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할로윈 '오징어 게임' 분장 전 꼭 알아야 할 비화

 

[노정태의 뷰파인더-56] '근본 없는(?)' 축제에 대처하는 자세

● ‘오징어 게임’이 바꾼 할로윈 관점
●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축제
● 가톨릭계 이민자와 함께 美에 정착
● ‘어른들의 할로윈’ 어쩌다 탄생했나?
● 1996년作 호러 영화 ‘스크림’ 후폭풍
●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 포용해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할로윈 데이를 나흘 앞둔 10월 27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카페거리 노점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가면이 할로윈 소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뉴스1]
10월 31일 오늘은 할로윈 데이다. 매년 이맘때면 언론이 쏟아내는 기사의 패턴이 있다. '할로윈이라는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명절을 즐기겠다고 이태원과 홍대 등으로 쏟아지는 젊은이들', '기괴하고 잔인한 분장을 하거나 마블, DC의 슈퍼히어로 흉내를 내며 젊은이들이 즐기는 모습', '바닥에 나뒹구는 구토 자국과 빈 병이 보여주는 실종된 시민의식'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양상이 다르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때문이다. 예년 같으면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국적 불명의, 혹은 미국식 가짜 명절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오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흔히 눈에 보인다. '미국인들이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오징어 게임' 추리닝을 입고 있다', '유럽인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달고나를 먹으며 할로윈을 즐긴다.'

지난해까지는 외래문화가 맥락 없이 들어오는 창문이었던 할로윈이, 어느새 한국 문화가 해외로 뻗어나가는 수출 경로가 되고 만 셈이다. 그렇다보니 올해는 특이하게도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할로윈 비판이 많지 않고 그 수위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직 30대인 필자 입에서조차 '오래 살고 볼 일' 같은 말이 절로 나오는 희한한 2021년이다.

할로윈이라는 '명절 아닌 명절'이 국내에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후 처음으로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만큼, 이 기회에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할로윈이라는 특이한 명절의 유래는 무엇일까? 왜 오늘날 할로윈은 죽은 이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를 따라하는 날이 돼버린 것일까?

중세 유럽 켈트족에서 멕시코까지

중세 유럽의 켈트족은 한 해를 여름과 겨울 두 개의 계절로 나누었다. 생명이 약동하고 번창하는 여름이 끝나면 죽음이 돌아오는 겨울이 시작된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것, 그 축제를 서우인(Samhain)이라 불렀다. 10월 31일 밤부터 11월 1일까지 이어지는 그 축제는 여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동시에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성대한 축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켈트족 역시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다. 기원후 43년 대부분의 켈트족이 로마에 무릎을 꿇었다. 그 결과 서우인에도 로마의 색체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대부분 비슷했던 모양인지, 로마인들은 매년 10월이 끝나갈 무렵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페랄리아(Feralia)라는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날짜와 주제가 비슷한 탓에 두 축제는 서서히 하나가 되어갔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갔다. 로마의 유산과 제도 등이 무너진 가운데 그나마 문명의 잔해를 유지하고 있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 모든 문화와 풍습에 기독교의 영향이 가미됐고, 서우인 역시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세 유럽에 남아있던 축제는 서우인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전통 축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중세를 지배하던 가톨릭교회는 그런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즐기는 축제지만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고대 종교의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교도'의 전통에 따라 먹고 놀고 마시다보면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야만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 8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기존에 5월 13일로 정해져 있던 '모든 성일 대축일'의 날짜를 11월 1일로 옮겼다. 서우인 또는 서우인과 비슷한 다양한 토착 축제를 갑자기 없애버리면 민심이 동요하고 거부할 수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 노는 날짜는 그대로 두되 그 위에 기독교적인 맥락을 추가하여 '덮어씌우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략은 효과적으로 통했다. 11월 1일 모든 성일 대축일은 지금도 가톨릭교회의 중요 행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라틴 문화권에서 11월 1일은 상당히 비중 있는 명절이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0월 31일에는 세상을 떠난 모든 가족과 친지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다. 11월 1일은 아침부터 성당에서 모든 성인을 위한 미사를 드리며 어젯밤을 뒤덮었던 죽음에 대한 상념과 묵상으로부터 벗어난다. 11월 2일은 그 행사의 마지막 날인 위령의 날이다.

