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0

신뢰의 사슬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판단을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이 사람이 신뢰하는 저 사람이 신뢰하는 그 사람을 신뢰'한다. 그러니까 경제 정책이나 탁현민이나 뭐나 뭐나 마음에 안 들어도, 통상적인 20대 여성이 윤서인이랑 같은 후보를 찍을 수는 없다. 신뢰의 사슬이 뚝 끊긴다.
노정태. "왜 20대 여성은 현 정권을 지지하는가." 노정태의 블로그. 2018-12-23. https://basil83.blogspot.com/2018/12/20.html

오랜만에 블로그를 펼쳐서 뒤적거리다 발견한 옛 게시물의 한 대목이 눈에 띄어서 코멘트.

'신뢰의 사슬', 내가 만들었지만 매우 그럴싸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알 수도 없으며 판단하는 건 더더욱 귀찮아함.

사람들은 그냥 '내가 아는 저 사람이 알아서 해주겠지', '내 친구의 친구가 그렇다는데 뭐 맞겠지', 정도로, 본인과 직접 상관 없는 거의 모든 문제를 퉁 치고 지나감.

그래서 정치인은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해야 함. 어떤 소명의식? '신뢰의 사슬'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살아야 하는, 솔직히 말도 안 되게 피곤한 그 노역을, 기꺼이 감당하겠노라는 소명의식.

비단 정치인 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조금이라도 발을 들였고, 발화하는, 그런 사람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

이쪽에서 한번 신뢰의 사슬을 거하게 깨뜨리면, '저 ㅅㄲ가 하는 말은 내용이 옳아도 재수없어서 동의 못하겠다' 이런 아이콘이 되어버리면, 공적인 활동의 영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음.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시민이겠죠.)

조국 사태가 낳은 최악의 결과도 결국 그것 아닌가? 조국을 쉴드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그 수많은 '똑똑하고 정의로운 사회적 발화자'들이, 단지 진영 논리 하나만으로 움직이는 마리오네뜨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의 신뢰의 사슬이 반토막 아니 1/4토막 이하로 줄어들어버리고 말았던 것.

우리 사회가 좀 더 섬세하고 촘촘한 신뢰의 사슬을 맺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이 정치니 사회적 이슈니 딱히 신경 안 쓰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할 일을 합니다.

2023-07-30

존 로크의 의도된 비효율적 인덱싱

Commonplacing, commonplace book, 뭐 그런 게 있다.
한국말로는 어떻게 번역해도 어색하다.
사전에서는 '비망록'이라고 하던데,
현대 한국어에서 비망록이라고 하면
'지워지지 않는 스무살의 비망록'
뭐 이런 뉘앙스를 많이 갖게 되었는지라...

아무튼 그런 게 있다.
대충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
인덱스 카드를 이용한 정보 관리 방법이 발전하기 전까지
두루 널리 쓰였던 지식 수집과 연구 방법론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노트를 마련해놓고
본인이 관심있게 읽은 내용들을 옮겨 적는 것이다.
'블로그 펌질'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블로그에 펌질을 많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정리하느냐, 그리고 그 정리한 내용을
언제 어떻게 적절하게 찾아 보느냐다.

나도 이것저것 많이 메모해놓고 까먹는 사람이기에
(다들 그렇지 않나요? 네?)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만큼이나
내가 모아놓은 것을 '재발견'하는 방법을 많이 탐색중이다.

(지난번에 올렸던 '구글 드라이브 랜덤 파일 읽기' 같은 게 대표적이다.
랜덤하게 뭐가 보이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찾다 찾다 흥미로운 게시물을 하나 접했다.
"John Locke’s Method of Organizing Common Place Books".
https://fs.blog/john-locke-common-place-book/
말 그대로 존 로크가 어떻게 비망록을 작성하고 분류했느냐 하는 것.

그 방법이 매우 희한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1)수집한 텍스트에서 표제어(head)를 골라낸다.
2)표제어의 첫 글자와 뒤따라오는 첫 모음을 적는다.
가령 Head라면 h e, place라면 p a 가 된다.
3)그런 기준으로 항목 인덱스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인덱싱을 하면 어떻게 될까?
전혀 상관 없는 단어들이 인덱스에서 맞붙게 된다.

가령 chair 와 castle을 떠올려 보자.
별 상관 없는 개념이지만 로크 스타일로 정리하면
둘 다 c a 이므로 인덱스에서 사이좋게 같은 칸이다.

이 혼란은 의도된 것이다.
어떤 단어를 찾아보려다가 엉뚱한 단어를 만나기 위해.
창조적 사고를 위한 도구를 만들어낸 아주 인상적인 기법이어서
미칠듯이 덥다가 비가 쏟아진 지금 한번 공유해 보았음.

2023-07-25

인구감소가 해방이라는 주장의 오류

'지배집단은 노예를 원한다, 인구감소가 해방이다'라는 주장의 오류. 그렇게 말하는 사람 본인은 지배계급인가, 노예인가? 지배계급이라면 그것은 마치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부르주아 집안 자식 같은 고결함 내지는 위선의 표현일 뿐이지만, 노예라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신분이 낮고, 재산이 없고, 특별한 재능이 없을수록,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인 평범한 사람들의 노고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예를 낳지 말자'는 주장에서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자신이 다른 노예들과 서로 돕고 살아가기에 지금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하며 오만한 노예.

2023-05-13

넷플릭스식 Binge Watch 단상

넷플릭스가 조져놓은 드라마를 둘러싼 문화적 관습이 한둘이 아닌데, 그 중 최악은 Binge Watch라고 생각한다.

TV 시리즈는 그런 게 아니다.  

힌국 기준으로 16부작은 1주 2화씩 8주에 보도록 맞춰져 있다.

딱히 기한 없이 흘러가는 연속극도 1주에 한 편 내지는 두 편, 요즘은 잘 만들지도 않는 일일연속극은 1주 5화 1일 1화가 최대치다.

이게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연속'극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의 흐름과 시청자의 인생의 흐름이 함께하는 그 감각. 그것이 영화와 드라마를 가르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라는 단절된 시공간에 들어가서, 대충 2시간 아무리 길어도 4시간이 안 되는 영상물을 보고 나온다. 영화 감상은 '이벤트'다.

반면 드라마는 TV가 됐건 모니터가 됐건, 익숙한 시공간과 시청 환경에서, 최소 8시간(이면 너무 짧고), 대충 16시간을 함께한다.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라이프'다.

빈지 와치는 바로 이 '라이프'로서의 드라마를 조져버린다. 하루 날잡고 쫙 정주행하는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자세가 아니다.

갑자기 왜 혼자 급발진하는가?

오랜만에 더 와이어 여전히 시즌 1... 의 8화를 보고 하는 소리임. 걍 무시하세요. 한 화 정도만 더 봐야지...

2023-02-24

독신남 ‘바가지 긁는 고양이’에 빠지다 (한겨레 매거진 esc, 2010년 4월 8일)

 

김도훈+고양이 솔로, 노정태+고양이 가을, 입동, 고세진+고양이 지오, 호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20~30대 싱글남 3명에게 듣는 ‘왜 고양이인가’ 

“수많은 독신남들이 ‘고양이 옷장’에서 뛰쳐나오기(coming out) 시작했다.” 2008년 10월3일치 미국 <뉴욕 타임스> 기사 중 한 대목이다. 이제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는 골든 레트리버(개의 품종)가 아니라 털 폭신폭신하니 껴안기 좋은 고양이라고 기사는 전했다. 남몰래 자신의 방에 고양이를 들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반려동물의 근황을 트위터라든가 ‘남자와 고양이들’(www.menandcats.com)과 같은 남성전용 고양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는 것 또한 남자들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라고. 그로부터 약 1년여 뒤, 이젠 한국에서도 고양이와 자족하며 지내는 남자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자취남의 궁상을 접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고양이에게 적대적인 사람과는 연애를 떠나서 친구관계조차 유지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흑단처럼 윤기 나는 검정무늬를 ‘간지나게’ 차려입고 있는 턱시도 고양이 ‘솔로’와 3년째 함께 살고 있는 김도훈(36)씨의 말이다. 영화잡지사의 기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지방 출신으로, 본가에서는 반려동물로 개를 키운 경험이 있다.

“특히 지방에서는 남자들이 고양이와 사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는데 서울 올라온 후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고양이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여전히 개도 좋아하지만 혼자 사는 처지에서 개를 키우기란 엄두를 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손도 많이 가는데다 홀로 두고 나다닐 수도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에 독립적인 성향의 고양이를 선택하게 된 것.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바로 이런 이유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양이들이 독립적이라고는 해도 김씨의 ‘애묘’ 솔로는 좀 다르다. ‘사실 얘는 강아지가 아닐까?’라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애교가 많기 때문. 김씨가 솔로를 처음 만난 곳은 홍대 인근의 어느 골목길. 당시 생후 3개월가량이었던 이 고양이는 운이 좋게도 주위에 사는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도 받았고, 나름 보금자리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솔로에 대한 김씨의 애정도 각별하다. “지인 중에는 저를 ‘대치동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사료나 고양이용품, 심지어 장난감 같은 것도 최고로만 사 주려고 하니까요.” 최근에 이사를 한 김씨는 고양이를 위해 40만원대의 캣타워를 구입했다.

