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3

네트워크 자체는 똑똑하지 않다

이러한 식으로 네트워크를 통한 혁신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나는 지금 '글로벌 브레인(global brain)'이나 '군중심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집단적 사고에 의해 멋지게 해결되는 문제들도 실제로 있다. 도시에서 이웃의 형성, 시장가격 형성의 다양한 신호들, 사회적 곤충들의 정교한 엔지니어링 재주 등. 하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해왔듯--가장 최근에는 컴퓨터과학자이자 음악가인 재런 레이니어(Jaron Lanier, 1960~)가--대규모 공동체에서는 진정한 창조나 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탈리아에서 시장이 있는 마을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마을들이 마법처럼 더 높은 수준의 집단의식을 갑자기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 마을들은 단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를 넓혔을 뿐이다. 이것은 군중의 지혜가 아니라 군중 속 누군가의 지혜다. 네트워크 자체가 똑똑한 게 아니다. 개인들이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똑똑해지는 것이다.

스티븐 존슨, 서용조 옮김,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서울: 한국경제신문, 2012). 71쪽.

젊은 작가 지망생을 위한 조지 몬비오의 두 가지 조언

젊은 작가 지망생에게 조언 두 개만 해주신다면?

첫째,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걱정하느라 글쓰기가 막혀 있는 상태에 빠지지 마십시오. 쓰고자 하는 문단에 들어갈 단어나 아이디어를 단어 몇 개로 마구 던져놓고, 필요한만큼 단편적으로 거칠게 스케치를 한 후 나중에 정돈하기 바랍니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예상 외로 글이 풀리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본인이 쓴 글 가운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건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영국에서는 한 해에 18만여 권이 출간됩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00권이 대단히 잘 팔리고, 1000권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그 책이 눈부시게 훌륭한 책이라 해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을 희망하거나 심지어 기대합니다만, 그 희망은 거의 언제나 꽝입니다. 그 실망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지 말기 바랍니다. 책 한 권을 끝내면 다른 책 작업을 시작해서 그 속에 파묻혀버려야, 첫 책이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더라도 집중하고 있을만한 무언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거의 확실하게 맞닥뜨리게 될 것인만큼, 여러분은 실망을 견뎌내기 위한 전략을 고안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http://www.monbiot.com/2017/11/03/escape-hatch/

2019-09-01

1960년대 반문화 운동과 실리콘밸리, 그리고 안티조선

실리콘밸리는 '반문화'를 졸업했지만, 완전히 졸업하지는 못했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표방하는 가치는 전부 1960년대에서 비롯되었다. 대형 테크 기업들은 기업의 정체성을 개인의 자유를 위한 플랫폼이라고 내세웠는데, 이는 스튜어트 브랜드가 했던 말과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각을 소셜미디어에서 말하고, 지적, 민주적 가능성을 발휘하고,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만드는 수동적인 매체인 반면에, 페이스북은 참여하는 매체고 사용자가 권한을 갖는다. 다양한 글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만의 의견을 형성하는 일이 허용된다.

[프랭클린 포어, 이승연, 박상현 옮김, 『생각을 빼앗긴 세계: 거대 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가』(서울: 반비, 2019). 79쪽.]

이러한 '반문화운동'의 논리가 2000년대 한국에서 안티조선 운동, 더 넓게는 인터넷을 통한 정치인 팬클럽 운동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수 있을 것이다.

2019-08-29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하여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독일에서 잘 돌아가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정치에 뜻을 품은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정당에 가입해, 평당원부터 차근차근 정당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고 그 과정에서 능력과 청렴도가 검증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정당명부 비례투표를 해도 되는 것.

반면 한국에서 정치란, 박근혜에게 청년비례 공천받은 이준석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4-50대 무렵까지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인생 이모작을 하러 들어가는 분야다. 중년의 정치 신인들은 지역 연고, 그 순간의 인맥, 기타 이해관계와 당선 가능성을 가늠하여 소속 정당을 택한다.

게다가 한국의 정당들이 독일의 정당처럼 일관된 정책 지향과 이념적 방향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요컨대, 한국의 정당은 자신들이 내놓는 후보의 인적 측면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정책적 측면에 대해서도, 독일에 비해 매우 보증력이 떨어지는 선거 공략용 공대에 가깝다는 말이다.

지역 기반 투표가 국회 의석을 deadlock 시키는 것을 문제라고 본다면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것을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별적인 후보자에 대한 인적 검증이 소선거구제 시절보다 약화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하자 있는 국회의원'이 더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삼김시대에도 지역구는 나름 필터링을 했다. 보스에게 공천받은 후보가 떨어지면 개망신이니까. 하지만 전국구 의석은 '돈 받고 파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그냥 다들 넘어가주는' 분위기 아니었던가. 비례대표제가 무조건 '민심'을 더 잘 반영한다는 식의 환상을 넘어서서 그 작동 방식을 보자.