특히 멕시코는 10월 31일을 '망자의 날'로 특별히 취급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아즈텍 문명의 명절과도 관련이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공교롭게도 할로윈과 같은 날에, 같은 주제로 축제를 벌여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축제는 우리가 아는,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할로윈과 사뭇 다르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2018)에서 묘사하고 있다시피 진지하게 죽음을 고찰하고 망자를 그리워하면서도 떠나보내는 그런 날이다.

‘어른의 축제'가 된 비밀을 풀다

10월 25일 ‘오징어 게임’ 복장을 하고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을 찾은 야구팬들의 모습. [뉴스1]
미국은 기본적으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다. 미국으로 처음 건너온 이민자들의 삶은 망자의 날에서 모든 성인 대축일로 이어지는 가톨릭 전례 달력과 무관하거나 상당히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할로윈은 미국 어린이들의 축제가 되었다가, 심지어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어른들이 특수 분장을 하고 노는 날이 된 것일까?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문헌 중 대중적으로 입수 가능한 것들을 뒤져봐도, 어째서 가톨릭 계열의 축제가 개신교 국가에 뿌리 내릴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정교하게 설명한 것은 찾기 어렵다. 아무튼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가톨릭 계열 이민자들이 미국에 건너와 정착하면서 할로윈, 혹은 망자의 날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요즘은 영어 유치원이 아니라 그냥 유치원에서도 '트릭 오어 트리트(trick-or-treat)'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스켈레톤이나 마녀 같은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탕을 받는 그 행사 말이다. 그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유입된 할로윈의 풍습이 20세기 초, 1920년대부터 미국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아이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사탕을 받는 귀여운 행사가 된 할로윈은 '로컬 커뮤니티'를 중시하는 현대 미국인들의 감성과 딱 맞아 떨어졌다. 그 기원과 유래에 대한 특별한 고민 없이 두루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명절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되어버린, 말하자면 '어린이용 할로윈'이 탄생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할로윈'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걸까? 필자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조사를 해봤다. 한국어 문헌 뿐 아니라 영어 문헌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그럴듯한 설명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대목부터는 약간의 '뇌피셜'을 가미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할로윈이 '어른들의 축제'가 된 것은 두 번의 변곡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존 카펜터 감독의 1978년 영화 '할로윈'의 성공이 그 첫 번째다. 여섯 살에 친누나를 살해한 정신이상자가 고향에 돌아와 살인극을 벌인다는 내용의 호러 무비다. 이후 '할로윈' 시리즈 뿐 아니라 비슷한 콘셉트의 할로윈 시즌 호러 무비를 낳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할로윈을 어린이들의 동심 축제에서 어른용 호러 축제로 바꾼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영화 '스크림'의 등장은 특히 주목받는 사건이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스크림'을 안 본 분이 더러 계실 텐데, 그렇더라도 '스크림 마스크'는 보셨을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눈코입이 뚫려 있고, 대단히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 마스크 말이다. 그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변조한 목소리로 음산하게 '헬로, 시드니'라고 희생자를 부르고 무참히 난자해서 죽이는 호러 영화. 대중은 그 이야기에, 마스크에 열광했다.

그 '근본 없음(?)'이 우리의 힘!

지난 9월 2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에 마련된 ‘오징어 게임’ 팝업 체험존 ‘오겜월드’가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뉴스1]
정리해보자. '할로윈'과 그 뒤를 이은 호러 영화들은 할로윈을 어린이의 축제에서 호러 영화를 즐기는 어른들의 축제로 서서히 바꿔나갔다. 그러다가 '스크림'이 기념비적 성공을 거두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호러 영화를 몰래 보며 성장한 세대는 할로윈을 '어른들의 파티'로 즐기기 시작했다. 할로윈은 호러 영화에 등장한 온갖 할로윈 괴물이나 살인마를 따라 분장을 하고 노는 날이 됐다. 점점 '코스프레'의 대상은 호러 영화를 넘어 영화나 드라마 등 히트한 대중문화의 여러 요소들로 확장되었다.

앞서도 말했듯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지식과 체험에 기반하고 있다. 100% 확인된 사실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하지만 대체 왜 매년 서울 이태원이나 홍대 근처에는 10월 마지막 주말만 되면 흡혈귀도 아니고 살인마도 아닌 마블 캐릭터 의상을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즐기는 할로윈은 '근본 없는(?)' 축제다. 그 뿌리는 고대 켈트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미국에 기원을 둔 대중문화의 축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일일까? 망자를 그리는 엄숙한 종교적 행사에서, 아이들이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날이 되었다가, 어른들도 딱딱한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대중문화 흥행작을 흉내 내며 즐기는 날이 된 그 변화 과정을 굳이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런 '근본 없음'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2021년 할로윈은 분명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만든 문화 콘텐츠인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할로윈 파티 테마로 떠오른 즐거운 현상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할로윈의 '근본 없음' 때문이니 말이다.

