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1

정치의 철학화, 철학의 정치화 - 최장집 '고별 강연' 비판 및 실천적 방향에 대하여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라는 논의 프레임은, 결과적으로 볼 때 여러 사람 바보 만들고 정작 촛불시위에 대한 지적인 담론도 활성화시키지 못한, 거대한 패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최장집의 그간 논의 구도에서 볼 때 그런 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물론 정당하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 내"에서 자신의 정치학이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는1), 즉 학문적 발언과 그것의 정치적 해석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는 원로 학자로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유사 형이상학적 틀거리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는 담론을 내밀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최장집이 '고별 강연'을 통해 천명한, 학자 최장집 본인의 사상적 전향이 깔려 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글쓰기를 주저해왔던 이유는,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서 길게 쓰면 잘 쓸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월요일 모종의 기회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우며, 그게 된다면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게 오래 품어온 논지를 꺼내놓고자 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자유의지에 의해 인과론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을 보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우리의 지성이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주 바깥의 것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그 각각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오는 것에서 굳이 답을 구하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국어에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라는, 대단히 부정확하지만 그 덕에 어디에나 갖다 써먹게 되는 '형이상학적' 대결 구도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너는 이상주의자이다'라는 식의 개인적 매도에 활용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이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을 이상주의자로 몰아갈 수 있다면 반 넘게 이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논쟁이 자신은 현실주의자이며 남들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했다는 그런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립시키고자 한다면, 최장집은 자신이 말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상당히 이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대립 구도가 언어의 형태로 던져졌을 때,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촛불의 정치학을 '직접민주주의'에 고스란히 투영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이들은 졸지에 나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예전같았다면 그 누구도 촛불의 흐름에 거슬러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더욱 선호한다'라고 용감하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최장집은 본인이 늘 해오던 말이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총대를 맸다. 최장집은 자신의 고별 강연에서 "낭만주의적/이상주의적 정치학(관점)"이 대체로 "진보파의 관점을 대변"하며,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회하거나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어떤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羨望)"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2)

여기서 여러 사람 바보 됐다. 우선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나는 직접민주주의자요'라고 말하면 그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베드로처럼 부인하면, '그럼 촛불을 끄고 국회의 개원을 촉구합시다'라는 온건한 자들에게 대꾸하기가 매우 난망해진다. '지금 이 논의는 다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는데, 그 정답을 그 타이밍에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미 프레임에서부터 말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은 최장집 본인에게도 닥쳐왔다. 그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대립 구도는,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다시 갖다 붙여본다면, 현실적인 맥락에서 볼 때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적이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더 많은 역량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보신당의 이론가였다면 "시민들의 일상적 정치생활의 형태가 운동이 아니라 정당이 되는 것이 중요"3)하다는 말을 하면서 슬쩍 입당 원서를 돌릴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 지향이 다를 뿐더러 학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결과 그는 '촛불의 발목을 잡는다'며 괜히 욕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의 지식 사회에서도, 별 쓰잘데기 없는 이상한 논쟁이 촉발되어 버린 탓에, 촛불시위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후에 등장한 무슨 웹 2.0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도 결국 최장집이 깔아놓은 논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다. 가령 웹 2.0의 가치를 목놓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결집된 이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외친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데, 이건 직접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이분법은, 담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등장하지 말았어야 할 이분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최장집을 적극적으로 탓할 생각이 그다지 없다. 최장집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마따나, 그는 자신이 늘 하던 말을 했을 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소홀히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이상주의 대신 현실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촛불시위를 이상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현실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어린이들로 몰아간 당시의 담론적 분위기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장집이 내놓은 발언으로 인해 이른바 '정치의 철학화'가 다시금 이 땅에서 시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느낀다.

정치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다루어졌어야 할 문제가, 어쩌면 그 자체로서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언어적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클리셰'에 묶여버렸다는 것은 너무도 뼈아픈 손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에게 기륭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얘기했다고 쳐보자. 그가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는 게 다 어려운 거 아냐?' 혹은 '결국 그 사람의 성공은 개인적인 노력에 달려 있지', 등등. 여기서 답이랍시고 나오는 이게 바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사이비 형이상학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대신 '사는 건 다 똑같다?'가 들어왔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구도는 칸트가 비판한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 대해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바로 저런 '형이상학'들이 논쟁을 좌우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신을 위로하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 내가 말하는 '정치의 철학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론은 담론적으로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상주의자, 철부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경험 없는 룸펜들, 이렇게 촛불은 담론의 전쟁터에서 패배를 향해 걸어가게 되었다.