지금은 아무리 정치 거물이어도 총선때는 긴장 타야 한다. 여차하면 골로 간다. 하지만, 가령 100% 정당명부비례제라면, 선순위 공천자는 국민이 아무리 싫어해도 당선된다. 비례대표가 늘어날수록 유권자의 '떨어뜨리는 힘'은 줄어든다. 대신 공천권 가진 사람의 '고르는 힘'은 한없이 커진다.

요컨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구성하고 반영하는 조직으로서 제 기능을 하며, 정당 내부의 정치 행위와 역학 관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충분히 쌓여 있어야, '민심'을 올바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 제도다. 한국이 그런 나라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 해볼 일.

하나 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날 거라 믿는 군소정당(정의당, 바른정당 등)들. 그러한 방식의 선거 제도 하에서 대형 정당은 비례 순번의 말석에 군소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인물을 공천한다.

유권자는 '작은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인물'보다는, '큰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인물'의 당선을 위해 투표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 비례대표제 하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그게 더 큰 규모로 시행될 뿐이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 기성 정당이 이념정당의 이념적 지향성을 빼앗아올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하면, 유권자로서는 그 실체와 존속 여부가 불투명한 군소정당을 지지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기민당과 사민당이 아니라는 말이다. 뭐, 이미 다들 '합의'를 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례대표가 늘어난 후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지역구에서 못 본 재미를 비례에서 실컷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유권자에게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잔돈'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애매한 잔돈 그냥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들'한테 주자, 이걸 모아서 의석 만드는 게 진보의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잔돈'이 '목돈'이 되면, 유권자들이 예전처럼 진보정당에 옛다 하고 줄까? 그리고 거대 정당들이 이전처럼 순순히 개평 떼어줄까? 안 그럴 것 같은데...

정의당이나 바른미래당 등 군소야당이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했다면, 선거제도 그 자체보다 일단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는 것을 전제로 협상에 임했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명으로 줄이고 전원 비례대표로 뽑느니, 모든 의석을 지역구로 돌리고 400명을 뽑는 게 훨씬 '대의제'에 부합.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 떠나서 숫자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숫자 뿐 아니라 국회라는 기관 자체가 갖는 권한이 너무 약함. 가령, 감사원을 청와대 직할이 아니라 국회 직할로 옮기면 과연 국정감사가 지금처럼 연례 호통쇼에 머물까?

선거제도개편을 밀어붙이는 측은 국회의 권한을 늘리는 데 관심 없다. 자신들의 의석을 '상대적으로' 더 확보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의석을 300석으로 묶고, 자기들도 남에게 설명 못하는 복잡한 선거제를 도입한다? 이런 정치적 선택을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기만적인 일처럼 보인다.

2019-08-28

남학생 교육도 페미니즘의 문제인가

여학생들에 비해 남학생들이 집중 못하고 성적 떨어지고 사고 치는 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님. 사회적으로도 고민해볼만한 문제.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여성주의를 남성인권운동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여성을 구조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할 때에는 몰랐지만, 여성들에게 동등한 교육과 참정권을 제공하고 나니, 지식/산업사회의 구조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동등하고 공정한 대접을 받도록 하는 것. 낙오되는 남자들 부둥켜안는 건 별개의 문제.

남자가 공부 못하는 건 맞는데, 대학 전공에서 돈 되는 STEM은 또 남초임. 이것도 세계 공통. 페미니즘 교육의 주안점은 '얌전히 앉아있으면 칭찬받는 여자애들한테 밀려서 공부 못하는 불쌍한 남자애들'이 아니라, '공부를 잘 하는데도 돈 안 되는 학과를 강요받는 여자애들'에게 쏠려야 하지 않을까.

남자애들이 공부 못 하는 건 전 세계적인 현상인만큼, 그것을 '한국의 페미니즘'이 해결하려 드는 것은 어불성설. 반대로 말하면, 여자애들은 어릴 때부터 몇십분씩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에 적합할만큼 억압받으며 자란다. 문명화 과정에 적응 못하는 남성성의 문제. 그 현상을 다루고 있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사 "The Weaker Sex"는 그 자극적인 제목에 힘입어 널리 인용되고 있다. 저 기사의 논조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더라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함.

'학교에 적응 못하는 남자'라는 어떤 자연 상태에 가까운 생명체를 어떻게 현대 사회에 적합한 시민으로 재탄생시킬 것인가. 나도 관심이 많은 주제고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기도 함. 하지만 이걸 '페미니즘'이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개인적 입장. '남자 문제'는 남자의 문제고, 결국 남자들이 해결해야 한다.

참을성 없고 공부 못하고 말 안 듣는 남자애들이 여학생 여선생에게 끼치는 피해는 페미니즘 이슈. 하지만 그 남자애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며 개선시킬 것인가는 페미니즘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 현실은 그런 남자애들이 '역차별' 안 당하게 근대 교육을 형해화시키자는 분들까지 나오는 지경.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역습, 이른바 '백래시'는, 바로 그렇게 '소외 계층 보듬기'의 탈을 쓰고 도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