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0

’매국노 조롱 잔치‘는 ’중티‘나는 짓이다

'매국노 조롱 잔치'라는 행사가 
지난 광복절에 열렸다.

이지용, 이완용, 윤덕영,
박제순, 권충현, 이근택 등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을
'유쾌하게 혼내주는' 이미지와 함께
굿즈와 음료를 파는 행사였다.



이걸 기획한 테크 유튜브 디에디트는
자신들이 굉장히 힙하고 세련되게
MZ들의 애국심을 표출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걸 보자마자 들었던 뭔가 그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이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적절한 표현이 떠올랐다.

'중티난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중티난다'는 것은 '중국 같고 촌스럽다'는 뜻이다.

왜 '매국노 조롱 잔치'가 중티나는 짓인가?



애국을 빙자한 폭력적 성향의 표출을
신나고 재미있고 유쾌한 것으로 포장해
전국 단위로 들쑤시고 놀았던 광란의 축제,
그것이 바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기 때문이다.

유희로 포장된 애국,
유쾌하게 즐기는 폭력,
그런걸 좋다고 깔깔대는 이들,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다.

 





2026-08-05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

국선변호인은 일반적으로

1)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인데
2) 그럼에도 인권이 있어서
3) 검사와 맞다이할 수 있게끔

국가가 붙여주는 변호인임.

범죄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은
이미 잘 작동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바로 '검사'라고 해왔음.

스스로 3)을 작살낸 서영교가
범죄'피해자'에게 국선변호인 운운하는 건
피해자를 가해자 취급하는 최악의 모욕임.

범죄 피해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심지어 잡범 가해자 취급을 하냐.

민주당은 교섭단체 이하로 추락하고
검수완박 주동자들은 감옥 가야 한다.

2026-07-31

정치-깡패-경찰 세상이 열렸다


기어이 더불어민주당과 그 외 위성정당들에서
곽상언 이소영 두 사람의 예외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경찰괴물법을 통과시켰다.

이제 검찰은 경찰의 힘을 통제할 수 없고
경찰을 막을 수 있는 권력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잖은 분들이 이런 꼬라지를 보면서
'민주당 저거 곧 쓴맛을 보게 되겠지',
'성난 민심 때문에 나중에 어쩔 줄 모르게 될거야'
이런 낙관적인 소리를 하고 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정치인이 나 너 우리 같은, 쥐뿔도 없는 사람들,
평민 내지 천민들에게 설설 기었던 것도
이제는 서서히 역사의 뒷페이지로 사라질 것이다.

왜?
대부분의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 때문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얼마나 무서운 권력자인지,
하루 24시간 정치 뉴스만 보고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른다.

국개으원 그딴게 뭐가 권력자냐 싶지?

세상에는 지방자치제라는 것이 있고,
국회의원은 의원이기에 앞서 '당협위원장'이다.

당협위원장의 가장 핵심적인 권력이 뭘까?
지방선거 출마자 공천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누가 나가냐?
좋게 말해 지역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들
나쁘게 말해 토호들이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정도로만 말하자).

그럼 향찰, 그러니까 푹 썩은 지역 경찰들은
누구랑 짝짝꿍 아삼육일까?
당연히 토호다.

그러므로 여기서 먹이사슬이 이렇게 그려진다.

국회의원(당협위원장)
↓ 
지방선거 출마자 및 당선자(중 일부)

경찰

나 너 우리 같은 평민과 천민

여러분은 구조적으로 절대, 절대,
국회의원 나으리들의 갑이 아니라는 소리다.

근데 왜 지금까지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나?

'정치검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첫째,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을 쫄게 하는 힘이 있었고,
둘째, 경찰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영감님 소리 들으면서).

그래서 우리는 검찰 수사에 벌벌 떠는 국개들을 보고 비웃으며
경찰이 우리를 함부로 못 건드리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었다.

물론 그 검찰도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긴 하는데
검찰이 쪼는 정치 권력은 대선 결과에 좌우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대통령 투표권,
그것이면 우리는 국회의원의 갑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검찰이 없던 시절에는 어땠나?
군사독재 이전 자유당 시절로 돌아가보면,
경찰이 깡패와 유착해 있었고
그 깡패-경찰을 정치인들이 머슴처럼 부렸다.

민주당은 지금 그런 세상을 다시 만든 것이다.

물론 이게 민주당 국회의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힘에서도 화내는 척 하면서
표정관리하는 의원님들이 적지 않다.

여러분은 이름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 일 없지만
지역 내려가면 방귀 좀 뀌시는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을 위한 A Whole New World 가 열렸다.

김용민이니 서영교니 비웃고 조롱하면 될 것 같지?
그 귀하신 분들, 다다음 총선까지 살아남으시고 나면,
우리같은 천것들이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
경찰서에 72시간씩 영장 없이 구금당할 거다.

어디 그때도 문자폭탄이니 뭐니
보낼 수 있는지 보자.
어딜 천한 것들이 귀하신 분들한테...

'선거에서 민주당을 혼내줘야지!'
'민심의 쓴맛을 보여줘야지!'
이런 소리 하는 분들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다음 총선에서, 민주당 몰락은 당연하고,
이 입법 폭거를 어물쩡 넘어가면서 이익을 취하지 않는,
그런 정치 세력이 개헌선 육박한 의석을 차지한 후,
입 싹 씻지 않고 초심 그대로 '검수원복'을 시켜야,
그래야 우리가 아는 치안 좋은 대한민국이 돌아온다.

이건 사실상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 개자식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

2026-07-14

민주당 덕분에 조만간 연쇄살인마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유영철부터 해서 2000-2010년대는
바야흐로 '연쇄살인마의 시대'였음.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등등
기라성같은 연쇄살인범들이 등장해
언론을 뒤덮고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음.


