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0

과학과 철학에 대한 논쟁을 넘어

철학뿐 아니라 그 어떤 분야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 그 자체를 면밀히 관찰하거나 그에 대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갖는 과학으로서의 의의를 논하다가 결국 이 논쟁은 과학철학에 대한 것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논쟁 참가자인 한윤형이 너무도 불성실한 태도로 텍스트를 읽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이 사용했던 용어의 일관성을 지키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지점을 지적하면서 내 논점을 펼친 후 논쟁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한윤형이 가지고 있는 '메타 이론'에 대한 정의는 글마다 다르다. 새로 올라온 포스트인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20일)에서는 '메타 이론'을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하고, 그 예시로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갖는 실천적인 오류를 들고 있다. 요컨대 자기지시적인 명제가 갖는 논리적 오류라거나, 모순율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가 낳는 논리적 파탄 등을 배제하는 것이 '메타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종류의 '메타 이론'은 특정한 분과 학문의 연구를 통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판단의 지변에 두루 존재하는 일종의 대기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직전에 올린 포스트에 따르면 '메타 이론'은 사뭇 다른 모습을 띈다. "심리학의 메타 이론은 마땅히 심리철학"("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가상의 심리학도와의 대화에서 그가 "그것은 실체이원론입니까? 아니면 행동주의입니까? 심신 동일론? 인과론적 기능주의? 심적 인과성론? 심적 실재론? 부수 현상론? 이렇게 세부적인 것에서 고를 수 없다면, 그것은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물리주의입니까? 물리주의라면 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라고 묻는 방식을 보더라도 그 사실은 확실하다.

사흘 전에는 "마땅히 심리철학"이었던 것이, 어느새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0일의 그는 "메타 이론이 도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심리학을 과학으로서만 옹호한다면 분열이 일어난다는 정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나의 주장을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주장을 내뱉으라고 요구하는 미친 소리로 취급한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그렇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메타 이론'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윤형의 입장이 오락가락 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상식에 부합하도록, 또한 3월 20일의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다듬어준 다음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만약 그가 사고를 위해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범주'에 가까운 그 무엇, 혹은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탐구한 인식의 전제조건들을 '메타 이론'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 어떤 철학의 내용도 될 수 없고 다만 철학의 전제조건을 형성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의를 놓고 들어간다면 심리학에서 '메타 이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심리학자들이라고 해서 러셀의 역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들이라고 해서 동일률과 모순률을 어겨가며 실험을 할까?

그가 3월 20일에 말했던 바대로 '메타 이론'을 정의한다면, 한윤형이 심리학자들더러 '당신들의 과학에는 메타 이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하지만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메타 이론'의 형성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식의 '메타 이론'을 가지고 있는 과학은 내가 알기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메타 이론 1호'와 '메타 이론 2호'가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되어 버린 다음, '그러므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자신의 학문적 위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하므로 '덜 과학'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그것이 그가 3월 20일 포스트의 첫머리에서 말한 주장 2), 즉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 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내용일 것이다.

물론 저 질문 자체가 상당히 잘못 이루어져 있다. '메타 이론 1호'에 따르면 그것은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철학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 조건이 된다. 반면 '메타 이론 2호'에 따른다면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편이 더욱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이추판다님이 바로 직전 포스트인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Null Model, 2008년 3월 18일)에서 인용한 김재권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김재권에 따르자면 "인지 과학은 심성(mentality)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향상시키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심리학, 언어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의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2쪽, 김재권 씀, 하종호, 김선희 옮김, 《심리철학》(서울: 철학과현실사, 1997), 인용문에서 재인용)이다. 그리고 심리철학은 인지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에 힘입어 최근 큰 성과를 거두어왔다. 만약 한윤형의 주장대로 심리학이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하지 못하는 '덜 된 과학'이라면, 심리학과 인접한 분과 학문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학제간 연구인 인지 과학 또한 '메타 이론 2호'를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김재권이 쓴 《심리철학》의 내용 또한 전부 철학이 아니게 되어버린다(아이추판다님의 포스트 "콰인 가라사대"에 달렸다가 작성자 한윤형에 의해 오후 5시 40분 무렵 삭제된 리플에서 그는 "신경생리학이나 인지과학 같은 것에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구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윤형이 그 시점까지도 인용된 김재권 책의 내용을 정독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내 논점은 첫 글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 1.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으로서 나름의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 2.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3. 어떤 조건에 의해서인지 명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은 과학이다. 4. 심리학에서 잘못되었다고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인 논변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5. 현재까지 진행된 심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단일한 철학적 입장이 옹호되지 못한다고 해서 심리학이 '덜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6.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고전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하는 전통적인 대륙철학의 맥락이 전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고착되어 있는 일부를 제외한다면, 1에서 6까지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윤형 또한 나의 논지 중 개별적인 부분에는 찬성의 뜻을 표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학문을 규정하는 메타 학문'인 철학의 위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쓸린 나머지, '메타 학문'에 대한 개념 정의를 혼동하다가, 심지어는 '심리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 하기 어렵다'는 소리까지 하는 등, 너무도 많은 범위에서 너무도 많은 주장을 내놓고 있다. 바로 이런 엄밀하지 못한 태도가 대륙철학의 맥락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사회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추판다님이 이 논쟁에 참여하는 태도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실에 대한 참과 거짓을 밝히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이론을 단지 '철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철학이 현대 과학의 내용들을 마구잡이로 곡해하는 것에 당연히 반대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철학도들이 구체적인 분과 학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 스스로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려 있던 어떤 리플에 대해 대답하자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내 전공과 무관한 수학, 과학 도서들을 즐겨 읽는 편이다). 같은 요구를 철학의 고전들에 대해서까지 하는 일은 그렇다면 과연 합당할까?

