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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7

[북리뷰] 그래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6만원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47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후, 미국은 큰 병력 손실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로의 상륙 작전 대신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전의를 꺾는 쪽을 택한다. 그 후의 역사도, 강대국끼리의 무력 충돌만 없다 뿐이지, 피로 점철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미국의 대리전이기도 했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간중간 벌어진 온갖 끔찍한 테러까지. 우리가 아는 20세기 이후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과 기술,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인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며 살해하는 대량살상기계로 둔갑해 인간을 옥죄어온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바로 그와 같은 비관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미 핑커는 『빈 서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과 같으며 올바른 양육, 즉 교육을 통해 모든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보 진영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었던 전례가 있다. 그런 그가 인류 역사 전체를 무대로 삼아 실증주의적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최악이다'라는 선언적 전제가 왜 문제인가?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방부제일 뿐, 당장 우리들 중 그 누구도 100년 전은 고사하고 1970년대로 돌아가 살라고 해도 거부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비관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이 너무도 크다는 것이다. 명백히 확인되는 과학적 사실을 거부하고, 인류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자 결과물인 근대성을 부정하며, 이성에 의한 인간의 폭력적 욕구 통제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개인주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 이성(reason), 과학의 힘이 가족, 부족, 전통, 종교를 잠식하는 현상으로 규정되는 근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이런 변화의 유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곧 오늘날의 세상을 범죄, 테러, 집단 살해, 전쟁의 악몽으로 보느냐 아니면 역사적 기준으로 보아 유례없이 평화적인 공존과 축복의 시기로 보느냐에 따라, 참으로 많은 문제가 결정된다."(14쪽)

중앙집권적 궁정사회의 출현이 개인에게 에티켓을 강요하면서 그들에게 현대적 도덕을 내재화하고 중세인들을 순치시켰다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주장했다 핑커는 그 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명화 과정'이 실제로 남의 총이나 칼 혹은 도끼나 망치 등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숫자를 줄이는 결과를 불러왔음을 숫자와 그래프로 그려낸다. "유럽은 도시화, 세계주의, 상업화, 산업화, 세속화를 겪을수록 점점 더 안전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현상을 유효하게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 즉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견해를 떠올리게 된다."(137쪽)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를 다른 대형 사건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화'하는 등의 작업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대목을 통과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 아주 묵직하고 두툼한 위안이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특히 이성의 힘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복받쳐오르기 때문이다.

2016.12.27ㅣ주간경향 1207호

2016-12-13

[북리뷰] 박근혜를 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조성주 지음·후마니타스·9000원

광장에는 논쟁이 피어난다. 11월 26일 제5차 촛불문화제 무대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왕년의 '악동' 힙합 그룹 DJ DOC를 둘러싼 논란이 그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박근혜를 '미스박'이라 칭할 뿐 아니라, '문고리 삼인방'에 대해서는 국민에겐 사과없이 fuck그네만 / 챙겨 양심팔아 돈을 땡겨"라는 식의 원색적인 욕설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스박'이라는 표현이 여성비하적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만 하는가? 놀랍게도 적잖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목청높여 '상대가 대통령이니까 괜찮다'느니, '원래 '미스'라는 말은 존칭의 의미로 쓰인다'느니,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조성주의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을 펼쳐들 때다.

조성주는 칼 세이건을 읽고 천문학자의 꿈을 꿨던, 하지만 막상 천문학과에 진학해보니 자신의 관심사는 먼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있음을 깨달은 청년 정치인이다. 그는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3위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그가 2015년 정치발전소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보다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그 시기에 필자의 고민을 많이 정리해준 책이 바로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었다."(9쪽)

조성주의 강의에 귀를 기울여보자. "알린스키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태였다."(38쪽) 노동조합, 이민자 중하층 계층, 지역사회 운동가, 흑인 민권운동가, 반전 운동가 등 한데 묶기 어려운 진보 세력을 규합해낸 로버트 케네디가, 그의 형 존 F. 케네디처럼 암살당하고 난 후 치러진 전당대회였다. 충격과 좌절에 빠진 급진주의자들은 폭력 혁명 노선에 경도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통해, 실망하고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끈질기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자고 설득하고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42쪽)

알린스키의 입장은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철저한 현실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마치 저 먼 곳의 수평선같은 이상으로서의 진보를 제시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룰에 맞춰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린스키의 투쟁론은 '당위로서의 정치'가 아닌 '윤리로서의 정치'를 제시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 조성주의 설명이다.

알린스키의, 혹은 알린스키를 사숙한 조성주의 현실주의는 그러나 '윤리적 기준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 기준마저도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인식하고 궁극적으로는 지켜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조성주는 한탄한다. "알린스키가 50여 년 전에 지적한 미국의 모습은 어쩐지 2015년 한국 진보 진영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닭그네' '쥐새끼' '견찰' '색검' 따위의 단어는 풍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여성에 대한 비하를 서슴치 않는 경우도 많다."(67쪽)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증오의 표출이 우리 편이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거나 단결을 강화해 주는 것도 아니"(67쪽)라는 것을 말이다.

'쥐박이'라고 이명박을 욕했고,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이제 박근혜를 욕하지 않으면서 이겨내기 위해, 알린스키의 실용주의로 맞서야 한다.

2016.12.13ㅣ주간경향 120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2061009171&code=116

2016-11-29

[북리뷰] 광장의 불꽃은 백년 넘게 타오르고 있다

1898, 문명의 전환
전인권·정선태·이승원 지음·이학사·1만8000원

정치학자 전인권에게는 꿈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원을 정치사상사의 관점에서 밝혀내고, 이 나라가 직면한 제반 상황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의 그를 병마가 덮쳐왔고, 전인권의 미완성 원고를 그의 동료인 정선태와 이승원이 이어받았다.

