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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4

설강화 관련 코멘트 모음

신동아에 보낸 칼럼(링크). 1, 2화 보고 씀.

 

3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 3화 틀었는데, 2021년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아씨-식모' 구도의 갈등이 전면화.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잘 안 다루는 지점.

하긴 유현미 작가는 <스카이 캐슬>때도 굉장히 노골적으로 계급 이야기를 했음. 문제는 그랬다가 혜나를 구렁텅이 빠뜨리고 죽였다는 것인데... 진보적 성향은 없지만 계급 문제를 인지하는 작가들이 곧잘 택하는 코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작게나마.

아무튼, 무슨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 논란으로 이 드라마 조지는 사람들이 더더욱 싫어할 수밖에 없겠다. 작품 내에 결백한 사람이 없으니까. 여러모로 90년대 순정만화 같음. 좋은 의미에서.

 

5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 5화까지 본 소감. 작가는 '남북관계를 배경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음. 신동아 원고 쓸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단정지어 말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분명하네... 

 

7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는 영화로 갔어야 할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게 가장 큰 패착 같다.

감정선이 아주 높고 깊게 오가며 빠르게 변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그걸 연출과 몇몇 장면에서 드러나는 연기로 커버 가능함.

반면 드라마라는 장르는 워낙 러닝타임이 길다. 남주 여주 사이의 멜로가 붙느냐 마느냐, 이거를 시청자들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보고 촉각적으로 판단함.

<로미오와 줄리엣>, 거기서 파생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극단적 러브스토리들, 모두 청춘들의 짧게 불타오르는 사랑 이야기인데 거의 대부분 이야기 자체를 길게 끌지 않는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음.

관객이 단번에 보고 단번에 흥분한 후 단번에 절망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야기가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전개되고 끝나지 않으면 안 됨. 생사를 오가는 총성 속의 사랑 이야기인데 이번주에 보고 쉬었다가 다음주에 또 보고... 그게 필이 잘 안 받겠죠.

영화로 찍었다면 좋은 뭔가가 뽑히고 충분히 유익한 사회적 논의도 뽑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러모로 아쉽다. 이제는 실검에서 총공도 안 당함...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올려봅니다. 여러모로 아까운 기획이 왜곡되고 묻혔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움.

2021-06-13

이준석의 페미니즘 공격이 별 일 아니라는 이들을 위한 사고실험

성별 외 다른 변수를 제외하기 위해, '나경투'라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보자.

나경투는 1986년생 여성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지만 국민의힘 지지층이 많지 않은 서울의 모 지역구에서 세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세 번 낙선했다. 하지만 말솜씨가 좋고 방송 감각이 있어서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하버드 대학교도 나왔다고 하고, 뭐 기타등등 다 이준석과 동급이다.

나경투는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나경투는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교회 다니는 중장년 표심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경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심지어 당대표가 어찌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경선 과정에서 열변을 토했다.

  •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퀴퍼 금지
  • 군형법상 계간죄(남자 동성애 처벌) 폐지 결사 반대
  • 기타등등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성소수자 혐오

나경투의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진중곤 같은 논객들이 달려들어 페이스북에서 논전을 벌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고 말았다. 나경투는 자신의 성소수자 혐오를 공정이라던가, '안물안궁의 권리'라던가, 아무튼 뭔가 대충 그럴싸한 담론과 버무려 포장했다.

그리하여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나경투의 혐오 선동은 사실상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한국의 여론 지형상 여론조사에서도 높은 수치를 받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심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당대표가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분은 나경투가 단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지받아 마땅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나경투가 공공연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고 혐오 선동을 하여 자신의 지지층을 형성한 것을 두고, "이건 어쩌면 나경투라는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두번째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말하는 칼럼을 떠올릴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칼럼이 한국의 자칭 진보 진영의 기관지와도 같은 한겨레에 실릴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이준석은 남자 나경투다. 나경투는 여자 이준석이다. 당신이 나경투에게 반대한다면 이준석에게도 반대해야 한다. 게다가 가상의 사례인 나경투와 달리 이준석은 리얼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들 이렇게 평온하게, 심지어 즐겁게, 박수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실은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너무도 역겹다.

2021-06-12

'시험'을 줄이고 '테스트'를 늘리자

일본어를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 갖다 쓰는 일본어에서 '시험'[試験(しけん)]과 '테스트'는 다른 단어입니다.

'시험'은 대학교 입학을 결정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 '사회적 관문'의 기능을 하는 제도를 '시험'이라고 합니다.

반면 '테스트'는 좀 더 가볍고 자주 보는 것들. 공부를 잘 했는지, 진도를 따라오고 있는지, 등을 평가하기 위해 보는 것들이 '테스트'입니다.

