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6

[북리뷰]<페스트>-지금 가장 시의적절한 고전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책세상·1만4000원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만 할 때가 있다.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젊은 작가를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지금까지 번역을 제외하고 프랑스어로만 500만부가 팔린 책.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식상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없이 시의적절한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를 요양소로 보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동시에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들의 예후와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확산되는 전염병을 페스트로 보고 대비해야 하느냐, 그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오랑의 의사와 현감 등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총독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페스트의 발병을 확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고.

“오랑의 시민들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60쪽) 봉쇄된 도시 속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심지어 대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사무실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115쪽)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묘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노인과 아이들. 그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무색무취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포와 권태가 한 몸이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도시 바깥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마저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버려 결국 식상해져버리는 그 반복의 공포.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사건인가? 과연 그것은 지루한 ‘일상’을 대체해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태도 변경 앞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했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244쪽) 그 페스트에 맞서는 의사 리유 역시 다양한 인물들과 상호 교류하며 실존적인 화두를 던지고 대답을 찾아나서지만, 매일 환자들의 숫자를 세고 통계표를 만든다. 페스트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것과 싸우는 의학 역시 하나의 행정사무인 셈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졌고,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단 한 사람이 늑장 대책회의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시민들은 실존적 문제 이전에 아주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있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에, 실은 수십여 명의 확진 환자가 나타났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부터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휴지, 혹은 팔꿈치나 어깨로 가리고 해야 한다. 본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을 켜고, 공포와 불안의 봉쇄령이 풀릴 그 날을 함께 기다려보자.


2015.06.16ㅣ주간경향 113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6081443401&code=116#csidxe60f409375f16b293a255a00aeaba3f

2015-06-14

[별별시선]페미니즘을 위하여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이 주제로 등장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요?’ 하는 사람들 말이다. 경험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입력 : 2015.06.14 20:42:23 수정 : 2015.06.14 20:45: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덧붙임1: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 공개했을 때만 해도 '모든 페미니즘이 옳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2016년 7월 현재,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라고 주장한 이 글의 관점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메갈'을 타자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은 "#내가메갈이다"라고 해쉬태그를 달아, 그러한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덧붙임2: 내가 편집부에 보냈던 원래 제목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2016/07/29)

2015-06-02

[북리뷰]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김명남 옮김·창비·1만4000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 이미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n과 설명이라는 뜻의 explain을 합친 신조어다. <뉴욕타임스> 선정 2010년 ‘올해의 단어’였다. 그리고 2015년에는 우연한 계기로 한국어권에서도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패션지 <그라치아>에 기고한, ‘IS(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가장 먼저 트위터에서 여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여성을 공개적으로 차별하고 학대하는 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말에, 트위터 사용자들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해쉬태그를 달며 항의했다.

한때 페미니즘은 지성인의 상식으로 여겨졌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어 그 불꽃은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남자들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을 노골적으로 경시하며, 남성 위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체화한 여성들을 향해 ‘개념녀’라는 훈장을 달았다. 반대로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김치녀’, ‘된장녀’ 같은 딱지를 붙여 비하하기 바빴다.

문제는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목청을 높여 맞서는 여성 지식인들의 숫자와 기세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왕년에 자타공인 페미니스트라고 불렸던 이들 중 오늘날까지도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하루가 다르게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는 한국 사회와 맞서는 이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페미니즘, 혹은 똑같은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분위기에 맞게 경신된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에게 가이드라인 노릇을 할 ‘바로 그 책’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저자이며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바로 그런 현실 속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다. 모두 아홉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제작인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다. 리베카 솔닛은 한 파티에서 바로 그 자신이 썼던 어떤 책에 대해, 처음 만나는 남자가 달랑 그 책에 대한 서평만을 읽은 채로 함부로 가르치려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바로 그렇게, 남자들이 상대방의 지식 수준을 함부로 얕잡아본 채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행동, 그것이 바로 맨스플레인이다.

맨스플레인 그 자체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적이다. 어떤 남자들은 바로 같은 사고방식에 기반해 여자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며 폭력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15쪽)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여자의 말을 끊고 잘난 척을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세상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드러내주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에세이는 오늘날의 젠더 이슈를 골고루 일주한다. 21세기의 페미니즘 교과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261647401&code=116

메르스 '괴담', 정보 공개로 맞서라

1.