이 글을 '국뽕'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화두를 더 던져보고 싶다. 매년 언론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순국도 아닌 '사형선고일'을 들먹이며 밸런타인데이를 구박한다.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라는 걸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래떡 데이'부터 온갖 길쭉한 음식을 갖다 붙이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할로윈의 '근본 없음'이 결국 우리의 힘으로 돌아왔다면, 다른 '국적 불명 기념일'에 대해서도 너무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단일민족과 순수혈통의 환상을 벗어던지고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와 섞여 들어갈 때, 우리는 더 강하면서 풍요롭고 즐거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할로윈데이 #오징어게임 #스크림 #코스프레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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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0

언론 비평 매체 '미디어스'에 보냈던 원고들

2008년 11월부터 2010년 7월까지 <미디어스>에 보냈던 원고들을 갈무리하여 블로그에 업데이트합니다.

이렇게 직접 정리해두지 않으면 URL이 바뀌거나 언론사가 사라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제 원고를 찾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와 지금, 많은 생각이 달라졌고 어떤 것은 그대로입니다. 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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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 미국 대선 결과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몇 가지 시선
https://basil83.blogspot.com/2008/11/blog-post_6.html

2009-03-13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문제적 개념 - 의회 불신의 난감한 산물…외부 여론이 방향타돼야
https://basil83.blogspot.com/2009/03/blog-post_13.html

2009-05-06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6.html

2009-05-21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알타이연합론인가 대동아공영권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21.html

2009-05-2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부엉이바위의 음모론을 경계하자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77.html

2009-06-04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 태국의 노란 셔츠 시위대를 보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6/blog-post_4.html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06/blog-post_17.html

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2.html

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13.html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23.html

2009-08-12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버마에서 벌어지는 법의 횡포와 민주주의 - 아웅산 수치와 쌍용자동차
https://basil83.blogspot.com/2009/08/blog-post_12.html

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https://basil83.blogspot.com/2009/08/blog-post_27.html

2009-09-1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강만수 특보의 이중국적 발언 – 마붑 알엄 씨의 경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9/blog-post_10.html

2009-09-18
김어준 총수, 파티는 끝났다
https://basil83.blogspot.com/2009/09/blog-post_18.html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0/blog-post_9.html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0/blog-post_27.html

2009-11-2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https://basil83.blogspot.com/2009/11/fta.html

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2/blog-post_4.html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https://basil83.blogspot.com/2009/12/blog-post_27.html

2010-03-16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https://basil83.blogspot.com/2010/03/blog-post_16.html

2010-07-29
[기고] 저 민주당과 무슨 연합을 할 것인가? - 이재오, 엄기영, 심상정
https://basil83.blogspot.com/2010/07/blog-post_29.html

거침없는 거짓말, 반성은 없다.. 이순간만 중요한 당신의 병명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맷 데이먼 주연 영화 '리플리'와 이재명의 '소시오패스' 논란

일러스트=유현호

낮에는 호텔 보이로 일하고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 노릇을 하는 톰 리플리. 어느 날 팔 다친 피아니스트를 대신해 뉴욕의 상류층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런데 리플리의 인생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빌려 입은 재킷에는 프린스턴 대학 로고가 박혀 있었고, 그걸 알아본 선박 부호 허버트 그린리프가 이렇게 말을 붙인 것이다. “프린스턴에 다녔으니 우리 아들 딕을 알겠군. 디키 그린리프.”

