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3

외출복을 입고 엘리베이터 옆에서 자는 예술가

그래서 그는 승강기 옆에서 다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도시 전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체포되는 모습만은 보여주지 않으려고 똑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밤마다 그는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잠든 딸에게 키스하고, 잠 못 이루는 아내에게 키스했다. 아내의 손에서 작은 가방을 받아 들고 대문을 닫는다. 마치 야간 근무를 하러 가는 사람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로 그랬다. 그런 다음 과거를 생각하며, 미래를 두려워하며, 짧은 현재의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거기 서서 기다렸다. 종아리에 기대어놓은 가방은 그를 안심시켜주고,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려는 것이었다. 실용적인 조치였다. 가방 덕분에 그는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주도자로 보였다. 전통적으[78쪽]로 손에 가방을 들고 떠난 사람들은 되돌아왔다. 잠옷 바람으로 잠자리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

이것이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 중 하나였다. 거기 서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용감한 행동일까 비겁한 행동일까? 아니면 둘 다 아닌--그저 합리적인 행동인가? 그는 답을 찾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79쪽]

줄리언 반스, 송은주 옮김, 『시대의 소음』(경기도 파주: 다산북스, 2017)
 

쇼스타코비치. 혁명. 소련. 숙청. 예술.

2020-08-11

앨버트 O. 허시먼, 노정태 옮김, 『정념과 이해관계』(서울: 후마니타스, 2020)

 

번역한 책이 나왔습니다. 앨버트 O. 허시먼의 <정념과 이해관계>. 자본주의가 역사의 승자로 자리매김하기 전, 어떤 정치철학적 논쟁을 통해 지금의 위치를 확보했으며, 어째서 그런 논쟁들이 잊혀지게 되었는지 따져 묻는, 짧지만 강렬한 대작입니다.

저는 정치학, 경제학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런 제게 이런 책을 번역할 기회를 주시고, 무한한 인내로 기다려주신 후마니타스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번역은 여러모로 미흡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허시먼은 '쉽고 명료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렵고 좋은' 문장을 쓰죠. 그가 전개하는 심도 깊은 논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루 질정 부탁드립니다.

2020-08-04

행정수도,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아니냐, 한 나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수도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께.

미국의 수도가 왜 워싱턴 DC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여 13개 주가 연방을 결성할 때, 가장 힘이 셌던 두 도시가 있습니다. 뉴욕 주의 뉴욕 시,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 시.

지금 구글 지도를 펴서 미국의 동부 지도를 보십시오. 워싱턴 DC가 어디 있습니까? 네, 그렇죠. 뉴욕과 리치몬드의 중간에 있습니다. 가장 힘이 센, 남부와 북부를 대변하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연방의 수도를 새로 만든 겁니다.

이건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인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힘이 센 도시 두 곳은 어디? NSW의 시드니, 그리고 빅토리아주의 멜버른. 그럼 연방국가 호주의 수도는? 그렇죠.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 지대에 만든 인공 도시 캔버라가 되는 겁니다.

캐나다의 수도가 오타와인 이유도 똑같습니다. 서부가 개척되기 전, 가장 센 도시 두 곳, 몬트리올과 토론토. 둘 중 어디도 자체적으로 수도가 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기에 중간 지점인 오타와가 연방의 수도로 낙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세종이 무난하게 행정수도로 기능하려면, 부산이 서울에 맞먹을만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1차 세계대전 수준의 무장을 해서 전쟁을 했을 때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만큼) 힘이 강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 지점인 대전이나 그 인근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게 말이 되죠. 아니,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서울과 수도권을 합치면 인구의 절반이 들어가고 산업생산 역시 절반을 넘깁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권역은 중화학공업 생산기지와 항구를 가지고 있지만 수도권과 별도로 헤게모니 싸움을 할 역량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서울은 장기적으로 황폐화되고, 잘못 만들어진 세종시가 제2의 서울 강남 기타등등이 되어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골때리는 수도권 과밀 현상을 겪게 될 겁니다.