일본어에서 '시험'과 '테스트'의 관계는 뭐랄까, '문'[門(もん)]과 '도아'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서양식 주택에 달린 문도 모두 '문'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에게 '문'이란 전통가옥에 붙어있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서구식 건물의 출입구를 막아주는 판자 같은 건 '도아'라고 부르니까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Meritocracy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실력을 키우고, 공정하게 평가하며, 학습효과를 높이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테스트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고, 평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공부도 잘 됩니다.

반면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물론 음서제에 비하면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실패에 대응하는 등 모든 방향에서 결국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시행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렇죠.

'시험'이 그렇게나 공정한 제도라면, 멸망하기 전까지 과거제도를 굴렸던 조선이 왜 그런 나라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시험'과 '테스트'의 구분으로 돌아와봅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시험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문제는 오늘날 '능력주의' 내지는 '공정에의 요구'라는 이름 하에, '시험주의'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대 시험주의는 그 성격상 테스트, 특히 많은 테스트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잦은 테스트를 통해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본래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은 '능력주의' 혹은 '시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잘 보았던, 혹은 잘 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시험'을 통과한 후, 그 성적에 따라 본인이 불공정한 제도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죠.

'테스트' 중심의 사회는 단지 자본가나 세습 자산가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도 그다지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안정적 직장과 연봉에 걸맞는 생산성을 내고 있는지 계속 평가받고 수시로 위치가 변경된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난지 오래이므로, 유연안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연안정성의 길이란 곧 '시험주의'에서 벗어나 '테스트주의'로 나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라는 말에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환상을 끼얹는 일을 그만두세요. '능력주의'는 엄연히 정의와 용례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시험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테스트주의'입니다.

2021-06-11

'음서제 대 과거제'라는 가짜 논쟁

이준석 당선과 그에 뒤따르는 논의에 끼어들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실력 안 되는데 빽/연줄/기타등등으로 끼어드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정말 크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감정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의가 '음서제 대 과거제' 수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결국에는 '윗분'과 '아랫것'들을 구분하는 걸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동적이면서도 약자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원합니다. 그것은 음서냐 과거냐를 넘어서, 일단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음서제로 '양반'되냐 과거제로 '양반'되냐, 이 갈등은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라는, 전근대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근대적인 세계를 원합니다. 매 순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지만 낙오자를 버리지는 않는,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021년. 우리 모두 근대인이 됩시다.

2021-06-09

엑셀과 능력주의 (feat. 이준석)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엑셀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이 말 자체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엑셀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들먹인다면 문제는 퍽 달라진다. 엑셀 사용 능력을 '시험'봐서 평가하겠다는 것은 정치와 상관 없다.

한국에서, 특히 보수 쪽 지지 성향이 있는 분들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능력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능력주의라고 뇌피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실 좀 더 한국어 맥락에 부합하게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가깝다. 어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한 후, 그에 따라 사회적 계층을 할당하자는 소리다. 

 

마이클 영의 책 Meritocracy가 바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린 SF 소설이고,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마이클 영이 저 책을 쓰면서 만든 말이다. 마이클 영은 2002년에 죽었는데, 그 전에 <가디언>에 본인의 뜻을 밝힌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도 최신 용어라는 소리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이준석이다. 선거로 뽑혀야 마땅한 정치인을, 시험 봐서 뽑자고 하면 너무 과격하니까, 출마 자격을 평가할 때 시험을 보자. 시험홀릭, 입시제도가 낳은 괴물, 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발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떠올려보자. 

오세훈은 파일명 뒤에 붙는 v(version의 v)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VIP의 V라고 했다가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도 이겼다.

정치인이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컴퓨터 잘 못 쓰는 사람들은 출마도 못 하게, 시험 봐서 떨어뜨리자고? 이준석은 지금 오세훈을 '멕이는' 건가?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은 딱 세 가지다. 내가 봐도 참 아름답고 기가 막힌 정리인데, 아무튼 이렇다.

  1.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2. 내게 모인 사람들의 능력, 인성, 충성심을 파악하는 안목
  3. 아니다 싶은 사람을 내치고, 대립각을 세울 줄 아는 투쟁력

이 모든 것은 컴퓨터 사용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글을 몰라도 된다.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겠지만, 좀 극단적인 예시이긴 한데, 샤를마뉴 대제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는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징기스칸도 아마 문맹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말고. 현대의 정치인이라고 뭐가 다를까. 믿음직한 참모가 글 읽고 표 볼 줄 알면, 정치인 본인은 문맹이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이준석에게는 3의 능력이 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1이 없다. 매우 심각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떨어진 것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다. 당대표가 된다면, 그래서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좀 나아지려나.

나는 컴퓨터라는 도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필요한 분야는 일부러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방향에서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정치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해왔던 그런 영역에서는, 엑셀이 아니라 매력이 본질이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운운하면서 자꾸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능력주의'를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능력주의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더 가깝다. 이준석은 능력주의자인데, 좀 더 잘 번역해보자면, 시험주의자라는 소리다. 

