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김영란, 김두식 지음·쌤앤파커스·1만5000원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3월 3일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후 정확히 일주일 후였던 3월 10일, 김영란법에 대해 김영란 본인이 입장 발표를 한 것이다. 김영란은 이미 2013년에 김영란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심지어 그것을 위해 책을 한 권 펴내기까지 했다.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법조인들의 ‘이너서클’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김두식 교수에게 연락을 해 만남을 갖고, 법조계를 포함한 공직사회 전반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김영란법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선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주도하여 1997년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 이른바 ‘청보법’이 낳은 폐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보법이 시행되면서 수많은 만화들이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되었고, 당시 IMF로 위기를 겪고 있던 출판만화 시장은 결정적인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법으로 다스리려 할 경우, 그것이 원하는 효과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거나 어쩌면 더 큰 역효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청보법이 한국 만화계에 재앙을 불러왔듯, 김영란법이 어딘가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으므로, ‘원칙에는 찬성하나 결과를 우려하는’ 회의적 입장에서 ‘어디 나를 설득해봐라’는 태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김영란 본인은 이러한 비판을 많이 들어봤고, 또 익숙한 듯하다. “저더러 과격하다고 하는데 뭐랄까, 자코뱅(Jacobins) 같나요?(웃음) 그래도 속은 시원하지 않나요?”(167쪽) 그렇다.
비판자들은 ‘너무 과격하다’고 말한다. 마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단두대로 승화시켜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자코뱅파처럼, 김영란법 역시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고. 반면 김영란법에 대한 찬성 의견은 일차적으로 ‘속 시원하다’는 감각적 반응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나 같은 회의주의자들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회의주의자에서 일종의 모험주의자로 입장을 바꾸고 싶어졌다. 김두식은 김영란이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치기 좋은 공’을 연거푸 던져준다. 김영란은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그 설명은 때로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가령 “이것은 정말 상징적인 법규일 뿐, 이 법 때문에 처벌이 무한정 늘어나리라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건 공무원들을 위한 법, 공무원들이 부담스러운 청탁을 거절할 수 있는 법”(258)이라는 부연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말이다.
아직도 나는 회의적이다.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법의 적용 대상을 민법상 규정된 가족에서 본인과 배우자로 축소시킨 것이 가장 뼈아픈 후퇴라고 생각한다. 이해관계 충돌 금지가 빠진 것 또한 그렇다. 이 법이 처벌 이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공직자들의 윤리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법이 통과되기 전에 좀 더 많은 홍보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김영란법은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161610081&code=116
2015-03-24
2015-03-22
[별별시선]밥이 공부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발언이다. 무상급식이냐 의무급식이냐,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 등으로 해묵은 논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준표의 발언이 지니고 있는 더 큰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43억원의 무상급식 지원비를 서민 자녀 지원사업에 투입한다는 것이 홍 지사의 입장이다. 그런 그가 ‘공부’와 ‘밥’을 대비시킬 때, 과연 그 ‘공부’는 무엇인가? ‘개천의 용’이 사라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노라는 홍 지사.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한 자신의 ‘휴먼 스토리’를 슬며시 포개어 놓는다.
요컨대 홍준표에게 ‘공부’란 남을 이기는 공부, 남보다 더 높은 시험성적을 얻어내어 판검사 되는 공부, 그래서 ‘개천’ 출신들이 ‘용’되어 개천을 탈출하기 위한 공부인 셈이다.
왕년의 학생 홍준표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도 붙으면 속된 말로 ‘팔자 바꾼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입시제도가 턱없이 복잡해진 탓에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하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루트로 명문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역균형선발로 대학에 들어오면 ‘지균충’,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하면 ‘기균충’, 학생들은 끝없는 차별에 부딪힌다. 명문대 입학했다고 어깨 쭉 펴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명문대 나온 취업준비생이 될 뿐이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홍준표는 여전히 개발독재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새마을노래를 들으며 굶주린 배를 안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명문대 가고 판검사 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개천의 용’으로서, 20세기의 가난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과연 그 20세기 ‘개천의 용’ 모델은 지금까지 유효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배고픔을 참고 공부해서 명문대 가고 사법시험이나 기타 취업 관문을 통과하면,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나는 나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부질없는 짓이며, 따라서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에 대해, 그 교육을 통해 배분되는 직업들 사이의 소득 형평성에 대해, 각 가구의 자산 불평등에 대해 총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학교 교육과 국가고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무상급식을 철회하며 ‘공부해’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학생들이 희망을 느낄 성 싶은가?