<1898, 문명의 전환>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왕조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거듭났던 그 순간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주체는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대한국민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든 주권자들은 부정과 독재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쫓아냈고, 빈 틈을 노리고 들어온 군부에 잠시 권력을 내줬지만, 기어이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 직선제 민주 헌법을 이룩해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대한국민은 3·1운동을 통해 이 나라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런데 갑오개혁이 시작된 것은 1894년이고, 3·1운동은 1919년이다. 불과 25년 만에 조선의 신민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전인권은 역사학계의 통념에서 벗어나 한 매체와 그 매체로 인한 정치 운동에 주목한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고문 자격으로 돌아온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시작된 후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만민공동회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의 순한글신문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혁신적으로 가독성을 끌어올린 <독립신문> 덕분에 새로운 공론장이 탄생했다. 말하고 읽고 쓰게 된 조선왕조의 백성들은 광장에 모여 밤을 새가며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한 끝에, 상호 간에 평등하며 근대적인 정치 체제의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주체가 비교적 소수의 엘리트였다면, 만민공동회는 대중들이 이끌어간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정치운동”(169쪽)이었다. 하지만 기존 역사학계는 민중주의 사관에 집중한 나머지 동학농민운동을 주요 사건으로 되새기면서 만민공동회를 다소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새로운 매체와 광장에서의 모임을 통한 새로운 정치의식의 출현. 전근대사회의 신민에서 근대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그 중대한 의미를 병상에 누워 정선태와 이승원에게 남길 유언을 녹음하던 전인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시 문명의 전환이 왜 1898년이냐, 1876년 개항일 수도 있고, 김옥균이 쿠데타 한 때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근대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출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하고, 과거 백성들과 신민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새롭게 호명되면서, 균질화된 혹은 동질화된 그 자격을 가지고 공론장에 참여하고 있는 이 형태.”(304쪽)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광장’의 체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성공하고, 가끔은 실패했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정치적 주체화의 도저한 흐름 말이다. 우리의 문명은 바로 지금 한 단계 더 나아가야만 한다.

2016.11.29ㅣ주간경향 1203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221050471&code=116

2016-11-15

[북리뷰] 늑대왕 로보와 시튼, 그 문제적 관계

커럼포의 왕 로보
윌리엄 그릴, 찰리북, 1만5천원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동물학자 어니스트 시튼은 자신이 관찰하고 겪은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커럼포의 왕 로보'다. 미국 뉴멕시코의 커럼포는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가 지배하고 있다. 로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 염소, 개 등을 물어죽이고 사냥하며 커럼포의 목장주들의 골칫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초청받은 시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보를 추적한다. 강력한 독약을 정성스럽게 만든 미끼에 설치하고, 비싼 덫을 놓았다. 하지만 로보는 시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보다 영악해서, 그 어떤 미끼도 물지 않고, 덫도 피하며,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그 위에 똥을 싸놓기까지 했다.

시튼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동물학자였다. 그는 로보의 무리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감히 로보를 앞서나가는 어떤 늑대가 있다는 것. 암컷이었다. 시튼은 그 늑대가 로보의 짝임을 직감한다. 흰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컷 늑대 블랑카. 블랑카를 잡으면 로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블랑카의 시체를 찾기 위해 로보는 평소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을 함정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시튼에게 붙잡혀,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윌리엄 그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로 색연필을 이용한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로보와 블랑카, 로보의 무리, 사냥당하는 동물들, 그들을 추적하는 시튼의 모습을 담아냈다.

단지 그림만 다시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시튼이 로보를 사냥해낸 후 늑대 보호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튼이 깨달은 바, 로보가 가축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 다른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그릴의 로보 이야기는 시튼의 원작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맥락에 맞게, 야생의 피 냄새를 파스텔톤으로 지워내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커럼포의 왕 로보>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며, 고전의 리메이크라는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몇 개의 고민이 뇌리에 남는다. 시튼은 로보를 죽이고 나서야 늑대의 '보호'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그릴은 그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현대적 맥락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은, 늑대의 야생성을 이미 거세한 후에 벌어지는, 안전한 '애도'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정복한 자연만을 '보호'하며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네스트 시튼의 로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갱스터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가 짐덩어리밖에 안 되는 철없는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몰락을 위해 종종 포르노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암컷 늑대 블랑카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한' 이야기이며 우리를 고민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면이야말로 <커럼포의 왕 로보>를, 윌리엄 그릴의 것이건 그 원작이 되는 어니스트 시튼의 것이건, 두고두고 되짚고 곱씹어야 할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11.15ㅣ주간경향 1201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090916411&code=116

2016-11-01

[북리뷰] 만주를 생각한다, 철도를 고민한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산처럼, 1만2천원.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의 끝인 지브롤터까지 향하는 꿈.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대륙을 향한 철도의 로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만주에 철도가 깔리던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민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만주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이 뒤섞이는 점이지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교수인 고바야시 히데오의 책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를 펼쳐보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일명 '만철'은 한때 설립되고 사라져버린 일개 기업이 아니었다.

정식명칭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 책에서 그 '탄생부터 사망까지'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이 회사가 가진 의미를 고찰해보려 한다. 1906년부터 1945년까지 20세기 전반의 반세기를 버텨온 이 회사는 일본 최대의 주식회사로서 중국 동북(東北)지역, '만주'에 군림했다. '만주'의 중요 산업을 지배하고, 철도 인접지역에 '부속지'라는 이름의 '영토'를 가진 이 회사는, 명칭은 주식회사였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식민지 국가였다. 세칭 '만철왕국.' 이 회사는 물론 중국 동북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일본 국내에도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15쪽)

마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이라는 국가 이전에 동인도회사라는 한 기업이 먼저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일본의 만주 지배 역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프로젝트였지만 만철이라는 한 기업의 영리 활동의 외관을 빌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얻어낸 철도 영업권 및 철도 부속지 관할권을 메이지 천황은 만철에 일임했고 야심만만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미개척지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주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청나라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그 진공에 수많은 세력들이 동시에 빨려들어갔다. 그런 만주에서 철도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관차와 열차 및 기타 부속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재료를 공급하는 제철소, 그 모든 시설과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세력까지 포괄하는 준 국가 활동과 다를 바 없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그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일본의 대장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통제와 관려통제를 섞어서 짜낸"(16쪽) 통제경제의 모델을 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만철 조사부는 1937년부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30여년 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군복무를 한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안산(鞍山) 제철소와 쇼와(昭化) 제강소를 중심에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기술력을 동원해 포항제철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만철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짧고 가벼운 책은 일제강점기 만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낸다. '광활한 만주벌판', 그곳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다.