최장집의 '고별 강연'을 꼼꼼히 잘 짚어보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장집의 정치적 패착이 '그냥 하던 것만 하다가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장집을 옹호하겠다는 사람들조차도 이 점을 지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도 참 게으르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최장집이 자신의 지적 원천을 마르크스에서 베버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할 때4), 지금의 정치 담론적 실패는 이미 그 속에서 예견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의 철학화'에 맞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그 중 하나는 마르크시즘적으로 하부 구조를 연구하여 상부 구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최장집이 촉망받던 학자이던 시절,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고 최근까지 진행하고 있던 작업들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노동운동의 조직화 실패를 통해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헐거움을 논했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끌어들여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가 움직이는 방향을 관찰했다.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권위주의시기에 노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와 정당을 고민"5)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범 한나라당 계열 의석이 개헌선을 넘기거나 그에 육박하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대체 왜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대권을 내주고도, 한국의 시민들은 다시 한나라당에게 몰표를 안겨주었는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6)가 최장집의 정치학이 지향하는 바라면, 대체 왜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 모두를 압승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정치학자' 최장집에게 바라던 바일 것이다.

하지만 총선 과정에서 나온 최장집과 최장집 학파의 분석은, 너무도 급박한 나머지 기존에 그들이 하던 것과 같은 충분한 깊이를 갖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한나라당으로 가득 차있는 국회를 놓고도 '대의민주주의'의 당위성을 강변해야 하는 변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민주당은 마치 '여당되기 vs. 고자되기'에서 용감하게 '고자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당연히 여당도 못 되었다). 한나라당의 내분은 '복당'이 테마였던만큼, 정치적인 이슈였지만 동시에 너무도 코믹했고, 실질적으로 대단히 가벼운 사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라는 자신의 테마를 유지하는 것은 학자로서 존경받을만한 대단한 뚝심임에는 분명하지만, 원내 정당정치가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운동의 역할 축소"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외고집이다. 지금은 정당의 외연이 운동으로 넓어져야 하고, 동시에 정당이 운동의 역량을 흡수하여야 할 시점이다. 촛불시위의 동력이, 오래 갔다면 오래 간 거지만, 재생산되지 못하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흩어지고 만 것은 정당정치에 있어서도 큰 손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앞서 말한 '정치의 철학화'일 뿐이다. 그것은 최장집이 정당정치의 복원을 위해 "좋은 정당의 출현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7)한다고 말하면서 확고해졌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베버가 정식화한 개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 단어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장집이 이후 '정치적 카리스마란 무엇인가'라며, 베버 자신도 단순한 관찰에 머물고 만 정치인의 카리스마에 대해 추가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설마 덜렁 내던져진 '카리스마'라는 단어 하나, 그게 우리가 "한국사례,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학을 탐구"하는 "지방(local) 그것도 변방의 정치학도"8)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나의 장집짱은 이렇지 않아!

나는 여기서 최장집이 베버의 '카리스마'라는 개념을 한국 정치에 적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념을 도입하면서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한국 정치에 새로운 언어를 주입해야 할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 경제는 위기에 처했고,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니미 뿡이고, 외교는 수렁에 빠졌다. 하긴 지금은 DJ 계열의 정치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을 상황이지만, 나는 최장집의 내용 없는 '카리스마' 언급이 결국 김대중에 대한 향수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고 싶다. 반대로 말하자면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바로 그렇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 모든 내용 없는 싸움은 결국 '정치의 철학화'를 가속화할 뿐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소득 차이가 더 벌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의 철학화'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국가가 왜 구제해줘야 하나요?'라는 식의 '철학적' 논의로 담론을 이끌어감으로써 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최장집이 베버의 어깨 위에서 추가적인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한, '카리스마' 또한 마찬가지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집단 지성이 중요하다'고 어떤 '민주주의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러면 최장집은 졸지에 엘리트주의자가 될 것이고, '엘리트주의 대 민중주의'라는 가짜 논쟁의 틀 속으로 또 빨려들어갈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지어 그를 옹호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조차도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다.

그의 '카리스마'론은 사실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었고 또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적 현실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이념적 색체가 뚜렷하고 당내 민주주의가 비교적 활성화되어있는 정당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내부 정치를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중요하다는 강조가 가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정치적 함의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 읽고 정치평론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전부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신영복의 '사람이 희망이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저 '좋은 소리'일 따름이다. *

내가 최장집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새삼스레 최장집에게 '실천적 이론' 을 내놓으라고 주문할 수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그는 내게 '이론적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장집을 한국의 지성계에서 빛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장집이, 한국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속을 꽉 채워주기를 지금도 바라고 있다. **

정리해보자. 한 시대의 담론을 이끌어오던 정치학자의 고별 강연을 비판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정치의 철학화가 아니라 철학의 정치화를 이룩해야 한다. 한국어 속에 횡횡하고 있는 사이비 철학들을 붙잡아내어 정교한 언어로 해체하고, 담론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기를 발라내야 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철학자들이 맡아오던 가장 유익한 과업 중 하나이다.