나는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험주의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시험 보는 재주라면 나도 딱히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2021년의 대한민국이 시험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방해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021-05-27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심심풀이 삼아서 읽어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TTS 기능을 이용해 '들었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담한 작전>은 유발 하라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세계 속에 우뚝 솟은 신흥 선진국 K-나라, 그곳이 바로 이곳이지만, 아직도 지성계는 글로벌 트렌드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떴다 하면 유치원때 쓴 그림일기까지 출판하고 있다.

라고 욕하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대담한 작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가 왜 오늘날의 '유발 하라리'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글을 잘 쓴다. 하나마나한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다.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탁월하다. 대중에게 팔릴 책을 쓰는 저술가로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둘째, '근대 이후'의 세계를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대담한 작전>은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특수작전들을 다룬다. 흔히 특수작전이라고 하면 근대국가, 즉 정규군/상비군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런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소수의 인력으로 전략적 요충지 혹은 인물을 점령, 파괴, 납치, 살해하는 것을 특수작전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근대(와 총력전의 등장) 이전이야말로 특수작전의 전성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기사도 문학과 전설들은 대부분 특수작전의 일종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두 가지의 장점을 낳는다. 첫째, 앞서 말했듯 근대 이후의 세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은 역사 서술을 가능케 한다. 둘째,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는 재미있는 영역에 대한 독점적 해설권을 자신이 가져가게 된다.

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대단히 유리한 포지션을 단번에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영역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얼마나 짜릿할까? 이런 학생을 학자로서 길러내는 교수는 또 얼마나 뿌듯할까?

'근대 이후 세계에 대한 상대적 이해'. 이것이 오늘의 키워드다. 유발 하라리의 이후 성공작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유발 하라리를 오늘날의 스타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 근대 문명을 상대화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는 자기 각성의 계기를, 동양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아자아자'의 기쁨을 안겨줌으로써, 글로벌 스타 지식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담한 작전>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할 게 없다. 나는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원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하라리가 뭘 제대로 설명하는 건지, 자기 취지에 맞게 부풀려 왜곡하는 건지, 판단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일단 재미있게 쭉 읽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중교양서로서는 차고 넘치는 일이다.

유발 하라리라던가, 토마 피케티라던가, 몇몇 스타 지식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한국의 출판계는 그들의 저작을 우르르 번역해서 내놓는다. 물론 그런 모습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하게만 살았던가? 경박한 상업주의에 입각해 여러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출판계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국 출판계가 떳다방처럼 책을 찍어낸다면, 진정한 독자가 해야 할 일은 개탄하기보다는 '똘똘한 한 권'을 찾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성계'란 그런 노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2021-05-25

문재인의 '우리 여기자'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이 핀트를 못 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제대로 뭐가 문제인지 짚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맥락을 떠올려보자. 바이든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의 성별이 여성이었다. 통상적인 질문을 했고, 통상적인 답변이 나왔다. 통상적인 기자회견의 모습이었다.

문재인은 그 직후에 '우리도 여기자 없어요?'라고 했다. 

그 순간, 처음 질문한 미국 기자는 여성차별을 당한 것이다. '성별이 여성인 기자'에서, 특별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여기자'로 취급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성들에게 우대 정책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백악관의 컨퍼런스 룸은 이미 그런 맥락이 다 지나간 곳이다.

이걸 페미니즘의 용어로 말해보자면 이렇다. 문재인은 그 기자회견장에서 '가부장적 페미니즘'을 구현한 것이다. 여성이 기자도 못 되고, 기자가 되더라도 질문 한 마디 자기 입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자'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세상에서나 어울리는 짓을 미국 백악관에서 했다는 말이다.

한국의 언론계가 그 정도 수준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언론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부장적 여성 보호 배려의 페미니즘 단계를 넘어섰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백악관의 내부 업무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재인의 '여기자 질문해보셈' 발언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백악관의 수준을 순식간에 문재인의 청와대와 같은 것으로 끌어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이 '여기자에게 무조건 첫 질문을 줘야지, 그게 페미니즘이지'라고 생각해서 질문 기회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든은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떠벌이지 않는다. 그 정도 '위선'은 지키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다.

'우리도 여기자 한 명 질문해보세요'라니. 이런 식이면 질문 기회를 받은 기자는 '내가 실력과 무관하게 여자라서 '배려'받았나?' 싶어질 것이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큰 실례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여자'로 취급할 때나 가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건 문재인의 그런 발언을 두둔한 권인숙이다. 그런 가부장적 페미니즘 행태가 "작지만 소중한 발언"이라고? 제정신인가?

나는 권인숙이 한국 민주주의와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젊은 안티페미들이 득세를 하면서 반여성주의 진영은 세대교체를 하는 모양새다. 여성주의 진영 또한 세대교체가 절실하다.