중동에서 최초로 메르스에 걸려온 사람을 1차 감염자라 하고, 접촉을 통해 그 사람에게 옮은 사람을 2차 감염자, 이런 2차 감염자에게 옮은 사람을 3차 감염자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 1천여 명의 메르스 확진 환자가 있었지만 이 중 3차 감염자는 아직 없습니다. http://news.jtbc.joins.com/html/284/NB10909284.html

이것이 어제까지의 뉴스였다. 오늘, 2015년 6월 2일, 대한민국에서 3차 감염자가 나왔다. 명백히 '세계 최초'로 메르스 3차 감염자를 배출한 것이지만, 모든 언론들은 그저 '최초 발생'이라고만 보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메르스 3차 감염자를 그냥 '최초'라고만 보도하는 모든 언론은, 오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오보를 뿌린다. 정부는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엄중 대처하겠다고 벼르지만, 정작 어제 오전 청와대는 정확한 감염자 숫자마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SNS에는 어떤 병원에서 메르스가 퍼지고 있는지 다양한 '정보'가 떠돌아다닌다.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2.

진정으로 '메르스 괴담'을 줄여나가고 싶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최초 감염자, 중국으로 빠져나간 환자, 그 외 본인이 감염된 상태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움직였던 사람들의 동선을 세세하게 포착하여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괴담'이 더욱 퍼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메르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메르스 그 자체보다 수천배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메르스 그 자체는 잘 옮지 않는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환자와 2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한 메르스의 공기 감염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확진 환자들이 격리되기 전까지 움직였던 동선이 명확하게 파악되고 또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 효과를 생각해보자.


  1.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의료기관을 통해 필요한 처치를 받을 수 있다.
  2.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어렵풋이 겹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2미터 이내에서 직접 접촉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안심할 수 있다.
  3. 그 외 국민들은 불필요하게 '괴담'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이것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메르스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는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알고,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으며, 전국에 의료기관이 배치되어 있는 나라다. 메르스 위기와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바로 그게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부가 볼 때는 '괴담'의 형식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다.


3.

작년 말 에볼라 위기가 서아프리카를 강타했고,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던 의사 한 명이 기니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본인이 에볼라에 안 걸린 줄 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오한과 발열 증상이 나자 스스로를 격리시킨 후 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에볼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옮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서 뭘 했건, 실제로 에볼라를 전파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그가 입국한 이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전부 입수하여 공개했다.

"What the New York City Ebola Patient Was Doing Before He Was Hospitalized"(링크: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23/nyregion/new-york-city-ebola-patient-timeline-map.html?_r=0)를 보자. 과연 이런 정보 공개가 '환자에 대한 조리돌림'을 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환자를 악마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해당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건강 상태를 한번 더 유심히 체크하게 된다. 반대로 그가 있었던 곳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다. 평택을 넘어 대전까지 갔다더라, 무슨 병원이 초토화되었더다더라, 같은 '괴담'이 떠도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 '괴담'을 종식시킬만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도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심하며, 본인이 감염되었다는 의심이 들 경우 적절한 시점에 신고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만약 미 정부나 <뉴욕타임즈>가 '괴담'을 두려워해서 모든 정보를 틀어막는 한국식 대처법을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4.

지금 정부는 국민들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국민들 역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정부다. 왜냐하면 정부는 올바른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단계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까지도 않으면서, 국민들이 퍼즐을 맞춰서 유통시키는 것을 '괴담'이라고 지칭하고 처벌의 의지만 드높이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는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될 태세다. 오늘자 뉴스를 하나 살펴보자.

1일(현지시간) 홍콩 보건당국은 한국인 J(44)씨의 메르스 확진 판정 이후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여행객들에 대한 방역과 검진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발열과 감기 증세 등 메르스와 관련된 어떤 증상이라도 보일 때에는 즉각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해 정밀 검진한다는 방침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4421582

정부의 이유 없고 실익 없는 비밀주의 때문에, 홍콩으로 향하는 모든 감기 환자들이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되어, 아마도 격리 검사를 당하게 생겼다. 대체 왜 정부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가? 홍콩 보건당국 역시 나와 같은 논리를 편다.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는지 공개되면 한국을 여행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해당 병원을 피하라고 알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국발 입국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방역 및 관리 수준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요컨대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 메르스 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수준의 질병 관리 대책을 내놓으면서 '요우커'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펑펑 써주기를 기대한다? 다 틀렸다. 이제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선진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멍청한 권위적 비밀주의가 심지어 경제에도 치명타를 입힐 우려가 크다.



5.