“에라 모르겠다 군대나 가자는 식의 충동도 말려주죠”

반려동물로서의 고양이는 단순히 애정을 주고 위안을 받는 것 이상으로 남자의 삶을 적지 않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칼럼니스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원생 노정태(28)씨는 20대 초반이었던 6년 전, 처음 새침한 삼색고양이 가을이(암컷)를 들일 때만 해도 마음을 쏟아서 보살펴 줄 대상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한창 방황하던 때였는데,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고양이를 키워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사는 남자들은 술도 많이 마시고, 술을 많이 마시면 집에 안 들어가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고양이를 들이고 나서부터는 밥을 주기 위해서라도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자연스레 생활이 바뀌기 시작했죠. 고양이가 함부로 먹지 못하도록 음식물 쓰레기를 제때 처리한다든가 수시로 청소를 하게 된 것처럼 단순히 생활에 관한 부분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인생 계획에서도 충동적인 결정을 할 수 없게 된 부분이 있고요. ‘에라 모르겠다. 군대나 가자’ 같은 식의 생각을 못하는 거죠.”

노씨는 2007년, ‘가을이’에 이어 둘째 고양이 ‘입동이’(암컷)를 들였다. 우연히 아파트 놀이터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검정 얼룩고양이 입동이는 당시 생후 3개월 정도였는데, 쉽게 입양되지 않으리라 판단해 직접 키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보니 혼자 있을 가을이가 외로울 거라는 고려도 있었다. 이 두 마리 고양이에 대한 노씨의 태도는 ‘끔찍한 애정’이기보다는 언뜻 무심해 보일 수도 있는 파트너십에 가깝다. “예쁘게 꾸미고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다든가 남에게 자랑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요. 저에게만 예쁘면 된 거죠. 사진을 찍어도 저는 우스꽝스런 모습만 찍게 돼요.(웃음)”

그럼에도 애묘들을 자랑할 때는 입에서 침이 마른다. “우리 고양이들은 표현력이 다양한 것 같아요. 여러 종류의 울음소리나 행동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 울음소리만 듣고도 애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거든요. 이를테면 창밖을 보고 싶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가을이는 특정한 톤으로 울고, 입동이는 그 앞에 가서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거든요. 그런 차이도 재미있죠.”

고등어 무늬의 암고양이 ‘호야’, 친칠라 종의 수놈 ‘지오’와 함께 살고 있는 고세진(35·인터넷 매체 편집국 팀장)씨. 그는 사람이 너무 다가가는 것도, 사람이 너무 외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고양이들의 절묘한 거리 감각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마치 ‘밀땅’(밀고 당기기)에 능한 여자와 연애하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는 것. “그렇다고 단지 그 매력 때문에 고양이를 키운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족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친척 어른들 중에는 재수가 없다느니, 더럽다느니 하시면서 고양이 내다버리라는 분도 계세요. 그럴 때마다 저는 그러죠. ‘제 동생 내다버릴 수 없잖아요?’ 한번 들이고 나면 반려동물도 가족과 같아요.”

하지만 이런 고씨도 과거에는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고양이를 키우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자신도 고양이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그 편견을 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의 친척 집에서 다리를 저는 등 성하지 못한 몸으로 태어난 아기 고양이 호야를 보고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우발적으로 입양을 결심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늦게 들어오면 바가지 긁는 소리…참 좋아요”

“과거의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양이에 대한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문제. 고씨는 2007년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던 앙상한 고양이 ‘지오’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다. 워낙 마르고 지저분해서 씻기고 나서야 그 고양이의 털이 흰색이고, 게다가 품종이 ‘친칠라’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서 주인을 찾았지만 나서는 이가 없어서 결국 고씨가 키우기로 했던 것. 발견 당시 한 살쯤 되었던 지오에 대해 고씨는, 아마도 원 주인이 어릴 때만 예뻐하다가 크고 나니 부담스러워서 버렸을 거라 추측한다. “버림받고 굶주린 탓에 경계심도 크고 식탐도 많아요. 잘 때 호야는 침대로 기어 오는데 지오는 문 앞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거기서 자요. 식사시간에는 호야 밥까지 뺏어먹고요. 그런 모습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죠.”

고씨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퇴근길에 “오늘은 고양이들에게 무엇을 해줄까?”라는 생각이 들 때라고 말한다. “애들이 식탐이 많아서 자율 배식을 하지 않고 정해진 양을 아침저녁으로 나눠서 줘요. 그런데 저도 술 마실 일이 많으니까 새벽에 들어올 때도 있죠. 그런 날이면 호야가 현관에서 날 보자마자 ‘우아앙’ 하고 목청껏 울어요. 배고픈데 왜 이리 늦게 오는 거냐며 바가지를 긁는 거죠. 그런 느낌이 참 좋아요. 그러면 아무리 취한 상태라도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부랴부랴 밥 챙겨줘요.(웃음)”

남자가 고양이를 만날 수 있는 방법

이름난 품종 고양이들을 들일 요량이 아니라면 고양이를 입양하는 데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다만 잘 보살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중요하다. 반려 고양이와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 인터넷 동호회 | 노정태씨가 첫 고양이 가을이를 입양한 곳은 다음 카페 ‘냥이네’였다. 각 포털사이트의 주요 고양이 커뮤니티에서는 입양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다음의 ‘냥이네’ 외에, 네이버의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싸이월드의 ‘괴수고양이’, 디시 인사이드의 ‘야옹이갤(냥갤)’ 등이 대표적이다.

⊙ 길거리 | 김도훈씨는 홍대 극동방송국 어귀 골목길에서 솔로를 처음 만나던 순간 ‘이 고양이다’라고 직감했다. 초면인데도 반갑게 다가와 마치 ‘나 좀 데려가 주’라고 말하듯 김씨의 다리에 머리통을 문질러댔다. 이외에 노정태씨나 고세진씨의 경우처럼 길 잃은 고양이의 모습이 측은해 데려온 게 관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 동물병원 | 기자의 경우. 친구 따라 동물병원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데리고 있던 유기묘를 입양했다. 사람들이 길에서 어린 고양이를 주워서 인근의 동물병원에 맡기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물병원에 맡겨진 고양이들은, 한달 안에 입양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타깝게도 안락사를 시킨다. 동네에 동물병원이 있다면 가끔씩 들러보자.

⊙ 기타 동물구조·보호단체 | ㈔한국동물복지협회 산하의 동물자유연대, ㈔한국동물구조관리협회, 그리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유기동물보호기관에서도 보호하고 있는 유기묘의 입양을 알선한다. 각 단체들의 인터넷 누리집을 참고하자.

글 조민준 객원기자 zilch92@gmail.com·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2022-12-31

독서 목록(2022)