‘개천의 용’을 위한 공부, 한 사람의 승자를 위해 아흔아홉 명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홍준표가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무상급식 발목잡기’에 나섰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개천의 용’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공부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아도취적이기도 하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계약서 쓰는 법, 노동3권 보장받는 법,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지키는 법, 협상하고 합의하는 법 등 기존의 교육 과정에서 무시되었지만 실은 반드시 필요한, ‘내 밥그릇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밥 먹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그렇다. 이제는, 밥이 공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05&code=990100&s_code=ao122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발언이다. 무상급식이냐 의무급식이냐,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 등으로 해묵은 논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준표의 발언이 지니고 있는 더 큰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43억원의 무상급식 지원비를 서민 자녀 지원사업에 투입한다는 것이 홍 지사의 입장이다. 그런 그가 ‘공부’와 ‘밥’을 대비시킬 때, 과연 그 ‘공부’는 무엇인가? ‘개천의 용’이 사라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노라는 홍 지사.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한 자신의 ‘휴먼 스토리’를 슬며시 포개어 놓는다.
요컨대 홍준표에게 ‘공부’란 남을 이기는 공부, 남보다 더 높은 시험성적을 얻어내어 판검사 되는 공부, 그래서 ‘개천’ 출신들이 ‘용’되어 개천을 탈출하기 위한 공부인 셈이다.
왕년의 학생 홍준표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도 붙으면 속된 말로 ‘팔자 바꾼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입시제도가 턱없이 복잡해진 탓에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하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루트로 명문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역균형선발로 대학에 들어오면 ‘지균충’,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하면 ‘기균충’, 학생들은 끝없는 차별에 부딪힌다. 명문대 입학했다고 어깨 쭉 펴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명문대 나온 취업준비생이 될 뿐이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홍준표는 여전히 개발독재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새마을노래를 들으며 굶주린 배를 안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명문대 가고 판검사 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개천의 용’으로서, 20세기의 가난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과연 그 20세기 ‘개천의 용’ 모델은 지금까지 유효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배고픔을 참고 공부해서 명문대 가고 사법시험이나 기타 취업 관문을 통과하면,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나는 나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부질없는 짓이며, 따라서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에 대해, 그 교육을 통해 배분되는 직업들 사이의 소득 형평성에 대해, 각 가구의 자산 불평등에 대해 총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학교 교육과 국가고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무상급식을 철회하며 ‘공부해’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학생들이 희망을 느낄 성 싶은가?
‘개천의 용’을 위한 공부, 한 사람의 승자를 위해 아흔아홉 명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홍준표가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무상급식 발목잡기’에 나섰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개천의 용’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공부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아도취적이기도 하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계약서 쓰는 법, 노동3권 보장받는 법,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지키는 법, 협상하고 합의하는 법 등 기존의 교육 과정에서 무시되었지만 실은 반드시 필요한, ‘내 밥그릇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밥 먹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그렇다. 이제는, 밥이 공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05&code=990100&s_code=ao122
2015-03-10
[북리뷰]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위대한 페미니스트의 일대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백선희 옮김·마음산책·1만2000원
“여성해방에 남성이 반대해온 역사가 이 해방의 역사보다 더 말해주는 바가 많다.”(21쪽)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이성과 합리에 따라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나선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조차, 콩도르세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빼고 나면, 모두 여성들의 주체적 권리 요구를 싫어하고 반대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자신과 수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인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단두대에 올라 목숨을 잃은 위대한 페미니스트,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꼴페미’의 인생을 기술하고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이다.
일단 주인공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그는 문필가인 귀족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올랭프 드 구주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열여섯에 시집을 갔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으며 그로부터 몇 달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온갖 사회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남편 없는 여자의 자유를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고 정치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최초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1788년 2월, <흑인들에 대한 성찰>을 출간하면서 그는 온갖 비아냥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 <왕비에게 헌정하는 여성 권리 선언>이 출간되었다. ‘왕비에게 헌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농담 같은 것이었지만, 훗날 권력을 잡는 자코벵 파는 그것을 빌미 삼아 올랭프 드 구주에게 왕당파의 혐의를 덧씌운다. ‘인권선언’의 ‘인간’은 당연히 남자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당시의 프랑스에서, 올랭프 드 구주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달라.”