2016-10-18

[북리뷰] 진정성을 갖고 작성한 사망진단서라는 거짓말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마티, 1만6천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표기한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를 재논의하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는 일반 지침과 다르게 작성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담당교수가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진료를 시행했으며,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말이다.

과학의 일부인 의학적 진술에 '진정성'이라니. 즉각적으로 조롱이 뒤따랐다. 주치의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진정성 따지고 들 거면 대체 한의학은 왜 비판하냐, 의사들이 결정적인 국면에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하니까 허현회 같은 대체의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이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책꽂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꺼내들었다.

2008년 여름,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가 아내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중고 요트 여행을 하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특공대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과 함께 책은 시작된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털어 중고 요트를 산 후,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우글거리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10쪽)

이 사례만 들어도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소비주의, 대량생산, GMO, 화학적 생산물, 기타등등 '현대적'(modern)인 것과 대척점에서 '진정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이제 제주도는 틀렸다. 산티아고나 히말라야에서 트래킹을 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개천의 물을 퍼마시고 과탄산소다를 풀어 빨래를 하는 삶이 '친환경적'인 것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진정한' 면역력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는 백신을 거부하고 서로 병을 옮겨주는 '수두 파티'를 벌인다.

캐나다의 트렌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현재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앤드류 포터는 전공인 철학 위에 다양한 대중문화적 지식을 접목하여 21세기 현재의 진보 운동이 빠져 있는 '진정성'의 늪을 파해쳐 보여준다. 그가 조지프 히스와 함께 쓴 책 <혁명을 팝니다>에서 보여줬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퇴행적 이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성'에의 추구와 파시즘에 대한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평범한 대중들과 달리 '깨어있는' 나는 대량생산되는 GMO 작물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는 자부심 느끼기.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분짓기'의 욕망이다. 그러한 '진정성' 담론이 힘을 얻을수록 수많은 인류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고 범죄율을 떨어뜨린 "자유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과학·법률·정치적 기반과 그 속에서 번성하는 문화"(312쪽)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찾아 야만과 폭력이 들끓는 전근대의 망망대해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진정성'을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진정성'에의 호소가 권력을 향한 전근대적 복종의 습속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북리뷰]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맨박스
토니 포터, 한빛비즈, 1만4천원.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말을 우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남자다움'의 틀에 갇혀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고, 여자들과 가까워지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일하는 기계'로 살다가 늙은 후 황혼이혼을 당한다는 것이 오늘날 남성의 인생을 애틋해하는 표준 서사를 이룬다. 이게 다 '남자답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남자들은 더 이상 '남자답게' 굴지 않겠다, '여자를 지켜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못난 풍경도 더러 눈에 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토니 포터의 책 <맨박스>는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남자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 그로 인해 남성 스스로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서사를 이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가이며 사회운동가로서 오래도록 남성들을 상대해왔던 토니 포터는 남자들, 특히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들에게, 값싼 면죄부 대신 유죄 판결을 내린다. '남자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펼친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박스는 그 속에 갇혀 있는 '선량한' 남자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남자들이 갑갑해하면서도 결국 여성을 향한 그 억압을 용인하는 사이, 세상은 점점 더 나쁜 곳이 되어간다고 고발한다.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그리고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들이 맨박스 안에 엉켜 있다.(41쪽)

매력적인 목소리와 화법으로 '맨박스'에서 남자들이 나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토니 포터의 TED 강의만을 생각하던 이들,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서술은 어쩌면 공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한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로,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 역시 맨박스 속에서 그것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는 한, '나쁜 남자'들이 저지르는 직접적 폭력을 거들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일단 남자들에게 맨박스의 존재를 알리고, 맨박스가 이끄는대로 '자동 주행 모드'로 살아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남자들이 "일단 현실이 어떤지 알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성 모임에서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43쪽) 기존의 남성성 모델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남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보다 평등하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며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 스스로에 대해서도 억압하지 않은 성 역할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맨박스>는 한 활동가가 평생에 걸쳐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지도해왔던 내용을 최대한 평이한 문체와 짧은 분량에 담아낸 책이다. 토니 포터가 가진 자기 확신, 카리스마, 설득력 넘치는 화법 덕분에 그는 수많은 남자들을 맨박스에서 끄집어내는데 성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저작물은 국내에 소개되면서 종종 오해받는 듯하다. '착한' 남자,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남자마저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당연시하는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는 공범인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이 책의 메시지를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2016.10.04ㅣ주간경향 119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9270958021&code=116

2016-09-13

[북리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성 지배
피에르 부르디외, 동문선, 1만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피에르 부르디외는 알제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전공은 사회학이었지만, 알제리대학교에서는 알제리의 카빌 지역 내 전통 사회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했던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바로 <남성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남성 지배'라는 현상에 대해 민속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남성 지배',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그 현상은 이른바 "공론(公論)의 모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잘못된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로 인한 억압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남성 지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강요되고 강요받는 방법 속에서 그러한 모순된 순종의 예를 줄곧 보아 왔다."(7쪽)

우리는 이 책의 논의 대상인 알제리의 카빌 지방, 그곳에 살던 베르베르족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성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동원했던 논리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카빌 사회에서처럼 성의 질서와 성의 차별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우주를 주관하는 대립의 총체 속에 잠겨 있는 세계에서, 속성들과 성행위들은 인류학적이고 우주론적인 결정들로 짓눌려 있다."(16쪽) 길고 현학적인 문장을 쉽게 옮겨보자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과 같은 비유로 꽉 차 있다는 뜻이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대립에 따른 사물들과 행위들(성적이건 아니건간에)의 분리는 고립된 상태에서는 자의적이지만 높고 낮음, 위와 아래, 앞과 뒤, 오른편과 왼편, 곧음과 구부러짐(그리고 삐뚤어짐), 건조함과 축축함, 단단함과 물렁거림, 간간한 것과 무미건조함, 밝음과 어둠, 바깥(공적인 것)과 안(사적인 것) 등의 동질적 대립 체계 안에 끼워넣어짐으로써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필요성을 부여받는데, 그 중 몇몇 대립은 위와 아래, 올라감과 내려옴, 밖과 안, 나감과 들어옴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에 상응한다.(17쪽)