2021-05-09

왕중왕, king of kings, 諸王の王

C. S. 루이스의 책에서 봤던가? 기억으로 하는 이야기다. 틀릴 수도 있고, 틀렸다는 걸 지적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아무튼.

고대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을 한 단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야훼는 자신을 '왕들의 왕들의 왕'이라고 칭했다.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이었다.

그 아들인 예수 역시 평범한 왕보다 더 높은 왕인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예수는 자신이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왕중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리스어 화자들에게 '왕들의 왕들의 왕' 같은 표현은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어 화자였던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그 표현을 직역했다. 자기 언어의 표현을 쓰지 않고, 어색하게 보이는 그 '왕들의 왕'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

라틴어를 지나 유럽 각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시대에 도달했다. 직역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영어는 최상급 표현이 있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그 표현을 있는 그대로 옮겨서, 'king of kings'라는 어구를 만들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루이스가 저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성경의 언어가 번역하기 좋다는 것이다. 도치 병치 등이 주로 사용되어 있다. 특정 언어의 음성과 운율에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루이스는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루이스는 '왕중왕'도 참 좋다고 했다(고 기억한다). 실로 간단한 언어적 장치를 통해 이전에 없던 심상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 어구를 직역함으로써 영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가 풍성해지지 않았느냐고.

한국어 성경은 어떨까. '왕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왕중왕'이다.

과연 '왕중왕'이라는 표현에 한국어 성경 번역자들은 어떻게 도달했을까? 중국어로 성경을 옮긴 예수회 신부들이 먼저 만들었을까? 일본어 번역의 영향인가? 기독교의 전파와 도래에서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보다 더 빠르지 않았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할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검색을 해보니 '諸王の王'이라는, 한국어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 나온다는 것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직역'은 나쁘고 '의역'은 좋다느니, 반대로 '딱딱한 번역투'에서 벗어나 '생생한 우리 입말'을 되찾자느니, 그런 추상적인 논의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강퍅한 담론이, 특히 민족주의적 정념과 뒤엉키기 시작하면, 안그래도 얕은 우리말의 물줄기는 더욱 쉽게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를 '왕들의 왕'이 아닌 '왕중왕'으로 번역한 덕분에, 우리는 '프로권투 헤비급 왕중왕전'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몸 좋은 남자 배우를 보고 즐기는 여성들이 '역시 맨 중의 맨은 휴 잭맨' 같은 농담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의 국적을 논하며 무언가를 솎아내자는 이야기나 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한국어의 '의'는 일본어의 'の'가 아니다.

1) 일본어에는 'の'라는 조사가 많이 쓰인다.
2) 일본어의 조사 'の'는 한국어의 '의'와 같다.
3) 한국어에서 '의'의 사용은 모두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1) 일본어로부터 벗어난 한국어 사용을 위해 '의'를 쓰지 말아야 한다.

1)을 빼면 모두 틀린 말이다. 일본어 조사 'の'는 한국어 '의'로 치환될 수 없다. 한국어의 소유격조사 '의'와 달리 일본어의 'の'는 훨씬 다양한 맥락에서, 심지어 일본인들에게도 설명하라고 시켜보면 잘 설명하지 못하는 복잡한 용법을 지닌다.

3)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3-1)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일본 생각을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말의 '의'는 우리의 '의'다. 일본의 'の'가 아니다. 한국어를 얕잡아보는 자, 폄하하는 자, 한국어를 일본어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 과연 누구일까.

2021-02-14

안중근 사형선고일? 여성해방의 날!

2월 14일, 언론에 또 그 타령이 실렸다.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소리 말이다.

2월 14일을 안중근 사형선고일이라고 떠벌이며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터넷 밈'이었다.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없다고 한탄하는 남자들이 인터넷의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언론은 품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관계로, 그런 헛소리를 슬슬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 다루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2월 14일에는 엄숙한 표정을 짓자'는 주장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엄숙하게 나가보는 건 어떨까 싶다. 매년 2월 14일을 '여성해방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다. 근거는? 미군정 시대, 1948년 2월 14일, 공창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김말봉, 박현숙 등 10여 명의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공창폐지연맹을 조직하여 기왕에 발표된 법령 제70호는 단지 인신매매 금지령일 뿐이므로 시급히 공ㆍ사창을 폐지하게 하는 법령을 제정해 달라고 입법의원에 건의하였다.41)

이를 받아들여 입법의원은 1947년 10월 28일 전격적으로 공창폐지법을 통과시키고 즉시 미 군정 장관의 추인을 요청하여 이듬해 2월 14일 공창제 폐지를 실시하는 법령을 공고하게 되었다.42)

개정판 |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강준만 저

안중근의 인생 중 생일도 아니고 사형집행일도 아닌 사형'선고일'을 기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반면 공창제 폐지는,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여성 인권 운동의 첫 단추로서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인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다면, 2월 14일을 '여성해방의 날'로 기념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성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것 역시 일종의 해방된 자의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을테니 기존의 전통과도 충돌하지 않을 듯하다.

