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아침… 박정희·김대중 그리고 일본에 대한 자유를 생각한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에리히 프롬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1832년 6월, 파리. 군주제 폐지를 외치며 공화주의자들이 봉기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신분을 감추고 잠입해 있던 자베르 경위는 곧 발각되고 포로로 잡혀 기둥에 묶인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 그의 앞에 권총과 단도를 든 장발장이 나타났다. 자베르는 자신이 쫓던 전과자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연한 죽음을 준비한다.
범죄자는 악이고, 미천한 존재이며, 자유인이 아니기에, 일말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 자베르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발장은 자베르의 결박을 풀어주고 나중에 찾아와서 자신을 체포하라며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자베르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애원한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그러나 장발장은 허공에 총을 쏴 자베르를 처형한 것처럼 위장한 후,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둘러업고 하수구를 통해 탈출한다.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이다.
빅토르 위고에게 있어서 장발장은 완전한 도덕과 신의 윤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반면 자베르는 인간이 만든 불완전하고 잔인하며 맹목적인 법의 화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의도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장발장과 자베르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다양한 철학자, 특히 이사야 벌린과 에리히 프롬이 중요하게 다룬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대립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 자유란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freedom from'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을 자유처럼 외부로부터 부정적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소극적 자유다. 자베르를 죽였다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자유이기도 하다. 반면 적극적인 자유란 'freedom to'로 표현된다.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마리우스를 구출하여 수양딸의 약혼자를 지켜내면서 장발장이 쟁취한 자유인 셈이다.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가 자유의 본령이라고 보았다. '자유의 두 개념'에서 그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는 타인에 의한 사슬로부터, 감금으로부터,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라고 강조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이성에 의한 자기 지배'라는 개념을 깔고 있기에, '이성적인 우리가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전체주의 옹호론으로 악용 가능하며 경계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반대 방향의 논의를 펼쳤다. 왜 독일 국민들은 나치를 '자발적'으로 지지했을까? 근대화와 자본주의는 기존의 봉건적 질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소극적 자유를 강제당하는 역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독일인들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여 나치를 지지하고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폐해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동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고립감의 공포를 극복하는" 자발적인 활동, 즉 적극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프롬은 주장했다.
둘 중 하나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는 소극적 자유는 다른 이와 손잡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적극적 자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극적 자유가 없다면 적극적 자유도 성립 불가능하겠지만, 적극적 자유가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하면 마치 1930년대 독일처럼 소극적 자유 또한 금세 허물어지고 만다.
그런데 오직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소극적 자유만을 유일한 선으로 여기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룬다. 작년 광복절 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과 화해하고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그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는 올해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몇몇 사례만 꼽아보자. 네이버의 자회사인 한국계 기업 라인주식회사의 메신저 라인은 일본에서 카카오톡과 같은 위상을 차지한 국민 메신저다. 옛날에는 대중가요의 상당수가 일본 노래의 표절이거나 번안이었지만 지금은 트와이스의 뒤를 이어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니쥬'가 일본의 국민 아이돌 자리를 넘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온갖 경제 지표 역시 한일 간의 격차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은 소극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 아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과 경제의 문호를 개방하고, 1998년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문화의 창을 열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와 식민 지배를 겪었던 나라가 대등한 위치에 섰다. 미국과 영국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에 머물지 않고, 일본'에 대한' 자유를 국민들이 누리게 한 덕분이다. 적극적 자유의 기적인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극적 자유에만 집착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베르는 그 함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누군가 법을 어겼는지, 즉 감옥에 갈 사람인지 아닌지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용서하는 적극적 자유를 그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범죄자인 장발장에게 용서받고, 감화되어, 결국 장발장을 풀어주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가지 일이 그를 경악하게 하였던 바, 그것은 장발장이 그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이고, 다른 한 가지 일이 그를 아연실색게 하였던 바, 그것은 자기 자베르가 장발장을 용서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자베르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해방된 지 75년째, 우리는 선진국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식민 지배를 했던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피식민지배 국가로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일본에 대한 소극적 자유만을 외친다. 아직도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보는 듯하다. 마치 장발장을 끝까지 전과자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던 자베르처럼 말이다. 정작 국민들은 소극적 자유를 넘어 적극적 자유의 세계로 진입한 지 오래다. 내년 광복절은 보다 미래지향적인 날이 되기를 희망한다.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4/20200814024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