남자는 바깥이고 높음이며 밝음, 즉 양(陽)이다. 반대로 여자는 안쪽이며 낮음이고 어두움, 즉 음(陰)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명예로운 일, 여자는 그 남자를 수발하는 일. 이렇듯, 자연계의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 대입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의 남성 지배, 혹은 여성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작지만 단단한 책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통찰 하에 남성 지배의 '인류학적' 특성을 조목조목 고찰한다. 전통사회의 문화와 철학 속에 베어들어 있는 온갖 이분법적 사고를 검토한 후, 그는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남성 지배의 변화 혹은 유지 과정을 대가의 솜씨로 개괄한다. 그 결과 도달하는 중간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78쪽)

이것은 결코 개별 문화권만의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류 사회가 공유하고 있다.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은 그만큼 보편적인 전근대적 사고 체계에 기반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의 젊은 부르디외와 마찬가지로, 2016년의 우리는, 그것의 극복을 사회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6.09.13ㅣ주간경향 1193호

2016-08-30

[북리뷰] 미러링과 표현의 자유

진실유포죄
박경신, 다산초당, 1만5천원


오래 전에 구입해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었던 이 책을 꺼내든 것은 한 칼럼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8월 2일자에 실린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눈치들 보지 마라"를 통해, <진실유포죄>의 저자 박경신은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논의의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영어의 표현을 빌자면 "Game changer"였던 셈이다. 그 칼럼을 읽고, 내가 놓쳤던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이 책을 펼쳤다.

메갈리아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일베가 여성혐오를 즐기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메갈리아 역시 일베를 '미러링'하는 과정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고 퍼뜨린다는 식으로 항변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일베를 배척하듯 메갈리아 역시 배척해야 하며, 메갈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 그 자체는 인간의 감정 중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원론적으로 따져보자면 혐오를 드러낼 자유 역시 자유이기는 하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소중하고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해 각별히 보호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따라서 논점은 언제 어떻게 '혐오 표현'을 통제해야 하느냐로 넘어간다. 그 질문에 대해 박경신은 이미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이전에 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모욕적 표현들이 혐오죄에 해당할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은 "혐오표현이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과 실체적인 차별로 이어질 위험이 얼마나 명백하고 임박한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76쪽)

법학의 용어를 빌자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발생시킬 위험이 "명백하고 현존"해야 한다. 혐오 그 자체는 그저 감정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향하는 혐오가 폭력과 차별로 이어진다.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넘쳐나지만, '남혐범죄'는 실체가 없다.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통제해야 할 대상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논리 전개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법원의 판결에 분노할지언정 그 판결의 논리에 대해 따지는 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분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법치국가인데,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법치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필자는 매우 드물다. 박경신의 <진실유포죄>는 바로 그 어두운 영역에서 빛나는 결과물이다.

이 책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그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 블로그에 쓴 게시물, 이후의 사태 진행에 대해 덧붙인 뒷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실유포죄>는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 시기와 고스란히 포개지는 책이다. 민주정권 10년을 거친 후 권력을 되찾은 보수는 법치주의를 내걸고 '검치주의'(檢治主義)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바로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 심지어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따라서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검찰은 허위사실공표죄를 휘두르며 반대자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진실유포죄>는 그 시기를 겪어낸 한 법학자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개별적인 글 꼭지의 출처는 표시되어 있지만 정작 글이 다루는 판결의 사건번호가 빠져 있다. 적극적으로 이 책을 찾아볼 정도의 열의를 지닌 독자의 지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권력이 법을 무기삼아 휘두르는 '검치주의' 시대다. 우리는 더 공부해야 한다. <진실유포죄>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2016.08.30ㅣ주간경향 1191호

2016-08-16

[북리뷰] 여성 차별의 유구한 역사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3000원

숙종 30년, 서기로는 1704년이 되던 그해, 기계 유씨 가문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유정기는 예조에 문서를 올렸다. 자신이 이미 14년 전 쫓아내어 따로 살고 있는 부인 신태영과 완전히 법적으로 결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은 이 희한한 소송에 대한 책이다.

양 부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혼인 관계를 청산하는 법적 절차가 조선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조선이라고 이혼이 없었던 나라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이혼 사례가 <실록>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즉 “<경국대전>의 이혼이라 함은 중혼(重婚)에 관한 처벌이며, 또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경우”(28쪽)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혼은 여성에 대한 처벌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유정기는 이미 14년 동안 쫓아내고 있었던 부인 신태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즉 성적으로 일탈하였다고, 그리고 시부모에게 험한 말을 하고 제사용 그릇에 오물을 섞었다고 고발했다.

유정기의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널리 퍼진 인맥의 힘으로 처음에는 임금인 숙종에게서 이혼 허락을 받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민진후가 반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장기화된다. 유정기가 내놓은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거나, 조작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신태영 본인, 신태영의 몸종 등 ‘양반 남자’인 유정기에 비해 낮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을 받아주면 ‘아랫것’이 ‘윗분’을 고발하는 셈이니 신분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편의 주장만 듣고 법에도 없는 이혼을 허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제목이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태영이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근본주의 국가였다. 신태영은 죄인, 혹은 피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채 ‘이혼 소송’을 겪어야 했다. 남편 유정기에게는 사회적 신분, 가문의 권세, 심지어 아내를 내쫓은 후 함께 살고 있는 첩까지 있었다. 반면 신태영은 유정기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큰아들의 집에 머물다가 옥에 갇혀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신태영이 한글로 쓰고 누군가 한문으로 옮긴 항변서, 즉 공초만이 남아 그의 영민함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기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차별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든 제도를 중국에서 베껴왔지만 여성과 노비를 차별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재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이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혼한 부인의 아들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그 남자 양반들 역시 어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의 출세길을 막는 꼴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목을 조르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성차별의 역사가 유구하게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호주제는 2008년에 와서야 폐지됐다. 신태영‘들’의 이혼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6-07-20

[북리뷰]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미래의 아랍인 1, 2
리아드 사투프, 휴머니스트, 각권 1만5천원.


