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7

고립과 연대

1.

6월 25일, 경복궁역 1번 출구 패밀리마트 앞. 애초에 경복궁역에 모이는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경복궁역을 가로지르는 차도가 시위대를 양쪽으로 분산시켰다. 오후 8시경 도착한 나는, 패밀리마트가 있는 1번 출구에서 친구와 만났고 상황을 주시했다. 정말 좋지 않았다. 전경들은 인도까지 올라와있었다. '불법집회를 당장 해산하라'고 말은 하는데, 해산한 다음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청와대 방면에서 전경 중대 하나가 내려왔다. 스크럼 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쪽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버텼다. 50여분 정도 그럭저럭 잘 해나간 것 같은데, 뒤쪽에서도 진압이 들어왔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사기가 떨어졌고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내 왼쪽에서 스크럼이 깨졌고, 전경들이 밀고 들어와 바로 내 옆에 있던 사람까지 연행해갔다. 손을 잡았지만 미끄러졌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돌아와 친구를 다시 만난 후 숨을 골랐다. 광화문으로 옮겨간 후 그날 3시까지 집회에 참여했다.

내가 대책회의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이 '집행부' 노릇하고 싶어서 방송 틀고 노래에 춤에 덩실덩실 노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앞장서서 나서고 있는 사람들이 고립되도록 방치하는 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고립으로 인한 공포심이야말로 시위대를 해산하고자 하는 경찰이 노리는 바로 그것이다.

경복궁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는 목소리를, 교묘한 방식으로 묵살했다는 제보가 한 둘이 아니다.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칼라TV 중계를 통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게다가 새벽 무렵, 서대문에서 전경들이 밀려들어오던 순간에도 그렇다. 투썸플레이스 방향으로 차를 몰고 왔으면 계속 거기서 버티거나, 방송을 끄고 조용히 광화문으로 도망갈 것이지, 계속 방송을 하면서 차를 빼니 시위대가 그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 아닌가.

분통이 터져서 항의를 하러 동행인이 달려갔다. 그러자 방송차량 주변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던 '일반 시민'들이, 누구에게도 답변을 할 수 없도록 돌려가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더라. 하나같이 말로는 '나는 대책위는 아니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는데, 대책위의 입장을 너무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방송차량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살수에 맞으면 안 된다나? 누가 당신들더러 앞장서서 방송 해달랬나? 후퇴를 하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 이거다. 꺼질거면 닥치고 꺼지라고. '님을 위한 행진곡' 틀면서 도망가면 후퇴가 전진으로 바뀌더냐?


2.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잠식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안전한 곳에 앉아서,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노래 틀면서 지휘부 행세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대책위로부터도, 고립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에 빠져들면 진다. 비단 이 시위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국민들이 무기력에 빠져들어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으면, 선거에서 거의 다 이기고도 정권 탈환을 못 하는 수도 있다. 짐바브웨가 바로 지금 그렇다.

짐바브웨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24일 대선 결선투표를 앞두고 야당 후보가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는 짐바브웨의 현지 르포를 실었다. 뉴스위크 기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기이한 ‘평온함’이었다.

로드 노드랜드 기자가 지하 조직을 통해 어렵사리 잠입한 곳은 짐바브웨 제2의 도시 블라와요. 실업률이 85%에 이른다는데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이나 거지가 없었다. 교통체증도 없고 거리도 깨끗했다.
"짐바브웨, 빵 한덩어리 사는데 3시간 ‘줄서기’"(경향신문, 2008년 6월 24일)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인 무가베를 앞섰지만 50%를 넘기지 못해 결선투표로 가게 된 짐바브웨에서, 무가베는 무자비하게 야당 지지자 및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야당 후보가 네덜란드 대사관을 통해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민들은 의외로 대단히 평온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드랜드가 본 짐바브웨 사람들의 주된 활동은 ‘줄서기’였다. 시내 빵집마다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쥐새끼를 때려잡자'는 사람들이,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며 주택청약 줄서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나 거기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삶을 꾸리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오직 '줄서기'에 매달려있는 동안 정부는 제멋대로 정책을 펼쳐나간다. 그래놓고서는 다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줄서기'를 그만 둬야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들 스스로가 한 사람의 노동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의식적 전환이 필요하다.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역설적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노드랜드 기자는 “무가베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6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무가베는 ‘짐바브웨는 붕괴되지 않는다’고 교만하게 말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무가베 말이 옳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5년째 10% 이하"라는 보도가 5년째 이어졌지만, 아무튼 대운하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면, 아프리카 플레이어를 끄고 아고라 띄워놓은 웹브라우저 창을 닫자. 광화문의 시민들은 현재, '일반 시민'들 속에 고립되어 있다.


3.

오늘은 경찰이 매우 이른 시각부터 진압에 나섰다고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일 가능성이 크다. 숫자가 적지 않아서 당장 집단 연행을 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시위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에 대해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결국 우리는 다시 '연대'라는 해묵은 가치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 금토일 사흘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더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두 거리에서 만납시다.