순간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리플리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디키는 어떻게 지내죠?” 디키는 가업을 이어받기 싫다며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있다. 허버트는 리플리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1000달러와 여객선 표를 내주며 디키를 데려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와 달리, 맷 데이먼이 리플리 역을 맡은 1999년 작 <리플리>는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에 충실한 편이다. 하이스미스의 소설과 영화 <리플리>는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의 행동 방식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작품이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정신이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이코패스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모든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욕을 채우고, 인육을 먹고, 기괴한 기념품을 만들고, 희생자를 살려두면서 고문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연쇄 살인범은 사이코패스, 지능형 범죄자는 소시오패스 같은 이분법이 타당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 그렇다.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사이코패스 검사표’(PCL-R)를 만든 사이코패스 연구의 개척자이자 권위자 로버트 D. 헤어 박사의 책 <진단명: 사이코패스>에 따르면, “영화와 소설을 제외하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극히 드물다.” 끔찍한 연쇄 살인범은 북미 지역을 통틀어 100명도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북미에만 200만에서 300만 명가량 존재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인구 중 1% 내외가 사이코패스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란 어떤 존재인가? 다시 <리플리>로 돌아가 보자. 나폴리 남쪽 몬지벨로라는 시골 마을에 도착한 리플리는 디키와 그의 약혼녀 마지를 만난다. 능숙한 거짓말로 동창생 행세를 하며, 평소 듣지도 않던 재즈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디키의 환심을 산다. ‘네가 잘하는 게 뭐야?’ 디키가 묻자 리플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서명 위조, 거짓말, 남 흉내 내기’.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걸 대놓고 자백하고 있지만, 너무도 당당한 태도로 이야기해버리기 때문에 디키는 리플리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헤어 박사의 기준에서 볼 때 리플리는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사회학, 정신의학, 의학, 심리학, 철학, 시, 문학, 예술, 법 등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둘러대기, 허풍, 과시 등이 거짓으로 드러나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 사이코패스의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크든 작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의 거짓말은 그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 들킬까 봐 두려워한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장기적인 고찰이나 반성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에게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그러니 남을 속이고, 때리고, 훔치고, 죽여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 죗값을 치를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사이코패스는 오직 본인을 향한 모욕이나 경멸에만 진지하게 반응한다. 부잣집 아들 디키가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과 행동을 자신에 대한 멸시로 여기며 차곡차곡 쌓아두는 리플리는 전형적 사이코패스일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 사회는 때 아닌 ‘소시오패스 논란’에 빠져들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해 국민의힘 대선 주자 원희룡 전 제주지사의 아내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강윤형씨가 내놓은 촌평 때문이다. 여당 측은 의료인의 권위를 빌려 정치적 비방을 했다며 의료 윤리 위반이라고 반발하는 반면, 강윤형과 원희룡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다.

이재명의 행보를 되짚어보자. 정계 입문 전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검사 사칭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성남시장으로서 본인이 설계한 업적이라고 자랑하더니, 문제가 되자 대장동 개발을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당당하게 몰아붙였다. 성남시의 조직폭력배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경기도 국정감사 자리에서 곤란한 질문을 받았지만 “으흐흐” 하고 웃어넘겼다. 심지어 경기도지사 당선 직후 “내가 끊어버릴 거야. 예의가 없어”라며 언론과 하던 생방송 인터뷰를 중단하는 등, 남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할 때는 격렬하게 반발하는 모습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이재명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논란이 그런 식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본인 스스로 테스트를 신청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형 고(故) 이재선씨의 정신병원 강제 입원 논란, 형수를 향한 욕설 파문 등 이재명을 둘러싼 믿기 힘든 소문은 예전부터 파다했다. 하지만 그는 상당수 지지자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두둔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과격하고 거칠수록 환호를 받았다. ‘대선 후보 이재명’은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정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주도권 싸움에 집착하고 권력투쟁에 능하다. 심지어 전문가인 로버트 헤어 박사 역시 사이코패스 사기꾼에게 속은 경험이 있다. 애초에 사이코패스가 접근하여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헤어 박사는 강조한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리플리> 같은 창작물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2021-10-24

스승의날 카네이션도 불법이라더니..이재명이 하면 합법?

 [노정태의 뷰파인더-55] '김영란법' 무력화한 전현희의 억지

●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린 청탁금지법
● 지인이나 친구에겐 무료 변론 가능?
● 판사에게 밥 사는 것도 특권
● ‘끼리끼리’와 ‘카르텔’의 본질
● 일선 경찰은 ‘박카스’ 하나도 안 받는데…
● 공직사회 ‘스폰서’ 차단이 본 목적
● 공직자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10월 18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 응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5년 3월 3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찬성 226명에 반대 4명이라는 압도적 표 차이였다. 청탁금지법의 제정을 원하는 국민 여론에 여야를 막론하고 호응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6년 7개월 후, 청탁금지법은 우스꽝스러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전현희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탓이다. 지난 10월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전현희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변호사 수임료 '무료 변론' 논란에 대해 이런 답변을 내놨다.