 
1. 220101 - 조던 피터슨, 김한영 옮김, 『질서 너머: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12가지 법칙』(경기도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21)
2. 220102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2000년대 편: 노무현 시대의 명암·1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11), 전자책, 리디북스.
3. 220108 - 심포 유이치, 권일영 옮김, 『화이트아웃』(서울: 크로스로드, 2021)
4. 220109 - 에마 스토넥스, 오숙은 옮김, 『등대지기들』(경기도 파주: 다산북스, 2021)
5. 220115 - 조귀동, 『전라디언의 굴레』(서울: 생각의힘, 2021)
6. 220116 - 아돌프 로스, 이미선 편역, 『장식과 범죄』(서울: 민음사, 2021)
7. 220116 - 나카야마 시게노부, 이연희 옮김, 『도해 갑자기 그림을 잘 그리게 되는 법』(서울: AK커뮤니케이션즈, 2015), AK Trivia Books 29.
8. 220122 - 김내성, 『마인』(서울: 판타스틱, 2009)
9. 220123 - 월터 모슬리, 이은정 옮김, 『올해 당신은 소설 쓴다』(서울: 더고북스, 2020)
10. 220123 - 아라이 히사유키, 구수영 옮김,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한 미스터리 입문』(서울: 내 친구의 서재, 2021)
11. 220129 - 조지 버나드 쇼, 김소임 옮김, 『피그말리온』(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1), 전자책, 리디북스.
12. 220131 - 에리히 프롬, 장혜경 옮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서울: 나무생각, 2016)
13. 220206 - 김종인,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22)
14. 220212 - 박찬용, 『첫 집 연대기』(서울: 웨일북, 2021)
15. 220213 - 펠릭스 데니스, 장호연 옮김, 『빈손으로 시작해도 돈이 따라올 거야(서울: 위즈덤하우스, 2021)
16. 220221 - Phil Knight, Shoe Dog: A Memoir by the Creator of Nike(New York: Simon & Schuster Audio, 2016), Audible.
17. 220224 - 이상희·윤신영, 『인류의 기원: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서울: 사이언스북스, 2015)
18. 220227 - 정찬용,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서울: 사회평론, 2000)
19. 220306 - 필리프 비옹뒤리·레미 노용, 이재형 옮김, 『뉴노멀 교양수업: 10년 후 정치·경제를 바꿀 10가지 핵심 개념』(서울: 문예출판사, 2020)
20. 220312 - 피터 린치·존 로스차일드, 이건 옮김, 홍진채 감수, 『전설로 떠나는 월街의 영웅』(경기도 파주: 국일증권거래연구소, 2021), 3판.
21. 220312 - 김용언, 『여자에게 어울리는 장르, 추리소설』(서울: 메멘토, 2022)
22. 220312 - 복거일, 『한반도에 드리워진 중국의 그림자』(서울: 문학과지성사, 2009)
23. 220313 - 하워드 민즈, 이윤정 옮김, 『헤엄치는 인류』(서울: 미래의창, 2021)
24. 220320 - 로버트 무어·더글러스 질레트, 이선화 옮김, 『왕, 전사, 마법사, 연인』(서울: 파람북, 2021)
25. 220322 - W. G. 제발트, 이경진 옮김, 『전원에 머문 날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21)
26. 220330 - Paulo Coelho, The Alchemist(New York: HarperTouch, 2005), Audible.
27. 220410 - Nir Eyal • Ryan Hoover, Hooked: How to Build Habit-Forming Products(New York: Penguin, 2014), Audible.
28. 220414 - 마이클 폴란, 김현정 옮김, 『요리를 욕망하다』(서울: 에코리브르, 2014)
29. 220416 - 나이절 워버턴, 박준영 옮김, 『그래서 예술인가요?』(서울: 미진사, 2020)
30. 220420 - 애거서 크리스티, 신영희 옮김, 『창백한 말』(서울: 황금가지, 2006),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9.
31. 220421 - 대검찰청 국제협력담당관실, 『미국의 영원한 검사 로버트 모겐소』(서울: 대검찰청, 2020)
32. 220422 - 미셸 우엘벡, 이채영 옮김,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서울: 필로소픽, 2022)
33. 220510 - Dan Brown, Origin(New York: Doubleday, 2017), Audible.
34. 220515 - 길희성 역주,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35. 220515 - 박효엽, 『불온한 신화 읽기: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1)
36. 220521 - 김성모, 『근성론』(피제이로, 2022)
37. 220522 - 마사토끼, 『마사토끼의 만화 스토리 매뉴얼 vol. 1』(서울: 서울미디어코믹스, 2019)
38. 220522 - 마사토끼, 『마사토끼의 만화 스토리 매뉴얼 vol. 2』(서울: 서울미디어코믹스, 2019)
39. 220522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박병규·박정원·최이슬기·이경민 옮김, 『영원성의 역사』(서울: 민음사, 2018),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2.
40. 220523 -  Fredrik Backman, A Man Called Ove(New York: Hodder & Stoughton, 2014), Audible.
41. 220529 - 이한우, 『우리의 학맥과 학풍: 한국 현대 지성사의 복원』(경기도 용인: 천년의상상, 2022), 개정판.
42. 220612 - 고원정, 『빙벽 1: 제1부/우상의 땅·상上』(서울: 현암사, 1989)
43. 220616 - 데이비드 굿하트, 김경락 옮김,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서울: 원더박스, 2019)
44. 220627 - 조지 버나드 쇼, 이후지 옮김, 『인간과 초인』(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3), 열린책들 세계문학 e컬렉션, 전자책, 리디북스.
45. 220629 - 박상훈, 『청와대 정부: '민주 정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서울: 후마니타스, 2018)
46. 220701 - 제임스 핀 가너, 김석희 옮김,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서울: 실천문학사, 1996)
47. 220701 - 제임스 핀 가너, 김석희 옮김, 『좀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서울: 실천문학사, 1996)
48. 220701 - 앨런 긴즈버그, 김목인·김미라 옮김, 『울부짖음: Howl 그리고 또 다른 시들』(서울: 1984, 2017)
49. 220703 - 고원정, 『빙벽 2: 제1부/우상의 땅·중中』(서울: 현암사, 1989)
50. 220703 - 고원정, 『빙벽 3: 제1부/우상의 땅·하下』(서울: 현암사, 1989)
51. 220708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승진 옮김,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21)
52. 220709 - 박완서, 『나목』(서울: 세계사, 2012), 박완서 소설전집 01.
53. 220723 - 도나 타트, 이윤기 옮김, 『비밀의 계절 1』(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7)
54. 220724 - 도나 타트, 이윤기 옮김, 『비밀의 계절 2』(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7)
55. 220813 - 정서경·박찬욱, 『헤어질 결심 각본』(서울: 을유출판사, 2022)
56. 220814 - 프랜 리보위츠, 우아름 옮김, 『나, 프랜 리보위츠』(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22)
57. 220918 - 실비아 플라스, 진은영 옮김, 『에어리얼 - 복원본』(서울: 엘리, 2022)
58. 221002 - Pavel Tsatsouline, Power to the People!(Dragondoor, 1999).
59. 221003 - 마이클 샌델, 김선옥 감수, 안기순 옮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서울: 와이즈베리, 2012).
60. 221011 - John Yorke, Into the Woods: How Stories Work And Why We Tell Them(Penguin Books, 2013).
61. 221020 - 피터 자이한, 홍지수·정훈 옮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서울: 김앤김북스, 2018)
62. 221020 - 피터 자이한, 홍지수 옮김, 『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서울: 김앤김북스, 2019)
63. 221021 - 이솝, 천병희 옮김, 『이솝우화: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정본』(경기도 파주: 숲, 2013)
64. 221030 - 마쓰모토 세이초, 김경남 옮김, 『D의 복합』(서울: 모비딕, 2012)
65. 221030 - 마쓰모토 세이초, 이병진 옮김, 『모래그릇 1』(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66. 221030 - 마쓰모토 세이초, 이병진 옮김, 『모래그릇 2』(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67. 221106 - 헨닝 망켈, 박진세 옮김, 『리가의 개들』(서울: 피니스 아프리카에, 2022)
68. 221118 - 알베르토 모라비아, 정란기 옮김, 『순응주의자』(서울: 문학과지성사, 2021), 대산세계문학총서 168.
69. 221119 - 애니 듀크, 구세희 옮김,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경기도 파주: 에이트 포인트, 2018)
70. 221224 - 페터 하프너, 김상준 옮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인터뷰』(세종시: 마르코폴로, 2022)

표1부터 표4까지 완독한 책의 목록. 올해는 100권은 고사하고 70권에 머물고 말았다. 여러 일이 있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더 많다. 2023년부터는 템포를 높여서 앞질러 가야지.

2022-12-26

[서평] 로널드 드위킨, <신이 사라진 세상>

신이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법철학자의 마지막 질문] 로널드 드워킨의 <신이 사라진 세상>
프레시안Books, 2014년 4월 25일.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6656 

1.

법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노닥거린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참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능 점수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제일 '좋은' 곳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입수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는데, 제목이 기억나는 것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밖에 없다. 일찌감치 백수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공부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민법총칙 교과서에는 스위스가 '瑞西(서서)'로, 오스트리아가 '墺地利(오지리)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책을 덮어버리고,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퍼져 있던 교내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그마저도 시들해질 때쯤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래도 법대에 왔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법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줄 주변 서적들을 찾아 읽겠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단지 법학자를 넘어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가령 독일의 형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잠언집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이 담긴 에스프리들이 묶여 있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라드부르흐의 법철학, 특히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부르흐 공식' 등은, 나치 시대에 대한 독일 법학계의 평가와 반성이라는 맥락이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따라서 그들이 만든 법이 문제였지 법조계는 비교적 결백하다는 항변이 그 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의 말과 법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법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법은 그 법이 통용되는 한 사회 내에서는 보편적인 규범력을 지니고, 따라서 그 법을 해설하거나 법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 역시, 대체로 특정 사회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버트 L. A. 하트의 <법의 개념>(오병선 옮김, 아카넷 펴냄) 같은 책을 읽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법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당시의 나를 변호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의 법철학은 영미법 체계를 해석하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로널드 드워킨이라는 이름을 만났지만, 역시 학부생이던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책이었던 <법의 제국>(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아카넷 펴냄)은 그저 두껍고 어려웠을 뿐이다.

2.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전공 대상은 칸트로 선정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다. 책을 그냥 쓱 읽어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혹은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칸트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드워킨의 마지막 책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도 그렇다. 법학적으로 응용되어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의 논의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 이른바 '그룬트레궁'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칸트의 핵심적 논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윤리 법칙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게 파악된 윤리 법칙은 이른바 '정언 명령'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정언 명령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3) 신의 존재는 이러한 윤리형이상학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정언 명령의 최종 담지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따름이다.

