 것이다.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용인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범인이 만9세의 초등학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죄와 벌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하다. 대중적 공분과 열기 속에서 <마르부르크 강령>을 다시 읽어본다. 올바른 형사 체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06

[북리뷰] 우리말의 탄생, 우리말의 재탄생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물러난 후라 경성역 창고에는 갈 곳이 없는 화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점검하던 역장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용물을 살펴본 역장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서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37쪽)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17

[북리뷰] 우리의 노동,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1만6800원.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우리 모두는 사용자 아니면 피용자, 즉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단어는 2015년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빨간색 조끼를 입고 파업을 하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는 듯하다. 게다가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 밖의 넓은 세상을 잘 인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노동여지도>는 바로 그 좁은 편견을 깨주는 책이다. 주간경향의 독자라면 다들 익숙할 바로 그 연재가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저자 박점규는 1998년부터 민주노총에서 홍보와 투쟁을 담당해왔고, 이후 수많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원, 울산, 인천, 서울 등 큼지막한 도시들 뿐 아니라, 군산, 구미, 화성, 광양, 동해, 삼척 등의 소도시에도 노동의 현장이 있다. 저자는 "2013년 3월 수원을 출발해 바다 건너 제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돌았"(8쪽)다.

그가 바라보는 전국 노동 현장의 모습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각자의 맥락과 상황이 있을테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절망과 탄식 속에 제한된 희망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연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이광오 사무처장의 말이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171쪽)

<노동여지도>는 뚜렷한 대립각과 입장을 세우는 책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깊은 동지애가 느껴지지만, 대체로 사측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는다. 제한된 지면에 연재된 원고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흔히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언급할 때만큼은 비판적인 뉘앙스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와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36일간의 파업 이후, 울산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을 외면한 부끄러운 역사를 지나왔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는 생산현장에 16.9퍼센트의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비정규직과의 노조 통합을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29쪽)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하나의 노동자계급이 일하던 공장은 연봉 9000만원의 A급 직영노동자, 연봉 4500만원의 B급 하청노동자, 초단기 알바로 일하는 C급 촉탁노동자로 나뉘었다."(36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냉정한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따스한 동지애에 기반하여 쓰여진 책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 그 중에서도 중소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화합하여 승리를 얻어낸 사례들을 기록할 때, 저자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타다대우상용차의 정규직 선배들이 매년 2천만원이 넘는 성과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정규직 후배들을 정규직이 되도록 도와준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독자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가 그리 흔치만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 것. 그 당연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이 십수년 째 지속되어왔고, 이제는 정리해고를 넘어 일반해고가 포함된 노사정 대타협안이 통과되었다. 다가올 미래가 그리 희망차 보이지 않는 지금,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우리의 노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2015.10.06ㅣ주간경향 114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10

[북리뷰] 우리에게도 와 있는 그들, 난민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이후, 1만6500원.


욤비 토나. 1967년 콩고에서 태어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 <내 이름은 욤비> 역시 널리 알려지고 읽힌 편에 속한다. 콩고에서 작은 부족의 왕손으로 태어난 저자는 제2차 콩고 내전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2002년에 망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최종적으로는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거쳐 2008년부터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상태다.

책에 따르면 "2012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4515명"(333쪽)이다. 난민 인정률은 13퍼센트 가량으로,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퍼센트인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욤비 토나는 그 13퍼센트의 확률을 이겨내고, 약간 높이는 데 기여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욤비 토나가 구술한 내용을 박진숙이 기록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욤비 토나의 궤적을 순서대로 추적하고 있다. 그가 13세에 처음 기숙학교로 떠나던 순간부터, 어떻게 본인이 지망하지 않았던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비밀정보국 요원이 되었는지, 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충실한 설명을 제공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부연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욤비 토나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난민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령 욤비 토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1장의 끝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따라붙고,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2장이 마무리되면서 32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주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난민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욤비 토나에게 일말의 동정심과 인류애적 연대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민협약에서 정의하는 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로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안겨준다. 욤비 토나의 자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성장했고, 박지성을 '우리나라 축구선수'로 생각하며 유관순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인지할만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다. 콩고로 돌아가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저자와 달리,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콩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태다.