그런데 지금은 그런 놈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왜?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엄청 착해져서?

아님.
이유는 단 하나임.

'연쇄살인범이 될만한 놈들은
이미 다 감옥에 있기 때문'임.

그럼 왜 그런 놈들이 이미 감옥에 있냐?
한국에 무슨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냐?

아님.
굳이 그런 게 없어도 됨.
왜냐하면 범죄자는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

좀 사소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른 놈도
이것저것 캐묻고 하다보면 이전에 다른 범죄,
수사하다가 미궁에 빠진 범죄를 저질렀고,
이런 경우가 태반이라 이거임.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도 감옥에 있었잖음.
범죄는 저지르는 놈들이 계속 저지른다고 해도 됨.

그러니까 '여죄 추궁'은 수사의 기본이며
우리를 연쇄살인으로부터 지켜주는 핵심 장치임.

여기서 진짜 문제가 있음.

지금 보완수사권 가지고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김 빼는 소리해서 미안하지만,
솔직히 사후약방문이라고 생각함.

검찰이 보완수사를 할 수 있다 한들
'인지수사'도 '별건수사'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 경우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성매매 업소에서 돈 떼어먹고 튀어서
'4885 너지 개새끼야' 하면서 잡힌 영철이가
경찰에서 개판으로 수사해서 풀려날 위기일 때,

검찰에서 설령 그 영철이가 최근 실종된 여성들의
살인 용의자라는 혐의를 짚고 있어도
'별건수사'이기 때문에 '수사 개시'를 못함.

다 잡은 유영철을 검찰은 풀어줘야 한다는 소리임.
설령 보완수사권을 지켜낸다 해도 결과는 같음.

'쟤 풀어주고 다시 수사해서 잡아주세요' 해야 함.
연쇄살인 혐의자가 잡혀도, 검찰은, 풀어줘야 함.

민주당 때문에 우리는 이미 ㅈ됐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는데,

이대로 한 5-10년쯤 지나면 이제 슬슬
국내에서 멸종된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들이
한 둘씩 슬슬 나오기 시작할 것임.

까페 테이블에 핸드폰 두고 다니는 치안이 좋은 한국?
조까 머저리 새끼들아 지금 뭐래는 거야...

이미 조져놓은 시스템을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릴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으니
그냥 다들 지금을 즐기시기 바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다 민주당 때문임.

검수완박 관여자들 모두 체포당해서
유영철 강호순과 같은 방에 갇히거나
정남규랑 같이 지옥 가야 한다고 봄.

2026-07-13

한민당을 모르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자랑스러운 우리가 되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선조들의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그분들의 도전과 분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먼저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6·25 전란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과정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미국, 그중에서도 맥아더와 이승만 그리고 호남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이 3대 지주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좌파들은 정확하게 이 세 지주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이 부분이 가장 먼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한우. (2026-07-10). [이한우 시론] 대통령의 90도 인사, 우리 현대사를 다시 묻다. 시사저널. https://n.news.naver.com/article/586/0000133528

동의하지만, 좀 더 부연해야 할 부분이 있다.

좌파들이 한민당에 대해 갖고 있는 이중적 태도가 바로 그것.

그들이 인촌을 물어뜯은 건 맞지만, 인촌의 오른팔이었던 고하 송진우는 '독립지사'라면서 적당히 존경하는 척, 숭배하는 척, 그러고 있음.

그런데 인촌과 고하를 떼어놓고 말하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함. 고하는 인촌의 오른팔이었고, 인촌 역시 고하가 있었기에 독립운동 전반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의존하던 관계.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한민당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아니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가령 다음과 같은 시각은 성립할 수가 없음.

  • 대한민국은 서북에서 내려온 기독교(그들 식으로는 '개독교')가 지배하는 나라다 → 아님. 예나 지금이나 실향민 기독교인들은 숫적으로 늘 열세여서, 어떻게든 그들이 가진 자본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모색하고 있음.
  • 대한민국은 친일군사독재 세력이 다 해먹어온 나라다 → 아님. 한민당이라는 기득권에 대해 아예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소리. 애초에 '친일'과 '군부'는, 적어도 초반에는 사이가 매우 매우 안 좋았음. 심지어 '반일'과 '군부'도 서로 갈등했음. 지금도 사이가 좋다고 하긴 어려움.
  •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가 굶주리고 친일파가 득세해온 나라다 → 아님. 독립운동가라고 이름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의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일본 입장에서도 귀한 인재였고, 그런 이들은 늘 제1의 포용과 포섭 대상이었음.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는 종이 한 장 차이거나, 앞서 말한 인촌-고하 관계가 보여주듯,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기도 했음. 왜 해방 직후 한국인들이 인촌에게 건국훈장을 주는 일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는지, 그 역사를 '내 머리로 생각'들을 좀 해보시라.

게다가 이 구도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 자체를 레종 데트르로 여기는 집단, 즉 386과 그들의 헤게모니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X세대, 말하자면 'X86 연속체'가 출현하면서 더욱 혼란하게 꼬여가고 있음.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세력 중 가장 위험한 건 X86 연속체라고 생각함. 이유는 간단함. 그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Juche 가 너무도 엉성하고 조잡하며 파괴적인 유사 종교이기 때문.

통일부에서 주체사상 관련 문서를 읽기 쉽게 해준다는데 정말 고마운 일. 시간과 에너지가 되는대로, 꼼꼼히 읽고 '해체'하며, 역량이 닿는 한 해외에 소개하여 한국의 새로운 지배 세력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에 물들어 있는지 전 세계에 알릴 것임.