<신의 사라진 세상>의 논리 전개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종교의 과학 영역 그리고 의식을 통한 숭배 의무와 같은 신에 대한 책무를 거부한다"(43쪽)고 할 때, 드워킨은 칸트가 말한 (1)의 논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떤 인생을 사는가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잘살아야 할, 빼앗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감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같은 곳)는 말은, 칸트가 말한 (2)의 논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종교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워킨의 주장 가운데 '철학적'인 부분은, 사실상 일종의 탄탄대로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는 처벌을 내리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존재해야만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183쪽)고 말할 때, 드워킨은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의 주장, 앞서 우리가 정리한 (3)번 논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직전까지 영미 법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그는 굳이 왜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이른바 '전투적 무신론자'들(및 그들을 따르는 지식인들)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 혹은 그러한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때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면,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어야 할 필요는 사실 딱히 없다. 반대로, '전투적 무신론자'들 또한 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과 진지함으로 삶을 바라보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유신론자들 역시 그들을 특별히 적개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드워킨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렇다. 그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법학자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동일하게 구현한다면, 그 또한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드워킨은 자신이 1992년에 쓴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종교는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인 객관적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148쪽) 얼핏 듣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를 정의할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령 낙태와 같이 기존 종교의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 역시, 일종의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 보호되는 권리가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드워킨은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또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윤리적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인지, 드워킨은 묻는다.

가령 내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마치 고대 이집트인처럼) 신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나의 종교의 자유 중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내가 종교적 환각 상태를 넘나들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복용하고자 한다면, 그럴 때 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나의 윤리적 독립성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야만 한다.

첫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는 종교적 광신 등으로 향할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가 두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를 종교의 자유로 보호한다면, 종종 '자신만의 윤리'를 세워나가며 기존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법으로 지켜줘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섣불리 해답을 내리는 대신, 드워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은 모두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깊은 종교적 포부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들을 완전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메울 수 없을 듯 보이는 간극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도덕적,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도 너무 큰 욕심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174쪽)

4.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태와 성에 대한 문제들이 그렇다. 낙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료 기관은 환자에게 필요한, 환자가 요구하는 의학적 처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 기관의 의무다. 하지만 일부 종교적 성향을 지니는 병원들은 가령 낙태처럼 종교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술을 거부하고, 그럴 때 자신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자신들의 로비력을 발휘해, 동성애 행위(이것은 좀 오래 전 이야기이겠으나), 동성결혼, 조기 낙태 등을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연방대법원은 대체로 위헌 판결을 내리는데, "대법원은 그 판결의 근거를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의 자유 보장 조항이 아니라 미국 헌법의 평등한 보호와 적법한 절차의 조항에서 찾아냈다."(171쪽)

대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의 의지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에서 자신의 욕구가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상태와는 별개로,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의 일부로 대한다면, 진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172쪽)

그러니까 한 쪽은 타인의 생명 및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종교의 자유를 들이밀고,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평등'과 '적법절차'라는,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종교와, 종교가 담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삶이라는 가치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로널드 드워킨의 유작이 된 것은, 계산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아름다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생토록 진보적(인 입장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법학자의 눈으로, 또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단지 해석에서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답게, 논의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제 ‘Religion Without God’을 <신이 사라진 세상>으로 옮긴 것은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신이 사라진 세상도 아름답고 윤리적일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딴 후 군대에 갔다. 다행히도 카투사가 되었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다. 특히 훈련을 나가면, 나는 통신병이었으므로, 대기 시간이 길었다. 경기도 북부의 어딘가에 있는 탁 트인 벌판에서, 사령부에 인공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해놓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드워킨의 《Life's Dominion》이었는데, 내가 한창 읽어내고 난 후에야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가 읽었지만, 혹은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대가의 문장과 논증을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워킨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더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지가 등장했을 때, 그는 특히 《New York Review of Books》 지면을 통해 치열한 반박에 나섰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통과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가 얼마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싸우는 지식인의 한 표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킨들에 넣어둔 그의 책을 언제 다 읽나 하고 있을 때쯤, 드워킨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설령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한들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쉬웠고, 어떤 면에서는 슬프기도 했다.

법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 근거가 대단히 부실한 학문이기도 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와 권위가, 한국 같은 성문법 국가의 경우 결국은 법조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미법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왜 법인가? 법이 왜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통상적인 법학의 범위 내에서는 답하기 어렵다. 법의 정당성과 지엄함은 법 바깥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종종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끝내 모른척하고 오직 실정법에서 출발하는 법학만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드워킨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는다. 철학적인 원칙과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법한 논증을 만들고, 그것이 현실의 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혹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유려하게 기술한다.

지적인 기반도 없고, 토대도 약하고, 심지어 판사마저도 걸핏하면 '국민의 법 감정'을 운운하며, 검찰은 국정원과 손을 잡고 무리한 기소를 벌이다가 그들 말에 따르면 '간첩임에 분명한' 유우성 씨를 놓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이 한국의 법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과 이상, 시궁창과 별이 빛나는 밤, 그런 차이가 또렷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문구로 이 서평을 끝내도록 하자.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드워킨과 나와 당신은, 그런 면에서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도덕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복과,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빌어본다.

2022-11-27

유전자 조작 아기를 낳는 것을 진보가 옹호할 수 있는가

마이클 샌델이 쓴 <완벽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책. 명확한 지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괜찮은 논증을, 하버마스로부터 빌려와 잘 썼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더 나은 아이를 '선택'해서 출산하는 행위를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옹호하는데, 그에 대한 반발이다.

같은 주제를 논하면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아는 자유의 개념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주 멀리 보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의 연장이고, 가깝게는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던져짐' 개념을 빌려왔던 것의 연속성 위에 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진보'라 여겨지는 미국의 고학력 리버럴 계층은, 자신을 닮았는데 여러모로 능력이 탁월한 아이를 통해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큰 듯 하다. 반면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은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며 꽝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는 보수적 가치를 옹호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가치(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한 죄인이며 죽을 때는 다 똑같다)로부터 벗어난 중국계 이민자에 의해 '글로벌 대리모 서비스 앱'이 출시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쌓아나가야 한다.

다시 샌델의 책으로 돌아와보면 이 아이러니가 더욱 도드라진다. 20세기 자유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하버마스의 입을 빌어, 21세기에 가장 잘 팔리는 공동체주의 철학자가, 21세기 미국의 '리버럴'들을 공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n년이니까요!' 같은 말은 정말 아무 쓸모가 없다.

-2019년 5월 5일에 쓴 글

2022-11-09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 GQ KOREA

2017.02.08

도서관도 없는데 책도 없고 결정적으로 도서관적 경험도 없는 이곳의 도서관에 대하여.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모른다. 서울 외 지역 출신에게 서울은 있어야 할 게 모두 있는 곳이다. 서울의 도서관이라면, 경기도 부천에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책의 바다’여야 한다. 부천의 경인문고에서 책을 뒤지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1호선을 타고 종로로 향했으니, 부천과 달리 서울의 도서관은 굉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나름 합리적인 유비 추리의 산물이었다.

서울 사람이 아닌 내게 서울의 도서관은 일단 대학 도서관이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대출 기록을 긁어보니 총 970권을 빌렸다. 그것들을 전부 읽었다고 장담할 순 없으나, 나는 가급적 빌린 책을 끝까지 읽고 돌려준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도서관에 가보니 학부 시절의 그곳보다 장서량이 부족하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애석해하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군 복무를 마쳤고 사회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 어떤 대학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울의 여러 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다닌 지 여러 해, 이제야 서울의 도서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부천에 살던 내가 막연히 동경하던 서울의 도서관은 서울에 없다. 서울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지역 특산물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한국에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서의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형으로서의 도서관’이 뭘까? <달력과 권력>이라는 생물학자 이정모의 책이 있다. 달력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제정 및 변화 과정이 개별적인 사회 및 세계의 권력 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추적한 책이다. 박학다식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물학 전공자가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서문을 통해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독일의 연방도시 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고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으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었다. 수메르와 로마 달력에 관해 1800년대에 출판된 책이 서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간된 것을 비롯,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이 동네의 조그만 도서관에 갖춰져 있었다. 본에 없는 책은 사서에게 부탁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다 주었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본의 도서관에 감사의 말을 돌리고 있다.