인류애적 당위와 공공선 차원에서 벗어나, 지금 토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내 이름은 욤비>가 놓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오직 아버지의 눈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들과 딸의 시각에서 망명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경험을 논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대간의 갈등이야말로 이민 문제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난민에 대한 논의를 동정심 너머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의 고민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27

[북리뷰] 함성이 포성으로 바뀔 때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평민사, 2만9천원.


긴 평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물론 유럽 내에 국한된 평화였기는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에 힘입어 유럽은 1870년 보불전쟁 이후 50여년간의 '벨 에포크'를 맞이했다. "1914년 당시 변두리에서 벌어졌던 발칸전쟁을 제외하면 유럽대륙에서는 한 세대 이상 전쟁이 없었"(492쪽)다. 그런데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유럽에는 호전적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았음을 상기해보자. 1914년쯤 되면 보불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거의 다 죽었거나, 전쟁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이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건, 가령 자동차라던가 비행기라던가 전화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럽인들의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속에는, 당연하게도 전쟁이 포함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이른바 '사라예보의 총성'이지만, 그 암살 사건은 쌓여있는 화약에 불꽃을 튀겼을 뿐이다. 프랑스는 1870년 발발했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반면 "1870년부터 독일인들은 군대와 전쟁만이 독일의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79쪽) 유럽 각국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거미줄처럼 동맹을 맺었지만, 오히려 그 수많은 동맹 관계 때문에 전쟁은 점점 커져만 갔고,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8월의 포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저술가 바바라 터크먼은 1962년 <8>을 출간했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였지만 <8>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애독자 중에는 존 F.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의 맥밀란 수상에게 이 책을 증정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1914년 8월과 같은 함정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6쪽)

그는 역사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본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탁월한 저자였다. 1차 세계대전 전체를 조망하는 대신, 개전 이후 30일까지의 상황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슐리펜 장군이 세워놓은 작전 계획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굳이 벨기에를 침공한 후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의 자신감의 충만했지만 전쟁 대비는 형편없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지만, 마른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고, 1차 세계대전은 길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고착되고 만다. "교전국들은 처음 30일 동안 전세를 결정짓는데 실패한 전투로부터 만들어진 덫, 그때도 또 그 이후로도 출구가 없는 그러한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680쪽)

전쟁 이후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되던 사회주의자들의 형제애 그리고 재정, 상업, 그 이외의 다른 경제적인 요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같은 전쟁 억지력은 막상 때가 되자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주의가 난폭한 돌풍처럼 일어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491쪽) 막상 한 번 시작되자 전쟁은 뜻대로 쉽게 풀리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울려퍼졌던 '8월의 포성'은 멈췄다. 그러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함성은 쉽게 잦아들고 있지 않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 <8>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역사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2015.09.08ㅣ주간경향 1142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4

[북리뷰] 그들의 눈으로 침략을 되짚어본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학고재, 1만5천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대형 빌딩을 뒤덮은 거대한 태극기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의 근원적 경험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수렴한다.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가장 근본적인 서사 중 하나다.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전>은 우리가 아는 '그 임진왜란' 이야기의 원형과도 같다. 최종 결정권자인 왕은 무능하고 의심만 많으며 자기 살 궁리나 한다.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신하들은 당파싸움에 정신이 팔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대비를 게을리했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는 단 한 사람의 장군, 이순신은,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임진왜란 서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도 조선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임진년에 왜가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시각의 폭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란'이었던 그 사건은, 일본인들의 눈으로 볼 때, 전국시대의 막바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몰락을 불러온 거대한 패착이었다. 명나라는 만력제가 조선에서의 전쟁에 뛰어드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과 명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는 누르하치 세력이 힘을 얻고 결국 청나라를 일으킨다.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고, 동아시아의 역사의 큰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인 김시덕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임진왜란'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다. 본디 고문서학자인 그가 택한 방법은 일본에서 출간된 대중적 출판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수많은 대중 출판물이 범람하였는데, 그 중 임진왜란은 인기 있는 이야기거리였기 때문이다.