한국 사회는 '확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한다. 병에 걸린 것은, 물론 개인적인 위생의 문제도 있겠으나, 결국은 운이 안 좋은 것이다. 본인에게 유리하지 않은 확률이 실현된 것이다. 불운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나쁜 확률에 걸린 자'를 곧장 '더럽혀진 자'로 인식하고 쫓아내려는 사고방식. 대단히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퍼져 있다. 일단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자. 그래서 개인들은, 본인이 운 나쁘게 뭔가에 걸렸을 경우, 그 사실을 감추려고 든다. 본인이 메르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음에도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 현재 중국에서 격리되어 있는 A씨가 바로 그러한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A씨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회사 생활' 하다보면 눈치 보여서 병가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떡하냐, 메르스는 치사율 40%지만 병가는 치사율 100%다, 같은 이야기가 적잖이 돌아다녔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 사회가 '나쁜 확률에 걸린 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러므로 그 '나쁜 확률에 걸린 자'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원래 그런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눈치 보고 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저 와중에 직장인한테 출장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너희들은 사회 생활의 고통을 알긴 하느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시각에 동참하거나 편승하는 게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힘 없는 약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느냐, 잘못한 것은 위기 대처를 엉망으로 하고 있는 정부가 아니냐, 이런 입장이다. 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현재의 메르스 위기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딱지를 붙여 쫓아내자는 식의 대중적 감정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지만, 개인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는 태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나쁜 확률'에 걸린 사람을 쫓아내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 '나쁜 확률'에 걸렸을 때 자신의 문제를 쉬쉬하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태도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개의 비과학적 태도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6.

일단 국가가 먼저 국민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에 대한 세부적 정보를 제공하라. 그러면 괴담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지금부터라도 모든 신문과 방송을 동원해, 손을 잘 씻고, 눈 코 입을 함부로 만지지 말고,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는 휴지나 손수건으로 가려야 한다고 홍보하라. 손으로 가리지 말고 팔꿈치나 어깨에 기침을 해야 한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손이 많이 닿는 곳은 직접 만지지 않기 위해 유의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계몽'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국민들을 대상화하고, 무시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하층민 취급하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국민들이 질병 전파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노력하여 위생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계몽'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시가 아니라 존중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의 전폭적 긍정이 바로 국민 계몽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를 반추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대체 왜 '보수적 도덕주의'라고 비난받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 하에 올바로 행동하지 않는 한 문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문명을 유지하고 위생과 청결을 지키자는 기본적인 요구가 '보수주의'라면, 나는 위생 관념 없는 비과학적 진보와 단호하게 선을 긋겠다. 그런 '더러운' 진보는 필요 없다.


7.

정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다. 그래야 '괴담'이 잦아들 여지가 생긴다. 그래야 국민들이 스스로 위험한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중화권과 전 세계적으로 실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도, 조금이나마 열린다.

문제는 정부의 권위주의와, 그 권위주의를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진보 진영의 삐뚤어진 세계관이다. 언론은 정부의 권위주의를 이겨내고,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동시에 국민들 역시 '나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무서운 질병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계몽에 나서야 한다.

과학을 존중하는, 인권을 보호하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위생과 청결을 지켜내는,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보자.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자는 말이다. 정부의 전향적인 판단과 세밀한 정보 공개를 다시 한 번 요구한다.

2015-05-19

[북리뷰]근대 일본의 서구 따라잡기

도련님의 시대 1~5
세키가와 나쓰오 지음·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미콜론·각권 1만1000원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공허함을 느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일본은 일약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듯했지만, 일본인들은 러시아로부터의 배상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전쟁을 앞두고 억눌러져 있던 국민들의 불만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비어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쓰메 소세키가 <도련님>을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고독한 미식가>를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등산 만화인 <신들의 봉우리> 등으로도 탄탄한 열성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그가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작가인 세키카와 나쓰오와 손을 잡았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제외하면, 일본인들이 가장 ‘좋은 시절’로 떠올린다는 메이지 천황 시대를, 나쓰메 소세키 및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문인들을 주인공 삼아 다섯 편의 만화 속에 담아낸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이라는, 불쑥 등장해버린 타자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은 우선 배우고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에게 ‘안’과 ‘밖’이 철저히 나누어진, ‘프라이버시’가 존재하기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서구식 생활 공간은, 신경증을 안겨주었다. 근대화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나쓰메 소세키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을지언정 ‘영국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뿐 아니라,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치던 모든 메이지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공통의 딜레마였다. 산업화를 통해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 성장의 과실은 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가난한 국민들을 바라보며 의식화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의식화하기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의자’들을 단속하고 나선다. 급기야 간노 스가코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천황을 살해하려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되면서, 일본은 엄격한 군국주의적 통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민간 개혁, 혁명세력에는 철권과 쇠사슬 그리고 죽음으로 대답하겠다고 결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마침내 메이지 천황에게 그 뜻을 아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메이지 42년(1909년) 5월 중순의 맑은 아침, 일본은 조용히 회전했다.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 등 28명이 죽을 운명도 이때 결정되었다.”(4권 208쪽)

한국인인 우리는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 답변의 목록은 실로 빈곤하기 짝이 없다. 고대의 일본, 중세의 일본, 근대와 현대의 일본이 각각 어떻게 다르고 구분되었는지, 어떤 시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하기 어렵다.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그 점에서 훌륭한 교과서가 되어주는 책이다. 물론 여성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한 묘사라든지, 안중근 의사를 등장시키고 다루는 방식 등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러나 근대 일본의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을, 그 사춘기를 빼곡히 적어낸 작가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텍스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메이지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11175635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