이정모가 말하는 ‘본의 도서관’은 단일 건물과 제반 시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에 거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 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일단 도서관에 가면 이용자가 원하는 주제의 책을 찾아주는 사서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없는 책은 다른 도시에서 가져다주는 종합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공부하고, 연구해서, 지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도서관은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 에도 나와 있다. 에코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 한 학생의 사례를 상정한다. 그 학생은 4년간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해 논문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았을 뿐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그리고 접근 가능한 도서 관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구 9만의)”의 시립 도서관뿐이다. 에코는 자신이 가진 중세 전문가로서의 이점을 포기하고, 사서에게 물어보는 쉬운 길을 접어둔 채, 우연히 발견한 핵심적인 논문의 참고 문헌 목록을 베끼는 짓을 하지 않 고, 어떻게 인구 9만 명이 사는 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어엿한 논문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시연해 보인다. 그리고 밥 아저씨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참 쉽죠?”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방에 살고 있고, 책들도 없고, 어디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의 도서관에서 과연 본의 도서관, 혹은 에코가 말한 인구 9만의 도시 ‘알레산드리아의 도서관’과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해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한국의 철새, 19세기 판소리의 채록 과정, 물산장려운동과 담배 수입의 역사 등, 한국적인 뭔가를 주제로 삼는다면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대학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잘 짜인 상호 대차 서비스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일반인들이 궁금해 하는 지식 및 학술 정보에 대하여, 이용자가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고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홈페이지를 통해 질의 답변을 받는 참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고, 주제가 한국적인 뭔가라면 연구는 가능하다. 문제는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울에서 가장 책이 많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경우 책 저장고로서의 기능에 더욱 충실하고자 모든 도서를 ‘폐가식’으로 운영한다. 보고 싶은 책 제목과 청구기호를 적어서 제출한 후 한참 기다리면 도서관 직원이 가져다준다. 열람만 가능하고 관외 대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책을 저장하고 보호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이긴 하지만, 책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출구를 찾는, 도서관 고유의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답을 찾는 곳이다. 그러나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은 책 속에서 길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잡으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그런데 대학 도서관이 아닌 한, 서울의 도서관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52만여 권을 소장한 정독도서관, 44만여 권을 보유한 남산도서관 정도가 체면을 세운다. 이는 서울대 4백52만 권, 고려대 2백45만 권, 연세대 2백7만 권, 부산대 1백 94만 권, 성균관대 1백82만 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 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전부 합쳐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보다 적다. 대한민국에는 도서관이 별로 없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도서관 정책은 ‘도서관적 경험’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나라에서 아예 법을 만들어 ‘작은 도서관’ 을 육성하고 장려한다. 2012년 2월 17일 제정된 ‘작은도서관 진흥법’에 따르면 작은 도서관이란 “<도서관법> 제2조 제4호가목에 따른 도서관”을 말하는데, 해당 조문을 찾아보면 ”공중의 생활권역에서 지식 정보 및 독서 문화 서비스의 제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으로서 제5조에 따른 공립 공공도서관의 시설 및 도서관 자료 기준에 미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즉, 애초부터 작은 도서관은 자료를 턱없이 부족하게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국민의 지식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작은 도서관의 기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7년 1월 현재 전국에는 6천1백73개의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1천여 권, 혹은 수백 권 단위의 장서를 비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확장된 학급 문고 수준인데 그 앞에 굳이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면서까지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좀 더 주민 친화적이면서 도서관의 본래 기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명칭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린이를 위해 작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도서관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더 큰 책의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싶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지성을 바라보며 눈이 멀고 싶었다. 작은 도서관이 아니라 큰 도서관을 간절히 원했다. 오늘날의 책벌레 어린이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아기자기하고 예쁜 뭔가가 아니다. 성장해가는 자아를 한껏 뻗칠 수 있는 모험의 장이 절실하다. 그러한 곳, 진정한 도서관은, 단지 어린이들뿐 아니라 늘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표현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학자와 작가와 연구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서울의 도서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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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고 떠올라 백업용으로 올리는 지난 글.

연관된 내용으로, 이 블로그에 있는 다음 글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2-10-22

보통 남자(homo normale)

 

"보통 남자(homo normale)가 어떤 존재인지 아나?
예쁜 여자의 엉덩이를 보고 힐끔거리는 남자,
본인 같은 남자들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남자,
축구장, 경마장, 성당에 흔한 그런 남자들이지.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를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해.
그래서 보통 남자들은 진정한 형제고, 시민이며,
진실된 애국자이고, ... 파시스트야."
 
- <순응주의자>(Il Conformista) 중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1960)

 

어제, 사전정보 없이 봤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3시간의 러닝타임 속에서 약 30분 단위로 이야기가 뚝뚝 끊어짐.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은 주인공 마르셀로의 내적, 외적, 타락. 극도로 세련된 영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피카레스크(picaresque). 임상수가 <돈의 맛>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게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다.

2022-07-30

우영우: '지켜주고 싶은 여자'라는 로맨스 세팅

1화만 봐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왜 흥행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상당히 공들여서 잘 쓴 법정씬. '천재 변호사'가 진실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잘 쓰면 당연히 재미가 보장된다.

본격적인 논의의 가치가 있는 건 우영우 캐릭터. 사람들이 '자폐'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놓치고 있지만, 이 캐릭터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인물 유형이 아니다. 오히려 5천만 국민에게 친숙한 '아는 맛'이다.

우영우는 기존 로맨스, 특히 2000년대 이전 순정만화에서 흔히 쓰던 여자주인공 캐릭터의 변주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해서 보고 있자니 딱하고 귀엽기도 한, 순수한 사랑스러운 그러면서도 특별한 게 있는 여자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귀엽다'인 것 같지만, 이게 통상적인 '귀여움'과 100% 겹치는 건 아니다. 저런 순정만화 캐릭터 세팅과 21세기 대중문화 속 귀여움에 대한 논의는 어려운 주제니까 나중에 언젠가...)

여기서 잠깐. 순정만화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비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터라 이런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럽다. 나는 그런 뉘앙스의 리플은 적당히 지우거나 감추거나 할 생각이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아무튼, 우영우 캐릭터란 그런 캐릭터다. 특별한 소녀. 하지만, 혹은 그래서, 지켜주어야만 하는 소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이러한 인물 유형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은혜 작 <점프트리 A+>의 혜진이는 마음이 너무 여리다. 그래서 해야 할 말 제대로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혜진이는 수도꼭지야..." 그러면 멋진 오빠들이 간지나게 춤추며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타나서 도와줌.

'지켜주어야 하는 여주'가 꼭 나약한 여자일 필요도 없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나는 장미로 태어난 장미칼, 아니 오스칼은, 군인 체질이지만 시대적 한계로 남장을 하고 군인으로 일한다. 그런 비밀 때문에 뭔가 제약이 생긴다. 소꿉친구 앙드레는 공식적으로는 오스칼의 부하지만, 앙드레에게 오스칼은 '지켜줘야 하는 여자'가 된다.

꼭 '순정만화'만 이런 기법을 쓰는 건 아니다. 여자 캐릭터를 낯선 환경에 던져넣기만 해도 '지켜줘야 하는 여자'를 만들 수 있다. 로맨스의 고전 중의 고전인 <귀여운 여인>부터가 그렇다.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거리의 여자다. 에드워드 루이스(리처드 기어)하고 어찌어찌 엮여서 고급 호텔에 묵는다. 비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간다. 하지만 옷가게 점원들이 무시한다. 그 사실을 듣고 에드워드는 격분하여 카드 들고 가게로 처들어가서 '여기 있는 거 다 내놔' 시전.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준다.

이 여자가 딱하다, 짠하다, 마음에 걸린다. 도와주고 싶다. 남자들이 쉽게 엮이는 감정의 고리다. 사실 여자들도 불쌍한 남자에게 쉽게 끌리곤 한다.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가 목발을 짚고 다니며 여자들의 동정심을 사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해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로맨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문제다. 그런데 남녀(일단 이성애 로맨스만 이야기하자)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건 눈만 마주쳐도 가능한 일이다. 재미있는 서사가 나오려면 뭔가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장애, disable이 아니라 obstacle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그 obstacle을 여자주인공의 캐릭터에 얹어보자. 앞서 말한 순정만화의, 혹은 로맨스의 여주 생성 공식이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어떤 장애에 부딪혀 넘지 못할 때, 그걸 딱하고 짠하게 여겨 뭔가 손을 내밀고픈 남자의 마음. 그렇게 로맨스를 만드는 게 2000년도 이전에는 특히 흔했다는 것이다.

우영우의 장애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런 면에서 당연하다. 혹은 장애의 재현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민감한 이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영우>는 disable을 로맨스의 obstacle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팅이 아니다. 여성을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서 로맨스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 창작 기법 자체가 20세기의 유물이다. 요즘은 여주들에게 노골적으로 obstacle을 부여하는 고전적 로맨스 세팅을 잘 안 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물며 그 obstacle의 자리에 disable을 갖다 놓는다? 이건 상당한 모험이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로 플러스를 뽑아보겠다는 플랜. 다행히도 <우영우>는 배우 박은빈이 연기하고 있고, 그는 사실상 원맨쇼 차력쇼 수준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우영우>의 세팅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그 맥락이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약간 부연설명을 해보고 있을 뿐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작품의 주인공을 박은빈이 해서 천만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연기력이 부족하거나 시청자들의 무조건적 호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밉상 털이 한오라기라도 박힌 배우가 맡았다면, 엄청난 논란 끝에 순항하지 못했을지 모를 일이다. 

2022-07-28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탱크와 전투기를 수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오늘 인터넷은 '폴란드의 날'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있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외국인에게 '두유노 코리아? 손흥민 몰라요?' 이러는 진상 국뽕 한국인처럼, '폴란드'라는 단어의 자동 연관 검색어를 떠올린다.