2026-07-04

인권의 이름으로 단체기합을 옹호하는 사람들

공부를 곧잘 했지만 학교는 끔찍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부조리하기 때문이었다.

시시덕거리고 떠들고 도시락을 까먹고, 때로는 바지를 내린 후 그 위로 체육복을 덮고 자위를 하는 그런 놈들의 그런 잘못 때문에, 모든 학생이 매를 맞는 시스템이 싫었다.

'한 사람의 잘못은 모두의 잘못'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폭언을 내뱉는 선생들이 싫었다.

개별적인 잘못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처벌하며 교정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과 게으름을, 모든 학생들에 대한 체벌로 퉁쳐버리는 그 부조리가 너무도 싫었다.

배재고 야구부 6개월 출전 정지는 바로 그런 짓이다.

소위 '인권 감수성'이 좀 있다는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진저리를 쳤을 '단체기합'의 부조리 그 자체다.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를 선창했던 누군가, 그리고 따라했던 누군가, 말리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

그들을 세밀하게 추적하고 잡아내지는 못할 망정, 몇 시간 대충 조사해놓고 '팀 전체 6개월 출전 정지'를 때리는 건, 군사독재 시절 혹은 그 잔재가 남아 있던 교실에서 벌어지던 단체기합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똑같다.

나는 '스타벅스 가야지'가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국가가 개인을 억압할 때 꺼내야 할 이야기이며, 야구선수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쇼비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 업계가 요구하는 스탠다드가 그렇다면 맞출 필요가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배재고 야구부 전체에 대한 6개월 정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은, 몇몇 사람들, 아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단체기합'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젊고 건강하고 명랑하기까지 한 '신세대'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학창시절에 그렇게 증오하던, 담배피는 양아치 새끼와 교실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범생이를 모두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백 바퀴씩 구보를 뛰게 하던, 불콰한 얼굴로 술냄새를 풍기던 교련 선생이다.

당신들은 스스로를 서태지 같은 문화적 반항아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당신들은 서태지의 노래에 삐 소리 나게 검열을 하던 바로 그 구시대의 기득권들이다.

나는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 인권을 존중한다는 사람들이, 어떤 모순에 빠져 있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알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소싯적에 그렇게 역겨워하던 그 배나온 기득권, '저 애새끼들 저거 확 조져서 눈깔을 못 들게 해야 해'라고 히죽거리던 그런 개저씨들, 당신들은 바로 그런 존재가 되어 있다.

인권의 이름으로 단체기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라니, 정말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배재고 야구부의 특정 학생은 징계를 받을만한 짓을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PL 선수라면 무릎 꿇는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배재고 야구부'가, 사실상 폐부당한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의 '집단 징계'를 받는 것은, 글쎄?

그게 괜찮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어디어디 지역 출신은 안돼'라고 하던 바로 그 꼰대들과, 똑같다. 게으른 집단 처벌 논리다.

역겨운 기득권이 되는 것이 당신들의 인생 목표였다면, 축하한다.

2026-06-12

원자력 악마화와 양이원영의 '보급투쟁'

원자력을 ‘나쁜 에너지’로 몰아가는 흐름은 태양광과 풍력에도 부당한 도덕적 관점을 부여했다. 그저 전기 생산 방식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양광이나 풍력 등은 ‘착한 에너지’인 양 포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광을 깔기 위해 나무를 베고 산을 깎으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환경 파괴가 된다는 현실적인 반박은 도덕적 함성 앞에 간단히 기각되었다. 풍력 발전 터빈이 친환경적으로 보여도 수많은 새와 박쥐, 곤충의 목숨을 실제로 앗아가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상을 선악으로 나눠 직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너무도 뿌리 깊은 인간적 경향성 때문이다.

바로 이 경향성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진정한 ‘도덕적 과제’라 할 수 있다. 특정 에너지나 입장을 도덕적 선으로 취급하고, 다른 에너지원과 입장을 도덕적 악으로 치부하는 식으로는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라는 전 지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이라 해도 그 나름의 도덕적 관점이 있고, 나름의 도덕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를 위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 뉴욕 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저서 ‘바른 마음’에서 역설한 내용이다.

필자는 지난 5월 20일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ALC)의 “기후 논쟁의 빈자리: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 세션에 패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곳에서 필자가 강조한 내용도 이와 같다. 기후 변화에 대한 담론은 도덕에 얽매여 있다. 모두를 위한 도덕이 아니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배타적 도덕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에너지 문제, 폐기물 처리와 관리 문제, 그 외 가치중립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수많은 환경 담론이 도덕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양 전 의원이 한수원 비상임이사가 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도덕주의가 낳는 혼란 중 하나다. 전 국민이 다 아는 반핵·탈원전 전도사가 어떻게 한수원 이사직을 노릴 수 있는 걸까.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도덕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흔한 패턴에 대입해 보도록 하자. 아마 그는 원자력은 ‘나쁜 에너지’고 신재생은 ‘착한 에너지’라는 생각을 여전히 확고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쁜 놈들의 돈’을 받아서 ‘좋은 일’에 쓰겠다는 식으로 본인의 이중적 선택을 정당화하고 있을 수 있다. 도덕화된 환경주의는 ‘친환경 내로남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노정태. (2026-06-06). 양이원영 한수원 이사 선임? 보신탕집 사장이 애견협회 회장 되는 꼴. 신동아. https://n.news.naver.com/article/262/0000019424?sid=100

지난 토요일에 업로드된 신동아 칼럼입니다.

본문에 쓰려다 말았던 표현이 있습니다. '보급투쟁'이라는 단어죠.