출판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시대에는 출판물이 당대인의 세계관·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3쪽)

<그들이 본 임진왜란>은 단지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할 뿐 아니라, 임진왜란의 발발 및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역시 외부인의 눈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관점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 명백한 문헌적 증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징비록>의 일본판인 <조선징비록>이 출간되면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중요한 건, 그 무엇보다 먼저, 임진왜란이 '우리들만의 역사'가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전쟁을 겪었고 곱씹었다. 그것은 물론 침략자로서의 시각이긴 하지만, 침략자였던 그들이 임진왜란을 이해했던 방식을 조선인들은 훗날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진왜란은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 세력'인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 첫 단계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을 그저 '무능한 왕 - 분열된 조정 - 고독한 장군'의 삼각 구도를 통해서만 이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역사적 관점을 한 단계 업데이트해보자.


2015.08.25ㅣ주간경향 1140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7-31

[북리뷰]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우리들에게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1만3천원.


문득 떠올려보면, 장강명 이전에 황지우가, '한국을 뜨고 싶다'는 욕망을 문학으로 포착해냈다. 영화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극장에서 "우리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행만 바뀐 채 곧장 이어지는 문장으로 현실이 엄습한다. "하는데 대한 사람 / 길이 보전하세로 /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절창 '새들도 새상을 뜨는구나'의 뒷부분이다.

기자 출신의 젊은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도 비슷한 정서의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는 세상이 아니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주저앉는다" 외의 다른 선택지가 가능해졌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고자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는 '계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에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바로 그 말, '에이, 이놈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아'를 적나라하게 제목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뭉개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꿨지만, 정말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삶에서의 작은 행복을 찾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최고의 문제작이다.

하지만 박수를 몇 번 치고 책장을 덮기엔 아쉬움과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떨치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는 남자인데, 왜 '한국이 싫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1인칭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한국을 굳이 떠나야만 하느냐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그렇다. 한국은 한국인들이 사는 나라지만, 그 표준적인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남성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100대 62다. 여성의 노동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기는 평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세계 그 어디에도 완벽한 성평등이 구현된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유독 심하게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기서 작중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1인칭 서술을 한 장강명의 선택은 양면적 효과를 낳는다. 일단 그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성형 1인칭 화자의 내면을 서술되어 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주인공 계나의 판단과 선택은 사회 통념적 비난을 돌파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뒤엎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이 싫어서> 이후, 더 많은 문학적 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2015-07-16

[북리뷰] 요리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
후안 모레노, 미라크 탈리에르초, 반비, 2만원.

바야흐로 쉐프 전성시대다. TV만 틀면 칼 든 남자들이 흰 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다. 누구는 유학파라는 둥, 누구는 국내에서 공부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둥, 심심찮게 그들의 배경까지도 엿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리라는 것이 과연 쉐프만의 전유물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장소와 맥락 속에서 요리를 한다. 우리가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리사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사연을 겪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슈피겔>의 기자 후안 모레노가 사진작가 미르코 탈리에르초와 수다를 떨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도 바로 그것이었다.

"미르코와 나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리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독자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각자의 최고 요리와 함께 각자의 사연을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질이다.(12쪽)"

그렇게 수집된 17명의 요리사들이 보여주는 사연들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때로는 충격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슬픔을 안겨준다. 삼촌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삼촌이 마피아의 거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빌 클린턴이나 마돈나도 예약을 하지 못할만큼 잘나가는 뉴욕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오스'의 쉐프인 프랭크 펠레그리노의 경우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다.