쉼보르스카는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전차와 전투기를 사고 파는 거대한 돈과 폭력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극도로 문학적인 아무말이며, 반박시 일단 내 말이 맞는데, 솔직히 누군가 뭘 반박할 거리가 있지도 않다. 아무말이니까.

이런 시가 있으니 한 편 읽어주시면 좋겠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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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태양이 저물고 있네."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그저 시간을 가리키는 척 하고 있을 뿐이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2022-05-29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


새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입니다. 

이 책의 맥락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란 마치 실용서인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실용서가 아닌, 그래도 어쩌면 실용적인 쓸모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는 총서 시리즈입니다. 

가령 CIA의 사보타주 매뉴얼을 담은 <생활 공작>,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인들에게 배포된 육박전 매뉴얼인 <실전 격투>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용서였지만 실용서가 아니고, 실용서라고 보기 어렵지만 실용서(였)죠. 

<프리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10년차도 더 된 프리랜서인 제가, 프리랜서로서의 삶의 태도와 방식, 여러 팁을 전합니다. 실용서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가령 <미라클 모닝>이라던가, 뭐 그런 식의 실용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가격은 고작 9천원. 전체 분량 182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용서가 아닌 정도를 떠나, 책의 만듬새만 놓고 보면 시집 같기도 하군요. 편하신대로, 좋을대로, 그렇게 읽으면 좋을 책이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2-05-22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

오늘(5월 22일 일요일) 막을 내린 권진규 100주년전.

일단 대단히 훌륭한 전시였고,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줘야 하지만, 누군가 어떤 말을 굳이 반복해서 한다면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권진규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젊은 시절 일본 가서 조각 배우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전시 초반에 써 있는데, 실제로 걸어온 행보는 그와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 모두 그렇다.

그의 예수상은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멀쩡히 교회에서 돈 받고 의뢰 받아서 만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권진규는 그 예수의 머리의 후광을 굳이, 굳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들었다.

수레바퀴란 종교에서 어떤 상징인가? 불교의 상징이다. 불교의 法이요, 윤회의 輪이다. 예수 머리의 halo를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령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전국의 여러 성당들은 앞다투어 '상투 틀고 있는 예수'라던가, '색동저고리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성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Roman Catholic'과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천주교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런 유형의 성상을 주문 제작할 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권진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아서 작업을 할 때도 아주 대놓고 자신의 의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곤조를 밀어붙였다.


나무로 만든 불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커미션 받은 작품이 아니지만, 종교의 내적 논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가주의적 의지가 강하게 개입해 있다. 미륵의 관을 썼지만 옷깃과 수인, 결가부좌는 부처의 그것이다. 종교의 문법을 알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권진규의 예술가적 목표가 뭔지, 얼마나 잘 추구하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써두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기술자/장인/등등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진정 간도 쓸개도 빼놓고 시키는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에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2-05-15

19세기 힌두교 르네상스, 바가바드기타, 계급과 차별과 의무

이 고전이 지니는 힘과 영향력은 간디뿐 아니라 틸라크 (B.G. Tilak), 오로빈도(Aurobindo),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nhan) 등 수많은 현대 인도 사상가와 정치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미쳤다. 사실 『바가바드기타』가 힌두교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대중적 경전이 된 것은 19세기의 이른바 힌두 르네상스(Hindu Renaissance)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는 인도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저항과 독립 의식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각성도 가져왔다. 특히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와의 접촉은 인도 지식인들의 힌두교 이해와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힌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따라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무조건 동일시하던 견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인 힌두교 사상의 강점을 새롭게 의식하게 되었다. 힌두교를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던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그들은 오히려 서구 세계를 향해 힌두교 철학과 종교 사상이 지닌 장점과 매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누구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유명한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3-1902)였으며, 그의 사상 역시 『바가바드기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393쪽, 해설]

- 길희성 역주,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가장 평이 좋은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기타를 읽고, 부산대학교 박효엽 교수가 (당시는 교수가 아니었지만) 쓴 『불온한 신화 읽기』를 읽으니, 현대 힌두교가 지니는 여러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힌두교는 본래부터 다신교에 어떤 종파가 지배하고 있지도 못했다. 일종의 토착 민간 신앙 차원에서 발전이 멈춰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도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19세기에 '재발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마냥 바가바드기타의 지위가 급상승하였고, 크리슈나는 '크라이스트'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카스트 제도. 그 전까지도 인도를 관습적으로 묶어놓던 카스트 제도는 바가바드기타 역시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약성경과 달리 바가바드기타는 '보편 해방의 경전'이 되지 못했다(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힌두교 신학자 혹은 신도들도 상당히 많은 듯하지만). 결국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현대화' 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고한 종교적,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

박효엽의 <불온한 신화 읽기>는 특히 이 지점을 충분한 분량을 동원하여 잘 언급하고 있다(제3장 "『기타』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무사 계급'의 특수한 의무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경우 힌두 신화 체계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는 한 다수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도덕 철학 체계를 이루기가 어렵다.

한국은 '의무'라는 개념이 아예 실종된 사회다. 특히 군복무와 관련된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국방의 의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와 같이 의무 개념을 해석하며, 특수 의무를 보편 의무보다 절대적으로 앞세우면,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끔찍한 차별과 배제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다.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인도 철학을 애호하는 서구의 리버럴 엘리트, 서구 리버럴 엘리트를 흉내내는 한국의 식자층들은, 은연중 자신을 브라만 계급에 대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2022-05-14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성경 속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대한민국 최악의 대리인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집사를 두고 살림을 맡겼다. 그런데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부자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집사를 불러 해고하겠노라고 통보했다. 당장 쫓겨나게 생긴 집사는 고민에 빠졌다. 다른 곳에서 집사 노릇을 할 수도 없게 된 처지에, 험한 육체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주인댁 바깥에서 자신을 반겨줄 사람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 섬으로 깎아주었다. 낭비를 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생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도리어 더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그러자 주인은 집사를 불렀다.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다. 옛날 말로 집사를 청지기라고 한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비유가 그렇지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특히 혼란스럽다. 논란의 여지도 많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주인에게 다른 사람들이 진 빚을 제 맘대로 깎아주고는 도리어 칭찬을 듣는다는 말인가? 성경에는 저 집사 혹은 청지기가 의롭지 못하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예수는 나무라지 않는 걸까?

세속의 학문을 통해 성경의 비유를 이해해 보자. 1976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젠슨과 로체스터 대학교의 윌리엄 메클링은 본인-대리인 문제, 혹은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를 제시했다. 일을 맡기는 사람과 맡아서 하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경영학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다. 계약을 맺어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켜야 한다. 일을 맡긴 사람이 일의 주인이다. 하지만 일을 더 잘 아는 것은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즉 대리인이다. 주인보다 대리인이 정보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주인에게 불리하고 대리인에게 유리한 정보 비대칭이 발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남에게 일을 맡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24시간 감시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주인은 대리인이 자신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100% 확신할 수 없다. 대리인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아닌지, 심지어 대리인이 유능한지 여부마저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다. 업무 파악, 지시, 평가 등에 있어서 대리인은 주인보다 늘 우위를 차지한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고용 관계, 업무상 계약 관계를 넘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엄마가 심부름을 보내면 아이는 그 돈으로 과자를 사 먹고 싶어진다. 선거철만 되면 굽실거리는 정치인들은 투표 다음 날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다수의 선량한 사람은 양심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주인-대리인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대리인 문제로 홍역을 앓는 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온갖 사건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오스템임플란트에서 2000억원, 우리은행에서 600억원, 돈이 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의 횡령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지만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전형적인 대리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영진이 제대로 감시할 수 없거나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털고 있는 것이다.

온 나라에 대리인 문제가 심각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윗물이 썩었기 때문에 아랫물이 혼탁해진 것이다. 지난 5년, 문재인 정권이 벌인 일을 되짚어 보자. 세계로 수출되는 우리 원전 산업을 누구 한 사람의 고집으로 발목 잡고 주저앉히더니, 멀쩡한 숲을 밀고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도배했다. 우량 기업이던 한국전력을 빚더미에 올려놓고, 지방대가 문을 닫는 이 시점에 한전공대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마음껏 낭비하고 그 청구서를 주인에게 넘긴 채 떠나버리는 최악의 대리인이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재개발 사업에서 건설 회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한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사적 이익의 추구를 적절히 통제하고 공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재명의 성남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공공 개발을 막고 영리 개발을 허용하며 그 이익을 소수가 독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었다. 성남 시민과 대장동 입주민들의 대리인이어야 할 이재명은, 화천대유 일당 중 한 사람인 변호사 남욱의 말을 빌리자면, ‘4천억원짜리 도둑질’의 현장에서 시장 직인을 찍어주고 있었다.