프랑스의 만화가이자 영화감독인 리아드 사투프의 어머니는 아랍에 대해, 좀 더 정확히는 아랍에서 온 한 남자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클레망틴 사투프는 시리아에서 온 압델 라작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미래의 아랍인>의 주인공인 리아드, 즉 작가 본인이기 때문이다.

197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리아드는, 아버지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가 다스리던 리비아로 향했다. 1980년, 어머니까지 포함해 온 가족이 이주한 것이다. 리아드의 아버지는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범아랍주의자였고, "교육을 통해 아랍이 그 종교적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었다."(1권, 11쪽) 카다피가 바로 그 선봉에 선 인물이었으므로 시리아 출신이지만 리비아를 택해 아랍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미래'는 없었다. 카다피는 국민들에게 주택의 소유를 금지했고, 모든 사람은 문이 열려 있다면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리아드의 가족은 처음 할당받은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카다피는 온 국민이 서로 직업을 바꾸어야 한다고 공표했는데, 그 무렵 리아드의 아버지는 리비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단, 프랑스에서 교수직을 알아보는 대신, 시리아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아랍에 돌아와 뭔가 '큰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낙후한 제3세계의 현실 속에서 리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아간다.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염소에게 돌을 던지며 즐거워하고, 리아드의 동생이 딸이면 좋겠다는 어머니를 윽박지른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 가면 리아드의 어머니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남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

시리아에서 아이들은 동네에서 강아지와 '함께' 축구를 하지 않는다. 대신 강아지를 걷어차면서 논다. 급기야 좀 더 자란 아이가 그 개를 삼지창으로 찔러 들고 깃발처럼 흔드는 모습을 보며 리아드의 어머니는 아들과 프랑스로 향하지만, 그들은 다시 시리아로 돌아간다. "리아드, 미래의 아랍인! 이제 학교로 가는 거야!" 아버지의 이 대사와 함께, 당혹해하는 리아드가 비행기를 타러 가는 모습으로 1권이 끝난다.

2권의 내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어진다. 리아드의 눈으로 바라본 1980년대 아랍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아랍인>은 총 3권으로 예정되어 있다. 현재 2권까지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모른다. 리아드의 어머니는 언제, 무슨 계기로 아버지와 갈라서게 될까. 리아드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 적응하는 과정이 어떻게 묘사될까. 리아드의 아버지는 과연 시리아에서 본인이 원하던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통용되던 '정치적 올바름'에 익숙한 '진보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본인이 아랍에서 보고 듣고 겪은 종교에 의한 차별과 세속적 욕망에 의한 폭력을 모두 '까발리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리아드가 유년기를 보낸 아랍의 모습에 우리의 독재 정권 시절이 얼핏 겹쳐지기도 한다.

서구는 무조건 나쁘고 피식민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어쨌건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내 유년기의 체험담'이라는 형식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저자는 마치 열두살 소년처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내가 저곳에서 계속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미래의 아랍인>은 수작이며, 문제작이다. 어서 3권이 출간되고 다양한 감상과 논의가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2016.08.02ㅣ주간경향 118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7-07

[북리뷰]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길, 4만원.


한국 사회의 경우,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큰 경계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온 국민을 윽박지르던 시절, '자본주의'는 곧 '반공주의'였고, 따라서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나니 순식간에, 21세기 초 인기를 끌었던 한 광고의 유명한 대사처럼,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으로 쓰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시점에, 한국의 담론계는 '신자유주의'라는 허상만을 쫓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위험 떠넘기기, 임금 착취하기, 투자금 떼어먹기 등 온갖 비윤리적 탐욕을 정상 상태로 용인하는 그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들 이렇게 말한다. 이게 자본주의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개념 규정은 이미 육아실에서 배우는 문화사 수준에서 영원히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16쪽)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저자가 직접 강조하고 있다시피, 자본주의는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탐욕에 그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탐욕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존속이 판가름난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 부를 누리는 게 목표라면, 경제 주체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복잡한 회계를 동원해서 그 부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마치 오늘날 한국 기업들의 '오너' 일가들이 하는 것처럼, 자산을 대대손손 물려줄 궁리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게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 그래서 그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막스 베버는 되묻는다. 그러한 탐욕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고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했는데, 왜 자본주의는 오직 서구에서만 싹틀 수 있었냐고 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는 책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다음 두 가지 발전 요소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오늘날의 경제적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가계와 기업의 분리가 그 한 요소이며,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합리적 부기가 다른 한 요소이다."(21쪽)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사망한 막스 베버의 눈으로 볼 때, 전체 지분의 몇 퍼센트를 간신히 소유하는 '오너 일가'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결코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이 아니다. 가계와 기업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합리적 부기에 따른 투명한 회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지나고 나니, 그 후에는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하자'는 자조 어린 태도가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다. 그 후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대한민국의 공론장은 아예 작동을 멈추었고, 이제는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 낄낄거리고 소리치는 팟캐스트가 '대세'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극복'도 못 하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의 논의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단 이 책부터 읽기 시작해야 한다.


2016.07.19ㅣ주간경향 118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6-23

[북리뷰] 엠마 보바리는 왜 죽어야 했는가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민음사, 1만1천원.