동시에 우리는 '수입상 컴플렉스'를 떨쳐버리고 한국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내에 수입된 수많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몰아낸 자리에 철학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수입되었다면, 스스로의 생명을 내던져 단식하고 오체투지하는 우리의 '투쟁'을 통해 그 책을 이해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너무도 특수하다느니, 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느니,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느니 투덜거리는 대신, 자신이 아는 그 무엇을, 그러므로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보느냐 마느냐이다.

정치의 철학화가 횡횡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말 그대로 지식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보다, 한국 사회의 무식을 타파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라고 생각한다(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그러므로 분명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철학을 정치화하는 것은 결국 같은 행동의 다른 이름이다. 성신여대에서 들려온 작은 승전보 하나에 기뻐해야만 하는 패배의 가을이다. 결국 우리는 지고 또 지면서도 꾸준히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싸우고, 싸우면서 공부해야 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정치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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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두 문단은 9월 12일 오전 2시 18분에 추가되었습니다.

1)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 1쪽, 두 번째 테제. 특히 "정치학은 현실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정치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적, 파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라는 10번째 문장에 주목할 것.

2) 같은 팜플렛, 2쪽, 12번째 테제.

3) 같은 팜플렛, 9쪽, 6번째 테제.

4)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5) 같은 팜플렛, 2쪽, 16번재 테제.

6) 같은 팜플렛, 2쪽, 14번째 테제.

7)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8) 같은 팜플렛, 3쪽, 7번째 테제.

댓글 8개:

  1.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이네요.
    퍼가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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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웃기는 것은 모두는 이상을 지향하면서도 또 현실 운운하면서 실제적으론 이상을 지양한다는 것인데 솔직히 이상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현실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할 테지요. 그런 의미로 철학의 정치화라는 말에 통감합니다.
    다른 글에서도 비췄던 현장에서 자위 또는 자조적 언행으로 빗겨가는 위선자들에 대한 생각의 편린, 그런 속임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입상 컴플렉스' 이것은 정말 고질인 듯싶어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죠. 도대체 담론을 위한 담론만 지껄이고 결국은 지 배운 척 하는 건지 이 땅에서 전혀 먹히지도 않는 남의 다리 긁는 짓은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란 생각이죠. 이 땅의 배웠네 하는 지식인들은 도대체 지식(이상)을 이 땅의 현실에 접합시키지 못하고 읊기만 하는 종다리 그 이상은 아니란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거든요. 어쨌든 최장집 교수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향후 그에 대한 어떠한 글이든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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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krinien/ 읽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글이 쌓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참 어렵더군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대립구도를 아예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최장집 본인도 자신이 '현실주의자'로 몰려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을 '이상주의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고'라고 할 때, 이미 패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 사람의 거대한 학자인 최장집을, 촛불시위 현장의 '비폭력주의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최장집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일테니 말이죠. 그건 비폭력을 외치며 발악하던 일부 머저리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수입상 컴플렉스'라는 단어에 대해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제 말은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가열차게 한국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방문자께서도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문제는 너무도 많은 인문학자들이,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갖추지 못하고,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느껴,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아는 그 이론을 적용하는 일을 매우 저어한다는 겁니다. '수입상 컴플렉스'는 그 자체가 문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수입상에 불과한 존재로 비하하는 인문학자들이 빚어내는 담론과 현실의 괴리, 그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필요한 일은 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거겠지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아직은 떠올리고 있지 못하지만, 문제의식만큼은 표명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제 생각을 조금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리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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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http://yhhan.tistory.com/entry/노정태의-최장집-비판에-대해

    한윤형 씨의 반론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없어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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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노정태가 만약 한윤형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했고, 코에선 콧방귀만 나왔다면 "이젠 이 친구와 대화가 안 되겠군" 하고 끊을 것이고, 한윤형 말이 납득이 된다면 입이 있어도 뭐라 할 말이 없겠지요. 한윤형님과 노정태님은 오랜 친구사이였던걸로 아는데, 이후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좀 궁금하기도 하긴 하지만, 뭐 남의 개인사를 너무 파려고 들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한윤형이 한국 지성하에 이름을 남기게 되어 누군가 그의 행적을 추적한다면 언급될만한 사건이긴 한 것 같습니다. 한윤형의 반론을 읽는동안 내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으니까요. 내가 저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무의식의 폭로를 당한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윤형은 노정태의 무의식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노정태의 무식을 폭로했다고 하지만, 노정태의 글이 그런 식으로 '흐르게'된 것은 당연하게도 노정태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일테니, 결과적으로 한윤형의 글은 노정태의 무의식의 적어도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입니다. 만약 노정태에게 그것이 먹혀들어갔다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강한 타격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짐작일 뿐이지만.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이런 타격, 제대로 들어가면 다리에 힘이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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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노정태가 만약 한윤형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했고, 코에선 콧방귀만 나왔다면 "이젠 이 친구와 대화가 안 되겠군" 하고 끊을 것이고, (2)한윤형 말이 납득이 된다면 입이 있어도 뭐라 할 말이 없겠지요."