프랑스는 1791년도 아닌 194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다. 무려 두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올랭프 드 구주가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두 번째 여성이 되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지 보름 후인 1792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근본적인 견해까지 포함해서 누구도 자신의 견해 때문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 인권 선언’ 제10조의 당당한 요구는 그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되면서, 결국 오랜 세월 묵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IS보다 위험하다’는 칼럼으로 인해, SNS에서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김태훈이 한국 중계 해설자에서 물러난 201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트리샤 아퀘트는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임금과 기회를 제공하라는 페미니즘적 연설을 내놓았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021627241&code=116
브누아트 그루 지음·백선희 옮김·마음산책·1만2000원
“여성해방에 남성이 반대해온 역사가 이 해방의 역사보다 더 말해주는 바가 많다.”(21쪽)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이성과 합리에 따라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나선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조차, 콩도르세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빼고 나면, 모두 여성들의 주체적 권리 요구를 싫어하고 반대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자신과 수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인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단두대에 올라 목숨을 잃은 위대한 페미니스트,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꼴페미’의 인생을 기술하고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이다.
일단 주인공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그는 문필가인 귀족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올랭프 드 구주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열여섯에 시집을 갔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으며 그로부터 몇 달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온갖 사회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남편 없는 여자의 자유를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고 정치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최초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1788년 2월, <흑인들에 대한 성찰>을 출간하면서 그는 온갖 비아냥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 <왕비에게 헌정하는 여성 권리 선언>이 출간되었다. ‘왕비에게 헌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농담 같은 것이었지만, 훗날 권력을 잡는 자코벵 파는 그것을 빌미 삼아 올랭프 드 구주에게 왕당파의 혐의를 덧씌운다. ‘인권선언’의 ‘인간’은 당연히 남자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당시의 프랑스에서, 올랭프 드 구주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달라.”
프랑스는 1791년도 아닌 194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다. 무려 두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올랭프 드 구주가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두 번째 여성이 되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지 보름 후인 1792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근본적인 견해까지 포함해서 누구도 자신의 견해 때문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 인권 선언’ 제10조의 당당한 요구는 그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되면서, 결국 오랜 세월 묵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IS보다 위험하다’는 칼럼으로 인해, SNS에서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김태훈이 한국 중계 해설자에서 물러난 201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트리샤 아퀘트는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임금과 기회를 제공하라는 페미니즘적 연설을 내놓았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021627241&code=116
2015-02-22
[별별시선]우리의 명예를 찾아서
“연대는 설악산 소탕작전을 교대하고 휴식하는 사병들을 위해 이 굴 속에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놓고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면 되었다. 굴 속은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비닐 우비의 베드시트를 덮은 침대이다. 가마니를 드리운 굴 문 앞에는 언제나 병사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리영희.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위 문단은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책 <역정>의 198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저 문단에서 인용된 ‘시설’은 국군이 운영하던 것이다. 국군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 놓았다. 그 과정에 대해 리영희는 별다른 설명을 붙이고 있지 않다. 그렇게 ‘데려다 놓은’ 여자를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면 되었다”.
“전쟁 중의 이야기인데 적이 있는 전선에 가기 위해서 ‘코코포’라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는 반드시 삐야(ピ-屋)가 있다. 삐야라는 것은 위안소를 가리킨다.” <게게게의 기타로> 등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일본 호러 만화의 거장 미즈키 시게루의 회고 만화에서 인용한 대사다. ‘삐’는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만, 작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많은 남자를 한 명의 여자가 처리하는 것이다. (중략) 병사들도 지옥에 있었지만 이건 지옥 그 이상이 아닌가, 라고 화장실로 나온 조선삐를 보고 생각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무기를 손에 들고 북한과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가 남겨놓은 수많은 악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리영희가 증언하는 바,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하는 은전”이 대표적이다.
한국군은 일본군이 하던 그대로 위안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본군의 위안소에는 “일본삐” “나와삐(오키나와 출신)” “조선삐” 등이 있었던 반면, 한국군의 위안소에는 같은 한국인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다.
2015년 2월17일. 대한민국의 법원은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청구를 받아들여 “책 내용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광고 등을 할 수 없다”는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의 몇몇 구절이 종군위안부를 성매매 여성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이다.