보바리 부인은 자살한다. 요즘은 이런 고전의 결론을 말하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루오 영감의 딸 엠마는 많은 책을 읽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푹 빠진 예쁘고 똑똑한 처녀다. 의사인 샤를르 보바리에게 시집을 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껴 불륜을 저지르다가,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생긴 빚을 갚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후 지금까지 '여성의 낭만적 환상, 현실에 대한 불만족, 사치, 방탕, 불륜' 등을 꼬집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해제를 읽어도 그런 논조로 써 있다. 심지어 '보바리즘'이라는 신조어가 당대에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더러 쓰인다고 한다. 그런 정보까지 알고 나면 독자들은 플로베르가 얼마나 섬세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묘사해냈는지에 대해, 남들의 평가를 참고하여,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내뱉고 책장을 덮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엠마 보바리는 왜 죽어야 했을까? 단지 '보다 나은 삶', '여기에 없는 그 무언가'를 꿈꾸었다는 이유로?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초라함, 혹은 평범함을 참지 못해, 자신을 꾸미고 연인을 치장하기 위한 온갖 사치품을 구입하며 진 빚 때문에?

<마담 보바리>를 직접 읽기 전까지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2016년 오늘날에 와서야 이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엠마 보바리는 달콤한 환상 때문이 아니라, 그 환상을 스스로 이루는 것을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132쪽)

프루스트가 '사실주의적'으로 고스란히 반복하는 당대의 편견어린 서술을 젖혀두고 엠마 보바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자. 엠마는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의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시골 마을 오종의 약제사 오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엠마가 소설의 세계를 꿈꾼다면 오메는 신문 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엠마는 파국에 이르는 반면, 오메는 그 모든 위기와 추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 한 여자가 파멸하는 이야기인데, 소설은 한 남자가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503쪽)는 장면에서 끝난다. 모든 환상, 헛된 욕망, 탐욕과 거짓말과 교활함이 아닌, 오직 엠마의 그것들만이 단죄당한 것이다.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55쪽) 그렇다. 엠마는 알고 싶었다. 엠마는 경험하고 싶었고, 자신의 살고 있는 인생이 자신이 알고 있는 멋진 삶의 모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부합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이 너무도 제한되어 있었기에, 마치 발사에 실패한 로켓처럼 허공에서 폭발해버렸을 따름이다.

남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야망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보바리즘'이라고 부른다. '세상'과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서 <마담 보바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2016.07.05ㅣ주간경향 1183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6-09

[북리뷰] 페미니즘, 남자의 역할을 묻는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또 하나의 문화, 9000원


추모의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고, 공포와 분노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여성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그러자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외치는 새로운 목소리에 시큰둥하던 이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특히 남자 지식인들의 입장 변화가 눈에 띈다. 성정치의 이론적 복잡성에 기대어, 혹은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여성주의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한없이 보류하던 이들이 한 마디씩 말을 보태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한국의 지성계는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혹은, '그 페미니즘'과 '착한 페미니즘'을 가르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은 그저 약간 움텄을 뿐인데, 남자들은 호들갑을 떨며 '부잣집 딸내미들을 위한 운동을 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손사레를 치고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남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공론장을 과점하는 남자 지식인들과는 기꺼이 다른 입장을 택했던 사람이 있다. 권혁범의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글들은 여성주의자에게는 너무도 단순하고 당연한 글"이라고 겸양의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2007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던 남성주의적 합의에 대해, 그들 중 일부인 한 남자가 반기를 들었던 기록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남성-진보들은 틈만 나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선동하고 있을까? 혹 그들은 '부르주아'가 싫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마음껏 위반하고 유린하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 지식인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괜히 양념으로 '가부장 좌파'에 대한 비판을 끼워넣은 게 아닐까? 그들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똑똑한 여성에 대한 근본적 혐오감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178쪽)

여성이 '잘난' 모습을 보이면, 피해자가 되어 엉엉 울지 않으면, 상당수의 남성 지식인들은 지지하지도 연대하지도 않는다. 권혁범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부당하게 묘사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2001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아줌마'에 대한 그의 단상을 살펴보자. 장진구와 이혼을 택한 주인공에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는 "여전히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심혜진 씨가 분한 역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유포되어 있는 여성 지식인에 대한 전형적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한 고학력 여성은 예민하고 잘난 체하고 히스테릭하고 이기적이며 철모르고 자라난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통념 말이다."(59쪽)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의 심리를 한 남자가 거침없이 폭로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편견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지적인 수준이 높은 여성은 부담스럽고 또한 쉽게 지배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60쪽) 그렇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자신이 차별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당의(糖衣)라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에 대해 남자는, 특히 지식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빨리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다른 남자들을 가르쳐야 하나? 그도 그렇지만,  '그 페미니즘'과 '저 페미니즘'을 구분하고 손가락질해왔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그런 면에서 좋은 귀감이 되는 책이다.


2016.06.21ㅣ주간경향 118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5-26

[북리뷰] 생의 말년에 돌아보는 근현대사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
손정목, 한울, 2만3천원


지난 5월 9일, 이 책의 저자인 손정목 명예교수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1928년생, 만 88년의 세월을 거치며 살아왔던 그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과 4.19 혁명, 군사독재와 민주화를 모두 겪었다. 저자 스스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2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고 미군정기를 관통한 삶이었다."(5쪽) 이 책은 그 역사의 증인이 생의 말년에서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국면과 자신의 삶을 반추한 것이다.

손정목의 인생은 한국의 근현대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192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편입하였는데,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난했다. 전란이 끝난 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하고 군수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한 3년간의 휴직을 겪은 후 행정서기관으로 복직하고, 1970년부터는 서울특별시의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 후 1977년부터 199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시립대에 교수로서 몸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지나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동을 모두 겪어내면서, 동시에 정치, 행정, 도시계획 및 개발, 학문적 연구라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유해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나의 집사람 때문이다. 54년간 삶을 같이해온 사람과 사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5쪽) 부인과 사별한 후 그는 서울시립대에서 도서관 한켠에 마련해준 전용 연구실에 매일 출근하며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원고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다룬 "불륜 앞에 자유로운 자, 돌을 던져라"이고, 두 번째 원고가 "나는 어떻게 부정선거를 치렀나: 3·15 부정선거 이야기"라고 한다. 선거 직후부터 쓰고 싶었던 부정선거 체험기를,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써냈다.