하지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전속 요리사였던 오돈테 오데라의 이야기는, 그저 인터뷰를 통해 전해듣고 있을 뿐인데도 다소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편에는 시위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배가 고프면 투쟁도 없다'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밤 카트 같은 사람도 있고, 사라예보 내전에서 군인으로서 싸우다가 탈출하여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는 니하드 마멜레지야의 사연도 존재한다. 요컨대, '요리사'라는 단 하나의 범주를 제외하고 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묶여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은 단호하다. "레시피가 들어 있지만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스타 요리사의 이야기가 있지만 스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음식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음식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요리사에 관한 책이다."(13쪽) 그 요리사의 범주는 대단히 탄력적이며, 그만큼 많은 삶의 모습이 포착된다. 나이로비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여성이라던가, 텍사스 교도소에서 그 자신도 죄수의 신분으로 200명이 넘는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차려주었던 남성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모습이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고, 여기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TV만 틀면 누군가가 요리를 하거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건만, 그 모든 요리사들은 '쉐프' 아니면 '엄마'로 양분되는 듯하다. 폼나는 흰 옷을 입고 멋진 태도로 고급스러운 요리를 만들어주는 남자들이 '쉐프'로 불리고 있는 동안, 일상을 지탱시켜주는,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처럼 끝나지 않는 노동으로서의 '집밥' 차리기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의 몫일 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요리가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본질적 요소라면, 그 요리의 양태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고, 요리를 하는 사람인 요리사 역시 그저 두 가지 범주로만 쪼개질 수는 없다. 후안 모레노와 미르코 탈리에르초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요리사'에 집중하여 포착해낸 17개의 삶은,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식문화와 그 식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을, 문득 부끄럽게 만든다. 먹방의 시대, 천편일률적인 '쉐프'들의 모습을 보는 게 지겨워진 이들에게,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를 권하고 싶다.



2015-07-02

[북리뷰] 이성애도 한때는 정상이 아니었다?

사랑의 역사
루이-조르주 탱, 문학과지성사, 1만3천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전 세계의 국가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말이다. 영국의 시사·경제주간지 <The Economist>에 의해 '게이 디바이드'라고 명칭되기도 한 이 격차는, 지난 6월 26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각 주는 동성커플의 결혼을 막을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여 미국 내 동성혼을 전면 법제화함으로써, 확연히 가시화되었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이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제출한 혼인신고서가, 우리의 민법 규정상 특별히 반려되어야 할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게이 디바이드'에서 선진국이 아닌 후진국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6월 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조르주 탱은 동성애자이며 동시에 흑인이다.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며, 학문적으로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푸코의 방법론을 동원해, 사람들이 '자연스럽다', 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아주 근본적인 질서에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이성애'는 당연하기만 한 일인가?

우리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시민이며 동시에 군인이었던 그들은 서로 동성애 관계를 맺고 전우로서 함께 전장에서 뒹굴었다. 저자는 문학 연구자답게 중세의 대표적인 서사시 '롤랑의 노래'를 사례로 든다. 롤랑의 뒤를 따라 약혼녀가 죽는 장면을 후대의 연구자들은 크게 강조했지만, 그것은 분량상 대단히 미비하며 극중 비중도 크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롤랑이 그의 맞수인 올리비에 경과 나누는 진한 우정 혹은 애정이다. 그들은 서로 변하지 않는 충직함을 맹세하고, 진지하게 입을 맞추고, 함께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정말 중세의 서사시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세인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랐'기 때문에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동성애 뿐 아니라 이성애에 대해서도 현대인과 같은 관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세인들은 여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지한 감정적 교류를 남자와 나누었고, '남색가'가 아니면 남자와 몸을 섞기란 곤란한 일이므로,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돈독히 다졌다.

기사, 즉 무인 중심의 중세가 궁정사회로 변모하면서 이성애 중심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들끼리 싸워서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그 여성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하는 설득과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또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기사, 성직자, 의사들이 이성애에 온갖 딱지를 붙이며 그 영향력을 줄여나가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성애는 너무도 당연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 지배적 에피스테메가 되었고, 대신 동성애가 '문제적 대상'으로 부각된다.