독자의 양심에 질문을 던져보자. 리영희가 묘사한 한국군 위안소는 과연 정당한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올 때, 설령 그 여성들을 강제로 납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사들이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고 해서, 여성들이 수많은 남자들의 성욕 해소 대상이 됨으로써 심각한 학대를 당한 사실 자체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소에서 설령 ‘조선삐’를 폭력적으로 납치해오지 않았거나, 그들에게 경제적 대가를 지불했다 한들,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이 갑자기 아무런 비난을 받을 수 없는 일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강제로 납치한 게 아니니 문제 없다, 돈 줬으니 된 것 아니냐’는 것은 일본의 극우들이 일본군 위안소를 부정할 때 동원하는 논리다. 그러한 억지주장에 맞서는 해법은 ‘돈을 받지 않았다,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제로 납치당한 사례가 많건 적건, 금전적 보상이 있었건 없었건, 국가가 여성을 전쟁터에 동원하여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인권 침해’라는 입장을 단단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여성 인권을 짓밟은 파렴치한 전쟁범죄다.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는 일본의 극우와 맞서면서 동시에 일본 및 전 세계의 양심적 세력들과 손을 잡을 수 있으며, 대한민국이 스스로 저지른 여성 인권 학대에 대해서도 올바른 반성과 재발 방지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명예를 되찾길 희망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22034055&code=990100&s_code=ao122
리영희.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위 문단은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책 <역정>의 198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저 문단에서 인용된 ‘시설’은 국군이 운영하던 것이다. 국군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 놓았다. 그 과정에 대해 리영희는 별다른 설명을 붙이고 있지 않다. 그렇게 ‘데려다 놓은’ 여자를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면 되었다”.
“전쟁 중의 이야기인데 적이 있는 전선에 가기 위해서 ‘코코포’라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는 반드시 삐야(ピ-屋)가 있다. 삐야라는 것은 위안소를 가리킨다.” <게게게의 기타로> 등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일본 호러 만화의 거장 미즈키 시게루의 회고 만화에서 인용한 대사다. ‘삐’는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만, 작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많은 남자를 한 명의 여자가 처리하는 것이다. (중략) 병사들도 지옥에 있었지만 이건 지옥 그 이상이 아닌가, 라고 화장실로 나온 조선삐를 보고 생각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무기를 손에 들고 북한과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가 남겨놓은 수많은 악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리영희가 증언하는 바,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하는 은전”이 대표적이다.
한국군은 일본군이 하던 그대로 위안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본군의 위안소에는 “일본삐” “나와삐(오키나와 출신)” “조선삐” 등이 있었던 반면, 한국군의 위안소에는 같은 한국인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다.
2015년 2월17일. 대한민국의 법원은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청구를 받아들여 “책 내용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광고 등을 할 수 없다”는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의 몇몇 구절이 종군위안부를 성매매 여성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이다.
독자의 양심에 질문을 던져보자. 리영희가 묘사한 한국군 위안소는 과연 정당한가?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올 때, 설령 그 여성들을 강제로 납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사들이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고 해서, 여성들이 수많은 남자들의 성욕 해소 대상이 됨으로써 심각한 학대를 당한 사실 자체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소에서 설령 ‘조선삐’를 폭력적으로 납치해오지 않았거나, 그들에게 경제적 대가를 지불했다 한들,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이 갑자기 아무런 비난을 받을 수 없는 일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강제로 납치한 게 아니니 문제 없다, 돈 줬으니 된 것 아니냐’는 것은 일본의 극우들이 일본군 위안소를 부정할 때 동원하는 논리다. 그러한 억지주장에 맞서는 해법은 ‘돈을 받지 않았다,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제로 납치당한 사례가 많건 적건, 금전적 보상이 있었건 없었건, 국가가 여성을 전쟁터에 동원하여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인권 침해’라는 입장을 단단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여성 인권을 짓밟은 파렴치한 전쟁범죄다.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는 일본의 극우와 맞서면서 동시에 일본 및 전 세계의 양심적 세력들과 손을 잡을 수 있으며, 대한민국이 스스로 저지른 여성 인권 학대에 대해서도 올바른 반성과 재발 방지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명예를 되찾길 희망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22034055&code=990100&s_code=ao122
2015-02-17
[북리뷰]일상화된 감시 사회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
로빈 터지 지음·추선영 옮김·이후·1만3000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발표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CCTV의 해상도가 부족해서,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용의 차량으로 지목된 흰색 BMW 번호판의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 CCTV가 사건 현장의 것이 아닐 수 있음에 주목하고, 이전에 검토하지 않았던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한 끝에, 용의 차량의 차종을 윈스톰으로 특정했다. 그러자 범인의 부인이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서 진범을 잡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CCTV가 주인공인가? 그것을 판독해낸 경찰인가? 아니면 이른바 ‘집단지성’을 발휘한 ‘네티즌 수사대’에 그 공을 돌려야 할까?