2020-12-06

혜민, 혹은 종교인의 (너)무소유에 대하여

젊고 세련되고 교양 있고 세속의 인간들과 잘 어울리는 승려. 조계종 뿐 아니라 사실 전 세계의 불교계가 원하는 아이콘의 모습이긴 했다. '무'소유가 아닌 '너무'소유를 보여주고 있는 혜민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문제는 그 소유가 온전히 개인의 것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종교 단체가 많은 부를 쌓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온갖 자선사업, 기부, 교육사업, 약자 돌봄 같은 가치를, 심지어 겉치례로도 동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

혜민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논리 중 '무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도 참 이상하게 악용되고 있다. 그런 건 지나친 고행을 하거나, 굶어 죽기 직전까지 스스로를 학대하고 밥을 안 먹거나, 차 타고 와도 될걸 굳이 걸어와서 보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극단적 행위자들에게나 할 소리다.

조계종에도 나름의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종단인만큼, 승려의 재산 소유에 대해 이미 분명한 답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중은, 제 몫의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계종은 종단 법령인 ‘승려법’으로 소속 승려가 종단 공익이나 중생 구제 목적 외에 개인 명의로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 서유근, "남산뷰·뉴욕뷰 ‘건물주 논란’ 혜민 스님 “크게 반성…중다운 삶 살겠다”", 조선일보, 2020년 12월 3일.

중이라고 해서 돈 벌면 안 되냐, 정당하게 책 써서 판 돈이면 괜찮지 않냐, 이런 소리를 하는 분들을 퍽 많이 접해서 요즘 놀라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중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은 돈벌이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후세계의 위안을 약속하며 현세의 재물과 지위를 받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공포를 이용하여,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종교다. 따라서 종교를 이용한 돈벌이를 정당하다고 해버리면 세상은 온갖 사이비 잡종교인으로 넘쳐날 수밖에 없다.

'정당하게 번 돈'을 인정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가, 잘못된 영역에서 엉뚱한 사람을 옹호하는 논리로 오용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검찰 문제 단상

나는 대깨문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심지어 윤석열에게 원한 품은 몇몇 보수 분들까지도 '검찰주의자'라는 말을 욕처럼 쓰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검사가 검찰주의자여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어떤 법조인을 검사로 만드는 건 그가 검찰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 있다면 당연히 검찰로서의 직업 윤리, 가치, 금기, 도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걸 늘 새기고 지키는 게 왜 욕먹을 일인가?

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수사하고 잡아넣어서? 그래서 '검찰주의자'가 나쁜 건가? 검찰총장이 우리편은 봐주고 저쪽편은 조져야 하는데 안 그래서 속상하다 이건가?

한국에서 원리원칙적인 자유주의자 해먹기 정말 힘들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말이 도깨비방망이처럼 쓰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쪽수로 찍어누르는 게 아니다. 소수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다수가 의사결정권의 많은 부분을 갖되 그럼에도 소수를 존중해야 민주주의다.

게다가 법이란 근본적으로 '다수의 지배'가 성립하지 않고, 성립해서도 안 되는 분야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몰아붙인다고 해서 결백한 사람이 범인이 되지는 않는다. 증거와 법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검사는 판사와 마찬가지로 사법 기관이다. 국가를 대신하여 범죄자를 소추하고 기소하여 감옥에 넣는 것이 검사의 일이다. 따라서 검사 역시 '다수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하는 직종이다. 온 국민이 사랑하고 죄 없다고 박박 우겨도, 증거가 있고 해당하는 형법 규정이 있다면, 검사는 최대의 형량을 구형해야 한다.

이 난장판의 큰 부분은 우리 사회의 법에 대한 교양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법조인들은 아예 그런 대중 교양 함양에 관심이 없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거나 약간의 재주가 있는 법조인들은 그럴싸한 포우즈 취하고 깨시민 상대로 인기 끌 궁리 뿐이다.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무식해서 망할 것이다. 기층 민중이 아니라, 상위 중산층 레벨에 속하는 사람들이 무식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악다구니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무말이나 갖다붙이면서 더 무식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망할 것이다.

2020-09-23

다시,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일전에 신동아에 썼던 '뷰파인더' 칼럼에서 지적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무료로 독감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해놓고, 예산을 최대한 덜 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액수로 백신 단가를 후려쳤다. 당연히 기존의 정상적인 업체들은 손을 놓아버렸고 처음 백신 시장에 들어온 의약품 유통업체 신성약품이 낙찰받았다.

신성약품은 비용 절감을 위해 냉장 상태를 유지한 채 배송해야 할 백신을 종이상자에 담아 보내는 말도 안 되는 실수 혹은 과실을 저질렀다.

문재인 정권은 여기서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또 뻔뻔스럽게 신성약품을 상대로 '네 이노옴!' 하고 소리지르고 손가락질하며 무마하려 들 것인가?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정부는 제대로 된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하고 공적인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 재원이 부족하다면, 역시 정당한 절차와 논의를 거쳐 세금을 걷어야 한다.