이 책을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한 푸코적 해석으로 보는 것은 분명 가능하며, 그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독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과연 한국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로 나아간 적이 있긴 한지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마치 올리비에 경이 롤랑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듯, 한국의 일부 남성들은 성매수 경험이나 여성혐오적 농담 등을 공유하며 그들끼리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동성애가 인권의 판단 지표로 부각되어 있는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명적인 이성애자의 삶을 구현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불현듯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2015-06-30

[북리뷰]‘프레임’이 만만하게 보이니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지음·유나영 옮김 와이즈베리·1만3000원


2004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200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후, 지금까지 이 책만큼 오해되고 있는 책을 또 찾기란 쉽지 않다.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이 책의 제목을 모두 알고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그리고 다들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프레임이고….’ ‘프레임’이라는 단어, 혹은 국내에서 이해되고 통용되는 ‘프레임’의 논리는 지금까지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다.

가령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지난 9일 ‘메르스라는 단어가 낯설고 국민들이 무서워하니 친숙한 우리말로 바꾸자’고 할 때, 그러한 제안에는 국내에 소개된 ‘프레임 이론’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를 ‘중동 독감’이라고 지칭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교적 친숙한 독감의 일부로 소개함으로써,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을 바꾸려는 시도라고, 짐작컨대 청와대에서는 스스로 자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지 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 이론은 그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프레임 재구성은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떤 마법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프레임은 슬로건이 아니라 생각이다. 프레임 재구성은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에 접근하여 이를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담론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반복하는 일에 가깝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한 과정이며, 반복과 집중과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13쪽)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메르스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독감이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메르스를 둘러싼 프레임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0주년 기념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된 내용에서 저자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 가지 오해는 프레임을 구성하는 일이 ‘사망세’나 ‘부분 출산 낙태’처럼 상당수 대중에게서 반향을 일으키는 영리한 슬로건을 고안하는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슬로건은 세금이나 낙태 같은 쟁점들을 개념적으로 프레임에 넣는 장기간의, 흔히 수십년에 걸친 캠페인이 선행되어, 많은 사람들의 뇌가 이런 문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완료했을 때만 먹힌다.”(76쪽)

이미 2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격리 처치를 경험한 사람이 1만명을 넘어서게 된 메르스 사태를 두고, 야권 일각에서는 현재의 국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메르스를 세월호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물론 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메르스의 확산 통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놓고 정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야권에게 불리한 ‘프레임’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질까?

적어도 조지 레이코프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임은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세계관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 물론 변하긴 하겠지만, ‘프레임’ 타령만 하는 세력은 결코 기존의 프레임을 이겨낼 수 없다. 모든 위기 상황을 정치적 호재로 바라보는 분들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2015.06.30ㅣ주간경향 1132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506221617041&pt=nv#csidx23225d858145a6f89750f86343c6aae

2015-06-16

[북리뷰]<페스트>-지금 가장 시의적절한 고전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책세상·1만4000원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만 할 때가 있다.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젊은 작가를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지금까지 번역을 제외하고 프랑스어로만 500만부가 팔린 책.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식상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없이 시의적절한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를 요양소로 보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동시에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들의 예후와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확산되는 전염병을 페스트로 보고 대비해야 하느냐, 그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오랑의 의사와 현감 등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총독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페스트의 발병을 확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고.

“오랑의 시민들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60쪽) 봉쇄된 도시 속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심지어 대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사무실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115쪽)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묘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노인과 아이들. 그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무색무취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포와 권태가 한 몸이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도시 바깥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마저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버려 결국 식상해져버리는 그 반복의 공포.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사건인가? 과연 그것은 지루한 ‘일상’을 대체해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태도 변경 앞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했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244쪽) 그 페스트에 맞서는 의사 리유 역시 다양한 인물들과 상호 교류하며 실존적인 화두를 던지고 대답을 찾아나서지만, 매일 환자들의 숫자를 세고 통계표를 만든다. 페스트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것과 싸우는 의학 역시 하나의 행정사무인 셈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졌고,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단 한 사람이 늑장 대책회의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시민들은 실존적 문제 이전에 아주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있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에, 실은 수십여 명의 확진 환자가 나타났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부터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휴지, 혹은 팔꿈치나 어깨로 가리고 해야 한다. 본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을 켜고, 공포와 불안의 봉쇄령이 풀릴 그 날을 함께 기다려보자.


2015.06.16ㅣ주간경향 113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6081443401&code=116#csidxe60f409375f16b293a255a00aeaba3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