운동권들이 1) 체제 영합적 일자리를 얻거나 2) 그들이 적대시하는 체제와 거래하여 이득을 보거나 3) 심지어 엄한 사람들을 속이고 돈이나 재산을 빼앗거나 할 때,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쓰는 표현입니다.

대의를 위한 '투쟁'에 '보급'을 하고 있을 뿐이니 오케이다, 뭐 그런 논리죠.

양이원영 전 의원이 한수원 이사가 되겠다고 지원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단어가 곧장 떠올랐는데,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의식의 저편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네요.

어쩌면 '보신탕집 사장이 애견협회 회장 하는 꼴'이라는, 더 개쩌는 레토릭이 떠올라, 제 무의식 속에서 묻힌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칼럼이 나가고 며칠 후, 양 전 의원은 한수원 이사 지원을 철회했습니다. 잘한 선택입니다. 반핵 활동을 하시더라도, 보급투쟁 같은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지 마시고, 양심과 시민 사회의 상식에 맞게 행동하기 바랍니다.

첨부한 사진은 제가 ALC에서 발표한 모습입니다(feat. 김재섭 의원). 뜻깊은 자리에 연사로 설 기회를 주신 환경 시민단체 '아울러가꾸는터전'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26-06-07

재선거? 당연히 해야지

서울시장 선거 말고
투표지 부족했던 기초선거.

서울시장 선거는
이미 정원오가 승복했으므로
재선거를 논할 이유가 없음.

마치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의 플로리다 표가
천공밥이 안 떨어지는 등
몇몇 이슈로 논란이 되었지만

앨 고어가 대승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그냥 결과가 확정된 것과 같음.

Beyond the hanging chads: Four things you may have forgotten about the 2000  Fla. recount - The Boston Globe

게다가 논란이 된 표를 다 더해도
오세훈 승리라는 결과가 바뀌지도 않음.

반면 기초는 이야기가 다르다.

단 한 표 차이로 의석이 오가는데
그걸 재선거 안하면 말이 안 됨.
충분히 결과에 영향이 있을 수 있음.

선거 패배를 인정해준
정원오 후보에게 감사하면서
(감사의 정원오 🙏)

첫째, 이 일에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둘째, 기초 단위 재선거를 시행하며
둘째, 선관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야 함.

2026-05-21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 수호가 진정한 5.18 정신

시민군은 태극기를 몸에 감고 애국가를 부르며 싸웠다. 전남도청에 설치된 본부에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조사과가 있었을 정도로 시민군의 애국심은 분명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헌법적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 도시와 지역에 국한된 비극에 머물 수 없다. 일부 정당과 세력의 정치적 전유물처럼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 그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일 것이다.

노정태. (2026-05-18). 5·18 광주민주화운동.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9075

중앙일보 독자들 중에서도 논란이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각오하고 쓴 칼럼. 역시나 리플란이 발칵 뒤집혔다.

이래저래 굳이 인터넷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으려 했는데, 스타벅스 탱크데이 이벤트 논란이 벌어지고, 이재명 대통령이 "강력 응징"을 운운하는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어서 글을 쓴다.

이건 이재명, 우원식, 민주당의 5.18 파시즘이다.

5.18 광주의 정신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짓이다.

어째서인가? 전남도청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탱크데이 어쩌구 이벤트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특정 기업을 '응징'하겠다고 선포하고, 실제로 행안부가 불매를 해버리는 식이라면, 이건 5.18 시민군이 목숨 걸고 지킨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게 얼마나 섬뜩한 파시즘적 행태인지 모르는가? 정신들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재명의 '응징' 발언은 '스타벅스의 병크 ㅋㅋ'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말 사안이 아니다. 우리는 파시즘의 전조도 아닌 본격적인 시작을 목격하는 중이다.

이재명, 우원식, 민주당의 5.18 파시즘

이건 파시즘이다. 내가 직접 쓰기도 귀찮아서 챗GPT 굴림.

5.18을 역사적으로 되새기고 기념하며 그 정신을 새롭게 다지는 것과, 5.18을 앞세운 파시즘에 놀아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일러두기: 나는 5월 18일자 중앙일보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취지의 칼럼을 기재한 바 있다.)

우원식이 내놓은 개헌안 낼름 받아서, 그 장단에 놀아났던 분들, 다들 반성을 좀 해봅시다.


문: 행정부가 특정 기업을 불매하고, 대통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하겠다'는 나라가, 민주국가 중에 있나?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치가 유대인 기업에 할 법한 소리 같은데?

답: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부나 대통령이 특정 기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압박하는 사례는 있다. 그러나:

  • 행정부가 조직적으로 “불매”를 유도하고,

  • 최고권력이 특정 기업을 “응징하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하며,

  • 국가 권력을 동원해 보복을 암시하는 것

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법치주의(rule of law), 정치권력과 시장의 분리, 표현·경제 활동의 자유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현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기업을 비판하더라도 보통은:

  • 독점 규제,

  • 탈세 수사,

  • 노동법 위반,

  • 국가안보 문제,

  • 소비자 보호

같은 “명시적 법적 근거”를 앞세운다.

반대로 “정권에 비협조적이다”, “마음에 안 든다”,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응징을 시사하면, 그 순간부터는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 정치의 냄새가 강해진다.

당신이 떠올린 1930년대의 사례도 완전히 엉뚱한 연상은 아니다. 예컨대 1933년 나치의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 은 국가권력이 특정 집단의 경제활동을 정치적·인종적 이유로 공격한 대표적 사례다. 물론 오늘날의 어떤 사건이 곧바로 나치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 비교에서는 규모·제도·폭력성·인종주의 여부 등을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

다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민주주의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패턴은 있다:

  1. “국민”과 “반국민”을 나눈다.