"지인이나 친구 등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무료로 변론할 수도 있다."

나는 청탁금지법 제정 취지에 대해 찬성하는 편이다. 대한민국은 특권층의 카르텔형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나라다. 다소 '인간미'가 떨어진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엉겨 붙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내가 처음부터 청탁금지법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일상의 너무 많은 영역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형법의 적용 범위는 좁을수록 좋다. 그것이 자유주의자의 세계관이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가운데)이 10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2021년도 종합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스1]

변호사가 판사에게 밥 사는 게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2015년 무렵 생각을 조금 바꿨다. 형벌권의 지나친 확장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확대할 수도 있다는 유보적 입장을 갖게 됐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을 인터뷰한 책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를 읽고 나서의 이야기다. 책에 나오는 김영란의 말이다.

"제가 왜 소위 '김영란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냐면요, 사법연수생으로 법원에 실무실습을 나갔을 때부터 판사님들이 저희를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셨어요. 그런데 사실 판사 월급이 얼마 안 되던 시절이니까 제대로 저녁을 사기엔 주머니가 얇고, 그래서 결국 잘나가는 변호사들을 불러서 밥을 사게 하더라고요. 배석판사가 된 다음에 보니 부장판사랑 친한 변호사들이 저녁도 사고, 저녁을 못 사는 경우 변호사가 밥값을 따로 주기도 했어요. 아무 변호사나 그러는 건 아니고 동기 등 친한 변호사들이 그랬고, 액수가 그 당시 한 3만~5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김영란이 사법연수생이던 1979년~1980년의 3만 원은 오늘날의 3만 원과 다르다. 적지 않은 액수다. 하지만 '뇌물'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액수기도 하다. 법조인의 눈높이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하고 술을 곁들이기에 딱 적합한 정도의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딘 김영란이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고 의아했다. 변호사가 판사에게 밥을 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김영란의 의문에 답을 준 사람이 김두식이었다. 김두식이 2009년 펴낸 책 '불멸의 신성가족: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은 발간 즉시 진보진영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자기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고, 친하고, 음으로 양으로 '서로 돕고' 사는 법조계의 내막과 치부를 꼼꼼히 파헤쳤기 때문이다. 김두식이 볼 때 한국의 법조 엘리트들은, 그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일종의 '카르텔'을 이루고 있다.

그 점을 분명히 짚고 명확하게 드러내준 김두식에게 김영란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2012년 10월 말,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영란은 김두식에게 부패방지에 대한 책을 함께 쓰자고 제안했다. 덕분에 청탁금지법에 대해 속속들이 1:1 과외를 해주는 책이 탄생했다.

국민 눈에는 결국 한통속이고 카르텔!

3만 원. 그 사소한 금액. 어쩌면 '인간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그저 밥 한 번 같이 먹고 밥값 대신 계산해주는 데 지나지 않는 자잘한 호의. 김영란은 바로 이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판사에게 밥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엘리트끼리 '인간적'으로, '끈끈한' 정을 느끼며 서로 감싸고 챙겨주는 동안 그들의 도덕성은 점점 사회 보편의 기준에서 벗어나 둔감해진다.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볼 때 그렇게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문화 자체가 공권력과 국가 기관과 사법 정의에 대한 신뢰를 크게 망가뜨린다. 김영란은 이렇게 말한다.

"왜 대가관계 없는 금품수수를 그렇게 엄하게 다루냐는 비난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부패구조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그런 법이 반드시 필요해요."