생산적인 논점을 열어놓으면서 이 논쟁을 마무리짓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혹은 그가 대변하고 있는 전반적인 입장은, '잘못된 지식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철학의 고전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사례로 들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논거로 삼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을 '앞으로도 영원히 참일 것'이라고 말한 칸트의 철학 또한 시대의 유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수 있다시피,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의 모든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고전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단편적인 논의를 넘어, 언젠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댓글 6개:

  1. 고르기아스의 사례는 모든 학문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전제인 것이고, 개별 학문은 그것말고도 다른 전제를 가진다고 생각하고, 일관성 있는 전제가 도출이 안 된다면 그건 논리적인 관점에서는 그 학문의 편제가 자의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거야. 경제학과 신경생리학에 대한 네 질문에도 답변했는데 왜 이 지점이 이해가 안 가는 건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 간다.

    아이추판다 님의 경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얘기를 주로 했지만 딱 두가지 추상적인 명제를 주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메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다."라는 총괄적인 정의를 통해 그것을 정신분석학과 대비시킨 것이지. 구체적인 얘기 속에서 딱 두 개의 추상명제만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부당한 결론으로 치닫는지에 대해 더 인지하기가 어렵다고 봐.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고.

    네 글은 논의를 더 어지럽히고만 있는 것 같다. 남은 건 대충 아이추판다 님 블로그에서 댓글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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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경제학에서 '일관성 있는 전제'라는 게 대체 뭔지에 대해 네가 논증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나본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야. 대체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일관성 있는 전제'가 뭔데? 나는 그걸 모르고, 폴 크루그먼도 모르고 케인즈도 그걸 모르고 있었는데, 너만 안다 이건가? 허허 이거 참.

    반박을 하고 리플을 달 거면 일단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다는 게 어때? 내 글이 논의를 어지럽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네 머리 속에서 논지가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이미 이 논쟁은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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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난번 네 글과 아이추판다 님 글은 패러그래프 별로 답변을 단 다음에 그걸 종합해서 새 글을 쓴 거야. 이 글도 읽기는 다 읽었고.

    네 말대로 경제학은 "사람들은 경제적 유인데 반응한다."와 같은 것을 교의로 삼고 있진 않아. 그러나 교의를 언급하기 이전에 경제학의 탐구 과정에서 그것이 전제되어 있지. 그것을 인지하지 않으면서 학문이 발전해 나갔을지라도, 멘큐처럼 그것을 물어보고 서술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고,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경제학이 꽤나 성숙한 학문이라는 얘기를 이미 지난번 글에서 했지. "어떤 때에는 경제적 유인에 반응하며, 어떤 때에는 경제적 유인에 반응 안해요." 뭐 이런 것이면 곤란하다는 건 자명하잖아?

    신경생리학자가 비록 그런 식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지라도 상관이 없지만, 내가 얘기한 것은 그들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이 '가능'하냐는 문제였지 실제로 그런 질문과 대답을 만들어 냈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도 지난번 글에서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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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꽤나 성숙한 학문이라는" -> "꽤나 성숙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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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단락별로 읽었다면 그 두 개의 학문을 같은 범주에서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아이추판다님의 언급에 대해서도 대답을 했겠네.

    "경제학과 심리학은 모두 자연과학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성장한 학문이지만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경제학은 자연과학의 이론중심적 태도를 따르는 반면에 심리학은 실험중심적 태도를 따른다. 경제학자들은 우아한 수식과 그래프로 이뤄진 근사한 이론들을 가지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인종, 언어, 문화, 지역에서 재현되는 확고부동한 실험결과들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이 더 과학적인가는 설령 '과학주의자'라고 해도 윤형님처럼 간단히 결론짓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들은 심리학의 손을 들어주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인간은 경제적 유인에 반응한다'라는 식의 전제를 일단 수긍하는 경향을 보이고, 반면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계속 간직하면서 연구를 진행한다는 거잖아.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 과학적인 연구 자세라는 것이 아이추판다님이 말하는 일반적인 과학철학의 상식이고.

    단락별로 나눠서 답을 달았다고 해서 네가 상대방의 글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이미 반박된 논지를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네 주장만 계속 고집하고 있잖아.

    이 논의 더 해봐야 아무짝에 쓸모 없으니, 여기서 진짜 그만하겠어.

    * 다른 방문자들께서도 가급적이면 이 글의 내용 자체에 대한 추가적인 리플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고전 철학을 현대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철학의 고전들에 대한 과학적인 반박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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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철학의 고전들에 대한 과학적인 반박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 쌩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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