국가가 날강도처럼 구니까 국민들도 서로 뜯어먹을 궁리나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지 말기 바란다. 

보건당국이 독감백신 사업에서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잡은 것이 관리 소홀 문제로 이어지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약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백신 단가를 8,000원으로 책정했는데 이 가격은 시중 병원 납품가(1만 4,000~1만5,000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주요 업체들은 아예 응찰을 하지 않았다. 입찰이 대여섯 차례나 유찰을 거친 후에야 이번에 신성약품으로 공급사가 정해진 것이다. 의약품 유통업체인 신성약품은 1,100억원 규모의 4가 독감백신 국가 조달 입찰에 성공하면서, 이번에 처음 백신 시장에 진출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537880

2020-08-04

행정수도,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아니냐, 한 나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수도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께.

미국의 수도가 왜 워싱턴 DC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여 13개 주가 연방을 결성할 때, 가장 힘이 셌던 두 도시가 있습니다. 뉴욕 주의 뉴욕 시,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 시.

지금 구글 지도를 펴서 미국의 동부 지도를 보십시오. 워싱턴 DC가 어디 있습니까? 네, 그렇죠. 뉴욕과 리치몬드의 중간에 있습니다. 가장 힘이 센, 남부와 북부를 대변하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연방의 수도를 새로 만든 겁니다.

이건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인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힘이 센 도시 두 곳은 어디? NSW의 시드니, 그리고 빅토리아주의 멜버른. 그럼 연방국가 호주의 수도는? 그렇죠.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 지대에 만든 인공 도시 캔버라가 되는 겁니다.

캐나다의 수도가 오타와인 이유도 똑같습니다. 서부가 개척되기 전, 가장 센 도시 두 곳, 몬트리올과 토론토. 둘 중 어디도 자체적으로 수도가 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기에 중간 지점인 오타와가 연방의 수도로 낙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세종이 무난하게 행정수도로 기능하려면, 부산이 서울에 맞먹을만큼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1차 세계대전 수준의 무장을 해서 전쟁을 했을 때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만큼) 힘이 강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 지점인 대전이나 그 인근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게 말이 되죠. 아니,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서울과 수도권을 합치면 인구의 절반이 들어가고 산업생산 역시 절반을 넘깁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권역은 중화학공업 생산기지와 항구를 가지고 있지만 수도권과 별도로 헤게모니 싸움을 할 역량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서울은 장기적으로 황폐화되고, 잘못 만들어진 세종시가 제2의 서울 강남 기타등등이 되어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골때리는 수도권 과밀 현상을 겪게 될 겁니다.

한국의 식자층 여러분, 꿈을 꾸는 건 좋지만,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소리들을 좀 하고 삽시다. 한국은 앵글로색슨이 주류가 되어 만들어낸 연방국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 나라의 풍토에서는 '행정수도' 같은 기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부의 핵심 기능을 세종으로 옮긴다는 건, 그냥 서울을 다 옮긴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세종으로 옮기면, 지금 서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몇 배 더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현될 겁니다.

덧) 한국의 행정수도 논란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2020년 현재, 갑자기 프랑스가 '국토 균형 발전'을 꾀한다며 파리와 마르세유의 중간 지점인 (심지어 제3의 도시 리옹도 재껴둔 채) 군소 도시 클레르몽페랑을 수도로 삼네 마네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이 수도 일극에 집중된 다른 나라를 예로 들어보니 감이 확 오지 않습니까?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운운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큰 혼란과 재앙을 초래할지?

덧2) 일본은 관서의 오사카, 관동의 도쿄가 전쟁을 해서 도쿄가 이겼죠. 도쿄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고히하고자 천황을 '모셔와서'(납치해와서) 도쿄에 데려다 놓고 있고요. 그래서 일본의 수도는 지금껏 도쿄인 겁니다.

아, 국토의 균형 발전, 그거 참 좋은데, 일본도 도쿄와 오사카의 중간 어디쯤에 행정수도를 만들면 좋겠네요.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입장에서 절호의 기회가 될텐데.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을 추격하는 경쟁국들에게 아주 큰 기회를 공짜로 헌납하고 있는 셈입니다.)

2020-07-27

캐릭터의 제약과 난이도의 문제

조지 R. R. 마틴에게 있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중 가장 쓰기 어려운 캐릭터는 브랜이었다고 한다. 가장 어리고, 게다가 이야기의 초반에 추락하여 두 다리를 잃은 후로는 다른 캐릭터에게 의존하는 캐릭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좀 더 심층적으로 해석해보자. 캐릭터에게 제약이 존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작가는 캐릭터가 지니는 불리한 요소들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내면과 활동을 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게 되고 만다.