  2. 독립기관·언론·기업을 “적”으로 규정한다.

  3. 국가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불이익을 암시한다.

  4. 법 집행이 중립성을 잃고 충성 여부에 따라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으로 헝가리 의 오르반 빅토르 체제, 튀르키예 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체제, 일부 시기의 러시아 등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형식상 선거는 존재하지만, 국가권력이 시장과 시민사회를 압박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비판이다.

핵심은 “민주국가냐 아니냐”를 이분법적으로 보기보다, 민주주의에도 정도(degree)가 있다는 점이다. 선거가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민주주의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 혹은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다.


같은 질문에 대한 제미나이의 답변은 더 단호하다: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특정 사기업을 겨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하겠다'고 선언하거나 행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불매 운동을 주도하는 행위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법치주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민주국가의 헌법과 법률은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고 기업의 경제 활동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지적한 대로 이러한 형태의 전방위적 민간 압박은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 정권, 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대인 상점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적 보이콧(Judenboykott) 등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통제 방식에 가깝다.

다만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특정 기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타격을 입히려 시도한 사례는 존재한다.

현대 민주국가에서의 유사 사례와 한계

현대 정치에서 정권이 특정 기업을 압박한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기업 압박: 트럼프는 재임 시절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하던 워싱턴 포스트(WP)의 소유주 제프 베이조스를 겨냥해 아마존의 택배 요금 문제를 지적하며 우체국(USPS)에 요금 인상을 압박했다. 또한 CNN의 모기업인 AT&T와 타임워너의 합병을 저지하기 위해 법무부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대선 과정이나 재임 중 하 Harley-Davidson, Goodyear 등의 기업을 향해 "제품을 사지 말라"며 사실상의 불매를 선동하는 트윗을 올린 바 있다.

  • 리차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보복 시도: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하던 워싱턴 포스트의 모기업을 압박하기 위해, 해당 기업이 소유한 TV 방송국의 면허 갱신을 취소하도록 연방통신위원회(FCC)에 압력을 가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이는 이후 '닉슨 테이프'를 통해 폭로되었다.

민주주의 시스템과의 충돌 및 제어 메커니즘

이러한 사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응징'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부의 상호 견제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 사법부의 견제와 법치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부는 행정권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한다. 만약 행정부가 합법적인 근거(반독점법 위반, 세법 위반 등) 없이 특정 기업에 불이익을 준다면, 해당 기업은 행정소송이나 위헌법률심판을 통해 이를 무력화할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 법무부가 제기한 AT&T 합병 저지 소송은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 권력 남용 및 탄핵 사유: 대통령이 공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해 특정 기업을 파멸시키려 한다면, 이는 헌법 수호 의무 위반으로 이어져 의회의 탄핵 사유나 퇴임 후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된다. 앞서 언급한 닉슨의 시도 역시 탄핵 발의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자가 거친 수사(Rhetoric)를 동원해 특정 기업을 위협하거나 지지층을 동원해 불매를 유도하는 정치적 행태는 간혹 발생한다. 그러나 이를 넘어 행정력을 초법적으로 동원해 특정 기업을 '응징'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해당 국가는 이미 외형만 민주주의일 뿐 실질적으로는 법치주의가 무너진 독재 내지 권위주의 국가로 이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26-05-10

주담대 틀어막기는 강남좌파를 제외한 온 국민 '인종차별'

 

이 대퉁령의 '잔인한 금융'론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난한 사람이 목돈을 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집을 사서 그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천천히 갚아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과 민주당 정부는 주택담보대출을 악마화하며 그 요건을 매우 빡빡하게 조여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대출 방식 중 하나인 주택담보대출을 이렇게 막아놓고, 가난한 사람에게 대체 무슨 돈을 어떻게 빌리라는 말인가.

노정태. (2026-05-08). [노정태 칼럼]저신용자 고금리가 ‘잔인한 금융?’ 주담대부터 정상화하라!. 뉴스프리존. https://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8739

매달 초 발행되는 '노정태 칼럼'. 뉴스프리존이라는 인터넷 매체에서 경제 관련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이재명 대통령 각하께서 최근 '잔인한 금융' 어쩌고 하시면서 금융 제도를 또 이케저케 뜯어고치려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그 와중에 주담대를 틀어막다못해 아주 박살내고 계시죠.

이 두 가지 행태가 함의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이건 인종차별입니다.

뭔 소리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산층이 어떻게 성장했나요?

첫째, GI Bill을 통한 학자금 대출로 대학 가기 쉽게 해줌.
둘째, 참전 군인 중 '오직 백인'을 대상으로 모기지 쉽게 내줌.

이 중 첫째는 이명박 정부에서 했는데, 문제는 둘째죠.

미국은 설령 전쟁에 갔다 왔어도, 흑인들이 교외에 집을 사려고 할 때는 무슨 개같은 핑계를 대면서 대출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담대를 틀어막는 것을 흔히 '레드라이닝'(Red Lining)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전후 미국이 흑인과 유색인종에게 저지른 최악의 인종차별입니다.

왜? 집값이 상승하여 발생하는 자산 상승의 혜택을 흑인이 못 누리게 한 거니까. 그렇게 흑인들은 계속 도심에서 월새 내고 살면서 랩이나 하라 이거죠.

지금 민주당 강남좌파(혹은 이재명 성남좌파? 암튼) 정권이 하는 짓도 똑같습니다.