      (1)입니다. 오래간만에 이야기가 나와 검색해서 찾아보니, 제가 던진 논의를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최장집의 총론은 동의할만한 거 아니냐, 거기에 대해 어떻게 반박이 가능하냐'고 하는데, 그게 바로 무식한 소리입니다. 그 (서로 충돌하지만 모두 옳을 수밖에 없는) 총론들끼리 정치를 '철학화' 하는 것이 문제임을 저는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이해를 못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한윤형씨에게 이 글을 독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소양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가령 최장집이 마르크스에서 베버로 지적 토양을 옮기는 과정에 대해 아는 게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저 블로그가 살아있을 때 누군가가 '정치의 철학화, 철학의 정치화는 벤야민에서 따온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 전까지 그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니, 그만큼 덜 보였을 것이고, 그러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냐하면 웹 2.0 담론은 최장집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등장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지엽말단적인 꼬리물기 뿐이겠습니다. 웹 2.0을 김호기가 만들었나요? 미국에서 나온 단어를 수입한 거죠. 웹 2.0에 대한 저의 이 포스트의 언급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웹 2.0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내의 담론은 최장집의 발언 이전과 이후에 모두 동일하다, 그로부터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윤형씨가 저 지점을 논하는 방식은 그냥 꼬투리 잡기입니다. 다른 '논점'들도 다 거기서 거기고요.

      착각은 자유고 지능과 감수성은 유전과 환경의 조합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이들은 당연히 관용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저렇게 길게 악다구니를 쓰는 누군가에게 제가 대꾸를 해줘야 할, 아니 대꾸를 하기 위해 계몽을 해줘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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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랬군요... 어찌된 일인지 원래 댓글 단 사람이 아니라 제가 들어와서 "그랬꾸먼..." 하고 가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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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구슬이 서 말이여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옛 어른들 말씀이 떠오릅니다. 쿨럭..
    추운 겨울에 엔진이 얼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가려면 시동을 최소한 걸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주저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를테면, 차 키의 열쇠고리 모양은 이게 어떠냐라는 문제로...혹 잘못 이해했나요?

    2014년 10월 말에 읽어보는 이 글의 주장에서 과연 현재 한국은 한 발자국도 앞서가지 않은 듯 보입니다. 수 많은 커뮤니티와 '대화장소'는 늘어났지만,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라고는 '취존'과 '케바케'라는 말 뿐이니까요. 짧고 배움도 적지만, 나름 사회문제를 보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명확한 스탠스가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바탕으로 해결방안을 내놓은 뒤, 지적(知-)이고 약자와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들은 뒤 -비록 상당히 듣기 거북하고 고역일지라도- 하나의 문제라도 해결하는 게 사회의 변화에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SNS 아이디도 없고 인터넷 커뮤니티도 들어가지 않습니다만, 나름 네임드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SNS나 블로그를 기웃거립니다. 최근에 노정태님의 트위터에서 '부르주아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고백하면, 저 또한 고등학생때부터 몇 년 전까지 '부르주아 페미니즘'을 상당히 꼬갑게 보았습니다 (당시 마르크스를 어설프게 읽은 뒤, 엄청난? 계급주의자로 거듭나서라고 자위해봅니다.), 갑자기 다시 예전에 읽었던 페미니즘책,철학책(그래봐야 총합 몇권 되겠습니까..하하),여러 논객이나 지식인들의 글을 다시 음미(논객시대가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1판1쇄본을 갖고 있기에 절판되어도 좋습니다? ^^)해보면서, 그 생각이 얼마나 한심한지 깨달았습니다.. 운동의 역량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 힘 + 다른 힘 + 알파'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회의 끝없는 불신으로 인한 투박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튀는 것을 후에 정렬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 없다면 미래세대에 아직 희망의 물꼬라도 같이 만들지는 못해도 지지는 하겠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20대 초반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알게된 듯 합니다.

    제 덧글이 노정태님의 글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남길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인터넷에 쓴 글을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저의 치부를 스스로 남기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보잘것 없는 짧은 글을 남길까 합니다. 잊지 않으려고요.

    P.S : 그러면서 익명으로 남기는 것을 뭘까요. 네, 겁쟁입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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