‘자격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부패구조'라는 말에 밑줄을 그어보자. 이것이 바로 '끼리끼리', '카르텔'의 본질이다. 사법시험이 됐건 로스쿨이 됐건 행정고시가 됐건, 어떤 '자격'을 부여받은 이들에게만 허용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다음에야 결코 내치지 않고, 아무리 무능해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그런 '온정'과 '시혜'의 구조. 김영란과 김두식은 그것을 문제 삼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김영란의 관점은 너무 심한 게 아닐까?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사람이 새로운 업계에 속해 일을 하면 다른 인생이 시작된다. 모든 업계에는 내부에서 통용되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특히 법조계처럼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쌓고 경험을 다져야 하는 분야라면 더욱 그렇다. 업계 내부자끼리는 물리적, 사회적, 심정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걸 억지로 끊어놓기 위한 법을 만드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설령 가능하다 한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김영란의 답은 분명하다. 2015년 이전까지 우리 법체계가 지니고 있던 큰 맹점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엄연히 뇌물죄가 존재하지만 '대가성'이 입증돼야 처벌이 가능하다는 한계 말이다. 대가관계가 없는 금품수수도 금지하지 않으면 '정'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 정이 쌓이고 끈끈해지면 그들끼리 서로 봐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내부자 사이에서는 훈훈한 풍경이겠지만 외부의, 국민적 시선에서 보면 결국에는 한통속이고 카르텔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 법으로 대가성 있는 뇌물은 처벌하지만, 대가성 없는 돈은 처벌을 못하잖아요. 평소 돈을 받아오던 관계에서 청탁하는 것은 대가성이 없다고 해서 처벌이 쉽지 않고, 그게 바로 '스폰서'지요. 권력형 부패에서는 스폰서라 생각하고 돈을 주고받지, 뇌물이라 생각하고 돈을 주고받지는 않아요. 그래서 금품수수와 부정청탁, 두 가지를 모두 끊어야 하는 거죠. 그 고리를 끊는 행동강령을 만들면서 처벌규정이 없으면 실효성이 떨어지니까, 기존의 행동강령처럼 윤리만 논하는 단계를 넘어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코뱅 같나요? 그래도 속은 시원하지 않나요?"

대가성 없는 금품수수를 차단하는 것. 법조계와 공직 사회를 기웃거리는 '스폰서'를 차단하는 것. 그것이 청탁금지법의 본래 목적이다. 이는 청탁금지법 제1조에 잘 설명돼 있다.

"제1조(목적) 이 법은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청탁 및 공직자 등의 금품 등의 수수(收受)를 금지함으로써 공직자 등의 공정한 직무수행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공직자 '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청탁금지법은 처음에 오직 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한 법이었다. 국회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립학교의 직원과 언론사 직원 등이 포함됐지만, 최초의 목적은 공직자, 그 중에서도 '높으신 분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대가성 없는 후원 관계', 즉 '스폰서'를 처벌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 경제학에서 흔히 쓰는 말이지만 세상사 모든 분야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공직자와 '스폰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는 뇌물 수수와 관련해 여러 정치적 스캔들을 겪은 나라다. 고위공직자나 선출직 공무원 뿐 아니라 공직사회 전반이 '대가성 없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가 좀 더 좋은 나라에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청탁금지법은 완벽하지 않다. 여러 비판이 존재하며 일정 부분 수긍할만한 여지가 있다. 법의 취지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나부터가 여전히 국민 생활의 큰 부분을 형사처벌을 동원해 재단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완전히 거두고 있지는 못하다. 비현실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 결벽주의가 아니냐는 비판 내지 비아냥 또한 할 수 있을 테다. 그에 대해 김영란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저더러 과격하다고 하는데 뭐랄까, 자코뱅(Jacobins) 같나요?(웃음) 그래도 속은 시원하지 않나요?"

청탁금지법은 한 마디로 '친해지지 말라'는 법이다. 공직자가 돼 권력을 가진 사람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빌려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힘을 갖고 있는 동안은 아무하고나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친해지지 말라는 의미다. 그렇게 '친하니까 괜찮다'는 범위를 줄여나가야 우리가 공정사회에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청탁금지법의 근간에 깔려 있다.

교사의 카네이션과 이재명의 무료 변론

‘아주 친한 사이면 무죄.' 전현희의 발언을 보며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아주 친한 사이면 변호사비를 안 받아도 청탁금지법 위반이 아닐 수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청탁금지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학생들이 주는 카네이션도 안 받아온 선생님들, 동네 어르신이 쥐어주는 박카스 하나도 받지 않은 일선 경찰들, 혼자 밥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하는 공무원과 법조인들의 조용한 헌신을 짓밟는 셈이다. 말단 공무원이 하면 불법이지만 여당 대선후보가 하면 합법이면 그런 걸 법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책장에서 뽑아온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를 다시 펼쳐봤다. 여전히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다. 더불어민주당 집권 후 권익위원장이 대놓고 청탁금지법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 허다한 '양심적 법조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버린 건 아닐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탁금지법은 공정하게 적용돼야 한다. 주민센터 9급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그 잣대로 이재명 지사를 평가하라.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법치주의다.