이미 서울에 집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부동산이라는, 주식과 달리 인간의 생존과 번식과 번영에 필수적인 자산을 못 갖게 하고 있죠.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금융을 상대적으로 못 다루는 저소득층에게 돈을 더 빌려주겠다고 합니다.

이러면 결국 벌어질 일은 뭐다? 아주 끝장나는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이재명 정권 끝날 때쯤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산 없이 빚의 노예가 되어 있을 겁니다.

삼전닉스가 어쩌고 칠천피가 저쩌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역할을 계속해나갈 생각입니다.

원문의 링크를 클릭해서 읽어주시면 제 글을 받아주는 작은 매체에도, 그리고 제게도,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2026-05-02

박한슬. 『내 집에서 나이 들 수 있을까』(서울; 더퀘스트, 2026)



글 짓는 약사 박한슬 님께서 보내주신 책을 이제야 읽었다.

옛날에는 관혼상제를 모두 집에서 했는데 지금은, 관은 아예 없어졌고, 혼은 예식장, 상은 병원 장례식장, 그리고 제사는 사라져가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중 특히 상이 문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옛날과 달리,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이라고 죽음이 짧고 짜릿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는 건 아니지만, 오늘날의 죽음은 그렇지 않은가. 어디 요양병원에 유폐되다시피 한 상태로 앓고 앓고 자식들은 간간히 찾아오는둥 마는둥... 뭐 그런 스토리들.

이 책은 노화와 돌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논점을 짧은 분량 안에 효율적으로 담고 있다. 저자 사인에 적혀있듯,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것을 여성, 특히 며느리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해결해왔는데, 그 모델이 파괴되자 '요양병원에서의 죽음'이라는 생뚱맞은 결말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된 것이다.

더 최악은 따로 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는 것. 복지에는 돈이 드는데 아무도 세금을 낼 생각이 없다. '내놔라 공공임대' 하는 그쪽 사람들 말고, 그쪽 사람들 욕하느라 바쁜 자칭 보수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비용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책상 위에 한참 누워만 있던 책을 이제서야 집어서 후딱 읽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여러 지점에 대해 함께 논의해봤으면 좋겠다.

2026-04-27

조건에 맞서기, 운명에 맞서기

 

조건과 운명.

사람들은 흔히 이 두 요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운명에 맞서는 태도를 견지하되,
조건에는 순응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고,
극심한 연교차가 있고,
땅을 파도 석유는 나오지 않고,
국제적으로 쓸만한 무역항은 부산 뿐이며
북쪽은 어떤 유사국가 무장단체가 막고 있다.

이런 조건은 우리가 발버둥쳐서 바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냥 순응하고, 그 속에서 전체 파이를 키우되,
서울과 경부선 라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이
어떻게 소외되지 않을지 고민하는 게 합리적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내려와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나의 조건이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의 조건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조건의 역설이랄까, 그런 게 생긴다.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그제서야 비로소 '운명'을 바꿀 여지가 생긴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선진국 문턱을 살짝 넘었다.
조건을 받아들이되 운명에 맞섬으로써.

민주당의 지역이기주의적 행태 앞에서
민주당 지지 고학력층의 골때리는 소리들을 보고
이분들은 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정 반대가 아닐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조건을 '거부'하면서
운명에 순응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데,
그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운명에의 순응이다.

이영도가 피를 마시는 새였나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토끼는 자신에게 강한 턱과 이빨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달린 두 다리와 큰 귀를 이용해
포식자를 감지하고 재빨리 숨어서 이겨낸다.

조건에 순응하는 것은 운명에 순응하는 게 아니다.
조건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운명과 맞서기 위한 첫 걸음이다.

대한민국은 충분히 큰 나라여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가 아닌
다른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미국은 고사하고
심지어 일본과 비교하기에도 부적합한
그런 아담한 사이즈의 '영토국가'라는
조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방소멸은 극복할 수 있다.
심지어 운명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그 조건을 활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2026-04-23

너무도 단순한 돈의 방정식과 어두운 곳을 보지 않는 돈의 심리학

Housel, M. (2025). The Art of Spending Money. Portfolio(Penguin).
Housel, M. (2020). The Psychology of Money. Harriman House.

한국어판 <돈의 방정식>은 저자의 전작인 <돈의 심리학>의 후속편이다. 기왕 읽는 김에 두 권 다 구입했다.

두 책의 소재, 주제, 심지어 서술 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무리해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만족하며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두 권 모두 키워드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enough'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좋은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안분지족'이 가능한 상태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돈의 심리학> 챕터 3에서 언급하는 조지 헬러와 해지펀드 매니저의 일화가 바로 그렇다.

조지 헬러는 '저기 저 해지펀드 매니저는 네가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하루에 번다'고 말하는 커트 보네것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이 절대 갖지 못할 것을 갖고 있는걸... (그거면) 충분해.'

여기서 어떤 논리적 모순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조지 헬러가 <캐치-22>의 저자로서 가지고 있는 불멸의 명성은, "a hedge fund manager"만 가질 수 없는 게 아니다. 심지어 커트 보네것조차도, 보네것이 가진 명성과는 별개로,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이 책을 읽을 수많은 이들에게 그런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냐는 거다. 나는 갑돌이의 아들이며 개똥이 아빠다, 라고 생각할 자유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모든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모든 여자는 누군가의 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경제적' 가치와 자부심의 근원은, 말하자면,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하지만 딱 나의 친족 범위 내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끔찍한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족이 됐건 직장 내에서의 인정이 됐건, 심지어는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사랑(aka 불륜이나 그... 뭐 수간? 같은 것)이 됐건, 그 고유한 가치가 경제적인 이유로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고 단단한가? 과연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가?