어떤 경우라도 그날의 부정선거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때 자신이 한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이 점을 밝혀두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선거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인 1948년 5·10 선거부터 이미 부정선거였다. 정말 슬픈 유산을 물려받았고 나 역시 그 유산을 이어 원흉의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위에서 내려진 명령에 충실했다고 말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178쪽)

저자는 그 부끄러운 역사를, 철저한 자료 조사와 비상한 기억력을 통해 복원해냈다. 본인이 직접 개입한 바 있는 3.15 부정선거 뿐만이 아니다. 미군정시대에 대해 이전에 썼던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핵심 인물 이묘묵의 존재를 알아내고 그를 중심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3년간의 역사를 그려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던 자신의 경험과 일제강점기 막바지의 사회적 분위기의 접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1944년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같은 반 학생 거의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왜 그랬을까? 이는 일본의 징병제 실시에 대한 항거이고 거부였다."(28쪽) 이 책은 개인적 회고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고찰이지만 둘 중 어느 영역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자면 '말년의 양식'이 책 전체를 감싼다.

그가 남긴 저서들의 목록을 훑어보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16.06.07ㅣ주간경향 117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5-12

[북리뷰] '어버이'는 과연 2만원 때문에 '애국'하는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1만2천원.



그들은 본디 놀림감이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등장하자 더욱 심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어버이연합이 단돈 2만원에 보수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언론 보도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애초부터 그 '어버이'들은 존경 혹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불쌍하되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의혹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의 입김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들은 2010년대의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현장마다 등장하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당 2만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고찰은 '일당 2만원'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변변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에게 그 돈은 소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면, 일당을 두 배로 쳐준다 한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까? 그 '어버이'들은 돈벌이 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의 일부가 되어 집회 현장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에리히 프롬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독일 국민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무기력한 사회당, 공산당과 달리 나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들이대기에는 나치가 내세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은 진작부터 독일 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공격성과 약자 혐오를 감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들은, 그런 정당에게 표를 던졌는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本有的)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욕구가 없다면, 오늘날 어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1쪽)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롬은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냈다.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을 파해치고, 또한 그 심리적 요인을 낳는 사회적 변화를 짚어내는, 대범한 지적 기획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절대적인 권위를 희구하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기도 한다. 전자와 구분짓기 위해 후자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이름붙인 프롬은 나치의 집권 당시 독일 국민들이 바로 그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였음을 분석해냈다.

'어버이'들을 욕하기란 쉽다. 그들에게 값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선택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독일을 읽어냈다. 1940년, 아직 나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반면 우리는, '어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2016.05.24ㅣ주간경향 117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4-28

[북리뷰] 시신이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장성택의 길
라종일, 알마, 1만6천원


김정일이 지배하던 시절 그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였다. 3대 세습이 시작되자 감히 1인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12일 김정은은 전격적으로 장성택을 숙청해버렸다. 4신 기관총을 난사하고 화염방사기로 불태워버린 탓에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시신까지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장성택이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현장에서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남겨진 두 토막으로 부러진 볼펜 조각뿐이었다."(267쪽)

이 죽음이 너무도 황망한 탓이었을까. 그날 이후 장성택과 그를 숙청한 김정은은 가십 혹은 농담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김정은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젊은이들은 SNS를 통해, 장성택과 연배가 비슷한 중장년층은 종편을 통해, '고모부를 살해한 조카'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곱씹는다. 북한을 무조건 악마화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나니, 이제는 덮어놓고 일단 희화화부터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장성택의 길>은 사뭇 다르다. 북한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독재국가에 적용될 수 있을만한 원칙을 놓고 북한을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독재자들, 다른 나라의 권력 주변인들의 행동 패턴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해본다. 그렇게 라종일은 김정은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2년 후 장성택이 숙청당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어느 권력 체제에서나 2인자의 위치는 매우 미묘하게 곤란한 것일 수 있다. 특히 권력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 그리고 권력 승계에 관한 공개적인 규칙이 결여된 체제인 경우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당시 장성택이 처한 상황이야말로 그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거의 교과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했다.(10쪽)

"경제적인 자원 분배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거나, 혹은 장성택이 김정은과 달리 핵과 경제의 이른바 병진노선에 반대하고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등"(11쪽), 그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렇게 언론은 점점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하지만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2인자였기 때문이다. 라종일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쉬운 답, 하지만 정답일 수밖에 없는 답을 제시한 후, 다른 이들이 바라보지 않았던 곳을 들여다본다. 장성택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쩌다가 그러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어째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권력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는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세간에 알려진"(14쪽) 사실들을 모으고, 신분을 밝히기 꺼리는 "자문인"들로부터 귀중한 자료를 덧붙여, 장성택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전기로 엮어냈다. "구하기 어려운, 빈약한 단편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처신 그리고 특히 그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하고, 이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15쪽)어낸 것이다.

<장성택의 길>은 장성택이라는 북한의 핵심 인물을 온전히 '사람'으로 그려내고, 이해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1인 독재체제의 잔인하고 부조리한 측면까지 일말의 악마화나 희화화 없이 바라볼 수 있다.

4월 27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라종일은 "시신을 없앨 수는 있어도 사람을 없앨 수는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지워져버린 사람을 기억의 힘으로 되살리면 권력의 잔혹한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이 북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김형욱, 그 외 수많은 의문사 희생자들을 떠올려보자. "과거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272쪽)


2016-04-14

[북리뷰] 부정선거, 아는 만큼 보인다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
프로파간다 편집부, 프로파간다, 8천5백원.

2012년 대선의 후폭풍은 심각했다.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는 문재인 후보의 지지를 표명하며 사퇴했다. 두 후보의 표를 합치면 99%가 넘었다. 다시 말해 '이탈표'가 존재하지 않는 양자구도의 진검승부였다. 투표율은 75%를 넘겼다.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에게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100만표 차이가 났다. 일부 지지자들은 속된 말로 '멘붕'에 빠졌고, 개표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수개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개표 조작 논란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던 제16대 대선 이후에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헛소동에 지나지 않은 '수개표 논란'과 달리,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상처를 남겼다. 국정원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야당 후보를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해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음지'의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독립 출판사인 프로파간다가 '편집부'의 이름으로 엮어낸 책이다. "지난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사이버 여론전이 초래한 부정선거 시비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지금, 민주주의 제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있어 부정선거를 척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과제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9쪽) '편집부'는 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대한민국 건국 이래 등장한 온갖 부정선거 방식을 그림과 함께 살펴보고, 이승만부터 좌익효수까지 다양한 주요 인물들을 검토하며, "부정선거 고사 문제지"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복습의 시간까지 갖게 한다.

