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노자의 '도덕경'과 보수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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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안병현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 일명 '곤마리'가
출연한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제목이다. 독자 여러분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체구의 일본 여성이 미국의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나긋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일단 가진 걸 모두 꺼내어 쌓아놓은 후,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엄격한 순서가 있다. 옷,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일단 몽땅 꺼내서 쌓아놓는다. '내가 이렇게나
짐이 많았어!'라고 경악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판단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이 핵심이다. 옷이건 책이건 옛날에
찍은 사진이건,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레면 잘 정리해서 간직하고, 설레지 않으면 물건에
'고마웠어'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버린다.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쌓여 있던 과거와 선을 긋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걸까? 일본인은 좁은 집에 산다. 정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반면 넓은 집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의 경우 정리를 하지 않아도 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설레는' 것만 남겨야 하는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곤도 마리에의 주장은 그렇게 철학적 맥락을 띠게 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노자 철학의 일부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도덕경'의 11장을 펼쳐보자.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꽂혀 있으니, 바퀴통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어도 방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의 쓸모 덕분이다. 있음과 없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관계가 순환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 대목 중 하나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동아시아인들은 이 논의에 너무도 친숙하다. 많은
경우 이것을 철학적 논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곤도 마리에가 찾아가는 미국인들, 심지어 넷플릭스로 지켜보는 모든
이는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 가족이 사는 집, 각자 눕는 방, 심지어 자주 안 쓰는 물건을 치우는 창고까지도, 꽉 차 있으면
쓸모를 잃어버린다. 비어 있어야 쓸모가 생긴다. 더 좋은 삶과 경험을 채워넣으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는 가족이 살아가는 집보다 더 큰 단위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4월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후에도 끝날 기미가 없는 미래통합당의 내부 분열 및 의기양양한 청와대와 여당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보수 정치라는 집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을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에 따라 살펴보자. 옷.
새로 맞춘 핑크색 옷이 한가득 쌓여 있다. 설레는가? 그럴 리가. 책과 서류는 어떨까. 오랜 집권 경험을 지닌 거대 정당으로서
막대한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된 바 없다. 쌓여만 있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품들은? 선거를 앞두고 '잔재주'를 부릴 법한 시점이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수 정치라는 집은
있긴 한데 쓸모가 없는 것들로 꽉 차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늑하기는커녕 퀴퀴하고 답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추억의 물건을 살펴볼 차례다. 돌이켜보면 나쁜 것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당시,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내놓았던 일련의 정책들을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여러 과오와는 별도로 오늘날까지도 참고할 만한 지점이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도 모든 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공무원 연금 개혁의 화두를 제시한 정치적 용기만큼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쓸 수 없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이, 친박 양대 계파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쇄신하지 않았다. 탄핵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치는 설레지 않는 것들을 잔뜩 끌어안고 버티고만 있었다. 결국 국민이 보수를 통째로 내다 버리고 만 것이다.
여당과
청와대 역시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북한 깜짝쇼 따위 집어치우고, 국가에 필요한 인기 없는 정책을 펴나가야만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미래를 위한 노동 개혁이 절실하다. 21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권이 슈뢰더
총리의 지도하에 감행한 하르츠 개혁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문제다.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에게만 유리한 노동 구도를 타파하여, 상위 20%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하위 80%를 좀 더 폭넓게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온 국민이 창의적으로 일자리를 오가고 만들어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벌어질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형에서 한국이 국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의지가 없다.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국회 의석도 3분의 2나 되는데 뭐가 두려워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쓰지도 않을 것을 모아만 놓는
이들을 '호더(hoarder)'라 부른다. '지지율 호더', 문재인의 지금 모습 아닌가. 지지율은 정책으로 환산되어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 경제가 무너지면 지지율도 의미가 없다. 김영삼은 지지율 90%를 넘긴 적도 있지만 정권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첫 주말이다. 나들이 길에 나서는 건 성급할 수 있다. 나는 집 정리를 할 계획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털고, 안 쓰는 물건들을 내다 버릴 것이다. 그래야 뒤늦게 찾아온 봄을 신선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벌어지기를 바란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국민을
설레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다버린 후, 진짜 설레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이제 과거와 작별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다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보내주자.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 2020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주말판 게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8/2020050802565.html
* 참고: 기사에 포함된 일러스트는
이 게시물의 사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