이는 요즘 잘나가는 '웹소설'이라는 장르에 왜 이렇게 '전생물'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사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생의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가는 '사이다' 구성이, 구체적인 장르를 불문하고 웹소설의 표준적 작성 방식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다'를 원하는 대리만족의 욕망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조지 R. R. 마틴이 브랜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현생을 다시 살아가는 먼치킨 캐릭터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고생하는 캐릭터에 비해, 작가 입장에서 보면 훨씬 '쉬운' 캐릭터임에 분명한 것이다. 만들기도 쉽고 이야기도 술술 풀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공급이 끊이지 않으므로 재미를 찾는 독자들은 공급되는 것을 읽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안고 태어나는 자의 정신적 황폐함'에 대해서는 이미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갈데까지 간 사고실험을 해서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물은 계속 나올 것이고, 독자들은 계속 소비할 것이다. 혹자는 손쉽게 독자들의 수준을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생산자들의 문제가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2020-06-14

근속별 임금격차가 차별의 핵심

"근속·성·학력별 임금격차, 한국이 유럽보다 훨씬 커", 한겨레, 2017년 7월 4일.

한국의 근속, 성, 학력별 임금격차를 살펴보자. "근속별 임금격차는 근속 20~29년과 근속 1년미만 비교"한 값인데, 무려 4배 차이가 난다.

한국 다음으로 심한 시프러스가 2.44배이고 그 다음으로 포르투갈이 2.09배. 이 그래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의 근속별 임금격차는 독보적인 것이다.

한국 정규직과 공무원의 '자동 상승하는 연봉 시스템'이 낳는 누적효과. 일단 정규직 트랙에 올라가서 연차를 쌓으면 걍 연봉이 올라가고, 그 연봉 위에 또 연봉이 올라가고, 하다보면 근속 20년에서 29년차가 되었을 때 신입사원의 4배를 받는 것.

우리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중에 그런 나라는 없음.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같은 논리로 설명 가능. 일단 대기업 뿐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여성을 정규직으로 잘 안 뽑음. 그런데 여성은 정규직으로 입사해도 출산 육아 과정에서 퇴직(당)하는 반면, 남성 직원들은 쭉 남아서 연차를 쌓는다. 저 '4배 월급'의 사다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떨어진다는 것.

이것이 한국의 '10대 90' 격차의 핵심. 10퍼센트 안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여자라서 애 낳느라 쫓겨나지 않는 한, 버티기만 하면 됨. 그러면 퇴직을 앞두고는 신입사원의 4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

참고로 포르투갈은 소위 '이중국가화'가 심각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나라. 그런데 그 포르투갈보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더 안 좋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 그런데 그와 같은 임금 구조는 대기업 뿐 아니라 공무원 등 소위 '좋은 일자리'의 핵심이어서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을 것.

2020-06-09

마이클 델, 이재용, 오너의 책임 경영

마이클 델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 회사에서 지급하는 컴퓨터나 모니터로 많이 쓰는 델 컴퓨터의 오너다.

마이클 델은 컴퓨터를 값싸게 조립하여 판매하는 생산 라인을 확보했지만, 오프라인 판로를 뚫지 못했다. 그는 거기서 좌절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컴퓨터 견적을 맞추고 주문하여 물건을 받는, 20세기 말로서는 가히 획기적이었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리고 델 컴퓨터를 상장한 후 소위 '엑싯'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델 컴퓨터는 기나긴 침체와 방황을 겪었다. 컴퓨터 산업에 대해 비전도 없고 꿈도 없고 그냥 숫자로 나오는 실적만 예쁘게 해서 자기들 수당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된, 소위 '경영충'들의 놀이터가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마이클 델은 투자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엑싯'으로 번 돈을 허공에 날리지 않고 이리저리 굴려서 덩치를 더 키웠다. 그렇게 만든 시드 머니로 그는 희대의 결정을 했다. 자신이 상장했던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인 후 비상장기업으로 만들어 의사결정권도 독점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너의 귀환'인 셈이다.

그 후 나온 첫 작품이 Dell XPS 13이었다. 랩탑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텐데, (충격과 공포의 노란 봉투) 맥북 에어 이후 애플과 비벼볼만한 노트북으로 윈도우 계열에서 나온 첫 제품이라고 흔히들 평가한다. 극단적으로 베젤 크기를 줄여 거의 11인치 노트북에 가까운 본체 크기와 무게를 구현했다. Dell XPS 15는 15인치 화면을 13인치 크기에 우겨넣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한번 되찾은 프론티어의 위상을, 델 컴퓨터는 이제 내려놓지 않고 있다. 올해는 17인치 화면을 15인치의 본체 크기에 끼워넣은 Dell XPS 17도 나왔다. 오너가 만들고, 상장했다가 '경영충'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던 과거의 혁신 기업을, 오너가 되찾은 후 혁신의 DNA를 재주입한 멋진 사례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너 경영'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1) 어떤 '오너십'이냐 2) 그 '오너'에게 정말 비전이 있느냐 3) 그 '오너'의 '오너십'에 경제적, 법적으로 투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과 달리, 삼성의 미래에 대해 이재용만큼 근심하고 진지한 결정을 내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민연금이 대주주가 된 후, 낙하산 타고 내려와 한탕 하고 사라질 정권의 수족들보다는, 소위 '경영권'이라는 것을 이재용이 행사하는 편이 삼성의 미래에, 더 나아가 한국의 경제 전체의 미래에 바람직할 가능성이 크다. (포스코라는 반례를 보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재용이 편법 상속을 위해 동원한 다양한 '테크닉'에 대해 공정한 법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은 '오너 책임 경영' 그 자체가 아니다. 소위 '오너'라는 사람들이 주주의 이익을 실현시키지도 않고, 경영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기업의 의사결정과 이익만을 독점하는 잘못된 구조가 문제다.