#김영란법 #전현희 #이재명 #무료변론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10-17

1위에만 유리한 룰 해석, 민주당은 '노무현 당' 아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54] 이재명 '본선 직행'이 주는 교훈

● 아무리 극렬해도 선거는 전쟁 아니다
● 이낙연 패배 인정, 환영할 일이지만…
● 민주주의 원칙 어긋난 與 당규해석
● ‘투표’와 ‘득표’는 엄연히 다르다!
● 소급 무효? 他 후보 매수 나설지도
● 여당서 사라진 盧·최동원의 ‘우공이산’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가 10월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 합동연설회에서 후보자 수락 연설을 앞두고 두 손을 올려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선거는 전쟁이다.'

다들 많이 하는 소리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종종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다. 얼핏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 선거와 전쟁 모두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권력을 두고 벌이는 다툼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패자에게는 형식적인 격려와 칭찬의 박수 외에 남는 게 없다. 그러니, 선거는 전쟁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선거와 전쟁의 유사성은 은유 차원에서 머문다.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전쟁은 상대가 다시는 아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굴복시킬 때 끝난다. 반면 선거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과가 나오면 막을 내린다.

전쟁을 끝낼 때 '다음 전쟁은 몇 년 후에 하자'고 기약을 하는 전쟁 당사자는 없다. 모든 전쟁은,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고 공표하게 마련이다. 반면 선거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치러진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다음 선거가 기다린다. '이번 선거는 마지막 선거'라는 식으로 치러지는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일 수가 없다.

문제의 특별당규가 논란인 까닭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들이 벌이는 극한의 투쟁이라 해도,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선거는 전쟁과 달리 '규칙성'과 '반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대표를 선출하거나 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이미 정해진 방식에 따라 참여자의 동의하에 수행된다.

반면 전쟁은 '무규칙'이다. 선거가 링 위에서 벌어지는 스포츠라면, 전쟁은 길거리 싸움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길거리의 깡패가 상대방에게 칼을 맞으면, 물론 재기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복귀가 어려울 것이다. 반면 운동선수는 몇 번이고 쓰러져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이 또한 전쟁과 선거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다소 길게 일반론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두고 벌어진 논란과 후폭풍에 대해 짚어보기 위해서다. 정치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참여하는 이른바 '정치 고관여층', 특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정치 고관여층 사이에서는 정치와 전쟁을 동일시하는 시각이 흔히 보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이러한 관점이 여당의 열혈 지지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소리다.

10월 13일 당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경선 패배를 인정하면서 민주당의 내분은 일단 진정되는 모양새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정당의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와 무관하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지닌 초대형 여당에서 극렬한 내분이 발생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의 불행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불거지게 만든 민주당의 당규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대선후보 경선의 특별당규가 모호하게 짜여 있었다는 것부터 문제적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당규를 해석함에 있어서 당원들의 투표를 무효로 만드는 방향으로 당 선관위가 해석을 내렸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그러한 해석론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문제의 특별당규 '제20대대통령선거후보선출규정'의 제59조 1항은 후보자의 사퇴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

이를 두고 이재명 지사와 그를 지지하는 측은 '무효라고 써 있으니 무효가 되는 것'이라는 문언적 해석을 앞세우고 있다. 문언적 해석이란 말 그대로 쓰인 말을 그대로 읽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사안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무효는 무효다'라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제59조 1항이 과연 그렇게 '명백'한 규정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후보자에 대한 '투표'와 그 후보자가 얻은 '득표'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제20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 등 당 지도부가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지도부-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상견례’에 참석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다른 후보 매수할 유인동기 생겨

제59조 2항과 함께 읽어보면 1항의 의미는 다른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제59조 2항은 "후보자가 투표 시작 전에 사퇴하는 때에는 투표시스템에서 투표가 불가능하도록 조치하되, 시간적‧기술적 문제 등으로 사퇴한 후보자를 제외하는 것이 불가능한 때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치 방법을 정한다"고 규정한다. 1항에서 말하는 '투표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59조 2항은 이런 뜻이다. 후보자가 투표 시작을 한참 앞두고 사퇴할 때에는 투표용지를 다시 인쇄하는 등, 아예 무효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하지만 투표 시작을 눈앞에 두고 사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며, 무효표가 최소한으로 나오도록 선관위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제59조 1항은 사퇴 이후에 발생하는 투표를 무효로 한다는 것이지, 사퇴 이전의 표까지 소급해서 무효라는 뜻이 되기 어렵다.