이 책은 건국 이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여러 부정선거 기법과 사건 등을, 그림을 곁들여 알기 쉽게 정리한 도감이다. 대부분은 어느덧 희미해진 오래된 부정선거 사례들이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한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대한 교육 자료, 부정선거 기법의 세부에 대한 해설서로서, 필요한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로 소용되길 기대한다.(10쪽)

그렇게 소개되는 부정선거의 기법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창의적이며, 악랄하고, 때로는 노골적이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보성의 야당 참관인에게 '누군가'가 수면제를 탄 닭죽을 먹였다. 참관인이 잠든 사이에 '누군가'는 표를 바꿔치기(전문 용어로 '환표')했다. 그나마 수면제를 먹은 경우는 점잖은 것이었다. 다른 투표 참관인은 자유당이 동원한 폭력배에게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닭죽 사건'이다.

'피아노표'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개표원이 몰래 숨겨둔 인주를 손가락에 묻힌다. 자신이 떨어뜨리고자 하는 후보의 표가 나오면,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인주를 발라서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애 장난처럼 들리지만 불과 몇 표 차이로 당락이 갈리기도 하는 총선의 경우 특히 그 효과가 크다. "피아노표는 한국 부정선거 역사상 손꼽히는 '아이디어'이며 '가성비' 측면에서도 탁월한 수법"(39쪽)이라고, 프로파간다 편집부는 경탄을 내뱉는다.

공정한 선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결의를 다지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투표할 것이고, 정당하게 승리할 것이다.


2016.04.26ㅣ주간경향 1173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4-09

[북리뷰] 웃음과 냉소의 경계, 혁명의 길을 묻는다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스르자 포포비치, 문학동네, 1만5천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특별히 서문을 추가했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에이전시로부터 한국의 한 저명한 출판사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맨 처음엔 한국의 북쪽에 있는 이웃--2,500만 명의 인구가 세계 최악의 독재 아래 고통 받고 있는 곳--때문이겠거니 했습니다."

물론 농담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의 격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같은 소리는 한국인끼리 주고받는 '인사이더 조크'가 아닐까 싶었다. 어쨌건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의 무릎을 꿇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으며,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니 말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누굴까 해서 책날개를 보니 옛 기억이 났다.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문지 〈Foreign Policy〉의 한국어판을 만들 때 나는 이미 스르자 포포비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독재자를 '유쾌한' 방식으로 몰아낸 대중운동의 지도자. 나는 그가 쓴 글의 한국어 번역본을 편집했거나, 그것이 단신이었다면 내가 손수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스르자 포포비치는 단행본으로 내 책상 위에 돌아왔다. 미국의 리버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혁명'과 '저항'을 포장해주는 장사꾼이 아닐까 하던 의혹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그는 실제로 독재 권력과 맞서 세르비아를 넘어 동유럽 전체의 정치적 변화를 견인해낸 중요 인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표지와, 짐짓 유쾌한 척 하는 그의 말투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SNS에 '웃기는 짤방' 몇 개 올린다고 세상이 알아서 바뀔 것처럼 떠드는 그런 종류의 책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이 책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독재자를 그럼 대체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뭔가 사소한 것, 적절한 것, 그러면서도 성공적일 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죽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핵심이다."(34쪽) 엘리베이터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괜찮다. '작은 성공'을 쌓아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독재자의 권위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한 작은 도전이 가장 큰 변화를 낳은 사례로, 저자는 간디의 '소금 행진'을 꼽는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인도를 독립시키라'며 영국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없는 대의를 위해 모든 인도인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1930년, 간디는 결국 답을 찾았다. 소금이었다."(55쪽) 영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바닷가까지 걸어가 소금을 만들겠다는 간디의 행진은, 처음에는 77명의 추종자로 시작했으나, 결국 수만 명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고 말았다.

웃음을 잃지 말라, 독재자에게 겁을 먹지 말라. 모두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비폭력 투쟁을 하나씩 승리로 이끌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임계점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풍자에 힘을 쏟는다며 냉소만 퍼뜨리고, 모든 투쟁을 '이번 투표를 위한 것'으로 만든다면, 오히려 변화는 멀어진다.

쫄지 마? 그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웃음을 터뜨리되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 행진 이후 인도의 독립까지는 17년이 걸렸다 


2016-03-16

[북리뷰] '알파고 쇼크', 인류의 미래를 묻는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만2천원.

'인공지능'(AI). 최근 우리 사회를 새삼스레 달구고 있는 화두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두기 시작한 후 사람들은 AI와 제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 등에 대해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던 '스푸트니크 쇼크'처럼, '알파고 쇼크'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대체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 대해, 혹은 '지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선행 논의가 없다보니,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 혹은 '인문학적 통찰'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다른가? 무엇이 우리를 유인원의 한 갈래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까지 도달하게 한 것일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대담한 질문과 그에 답하는 서술로 인류 역사를 관통한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19쪽)

유발 하라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인간'이라는 범주를 탈신비화한다. 그 어떤 '인문적' 관점도 배제한 채,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또 다른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과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더욱 효율적이며 날카로운 무기와 발달된 사냥 체계를 얻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로 자리매김한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생산물을 독점하는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이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적 부족의 최대 규모인 150여 명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려면 윤리, 도덕, 법, 계급 등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원리가 필요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질서라고 늘 주장해야"(169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어 오던 인간의 역사는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357쪽) 과학혁명은 신, 과거의 현자, 기타 전승되는 문헌의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수천년 동안의 가정을 폐기했다. 그 결과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의 영역에까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농업혁명 그 자체가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이었다. 알파고 등 다양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파고 쇼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2016.03.29ㅣ주간경향 116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