대리인 문제를 원천 봉쇄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행동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주인이 고삐를 다잡는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대리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야 한다. 주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 벌어졌을 때, 확실히 적발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대리인 문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은 집사가 자기 재산으로 폭리를 취하는 대신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를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집사가 돈놀이를 하고 낭비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진 큰 빚을 깎아준 것은 어여삐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온 세상의 주인인 예수는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향해, 물질적 손해를 보더라도 영혼의 풍요를 얻으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재명은 대장동을 알았다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이다. 어떤 면에서건 심각한 주인-대리인 문제다. 실패한 정치인, 행정가로서 자숙하며 수사에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대선에서 패배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있다.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기상천외한 레퍼토리를 다시 꺼내든 것은 물론이다. 현실의 대리인 문제는 성경 말씀처럼 선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국회의원 금배지를 방패 삼아 숨지 못하도록,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상상과 선동에 휩쓸린 문재인 5年

●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 억압”
● 민중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
● 박지현은 무엇이 못 마땅했을까
● 前 당 대표 이해찬의 ‘노론 음모론’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10일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탄핵 이후 인수위원회 기간 없이 곧장 취임하며 야외 취임식도 생략한 터라, 9년 만에 치러지는 대규모 행사였다. 약 4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앞에서 신임 대통령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취임사를 낭독했다.

행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예상한 BTS의 공연도 없었다. 그러나 평범하지도 않았다. 외려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통상적 미사여구로 둘러대지 않았다. 반(反)지성주의라는 과제 앞에 맞서기 위해 자유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는 대통령 본인의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흔치 않은 대통령 취임사였다.

‘그거 내 욕하는 거 아니야?’
윤석열은 대한민국이, 또한 세계가 처한 위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금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윤석열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망가지고 정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새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면, 일반적으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박수를 쳐주고 덕담이나 해주며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독으로 168석(취임식 날 기준)을 지닌 초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퍽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5월 11일 조오섭 민주당 대변인은 성명을 발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한 반지성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5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박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겨냥해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뉴스1]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민주당이 못 마땅해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박지현은 5월 11일 당 비대위 회의에서 “민주주의 위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 규정하고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민주당은 ‘반지성주의? 그거 내 욕 하는 거 아니야?’하고 화를 낸 셈이다.

‘발끈하는 걸 보니 찔리나보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굴 생각은 없다. 또한 박지현의 지적에는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드러났다시피, 민주당의 구성원 중 일부가 심각한 지성의 결여를 보여준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 반지성주의란 흔히 말하는 ‘무식함’이나 ‘교양 없음’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반지성주의의 본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의 정치 역사상 가장 반지성주의를 심각하게 드러낸 정당은 민주당이며, 그 기간은 지난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저작권자, 美 역사학자 호스스태터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공산주의처럼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용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용어다. 그 저작권자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로, 19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컬럼비아대에서 교편을 잡은 인물이다.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펴낸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하게 된 이 책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바는 분명하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을 되짚어보며, 다시는 그런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에게 미국의 반지성주의란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당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인의 삶 전반(American Life)에 반지성주의의 싹이 심어져 있고, 특정한 조건과 계기가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매카시즘 광풍과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일까? 미국은 구대륙 즉 유럽에서 박해 당하던 신교도가 이주해 만든 나라다.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하고, 사제가 해석해줘야만 했던 신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이 직접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지적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신대륙 이주민들은 구대륙에 비해 반(反)제도적이고, 영성적이며,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광막한 자연 속에서 원시주의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 역시 문화적 풍토의 한구석에 자리매김하게 됐다.

방금 말한 내용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다. 구체제의 모순이 심화하고 대중과 지식인의 괴리가 커질 때, 적절한 반지성주의는 대중과 지식인 양쪽에 건전한 자극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대중적 에너지를 악용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반지성주의자는 사실 ‘민중’이 아니라 민중을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일 때가 많다.

일본의 양심적, 실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우치다 다쓰루는 호프스태터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2010년대 중반 일본에서 급속도로 퍼진 극우 운동을 파헤치는 작업에 돌입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뜻을 함께하는 필자들의 원고를 모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를 펴냈는데, 그 중 직접 쓴 첫 번째 원고인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에서 호프스태터의 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자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정쩡한 교육을 받은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반지성주의자는 통상 사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종종 진부한 사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상에 홀려 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이 대목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지성주의가 지니는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은 40대와 50대 남성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자이며 사회적으로 명성을 지닌 지식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서 반지성주의에 면역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과 그 구성원 및 지지층은 반지성주의에 취약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친일 독재 부역 세력’이라는 프레이밍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문재인 정권 5년간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이번 선거는 한일전이다!” 이 또한 민주당이 집권하던 5년을 특징짓는 정치 구호 중 하나다. 국민의힘, 그 전신인 자유한국당, 새누리당 등을 ‘친일 독재 부역 세력’ 등으로 프레이밍한 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듯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대중 동원 논리였다.

호프스태터의 논의를 21세기에 이어받은 우치다 다쓰루가 볼 때, 이렇듯 맥락도 시대감각도 없이 과거의 적을 상정하고는 그것을 현재에 이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중요한 징표다. 반대로 지성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시간 속에서 차츰 진리성이 익어 가는 언명을 가리켜 ‘지성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음모론자들처럼 이것저것 자기 입맛에 맞는 ‘팩트’는 열심히 수집하고 끼워 맞추지만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반지성주의자들은 때로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동시대에 적지 않은 찬동자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을 사회적, 공공적인 가설이라고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구조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으니,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반유대주의자였던 에두아르 드뤼몽의 사례를 제시한다. 에두아르 드뤼몽은 고대 로마 이후 19세기 말까지도 유대인들이 흑막 너머에서 유럽을 지배해왔다는 음모론에 심취했다. 음모론을 퍼뜨리며 대중적 인기를 만끽했다. 유대인들이 유럽을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는 모두 다른 시대라는 것을 단번에 무시해버리는 ‘무시간성’의 사고방식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1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미래시민광장위원회 출범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그는 2019년 인터뷰에서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신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과 그 지지층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른바 ‘역사의식’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들먹이지만 시간성이 없다. 과거에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른 악당 집단이 있는데 그들이 계속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원초적이고 상투적인, 대중소설 같은 상상력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2019년 인터뷰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 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에두아르 드뤼몽이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빠져 선동했듯, 이해찬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고 있거나, 본인은 믿지 않아도 남들이 그렇게 믿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의 지도부 또는 지지층 중 목소리 큰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역사 공부를 더 하라’고 손가락질하고 함성을 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의 행태다.

국민의힘도 잘 난건 없지만…
국민의힘과 그 전신인 보수정당 역시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힘이 강했을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지만 사회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던 이들을 대거 ‘빨갱이’로 몰았다. 호프스태터가 비판한 매카시즘의 광풍과 다를 바 없던 행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 당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공개 사과하는 등의 움직임은 있었으나 앞으로도 지속적 반성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다. 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통해 완성된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 속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며 반일 선동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 전체의 지적 담론을 갱신해야 하는 이유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5-13

동맹과 보험

우크라이나가 지금 나토에 가입할 수 없는 이유는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나토는 가입국이 전쟁하면 자동 참전하게 되어 있는데, 당장 나토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토는 군사 동맹이며,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 그 존재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나토가 나토이기 때문에 나토에 가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암보험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보험은 병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작 병에 걸려 있거나 질병 이력이 있거나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은 보험 가입을 제한당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결론: 한미동맹, 있을 때 잘 하자.

참고기사: "나토 가입, 핀란드·스웨덴은 되고 우크라는 안되는 이유", 뉴시스, 2022-05-13

2022-05-07

‘검수완박’이 개혁? 근현대사 공부부터 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검찰은 왜 경찰을 감시·견제·통솔했을까

● 사건 당 처리 기간·미처리 사건↑
●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
● ‘원수’ 이토 히로부미의 사법 개혁
● ‘박종철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
● 도저한 역사적 흐름에서의 퇴행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3일 오후 2시. 원래 10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한 차례 연기된 국무회의가 열렸다. 공식적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 퇴임 기념 오찬 때문이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일각에서는 이 기습적 검수완박이 결국 문재인·이재명 지키기 말고는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성남 FC 후원금 의혹 등 문재인 정권 및 이재명 전 경기지사와 관련한 사건의 경우 경찰 선에서 덮어버릴 가능성을 만드는 쪽으로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결과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회의 개의 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와 장혜영 정의당 정책위의장(오른쪽 두 번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물론 의혹일 뿐이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그리고 그에 찬동한 정의당의 진짜 의도를 단언할 수야 없다. 평범한 국민이 받는 피해는 예정돼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9월 통과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과 그에 따른 시행령이 2021년 1월 1일부로 시행되면서 국민들은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일단 사건 당 처리 기간이 길어졌다. 2017년에는 경찰이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데 평균 44일이 걸렸다. 2021년에는 62일로 늘어났다. 기간이 늘어난 만큼 확실하게 마무리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해 경찰은 2011256건의 사건을 접수했는데, 그 중 246900건(12.27%)을 처리하지 못했다. 열 건 중 한 건 이상이 미처리 상태로 남아있다는 뜻이다.