뒤이어 제60조로 넘어와도 마찬가지다. 1항. "선거관리위원회는 경선 투표에서 공표된 개표결과를 단순합산하여 유효투표수의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민주당은 여러 차례 순회 경선을 하고 투표하며 매번 투표가 끝날 때마다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므로 어떤 표가 무효인지 유효인지는 매번 투표 후 '개표'하고 '공표'할 때 결정된다. 그리하여 나온 유효투표수를 단순 합산해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재명 측의 주장대로 정세균 후보와 김두관 후보가 사퇴 전에 얻은 2만3731표와 4411표가 무효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제60조 1항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소급 무효'는 "경선 투표에서 공표된 개표결과를 단순합산"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 행해진 투표를 개표하고 공표하여 확정된 유효표는 설령 그 후보가 이후 사퇴했다 해도 유효로 봐야 한다. 그래야 제60조 2항에 정해진 결선투표의 취지에도 부합할 뿐 아니라, 전체 조문의 논리적 구성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미 민주당 당무위원회는 결정을 내렸다. 이낙연 후보 스스로 수용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국민적 시각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언적 해석을 표방한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사퇴한 후보자의 표를 소급해서 무효 처리한다면, 특정 후보는 다른 후보를 매수하거나 설득해 전체 유효투표의 모수(母數)를 조작할 유인동기를 갖게 된다. 육상, 빙상 경기 등에서 1위를 할 수 없는 선수가 같은 편을 돕기 위해 유력한 경쟁자 앞에 넘어지거나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그런 이상한 경선 룰이 되고 만다. 민주당 당무위의 결정에는 선거를 경쟁이 아니라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일까.

노무현과 최동원의 정치

9월 29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회의실 벽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누구 편이 가장 많은지 그 숫자를 헤아려 우두머리를 뽑는 것. 선거를 그 정도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틀린 건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더 많은 패거리를 거느린 알파 메일을 가려내는 일은 사람이 아니라 침팬지나 늑대 등, 사회생활을 하는 포유류라면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사회란 유인원 집단과 다른 그 무언가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선거를 전쟁으로 보는 단순 과격한 시각은 잠시 접어두자. 전쟁과 달리 선거는 상호 합의된 합리적 규칙에 따라 반복적으로 치러지는 평화적 행사다. 선거는 전쟁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다 해도, 선거가 끝난 후에는 웃으며 승자는 패자에게 위로를,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선거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상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거는 전쟁이 아니라 무엇이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민주국가의 선거란 '경연대회'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선 가능성을 보고 뛰어들어 실제로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도 있다. 매번 선거마다 판세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이기는 편 우리 편'의 마음으로 대세에만 표를 던지는 식의 유권자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당장의 당선 가능성과 무관하게 선거에 출마한다. 선거가 치러지는 공동체에 대해 후보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지,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적 행사가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마치 돌을 하나씩 날라 산을 옮기고자 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비록 지금은 다수가 아니지만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올바른 이야기를 하겠노라고 마음먹는 정치, 세상에는 그런 정치도 있다.

노무현은 호남 차별에 맞서기 위해 부산에 출마했다가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노무현에게도 선거는 당선을 위한 전쟁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는 3당 합당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그의 정치 행보를 지배했다. 노무현뿐만이 아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 역시 부산의 영웅이었고 김영삼(YS)과 각별한 사이였지만 3당 합당에 찬성하지 않았기에 민자당이 아닌 '꼬마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섰고, 패배했다.

대역전극 펼쳐지려던 찰나 뚝 끊겼다

쉽게 이기고자 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굳이 지는 길로 걸어 들어갔던 이런 사례들에서, 우리는 선거가 전쟁이 아닌 더 숭고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비록 지금 내 생각은 소수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선거라는 무대를 통해 꾸준히 대중을 만나 설득하다보면 언젠가 세상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런 바보 같은 믿음으로 인해 때로는 정말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오늘날의 민주당을 '노무현의 정당'이라 할 수 있을까?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을 보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대장동 의혹에 경선 판 전체가 휩쓸려 들어가면서 진흙탕 싸움이 돼버렸다. 막판 대역전극이 펼쳐지려던 찰나, 1위 후보에게만 유리한 식으로 룰을 해석하면서 경선 자체가 중간에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 뿐 아니라 국민 전반에도 큰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다. 이낙연 후보가 패배를 인정한 마당에 정해진 경선 결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 경선을 자기 성찰 및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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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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