삼성전자의 덩치가 너무 커져서 과연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영권' 방어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이재용 부회장이 올바른 방식으로 정당하게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법은 만인에게 공정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초석이니 말이다.

2020-05-31

고작 회계 문제? 돈이 곧 윤리다

정의연 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회계 문제다. 회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 가령 뭐 운동의 대의가 어쩌고 활동가의 선의가 저쩌고 따위는 모두 부차적이다. 장부에 돈 거래를 제대로 써놓고 투명하게 거래하는 것은 운동권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범한 시민들은 돈을 벌고 있다. 혹은 내일의 돈벌이를 위해 쉬고 있다. 돈을 번다는 건 그렇게 지엄한 일이다. 돈을 벌어서 그 기록을 투명하게 남기고,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사장이라면 직원 월급 밀리지 않고, 회삿돈을 잘 관리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 삶의 기본이면서 가장 숭고한 영역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왜 하는가? 민주화운동을 왜 했는가?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안온하게 잘 살기 위해서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권력에게 휘둘리지도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모든 회계는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반대로, 그 어떤 아름다운 대의를 갖다 댄들, 회계를 속이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그 사회는 투명할 수도 건강할 수도 민주적일 수도 없다.

'그깟 회계 문제'를 운운하는 자들아, 입 닥쳐라. 너희들은 지금 '그깟 회계'로 계산되는 '그깟 푼돈' 벌겠다고 새벽에 눈꼽 떼고 일어나 직장으로 일터로 택배 상하차 물류센터로 향하는 그 모든 평범한 생활인들을 모욕하고 있다. 너희들의 운동이 대체 뭐가 그렇게 고상하고 굉장하기에 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돈 문제를 이토록 얕잡아 본단 말이냐. 그토록 돈 문제를 우습게 보면서 어쩌면 네놈들 뒷주머니만은 알뜰하게 채워넣고 있단 말이냐.

돈 문제다. 이건 돈 문제고, 바로 그렇기에 가장 투명하고 엄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반미주의니 반일주의니 거대한 헛소리 다 집어치워라. 돈이 깨끗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숭고한 회계 문제 앞에서, 피해자와 활동가의 윤리가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 배부른 운동권 족속들, 그 역겨운 아가리들을 다 닥치란 말이다.

2020-05-22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에

일제시대에 대해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 독립운동한다고 도둑질, 강도질하는 자들, 또 반대로 도둑질이나 강도질하다 붙잡혀놓고 독립운동 한다고 둘러대는 범죄자들이 참 많았다.

물론 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칼 든 강도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독립운동가를 구분하기도 어렵거니와 안다고 해도 옹호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좋은 대의를 갖다 대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그 중 정말 어기면 안되는 것은 이미 다 형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횡령 같은 것이 그렇다. 설령 전쟁중이어도 전투의 일부로서 벌어지는 인명 손실이 아닌 살인은 처벌받는다. 그래야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의연 앞에 판단 중지'를 외친 한 기자 칼럼을 본 후, 구역질나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진정한 진보 운동의 출현과 정착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칼럼을 쓰는 사람, 이런 글에 동의하는 사람, 당신들이 소위 '적폐'와 다를 게 무엇인가.

2020-05-18

광화문과 門化光


광화문 한자 현판이 門化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한자가 기본적으로 세로쓰기이며, 문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문 세로쓰기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택한 매체, 죽간 때문이다. 오른손에 붓을 쥔 사람이 왼손으로 죽간 두루마리를 풀어가며 글씨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지금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점점 아래쪽으로 쌓여가듯, 죽간의 문장은 (글씨 안 쓴 여백이 왼쪽 두루마리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는 이렇듯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용가능성"을 행위유도성(affordance)이라 부른다.

우리가 고대 중국의 죽간 때문에 생긴 행위유도성과 그로 인한 한문 작성법을 2020년 현재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화문'이 아니라 '문화광'이라고 까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무식한 소리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정말이지 통탄할 일이다. 레닌이 말했다시피 무식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좀 유식하게 살자.