CCTV 및 기타 감시 시스템에 대한 2015년의 논의는 우리가 10여년 전에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감시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TV를 틀면 숫제 가정용 CCTV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언제라도 위치 추적 기구로 돌변할 수 있음을 잘 알지만, 20세기 말의 호들갑이 아니라 21세기의 무덤덤함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에게 더 많은 CCTV 정보를 공개하라는 상식 밖의 발언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감시 사회’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빈 터지는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를 통해 해당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물론 인류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쭉 남을 감시하고 감시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모든 죄수들을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구상했다. 나치는 게슈타포의 세밀하고 촘촘한 감시망을 통해 독일 국민들의 내면까지 억누르고자 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오늘날 스노든에 의해 폭로된 무지막지한 인터넷 감시체계를 갖추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해외를 오가는 전화통화 내용 가운데 테러리즘에 연루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통화 내용을 도청해도 좋다고 승인했다.”(97쪽)]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유와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 국가들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면서 포괄적인 감시체계를 마련하고 나섰다. 둘째,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시가 가능해졌다. 가령 페이스북에 당신과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올려보라. 컴퓨터가 자동으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한다. 이러한 기술이 CCTV와 결합하면, 컴퓨터는 행인 중 용의자를 곧장 파악하여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시민사회 자체가 감시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CCTV를 요구하는 것이 오늘날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저자 로빈 터지는 좌파 저널리스트답게 시종일관 비판적인 태도로 오늘날의 감시 사회를 바라본다.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 있는 한, 감시 사회로 향하는 경향성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CCTV가 우리 일상에 항상 끼어 있는 제3자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시민은 남의 싸움에 끼어들기를 꺼리게 되었고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도 줄어들었다”(270쪽)는 저자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티즌 수사대’ 이전에, 서로 챙겨주는 이웃사촌 아닐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2091902531&code=116
로빈 터지 지음·추선영 옮김·이후·1만3000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발표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CCTV의 해상도가 부족해서,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용의 차량으로 지목된 흰색 BMW 번호판의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 CCTV가 사건 현장의 것이 아닐 수 있음에 주목하고, 이전에 검토하지 않았던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한 끝에, 용의 차량의 차종을 윈스톰으로 특정했다. 그러자 범인의 부인이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서 진범을 잡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CCTV가 주인공인가? 그것을 판독해낸 경찰인가? 아니면 이른바 ‘집단지성’을 발휘한 ‘네티즌 수사대’에 그 공을 돌려야 할까?
CCTV 및 기타 감시 시스템에 대한 2015년의 논의는 우리가 10여년 전에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감시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TV를 틀면 숫제 가정용 CCTV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언제라도 위치 추적 기구로 돌변할 수 있음을 잘 알지만, 20세기 말의 호들갑이 아니라 21세기의 무덤덤함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에게 더 많은 CCTV 정보를 공개하라는 상식 밖의 발언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감시 사회’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빈 터지는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를 통해 해당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물론 인류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쭉 남을 감시하고 감시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모든 죄수들을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구상했다. 나치는 게슈타포의 세밀하고 촘촘한 감시망을 통해 독일 국민들의 내면까지 억누르고자 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오늘날 스노든에 의해 폭로된 무지막지한 인터넷 감시체계를 갖추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해외를 오가는 전화통화 내용 가운데 테러리즘에 연루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통화 내용을 도청해도 좋다고 승인했다.”(97쪽)]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유와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 국가들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면서 포괄적인 감시체계를 마련하고 나섰다. 둘째,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시가 가능해졌다. 가령 페이스북에 당신과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올려보라. 컴퓨터가 자동으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한다. 이러한 기술이 CCTV와 결합하면, 컴퓨터는 행인 중 용의자를 곧장 파악하여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시민사회 자체가 감시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CCTV를 요구하는 것이 오늘날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저자 로빈 터지는 좌파 저널리스트답게 시종일관 비판적인 태도로 오늘날의 감시 사회를 바라본다.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 있는 한, 감시 사회로 향하는 경향성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CCTV가 우리 일상에 항상 끼어 있는 제3자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시민은 남의 싸움에 끼어들기를 꺼리게 되었고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도 줄어들었다”(270쪽)는 저자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티즌 수사대’ 이전에, 서로 챙겨주는 이웃사촌 아닐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209190253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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