한국의 식자층 여러분, 꿈을 꾸는 건 좋지만,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소리들을 좀 하고 삽시다. 한국은 앵글로색슨이 주류가 되어 만들어낸 연방국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 나라의 풍토에서는 '행정수도' 같은 기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부의 핵심 기능을 세종으로 옮긴다는 건, 그냥 서울을 다 옮긴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세종으로 옮기면, 지금 서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몇 배 더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현될 겁니다.

덧) 한국의 행정수도 논란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2020년 현재, 갑자기 프랑스가 '국토 균형 발전'을 꾀한다며 파리와 마르세유의 중간 지점인 (심지어 제3의 도시 리옹도 재껴둔 채) 군소 도시 클레르몽페랑을 수도로 삼네 마네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이 수도 일극에 집중된 다른 나라를 예로 들어보니 감이 확 오지 않습니까?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운운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큰 혼란과 재앙을 초래할지?

덧2) 일본은 관서의 오사카, 관동의 도쿄가 전쟁을 해서 도쿄가 이겼죠. 도쿄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고히하고자 천황을 '모셔와서'(납치해와서) 도쿄에 데려다 놓고 있고요. 그래서 일본의 수도는 지금껏 도쿄인 겁니다.

아, 국토의 균형 발전, 그거 참 좋은데, 일본도 도쿄와 오사카의 중간 어디쯤에 행정수도를 만들면 좋겠네요.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입장에서 절호의 기회가 될텐데.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을 추격하는 경쟁국들에게 아주 큰 기회를 공짜로 헌납하고 있는 셈입니다.)

2020-07-30

정진웅 부장검사의 폭행: 사안의 본질은 가학수사

정진웅 부장검사가 한동훈 검사장의 스마트폰 USIM을 뺏는다는 명분 하에 달려든 사건에 대해, 사건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 본질을 호도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사안의 본질은 가학수사다. 국가가 범죄 수사를 명분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 피해자가 검사장이건 시정잡배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때린 게 핵심이다. 박종철을 '탁'하고 쳐서 '억'하고 죽었다고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수사기관이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주하는 용의자를 체포할 때 뿐이다. 그 외의 경우에 수사기관이 폭력을 쓰는 게 용납된다면, 해당 국가는 순식간에 독재로 돌아가고, 경찰은 그 독재의 도구로 악용되게 된다.

검사들끼리 '개싸움'한 거라고? 프로레슬링 같은 거 했다고? 그런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당신들은 다가오는 독재의 위험을 애써 무시하려 드는, 신독재세력의 부역자들이다. 사안의 본질은 인권이다. 그것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언제나 가장 중요하게 보호되어왔던, 피의자의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함께 진지하게 분노해야만 할 시점이다.

2020-07-27

캐릭터의 제약과 난이도의 문제

조지 R. R. 마틴에게 있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중 가장 쓰기 어려운 캐릭터는 브랜이었다고 한다. 가장 어리고, 게다가 이야기의 초반에 추락하여 두 다리를 잃은 후로는 다른 캐릭터에게 의존하는 캐릭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좀 더 심층적으로 해석해보자. 캐릭터에게 제약이 존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작가는 캐릭터가 지니는 불리한 요소들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내면과 활동을 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게 되고 만다.

이는 요즘 잘나가는 '웹소설'이라는 장르에 왜 이렇게 '전생물'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사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생의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가는 '사이다' 구성이, 구체적인 장르를 불문하고 웹소설의 표준적 작성 방식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다'를 원하는 대리만족의 욕망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조지 R. R. 마틴이 브랜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현생을 다시 살아가는 먼치킨 캐릭터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고생하는 캐릭터에 비해, 작가 입장에서 보면 훨씬 '쉬운' 캐릭터임에 분명한 것이다. 만들기도 쉽고 이야기도 술술 풀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공급이 끊이지 않으므로 재미를 찾는 독자들은 공급되는 것을 읽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안고 태어나는 자의 정신적 황폐함'에 대해서는 이미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갈데까지 간 사고실험을 해서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물은 계속 나올 것이고, 독자들은 계속 소비할 것이다. 혹자는 손쉽게 독자들의 수준을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생산자들의 문제가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