댓글 14개:

  1.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5년째 10% 이하"라는 보도가 5년째 이어졌지만, 아무튼 대운하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부분이 제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오늘은 힘들고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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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몸조심히 다니세요... 지금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이거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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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시간이 지난 뒤 '반성'하고 '후회'하는 일이 여러 사색과 토론을 통해 이어지겠지요. 글을 읽으면서, 그 '반성'과 그 '후회'를 가불해서 미리 할 수는 없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성과 후회를 예측한다는 것은 지금쯤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네요. 80년 서울역 회군이나 80년 광주나 87년 6, 7월이나, 지내놓고 보니 후회할 일 반성할 일 무척 많았지요. 후회와 반성을 엄밀하게 예측하는 것은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적 대운하'를 예방하기 위해서 연대해야 한다는 얘기에 공감합니다. 거리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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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익명/ 지지율은, 특히 이명박같은 근본주의자의 정책 수행을 가로막는 요소가 되지 못하죠. 실질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감사합니다.


    erte/ 사실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erte님도 나와주시리라 믿어요.


    익명/ 같은 내용의 코멘트가 다섯 개 달려있어서 제가 임의로 정리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이명박을 실질적으로 저지하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만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거리에 나가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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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부디 몸조심..

    그런데 어찌보면 굉장히 중산층적인 반발에서 어떻게 노동자로서의 자각이 이루어질지는 궁금. 노동자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겠지. 어쩜 나는 촛불을 내 환상대로, 사람들이 정말 뭔가 근본적 변화를 원한다고 맘대로 해석하는 걸 뿐 사실 사람들은 그저 위험한 소고기가 싫어서, 별 웃기는 넘이 제대로 일도 못하면서 자기 배불리려 나라를 집어먹으려한다니까! 딱 거기까지 일텐데...

    어쨌든 쥐는 꼭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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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노동자로서의 자각까지를 바라는 건 내 희망사항이고, 지금은 사실 최소한의 연대의식만 확보하더라도 성공이라고 생각해. '여대생'이 구타당하면 분노하는 사람들이 KTX 여승무원들의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은 분명 인식적인 괴리가 있는 거거든. 이번 시위를 통해 그런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거지.

    이명박을 끌어내리기 위해 뭘 해야 하나 한참 생각중인데, 완벽하게 똑부러지는 대안은 사실 없는 것 같아. 하지만 희망을 걸어볼만한 여지는 어느 정도 있지.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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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일단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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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오늘 http://blog.jrcho.com/1551 저도 하나의 글을 올리고 정신 차리고 있습니다. 연대의식 이란 수렴된 용어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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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경우, 광우병 문제는 때문에 생긴 기회는 반갑지만, 광우병이란 허깨비 이슈를 잡고 있어서는 안되고, 빨리 다른 실질적인 이슈로 전환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만약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집중을 하면 될 겁니다. 다른 이슈는 다 여기에 딸려서 나올 겁니다. 이미 정권이 자신의 운명을 광우병문제에 걸고 있기도 하고요.

    정권에 대한 직접충돌을 계속하기보다는 미국쇠고기 유통봉쇄를 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것이 원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겠죠.

    싱클레어가 정글을 쓴 다음 실망한 것 처럼, 식품안전이라는 공공재의 문제와 분배문제가 꼭 매끄럽게 연결되지만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노동자의식을 가지라고 다그치기 이전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그 조직력을 이용해서 유통봉쇄를 확실히 해줄 수 있다면 노정태님이 기대하는 접점이 일정하게 형성될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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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erte/ 위험한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jonathan.cho/ '연대의식'은 유서 깊은 단어죠. 한국에서는, 많은 어휘들이 그러하듯이 너무도 빨리 낡아버렸지만, 그 생명력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겁니다. 그런데 링크를 찍어보면 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오는군요. 아무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형사/ 광우병 자체가 논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국내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찰 및 외교부의 행정 절차에서 발생하는 수없는 위법 사실들이 논점이 되어야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허술한 식품 안전 관리 체계를 짚고 들어갈 수 있겠고요.

    현재 민주노총에서 쇠고기 냉동창고를 막고 있긴 한데, 컨테이너 하나 놓쳤습니다. 노동조합원들이라고 해서 무슨 슈퍼히어로들의 모임이거나 하지는 않죠. 그냥 아저씨들입니다. 저는 노동조합의 참여로 인한 '성과'보다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연대의식의 확충이 더욱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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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저는 토요일 새벽 1:30분쯤에 프레스센터 인근에서 연행되어, 이후 토요일과 일요일 투쟁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거리에서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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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역시 이 부분에서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는군요.

    저는 광우병문제가 처음 발생할 때부터 신뢰의 문제이고 정부의 국민에 대한 책임의 문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노정태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이슈들과 광우병문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해본 것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puppetmstr.egloos.com/371987

    http://puppetmstr.egloos.com/505377

    그리고 연대를 하려면 거래를 해야지요. 서유럽에서 사민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조건 중의 하나가 농촌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채택하면서 농촌과의 연대를 이룬 것이라고 하지요. 이 때의 거래를 일컬어 Cattle Trade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미친소를 매개로 Cattle Trade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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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만적/ 죄송하다니요. 오히려 무사히 집에 들어온 제가 더 죄송하죠. 몸조심하세요. 용기를 잃지 말도록 합시다. 다음 기회에 거리에서 뵐 수 있기를.


    인형사/ 한국의 농어촌, 특히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지역에서 그 인근 주민들과 어떻게 어떤 '거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저는 구체적인 답을 구하지 못하겠습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죠. 그러므로 인형사님의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 또한 그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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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Cattle Trade는 비유로 한 말인데요.
    광우병에 우려하는 국민과 시위대에 대해 어떤 거래를 할 것이냐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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