경찰의 미처리 사건 총량과 그 비중은 2017년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2021년 1월 1일 이후로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뛰었다. 2020년에는 2058268건 가운데 184966건으로 8.98%가 미처리 사건이었던 반면, 2021년에는 2011256건 가운데 246900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단순 계산으로도 6만 건이나 미처리 사건이 늘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경찰의 업무 부담이 매우 커졌다. 게다가 검찰은 이전처럼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지 못한다. 대신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만 있다. 지휘와 요구 사이에는 강제성 면에서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른다. 경찰은 실제로 업무 부담에 짓눌리거나, 업무 부담을 핑계로 곤란한 사건을 속된 말로 ‘뭉개고’ 앉아있을 수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단기적 미래, 한 두 사건의 처리와 달리, 이런 장기적 흐름을 예상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시선을 반대로, 과거로 돌려보자. 검찰이라는 제도, 검사라는 공직자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서 시작해, 근대 사법 제도가 도입되던 무렵,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쳐 공권력과 시민사회의 관계가 재정립되어 나가던 과정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수령·이서배 탐학”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속담이 있다. 현대 한국인은 저 속담을 실제 권한을 가진 사람보다 그 권한을 대리해 행사하는 자가 더 위세를 떠는 경우가 있다는,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이곤 한다. 애석하게도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그저 담백한 사실의 표현이었다. 아주 먼 과거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조금 넘긴 시점만 해도,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정말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서운 세상에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그 전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었다. 일본이 1906년 설치한 통감부는 조선을 사실상 지배·통치했다. 초대 통감은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훗날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대적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사법 개혁이니 좋은 일이었을 리 없다는 단견은 잠시 접어두자. 놀랍게도 통감부가 추진한 사법 개혁은 조선의 기층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이토 히로부미의 ‘큰 그림’이기도 했다. 조선의 사법 제도가 워낙 가혹하면서도 엉망진창이던 탓에, 사법 제도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이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푸른역사)에서 이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06년 이후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그에 뒤이은 한국 병합은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침략 행위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한국 민중의 고통과 개혁 열망에 편승한 침략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 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되었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복원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시행되면서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걸게 했기 때문이다.”(머리말, 9쪽)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 의식’이 형성되기 전이다. 다른 나라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보다 나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조선의 사법 제도가 엉망이고, 갑오개혁을 통해 자기 쇄신을 이루지도 못해서다. 앞서의 책을 좀 더 읽어보자.

“조선 후기 이래 형사재판제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왔지만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첫째, 인민의 범죄를 최일선에서 수사하고 재판하는 수령·이서배들의 탐학이 억울한 재판을 야기하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수령들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 부족하여 재판 과정을 이서배들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형방 아전 등 이서배들이 자의적으로 재판 과정과 판결을 좌우하고 있었다.”(102쪽)

조선 민중이 일제 개혁을 환영하다?
4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 합의파기 윤석열 국민의힘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은유나 속담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 그랬다.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에 오른 고을 원님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의 내막이나 진상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원님이 되건 형방, 아전, 기타 등등 수령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서배, 즉 양반은 아니지만 관의 일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실세였고, 백성을 괴롭히는 주범이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으며 필요와 욕구에 따라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사건을 뒤틀었다. 자정 작용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일부 암행어사들은 수령의 비리를 고의적으로 눈감아 주거나 아예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함께 민에 대한 수탈에 나서기까지 하였다.”(103쪽)

조선의 민심을 얻기 위해 사법 개혁에 나선 통감부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19071223일, ‘재판소구성법’ ‘재판소구성법시행령’ ‘재판소설치법’을 제정하게 했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지방의 행정관인 수령, 즉 원님이 재판까지 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바뀌지 않던 체제다.

일본은 고등고시를 합격한 일본 현직 판검사를 한국에 발령 보냈다. 한국인 중에서도 기존 경력자, 일본에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한 자, 변호사 시험 합격자, 법관양성소 졸업생 중 재판 사무 경력이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판검사로 임명했다. 판사뿐 아니라 검사라는, 행정부에 소속돼 있지만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근대적 제도가 도입됐다.

조선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영했다. 일단 대한제국 스스로가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화 첫 삽을 떴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 못 한 일’을 일본의 손을 빌어 완수한다는 논리 구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존 시스템이 지닌 문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가혹할 뿐 아니라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을 결여한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기층 민중이 일제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인 판검사가 한국의 재판기관을 장악해 감에도 불구하고, 군수·관찰사의 불공정한 재판에 피해를 받아왔던 지방민들과 중앙의 상급재판소의 폐해를 목도해 왔던 지식인들은 신재판소 개청, 민형사 재판 관련 신규 법령 실시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표명하고 통감부의 ‘시정 개선’ 사업 중 괄목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44쪽)

오늘날 기준에서 보자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의 관점을 상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활개 치는 폭력과 불의를 국가 권력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심지어 공권력이 불법적 폭력 단체를 감싸고 비호하며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 국가는 지배 정당성을 급격히 상실하고 만다.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민족 의식이 싹텄고, 6·25전쟁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까지 수립된 상황이었으나, 사법 체계는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자의적이고 엉성했다. 폭력 조직과 경찰의 유착은 심각했다. 흔히 ‘서청’으로 통하는 서북청년단이 북한 실향민을 중심으로 한 반공 폭력을 담당했다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거나 실제로 기여했던 민족주의자들 역시 해방 후 제도권에 흡수되지 못한 채 외곽 폭력 단체를 결성하고 ‘합법적 권력의 불법적 지배’에 기여했다.

일본 호세이대 방문강사인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현대 한국의 역사를 조직폭력 역사와 아울러 고찰한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현실문화)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그 책에서 펄트가 인용하는 바, ‘스네이크 김’이라 불리던 방첩대장 김창룡은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 고희두를 고문하다가 죽였는데, 그 고희두의 역할에 대해 미군 방첩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희두는 원남동 동회장이며 민보단 동대문구 단장이고 동대문 경찰서 후원회장이며 사법 보호위원회 회장이었다. 이런 직함은 그의 명함에 적힌 것이다. 고희두는 동대문 경찰서 관할의 청계천변에서 장사하는 노점상 대표였다. 그는 수천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어떤 면에서 동대문과 청계천의 통제권을 장악한 자는 서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여겨질 수 있다.”(54쪽)

여러 가지 달라진 점이 있지만,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 되는 평범한 국민 처지에서 보면 구한말과 자유당 정권 시절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1961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역점을 둔 것도 바로 그런 ‘비국가 범죄 집단’을 드러내고 소탕하는 것이었다. 펄트에 따르면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3000명을 체포했다.”(54쪽) 대중은 열렬히 환영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박정희와 군사정권이 발휘한 국가 폭력 체계가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민간의 폭력과 어지럽게 뒤섞인 최악의 경우보다는 나은 차악을 대중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60년대 초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변을 일으켰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견제 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한계가 뒤따른다. 펄트는 자신이 ‘백인 남성’인 이유로 다양한 이들을 만나 솔직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는데, 한 전직 경찰 인터뷰 내용이 이채롭다.

“나는 경찰관 응답자에게 왜 박정희의 권위주의 시기와 전두환 정권의 초기에 깡패들이 이용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꽤 단호하게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고 대답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비국가 집단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즉 외양적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질서를 세울 철권이 있었다.”(162쪽)

군인이 권력을 잡고 경찰을 ‘국가의 깡패’로 동원하는 체제는 중산층의 성장 및 민주화운동을 통해 허물어졌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조직이 다름 아닌 검찰이다. 영화 ‘1987’에서 잘 묘사했다시피 군부 정권의 수족과 다름없던 경찰은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으나, 검찰은 동의하지 않았다. 행정부 소속으로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경찰과 달리, 검찰은 조직상으로는 행정부 소속이나 사법부이기도 하며, 검사 개개인이 1인 기관으로서 권한을 지니고 있다. 박종철 사건이 폭로되면서 철통같던 군사독재도 무너졌다.

2022년 검찰이 빼앗긴 ‘수사개시 권한’ 역시 군사독재 시절의 해악을 중화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한 바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주임검사가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형제복지원이라는 기이하고도 거대한 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와 노동 착취를 목격하고, 스스로 사진을 찍어 증거를 수집한 후, 법원의 영장을 받아 사건의 진상을 밝힌 경우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지역 유지로서 경찰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수사 단계부터 특혜를 받으며 온당한 처벌을 피해왔다는 비판이 지금껏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입법 폭주
검찰이 모든 수사를 직접 관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해방 후 70여 년간 한국의 법치주의가 꾸준히, 경찰의 힘을 검찰을 통해 감시·견제·통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이유가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다. 한국인들은 공권력이 부당하게 작동하거나 토호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설령 일제에 의해 근대적 사법 제도가 도입되는 상황일지라도 바람직한 개혁이라면 손을 들어주는 편을 택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는 도저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의 퇴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든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닌 ‘권력의 몽둥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구한말처럼 권력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자유당 정권 시절처럼 사적 폭력과 공적 폭력의 구분이 애매해지거나, 군사독재 시절처럼 중앙 권력이 경찰 조직을 틀어쥐고 국민을 쥐락펴락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법치주의는 뿌리부터 썩고 만다. 검수완박의 폐해를 최소화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