돈 때문에 작살난 가족은 돈이 없어도 파괴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돈 문제로 크게 고심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건 하우절의 두 베스트셀러가 그렇게 막되먹은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다. 저자는 몹시 사려 깊은 문장과 어조로, 술술 읽히도록, 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지만 무시하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숙달된 미국 저널리스트의 글쓰기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나다. 배울 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거기서 만족하기 어렵다. '돈의 심리학'을 어기게 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선택을 하고야 마는, 그런 '심리학'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애석하게도 미국의 대중 교양 서적 시장은 그러한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저 이러저러한 호르몬 작용이라고 매도하거나, 아무튼 깊게 따져볼 필요도 없는 무언가로 치부할 따름이다.

나는 그게 매우 애석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문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일이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2026-04-13

승려(혹은 종교인)이 돈을 벌면 안 되는 이유

간단하다. 승려 혹은 종교인은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버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정당화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모든 자본주의적 행위자가 그러하듯,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을 넓히려고 들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자가 시장을 넓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마음의 불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컨대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장사를 할 유인동기가 된다는 소리다.

이는 마치 어지간한 나라에서는 의료행위를 순수한 영리 추구 행위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의사도 돈을 벌어야 하지만,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의료 지식을 마음껏 활용하도록 내버려두면, 없는 병도 만들어서 '치료'한다고 장사를 할 우려가 생긴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적절한 방식으로 의료의 사업화를 규제한다.

종교로 돈을 버는 그 승려를 두고 '왜 안 됨?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것을 보고 놀라는 중이다. 종교인이 제공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면, 그들의 행위는 돈벌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만 하는, 아주 당연한 결론이다. 이런 것까지 설명이 필요한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추가) 마음의 평화 제공 + 의료 서비스 제공 + 돈벌이 = 안아키. 이렇게 말하면 단번에 이해가 되실런지?

——

2020-11-15 작성


2026-04-08

1995년의 버스표


 

중고로 구입한 헌 책 속에서 나온, 95년 서울 → 강릉 버스표.

원래 주인은 긴 여정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샀구나 싶다.

그러나 책갈피가 꽂혀 있던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건대, 본인이 원하던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얻지는 못했던 듯.

고현학(考現學)의 사례로 기억할만 했다.

덧) 독서 목록(2022)을 확인해보니 고원정의 『빙벽』 1부의 2권이나 3권에서 나온 듯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던 책.

사마천. 이한우 옮김. 『이한우의 사기』(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26), 총10권.



나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번역가로 처음 알았다. 길버트 라일이 쓴 『마음의 개념』은 내가 처음 읽은,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철학서였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이한우, 당시 조선일보 기자.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 제국의 행동대장,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사라졌다. 망했다. 변질했다. 어떻게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번역가 이한우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품에서 나와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된 후로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서양 고전에서 동양 고전으로의 지적 도약을 감행한 후, 그는 더욱 훨훨 날아가는 중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님께서 보내주신 『이한우의 사기』 총10권이 지난 주말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나는, 사기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대부분의 한국 식자층이 그럴 테지만, '열전'의 백이숙제 편부터 펼쳤다. 왜? 가장 유명하니까. 우리가 '사기'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역시 잘 읽혔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기열전은 반쪽짜리, 아니 1/3쪽짜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기』 삼가주, 즉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까지 모두 번역해서 붙인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쌓인 주석들이 만들어내는 시층과 사유의 궤적이 아름다웠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역자 본인의 주는 또 어떠한가. 이미 『논어』 와 『문장정종』을 완역해낸 철학자 이한우는 사마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하는) 정통 유교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낸다.

첨부된 이미지 속 내용을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한우의 논어』는 "삼가주 완역 해설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새 번역본은 사실상 '사기 사가주(四家注)'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한우의 논어』가 이렇게 탁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지니고 있는 역사철학의 확고함 때문일 수 있다.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책의 1권을 펼쳤다. 역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첫 세 문단을 옮겨 적는다.

1.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이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이면서도 공허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물음이다. 사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조준이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에게 '무엇(What)'을 물어서 나올 대답은 뻔하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를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이나 고대 중국의 인간이나 21세기 현대의 인간이나 똑같이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How)', 즉 존재 방식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다. 즉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고 어느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쓸 것인가'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적어도 역사를 쓰는 사람은 일급 지성과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쪽, 역자 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유교 경전의 전체 체계를 제왕학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한우 동양 고전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양철학을 드디어 우리의 눈으로 읽어내는 시대의 개막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많은 독자분들이 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간청한다.

2026-04-03

우원식 개헌안, 내용도 형식도 틀렸다

오늘(4월 3일 금요일) 국회에서 한참 논의되고 있다는 우원식 개헌안.

한마디로 내용도 형식도 틀린,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개헌안이다.

3대 내용이라는 것이 이렇다.

첫째, 헌법 전문에 광주항쟁 부마항쟁 넣자.
둘째, 지방자치 확대하자.
셋째, 계엄 재발 방지 조항 넣자.

내용을 역순으로 검토해보자.

계엄 재발 방지? 이미 윤석열의 불법 계엄을 현행 헌법으로 잘 막아냈음. 오히려 지금보다 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면, 북한이나 제3국이 계엄 필요 상황을 유발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가 망할 수 있음. 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함.

지방자치 확대? 지방자치는 아예 없애거나 대폭 축소 개편해야 함. 심지어 지방 거주민들도, 자신들 입에 떨어질 콩고물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대계를 고민한다면, 지방자치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할 것. 근데 이걸 현행 유지하면서 확대한다? 개소리임.

광주항쟁 부마항쟁? 솔직히 이거 '호남표 영남표' 같은 얄팍한 계산에서 찬성하는 거 아님?

물론 광주항쟁 부마항쟁이 큰 사건이었음으로 원론적으로는 반대할 수 없음. 그런데, 그렇다면,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함.

우리 헌법 전문은 애초에 이상함. 3.1운동에서 시작하는데 곧장 4.19로 이어짐. 중간에 있어야 할, 한국전쟁의 서사가 빠져 있음.

한국전쟁은 단지 대한민국과 북한의 전쟁이 아니었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제 질서의 기틀을 잡은, 일종의 '정초전쟁'임. 우리는 세계 최초로 정상 작동한, 아마도 마지막 사례일 수도 있을, UN군의 힘으로 살아난 나라임. (내가 돈과 힘이 있으면 어디 좋은 터에 칸트 사당을 짓고 싶을 정도.)

헌법 전문, 나는 솔직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정 그걸 그대로 두고 확장하고 싶다면, 광주 부마항쟁을 논하기 이전에, 한국전쟁을 넣어야 함. 

한국전쟁은 민주항쟁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독재와 맞선, 최초의 민주 항쟁,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임.

이렇게 내용이 다 틀린 우원식 개헌안. 심지어 형식도 틀렸음.

국회의장이라는 인간이 왜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헌안을 띄움? 왜 '지선과 연동해야 한다'고 뽐뿌질함? 이게 과연 정상적인 국회의장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음?

우원식은 사퇴해야 마땅함.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될, 公人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갖지 못한 사람임.

내용도 형식도 글러먹은 우원식 개헌안, 반대가 마땅함. 국힘의 당론은 옳고, 개혁신당도 당론을 바꿔서 지금이라도, 향후 있을 수 있는 장기적이고 진지한 개헌 논의의 단초를 마련해야 옳다고 생각함.

2026-03-25

크리스틴 로젠. 이영래 옮김. 『경험의 멸종』(서울; 어크로스, 2025)

미국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 은 훌륭한 페이지 터너다. 그 장점은 단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왜 읽기 쉬울까? 주제가 너무도 단순 명료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기술에 의해 계속 변하고 재편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깔고, "비기술적 가치와 지식 흡수의 방식이 대체되고 사라지는 것", 즉 "경험의 소멸"[19쪽]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런 삶을 그만 살자,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진짜 경험'을 돌려주자는 이야기다.

좋은 주장이다. 우리는 이미 나쁜 사례를 잔뜩 알고 있다. 가장 극적인 예를 들어보자. "2010년 한국에서 한 부부가 인기 온라인 게임 프리우스Prius에서 가상 아이를 키우느라 실제 아이는 굶어죽게 내버려둔 일이 있었다."[31쪽] 꼭 이렇게 극적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의 '정념'에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정념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이성'에 설득되지 않아서다. 자신의 논지를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여러 학자를 원용하는데, 양쪽 모두에 있어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장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사라이 시에라라는 33세 여성의 사례를 짚어보자. 시에라는 혼자, 하지만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원래 세계와 단단히 연결된 채, 튀르키예 여행을 갔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못했다. 2013년 1월 21일 귀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실종된 후 11일 후 이스탄불의 역사 지구 술탄아흐메트의 성벽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범인은 인근의 노숙자였다. 페인트 시너에 취한 채 시에라를 강간하려다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범인은 스마트폰이다.

그녀의 친구와 가족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에라가 여행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의존했던 기술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지는 않았는지,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위험에 무감해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220쪽]

'주변의 위험을 살피지 않고 폰만 보고 다니지 말라'는 충고는 일반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노숙자가 시에라를 강간하려 했을 때 상황이 스마트폰과 유관한지 아닌지, 적어도 독자인 우리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여행지에서 셀카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례처럼 소비될 일이 아니다. 비겁하고 심지어 위험한 서술 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끌어들인 내용도 종종 눈에 거슬린다. 저자는 "벤야민은 이렇듯 열정적이지만 산만한 비판이 문화의 수준을 낮추고 대중이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저속하고 단세포적으로 변할 것이라[245쪽]고 우려"[246쪽]했다고 적는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잘 요약했듯, "발터 벤야민은 1936년 에세이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술적 변화, 특히 기계적 복제가 새로운 관점인 "진보적 반응"(그가 붙인 이름이다)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245쪽] 기술복제로 인한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벤야민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반겼다. 로젠은 벤야민을 똑바로 읽고도 거꾸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견강부회가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의 편향성 때문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나는 X세대다) 성인기에야 이 새로운 세상을 접하[18쪽]고 이 세상의 전망과 위험성을 헤쳐 나가고 있는 나 자신의 경험에서 발전"[19쪽]한 책이다. 특정 세대의 경험과 세계관에 입각해 현재의 미디어 발전을 제단하고 있는 것이다.

X세대라면 여자친구와 워크맨 이어폰을 나눠 듣는 것을 아름다운 연애 경험의 한 장면으로 추억할 것이다. 그런데 오직 그것만이 '현실'일까? 여자친구의 온라인 게임 계정에 대신 로그인해 레벨을 높이고 아이템을 주워주는 Z세대의 연애 경험 역시 나름의 진실된 무언가를, authenticity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

지니는 이미 램프 밖으로 풀려났다. 이 문제는 특정 국가에서 성장한 어떤 세대의 편견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가치 중립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2026-03-23

'노동 해방'(혹은 주3일 노동)은 인간 해방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26쪽] 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간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혼의 붕괴를 수용할 만한 병원은 아직 충분치 않다.[27쪽]

에리히 프롬,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서울: 나무생각, 2016).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노동 해방'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에리히 프롬의 양면적 고뇌가 잘 담겨 있는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